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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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8화


제19장. 사신출현(死神出現)

“큭!”

모용건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모용건은 백의 미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백의 미남자의 손은 마치 무쇠로 만든 것인 양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의 미남자가 손에 약간의 힘을 더 가하는 순간 모용건은 힘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계속 반항하면 목뼈를 부러뜨리겠다는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용건은 심기가 깊고 무공이 고강한 인물이었으나 백의 미남자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자신을 제압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호에 이름높은 고수인 흑수사 모용건이 정체 불명의 청년에게 목을 제압당한 채 눈알만 굴리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은근한 눈길로 백의 미남자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던 조채홍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다… 당신… 왜 이런 짓을 한거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쳐 물었다. 백의 미남자는 한 손으로 모용건의 목을 쥔 채로 그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여전히 준수하고 매력적인 미소였으나, 중인들은 왠지 오싹하는 한기를 느꼈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백의 미남자의 두 눈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뜻밖이오?”

조채홍은 눈빛을 가늘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난 당신이 지금까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백의 미남자는 나직하게 웃었다.

“잘 보았소. 나는 사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남자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거요?”

백의 미남자는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조채홍은 아직도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당신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그게 무엇인가요?”

백의 미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말할 수 없소.”

조채홍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렇죠?”

백의 미남자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걸 말하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나는 아직 당신을 죽이기 싫소.”

그 말에 조채홍의 어깨가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조채홍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백의 미남자는 비록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지금 농담이나 실언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채홍은 경악과 의혹이 담긴 눈으로 백의 미남자를 주시하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내가 꼭 알아야 하겠다면요?”

백의 미남자의 눈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정말 꼭 알고 싶소?”

조채홍은 순간적으로 망설였으나 이내 입술을 꼬옥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난 알고 싶어요.”

“그럼 당신에게만 특별히 알려주겠소.”

이어 백의 미남자는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는 무심코 그를 향해 한 발 다가갔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혹시…”

백의 미남자는 담담하게 웃었다.

“왜 그러는거요?”

조채홍은 무언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의 미소가 너무도 부드러워서 다시 한 걸음 내딛었다. 백의 미남자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말해주겠소. 그것은…”

이어 그는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은 전음(傳音)을 사용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은 들리지 않았다. 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채홍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버렸다.

“뭐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이…”

순간, 백의 미남자는 활짝 웃으며 왼손을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소. 이제 알았으니 당신은 여한(餘恨)이 없겠지?”

조채홍은 안색이 변해 전력을 다해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나 백의 미남자의 손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빠르고 신속했다. 눈앞에서 무언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싶은 순간, 백의 미남자의 손은 어느 새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찍어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강호에서 여마두로 널리 알려진 조채홍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우두둑!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아름답던 얼굴이 검은 흑색으로 변해 버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혀를 반쯤 내밀고 있다가 허물어지듯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일세(一世)의 여마두 답지않은 너무도 허무한 최후였다. 백의 미남자는 쓰러진 그녀의 몸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쯧. 당신의 몸매는 그런대로 봐줄만 했는데… 호기심이 너무 많은 것이 탈이었어.”

갑자기 주위에 무거운 침묵이 깔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은 공포와 경악이 담긴 눈으로 백의 미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으나, 그들 중 누구도 눈앞의 백의 미남자와 같은 잔인한 손속과 빠른 수법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목뼈가 부러진 채 바닥에 쓰러져 싸늘히 식어가고 있는 조채홍의 시신은 살아 생전의 요염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참혹한 것이었다. 백의 미남자는 단숨에 절정고수 한 사람을 제압하고 다른 한 사람을 고혼(孤魂)으로 만들어 놓고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누구 또 나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없소?”

쥐죽은 듯 조용한 장내에 울려 퍼지는 그의 음성은 마치 지옥의 사신(死神)이 부르는 진혼곡처럼 중인들의 마음에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당연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백의 미남자는 다시 빙긋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할 일을 마저 해야겠군.”

그때 갑자기 가장 백의 미남자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있던 화령천관 적동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난 이번 일에 빠지겠소.”

이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땅을 박차고 허공을 솟구쳐 오르더니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포악하기로 유명하며 소흥안령 일대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던 적동이 백의 미남자의 무공에 놀라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백의 미남자의 입꼬리에 매달려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올 때는 마음대로 올 수 있어도 갈 때는 그렇게 안되지.”

백의 미남자는 천천히 왼손을 품속으로 집어 넣었다. 적동은 그 음성을 들었는지 더욱 빠르게 앞으로 치달려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장내에서 십 여장 떨어진 곳에 도달해 있었다.

그때까지도 백의 미남자는 품에 손을 넣은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적동은 힐끗 뒤를 돌아보다가 백의 미남자가 자신을 쫒아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안심한 듯 바짝 긴장되었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바로 그 순간, 백의 미남자의 품속에 들어가 있던 왼손이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밖으로 꺼내졌다. 그와 함께 시커먼 흑선(黑線) 한 줄기가 눈부신 속도로 적동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쉬아악!

적동은 막 다시 몸을 날리려다 갑자기 등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옴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주위의 공기를 진공 상태로 만들며 자신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검은 색의 작은 목검(木劍)이었다. 그 목검의 정체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적동은 이마 한 복판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입을 딱 벌렸다.

‘억…’

비명 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적동은 마치 번갯불에 전신을 관통 당한 사람처럼 온 몸을 격하게 떨다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양 미간 사이에는 검은 색 단검 하나가 깊숙하게 꽂혀 있었다. 적동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에 꽂힌 단검을 잡으려고 꿈틀거리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중인들의 시선은 모두 적동의 이마에 박혀 있는 검은 색 목검으로 향했다. 그 목검은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한 크기였는데, 손잡이 부근에 <칠(七)> 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목검을 보는 순간 몇몇 중인들의 입에서 놀람에 가득 찬 소리가 터져나왔다.

“시… 신목령이다!”

신목령!
그 작고 거무튀튀한 목검은 바로 마도(魔道)의 절대적인 우상(偶像)이라는 신목령이었던 것이다. 손잡이에 써 있는 숫자는 이 신목령의 주인이 신목칠호(神木七號)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중인들은 백의 미남자의 정체가 신목칠호라는 것을 알게 되자 여러 가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욱과 마의 노인은 안색이 흙빛이 되었고, 종남파의 고수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으며, 녹의 소녀는 태연자약하기 그지 없었다. 도욱과 마의 노인은 신목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이고, 종남파의 고수들은 진산월과 임영옥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신목령과 어떤 은원(恩怨)관계에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목칠호가 나타난 것을 반겨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녹의 소녀는 이미 백의 미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기에 오히려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신목령 정도는 대수로울게 없다는 표정을 얼굴에 역력히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 장내에서 누구보다도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은 백의 미남자에게 목덜미를 제압당한 채 꼼짝도 못하고 있는 모용건이었다. 모용건은 상대의 정체가 자신이 짐작한 것과 맞아 떨어지자 짙은 불안과 의혹을 느꼈다. 백의 미남자는 왜 모용건을 제일 먼저 제압한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아직 모용건을 죽이지 않은 것일까? 조채홍과 적동을 살해할 때의 그의 잔인한 손속으로 보아 그가 모용건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다면 모용건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그들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용건의 숨이 아직 붙어 있는 것은 백의 미남자가 모용건을 죽일 마음이 없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모용건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백의 미남자가 자신을 살려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백의 미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백의 미남자는 모용건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짐작하고 있다는 듯 준수한 얼굴에 예의 매력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마시오. 그게 당신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는 길이니까.”

모용건의 눈빛이 몇 차례 변했다. 백의 미남자는 한 손으로 부드럽게 그의 목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모용건은 오싹 소름이 끼치는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백의 미남자는 다시 시선을 돌려 도욱과 마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소?”

두 사람은 백의 미남자의 시선을 받자 안색이 경직되어 있다가 그의 말을 듣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도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어떻게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백의 미남자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들 손으로 스스로 해결하겠소? 아니면 내 도움을 받고 싶소?”

도욱은 처음에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이 자결(自決)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손에 죽을지를 결정하라는 뜻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도욱의 왼손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차고 있는 오른쪽 허리춤으로 다가갔다. 하나 그는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검을 뽑아든다는 것은 결국 신목령에 대항하는 것이며,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목령에 거역하는 자의 최후(最後)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도욱은 검의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을 멈추며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소?”

백의 미남자는 의외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길은 사람이 다니는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거요.”

도욱의 눈에서 번쩍하는 빛이 일어났다.

“그 길이란게 무언지 알 수 있겠소?”

“간단하오. 내 부탁을 한가지만 들어주면 당신들은 언제든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소.”

도욱은 잠시 침음했다. 부탁을 들어준다는 말은 얼핏 보기에는 정중하고 온화한 것 같았으나, 그 속에 내포된 뜻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그 부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자칫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욱은 강호무림에 출도한 지는 불과 삼 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동안 많은 고수들과의 격전을 승리로 이끌어 나름대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검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미 오래 전부터 한 자루 검에 운명(運命)을 맡기겠다는 각오를 다져온 상태였다. 지금 그는 신목령을 앞에 두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신목령에 굴복하여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검 한 자루에 자신의 운명을 걸어볼 것인가? 순간은 짧았으나 도욱의 머리 속에는 수 만가지 각기 다른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도욱은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다. 도욱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갈 길은 내가 정하겠소.”

그와 함께 그는 힘껏 검의 손잡이를 움켜 잡으며 백의 미남자를 향해 돌진해들어왔다.

팟!

눈부신 검광(劍光)이 주위를 환하게 밝힐 듯이 찬연하게 피어 올랐다. 그것은 도욱이 필생의 노력으로 완성한 전광검법(電光劍法)의 최고 정화인 전광무영(電光無影) 일식이었다. 도욱은 이 전광무영의 검초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도욱의 검초는 정말 빨랐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도욱의 신형이 백의 미남자를 향해 다가간다고 느낀 순간, 그의 검은 어느 새 백의 미남자의 양 미간을 향해 거의 도달해 있었다. 백의 미남자는 단지 고개를 뒤로 슬쩍 제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도욱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도욱은 자신이 사력을 다해 펼쳐낸 전광무영의 검초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감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그의 벌어진 앞가슴을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뚫고 들어왔다. 그것은 달콤한 정인(情人)의 혓바닥처럼 너무도 부드럽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도욱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백의 미남자는 여전히 한 손에 모용건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로 다른 한 손을 앞으로 쭉 내뻗고 있었다. 그 손이 언제부터 그렇게 앞으로 뻗어져 있는지 도욱은 알지 못했다. 단지 부드럽게 내밀어진 그 손의 둘째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 푸른 빛을 번뜩이는 예리한 비수가 쥐어져 있으며, 그 비수의 끝이 자신의 앞가슴 화개혈(華蓋穴)을 뚫고 들어왔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화개혈을 뚫고 들어온 비수는 도욱의 심장을 반으로 갈라 놓았다. 도욱은 전광무영을 펼친 자세 그대로 우뚝 서서 백의 미남자를 응시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홀가분하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한 자루 검에 목숨을 맡긴 채 부평초처럼 강호(江湖)를 떠돌아다녔던 지난 날의 삶이 그렇게 허망하지만은 않다고 느껴졌다.

‘내 운명은 내가 정한다…’

도욱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환하게 웃었다.

하나 그 미소가 채 반도 떠오르기도 전에 그의 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백의 미남자는 그제서야 내뻗었던 비수를 회수하며 냉정한 시선으로 도욱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자기의 길은 자기가 정한다고? 당신이 갈 길을 정해준 사람은 바로 나요.”

그의 말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확실히 도욱의 운명을 결정지어준 사람은 그였지만, 그런 운명을 선택한 사람은 도욱 자신이었다. 묘한 차이였으나, 그것으로 도욱은 만족을 했을 것이다. 강호에서 한 사람이 자신의 죽고 사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각오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의 미남자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한쪽에 멍하니 서 있는 마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마의 노인은 도욱의 시신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다가 백의 미남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의 미남자는 입꼬리를 비틀면서 웃었다.

“당신은 어떻소? 당신도 저 자처럼 멋진 종말을 맞이하고 싶소?”

마의 노인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노부는 저 자와는 생각이 틀리네.”

그의 음성은 추악한 얼굴만큼이나 듣기 거북하고 음산한 것이었다. 백의 미남자는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오. 그렇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겠단 말이오?”

“무엇이든 말만 하면 자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네.”

백의 미남자는 가늘게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해줄 수 없는 것이오.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당신은 그저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면 되는거요.”

마의 노인은 허겁지겁 말을 바꾸었다.

“자네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뜻이었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낙일방의 얼굴에 짙은 혐오의 빛이 떠올랐다.

‘살기 위해서 자신보다 훨씬 어린 자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다니… 저 늙은이는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구나. 그에 비하면 장렬하게 싸우다 쓰러진 청의인은 얼마나 남자다운지 모르겠구나.’

낙일방은 만약 자신이 저런 처지에 처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반문(反問)해 보았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낙일방에게서 자존심을 뺀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낙일방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찌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 마의 노인은 목숨에 비하면 자존심 따위는 전혀 하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백의 미남자의 생각이 바뀔 것이 두려운 듯 다시 재빠르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노부는 평소부터 신목령의 위엄을 존중해 왔네. 그런데 어찌 신목령의 뜻을 거절할 수 있겠나?”

백의 미남자는 냉랭하게 웃었다.

“이건 신목령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오.”

마의 노인은 쭈삣거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노부에게는 마찬가지일세.”

백의 미남자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듯 음성이 차갑게 변했다.

“신목령은 신목령이고 나는 나요. 그걸 착각하지 마시오.”

마의 노인은 찔끔하여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이건 자네 뜻일세.”

백의 미남자는 싸늘한 눈으로 마의 노인을 쏘아보다가 이내 다시 처음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 부탁은 간단한 것이오.”

이어 그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듯 했으나 중인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전음술(傳音術)을 이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마의 노인은 처음에는 흠칫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얼굴에 기괴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것은 놀람과 당혹이 겹친 모습이었다. 백의 미남자는 말을 마친 후 마의 노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소, 들어줄 수 있겠소?”

마의 노인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네. 그런데…”

백의 미남자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럼 됐소. 당신은 내가 지시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시오.”

마의 노인은 한 마리 유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대답했다.

“알겠네.”

휘잉…!

한 줄기 세찬 강바람이 불어오자 장내의 고수들은 모두 한 차례씩 몸을 흠칫 떨었다. 마음속에 스물거리며 피어오르는 공포심이 차가운 강바람에 섞여 중인들의 마음에 오한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모래사장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고수들의 모습이 더욱 더 을씨년스럽고 섬뜩하게 보였다.

백의 미남자의 시선이 느릿느릿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은 그때까지도 침묵을 지킨 채 장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참혹한 광경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백의 미남자의 입가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뜻밖이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임풍옥수(臨風玉樹)라는 말이 무색한 것이었으나, 장내의 누구도 그의 미소를 준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산월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설마 신목령까지 이번 일에 끼어들 줄은 몰랐소.”

백의 미남자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사실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오. 나는 오래 전부터 그 물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입수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려 왔소.”

진산월은 문득 동중산이 가지고 있다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동안은 막연히 무림인들이 탐을 내는 기보(奇寶)일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천하를 위진시키고 있는 신목령의 고수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라면 단순한 기보 정도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의 속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백의 미남자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직 그 물건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을거요. 만약 알았다면 동중산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경솔한 짓은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일단 동중산을 받아들인 이상 당신은 마땅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거요.”

진산월의 대답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럴거요. 그의 과거가 어떠했든 일단 종남파에 들어온 이상 그는 종남파의 제자이며, 나는 장문인으로서 그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소.”

백의 미남자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어 올라갔다.

“과연 일파(一派)의 장문인다운 멋진 말이오. 그런데 내가 꼭 그를 데려가야겠다면?”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어디 한 번 해보시오.”

진산월의 너무도 태연한 말에 중인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모습들이었다. 아무리 그가 한 문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종남파는 이미 잊혀져가는 유명무실한 문파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신목령의 고수를 앞에 두고 이토록 태연자약할 수 있다는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더구나 백의 미남자의 잔인한 손속과 고강한 무공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백의 미남자 또한 다소 의외인 듯 짙은 검미 아래 빛나는 눈동자가 한층 더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나를 막을 자신이 있다는 말이오?”

“자신감 같은 건 불필요한 허식(虛飾)일 뿐이오. 난 그저 당신이 의도한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요.”

“과연 입담이 대단하군. 하지만 직접 내 손을 겪어보며 생각이 달라질 거요.”

“그거야 당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그런데 당신은 혹시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지 않소?”

백의 미남자의 눈빛이 야릇하게 반짝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냥 당신이 나타난 것이 단순히 물건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오. 당신은 나에게 달리 용무가 있는 게 아니오?”

백의 미남자는 한동안 기이한 눈으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확실히 처음 보기보다는 이상한 사람이군.”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어딘지 모르게 미련해 보인다고 생각했었소. 당신을 상대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별로 믿지 않았었지. 그런데 당신은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날카로운 구석이 있군.”

“그렇다면 내게 용건이 있다는 말이오?”

돌연 백의 미남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백의 미남자는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물건을 입수함과 아울러 당신을 만나기 위함이었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당신을 제거하기 위해 온 거지.”

그 말에 종남파 고수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낙일방은 물론이고 항상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던 정해마저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병기를 뽑아들 태세를 취했다.

하나 진산월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처음과 조금도 다름없는 표정으로 백의 미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에게 내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백의 미남자의 입꼬리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조금 전과는 달리 너무도 냉혹하고 살기 어린 미소였다.

“물론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건 그렇고… 밤바람이 슬슬 차가워지는데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짓고 싶군.”

그의 마지막 말은 독백(獨白)처럼 나직한 것이었으나, 종남파 고수들의 귀에는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차창!

요란한 검명(劍鳴)과 함께 낙일방의 손에 시퍼런 빛을 발하는 검이 쥐어졌다. 성질 급한 낙일방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든 것이다.

백의 미남자는 낙일방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오른손에 목덜미를 움켜쥐고 있는 모용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모용건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의 손에 목을 제압당한 채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맥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그의 눈빛을 받자 체념한 듯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백의 미남자는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그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을 풀었다.

모용건은 한 차례 신형을 휘청거리더니 이내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백의 미남자는 그가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당신을 살려두는지 이유를 알겠소?”

모용건은 평소의 그답지 않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럼 됐소.”

백의 미남자는 의미 모를 소리를 내뱉고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모용건은 힐끗 백의 미남자를 쳐다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며 진산월의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하나 그가 채 두 걸음도 내딛기 전에 하나의 검이 불쑥 그의 코앞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검을 휘둘러 그를 찔러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모용건이 백의 미남자의 손에서 풀려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그가 진산월 쪽으로 신형을 움직이자마자 바로 출수(出手)했던 것이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성급하고 무모한 행동이었다.

모용건이 비록 백의 미남자의 손에 어이없이 제압 당했다고는 하나, 이미 오랫동안 강호무림에서 적지 않은 명성을 떨쳐온 인물이었다.

사실 그의 무공 실력은 백의 미남자의 손에 일초도 못 버티고 제압당할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다.

단지 그때 그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데다, 워낙 백의 미남자의 기습이 빠르고 갑작스러워서 제대로 실력발휘도 해보지 못하고 제압당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이제 풋내기에 불과한 낙일방이 그를 향해 덤벼든 것은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었다.

모용건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는 얼굴에 아직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애송이가 검을 뽑아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내심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이 놈이 날 뭘로 보고…’

가뜩이나 백의 미남자의 손에 목덜미를 잡혀 개망신을 당한 치욕이 머리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터에 이런 일을 당하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잔인한 살심(殺心)이 마구 꿈틀거리며 피어올랐다.

모용건은 살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낙일방을 노려보며 오른손을 쭉 뻗어 그의 검을 빼앗으려 했다.

하나 낙일방의 검세는 제법 날카로워서 모용건은 급히 손을 오무려야만 했다.

낙일방이 방금 펼친 것은 유운검법(流雲劍法) 중의 유운축전(流雲逐電)이란 초식이었는데, 빠르고 날카롭기가 종남파의 무공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었다.

만일 낙일방이 이 초식을 완벽하게 터득했다면 무심코 손을 내밀었던 모용건은 커다란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모용건은 아직 얼굴에 붉은 기도 가시지 않은 낙일방의 손속이 의외로 매서운 것을 보고는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 미소를 보자 상원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그 미소가 모용건이 가슴속에 살심이 충만할 때 습관적으로 짓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슥!

갑자기 모용건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낙일방은 막 검으로 그의 어깨죽지를 찔러 오다가 눈앞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움찔 놀라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나 뒤에도 모용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의 뒤로 정해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방, 위쪽이다!”

그 음성을 듣자 낙일방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몸을 굴렀다.

펑!

그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서 폭음이 터지며 흙먼지가 자욱히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모용건의 신형이 허공에서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낙일방은 자신의 동작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 벼락같은 장력(掌力)에 그대로 격중되고 말았으리라는 것을 알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낙일방이 채 바닥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모용건의 몸은 어느새 그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무섭도록 빠른 몸놀림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건의 나이는 올해 사십일세, 운남(雲南)의 명문(名門)인 모용세가(慕容世家)에서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위로 네 명의 형과 아래로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열 일곱 살에 그는 형들이 있는 한 자신은 결코 가주(家主)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세가를 박차고 나와 강호로 뛰어 들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넘는 동안 그는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싸움을 통해 강호에 적지 않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그는 낙일방을 보자 마치 이십 년전의 자기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추호도 손속을 늦추거나 사정을 보아 줄 생각은 없었다. 오랜 동안 강호에서 지내면서 그가 절실하게 느낀 것은 강호에서는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반드시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거나 머뭇거린다면 결국 쓰러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그때 가서 아무리 후회를 하거나 어떠한 변명을 해 보았자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낙일방의 가슴팍을 향해 맹렬하게 다가오는 그의 오른 손바닥은 황소라도 단숨에 죽일만큼 살인적인 위력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절옥수(截玉手)라는 절정의 수공(手功)으로, 모용건은 신속히 낙일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처음부터 절기를 펼친 것이다. 낙일방의 지금 공력으로 그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낙일방은 황급히 우측으로 몸을 돌려 피하려 했다. 하나 모용건의 손이 워낙 빠르게 다가와 미처 피할 사이가 없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낙일방의 몸이 갑자기 뒤로 그대로 벌렁 누워 버렸다.

쑤앙!

강력한 위력을 담은 모용건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낙일방의 몸 위를 휩쓸 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뒤로 누웠던 낙일방의 몸이 다시 벌떡 일어나며 모용건을 향해 매서운 검광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아!”

중인들 틈에서 나직한 탄성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낙일방이 시전한 것은 철판교(鐵板橋)라는 것으로, 발 뒷굼치만으로 몸을 고정시킨 채 바닥과 거의 수평이 되게 몸을 눕혀 상대의 공세를 피하는 신법(身法)이었다. 이 신법은 그 절묘한 위력만큼이나 익히기가 어려워 오랫동안 피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펼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풋내기에 불과한 낙일방이 능수능란하게 철판교의 신법을 펼쳐 모용건의 공세를 피하고 오히려 날카로운 반격을 하자 종남파의 고수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사실 낙일방은 천남사살에게 호되게 당한 후 진산월의 충고를 되새기며 밤마다 철판교와 원앙각, 홍안척령 등의 초식을 수십 번씩 연마해 왔던 것이다. 언제고 천남사살의 장욱에게 설욕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아주 유효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모용건은 우습게 보았던 낙일방이 의외로 제법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이자 절로 마음이 급해지며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쏘아져오는 검광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파파팍!

그의 양 손이 질풍처럼 휘둘러지며 푸른 장영(掌影)이 허공을 가득히 뒤덮을 듯 생겨나기 시작했다. 절옥수 중의 절초인 홍망천리(洪茫千里)라는 초식이었다. 낙일방은 유운검법 중의 유운비격(流雲飛擊)으로 막 모용건의 목덜미를 찔러가다가 그가 자신의 검세 속으로 돌진해 들어오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아직 남과 싸워본 경험이 거의 없는 그로서는 상대와 정면충돌하는 일이 당혹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섰다가는 치명적인 낭패를 당할 것이 분명한지라 낙일방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그대로 유운비격의 검초를 밀고 나아갔다. 그의 강호 경험이 조금만 더 풍부했더라도 모용건의 공세에서 헛점을 발견하고 승기(勝機)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나, 지금의 그에게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파팡!

“큭!”

두 사람의 공세가 정면으로 충돌하자 세찬 경기와 검기가 사방을 휘젓듯이 몰아치며 누군가의 답답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부릅뜨고 장내를 지켜보던 종남파 고수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낙일방이 술취한 사람처럼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우엑!”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던 낙일방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커먼 피를 한사발이나 토해내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용케도 검을 놓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에 비하면 모용건은 제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전혀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하나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양 팔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양쪽 소매는 태반이 검기에 잘려나가 두 팔이 팔뚝 부근까지 훤히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으나 낙일방의 검법이 조금만 더 매서웠다면 영락없이 두 팔이 잘려지고 말았을 것이다.

모용건의 눈빛에 푸르스름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는 낙일방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더니 아무 말없이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록 낙일방을 부상 입히기는 했으나, 이제 겨우 강호에 처음 출도한 애송이중의 애송이에게 소맷자락이 잘렸다는 것은 모용건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백의 미남자에게 단 일초만에 목을 제압 당한 것보다도 더욱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 그가 낙일방을 향해 채 두 걸음도 떼기 전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그의 앞을 한 사람이 가로막았다. 모용건은 자신을 막아선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진산월의 뒤에 서 있던 방립을 쓴 여인임을 알아보고는 차가운 안광을 번뜩였다.

“비켜라.”

임영옥은 방립 아래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더 이상 당신과 싸울 수 없는 상태에요.”

모용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냉랭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비키지 않는다면 여자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임영옥의 음성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번 싸움은 당신이 이겼어요. 그러니 이쯤에서 만족함을 느끼고 그만 두도록 하세요.”

모용건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번개같은 일장(一掌)을 날렸다. 그것은 빠르고 날카로운 기세로 임영옥을 향해 날아왔다. 임영옥이 그 장력을 피하려고 몸을 움직인다면 모용건은 그 사이를 노려 임영옥의 뒤에 있는 낙일방에게 달려들 속셈이었다.

임영옥은 피하지 않고 오른 손을 마주 앞으로 내밀었다.

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백사장의 모랫가루가 허공으로 자욱하게 흩뿌려졌다. 모용건은 그녀가 자신과 정면으로 일장을 교환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 단지 칠성(七成)의 공력만을 사용했다가 가슴에 둔한 충격을 받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안색이 홱 변했다. 임영옥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지 한 걸음 밖에는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앞에 찍힌 발자국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만큼 미약한 것으로 보아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일부러 뒤로 한 걸음 살짝 물러난 것도 같았다.

그에 비하면 모용건의 앞에 찍혀 있는 발자국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모용건은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 없었는지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며 임영옥을 노려 보았다. 임영옥의 얼굴은 방립에 깊숙히 가려 있어 보이지 않았으나, 방립 아래 살짝 드러난 아래턱과 입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서 그녀가 얼마나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모용건은 이내 낯빛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과연 한 수가 있군. 그러길래 큰 소리를 쳤겠지.”

그는 상대가 여자라고 은근히 경시했던 마음을 버리고 양 손에 공력을 끌어올린 채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 각오하는게 좋을걸.”

그가 공력을 끌어올림에 따라 장내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임영옥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흑우선(黑羽扇)을 꺼내세요.”

그 말에 모용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흑우선은 그의 독문병기(獨門兵器)로, 그는 이 흑우선으로 펼치는 흑풍십이선(黑風十二扇)으로 강호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모용건은 조금 전에 낙일방을 상대할 때 흑우선을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허리춤에 꽂아놓고 있었는데, 지금 임영옥은 그에게 그것을 뽑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맨 손으로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닌가? 일개 아녀자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모용건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용건은 한동안 차가운 눈으로 임영옥을 쏘아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때가 되면 그러지.”

임영옥은 말없이 오른손을 움직여 장검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스릉!

날카로운 검명(劍鳴)과 함께 그녀의 백옥같은 손에 차가운 검이 쥐어졌다. 그녀는 검을 뽑아든 채 중단(中段)으로 겨누고 우뚝 서 있었다. 막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려 덤벼들려던 모용건이 갑자기 신형을 멈춰 세웠다. 모용건은 그녀의 자세를 보고는 안면 근육을 가늘게 떨었다. 단순히 검을 잡고 있기만 했는데도 그녀의 전신에서 칼날처럼 예리한 기운이 솟아 올라 그녀의 몸 전체가 마치 잘 닦인 보검(寶劍)처럼 한 치의 헛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그 보검에 베어지고 말 것 같았다.

그것은 평생을 검(劍)과 함께 살아온 절정의 검객(劍客)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기도였다. 모용건은 아직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여인에게서 이러한 기도를 보게 될 줄은 정녕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용건은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다가 이내 오른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 하나의 부채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부채였는데, 기이하게도 깃털과 손잡이 부분이 모두 검은 색이었다. 이것이 바로 흑우선이었다.

임영옥은 단순히 검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모용건으로 하여금 흑우선을 뽑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 버린 것이다. 흑우선을 손에 쥔 채 임영옥을 향해 다가가는 모용건의 얼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중하고 심각했다. 임영옥이 보기와는 달리 상당한 실력을 지닌 검의 고수임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강호에서 검(劍)으로 유명한 여고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여인들은 대개 검을 장식품으로 가지고 다닐 뿐, 진정으로 검도(劍道)를 수련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여자들은 그 신체적인 특징상 절정의 검도를 익히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여고수들은 장공(掌功)이나 음공(音功), 금나수(擒拿手)같은 수법들을 주로 익히며, 병기도 사용하기 편하고 쉽게 연마할 수 있는 편(鞭)이나 선(扇), 대(帶), 혹은 암기들을 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모용건이 상대하는 임영옥은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검법을 수련했을 뿐 아니라 그 재질 또한 우수하여 당대 무림의 어떤 검객들에도 못지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생전에 임장홍 조차도 싸우는 일에는 매상이 뛰어날지 몰라도 검법에 관한 한 임영옥을 당해내지 못할 거라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본다면 실질적으로 현재의 종남파에서 제일가는 고수는 임영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문인인 진산월은 남과 싸우는 법이 거의 없어 그의 사제들 조차도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고 있지 못했다. 하나 낙일방은 예전에 아주 우연히 진산월과 임영옥이 비무(比武)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천하삼십육검 내의 초식만으로 검을 겨루었었는데, 이십 여초만에 임영옥의 장검이 진산월의 가슴팍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그녀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그때 진산월은 하마터면 가슴에 구멍이 뚫릴 뻔했는데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그렇군. 이제 알겠어.”

라고 중얼거려서 구경하고 있던 낙일방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었다. 낙일방은 여자에게 패하고도 태연자약하게 웃고 있는 진산월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아무에게도 그때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임영옥에게 패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진산월의 체면이 깎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임영옥은 수중의 장검을 가볍게 들어 가슴 부위에 올린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자세는 물처럼 고요했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원래 중단세(中段勢)는 얼핏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오래 유지하고 있기가 힘든 자세였다. 하단세(下段勢)나 상단세(上段勢)는 뚜렷하게 노리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세를 잡고 있기 수월했으나, 중단세는 상대의 반응에 따라 대응을 하는 자세인데다 중심을 잡기가 애매해서 어지간히 수련을 오래한 고수들도 실전(實戰)에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임영옥은 무림의 고수인 모용건을 앞에 두고도 태연히 중단세를 취했을 뿐 아니라, 모용건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모용건의 이마에 언제부터인지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용건은 그녀의 완벽한 중단세에 내심 가슴 한 구석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으나, 그렇다고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느 덧 그는 그녀에게서 일장 반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있었다. 모용건은 이런 상태로 반장만 더 다가가고 싶었다. 그의 병기는 단병(短兵)인 흑우선이었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이점(利點)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그녀는 검을 사용하기 때문에 조금 떨어져 있는 것이 유리했다. 그런데도 임영옥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그의 접근을 허용하고 있었다.

‘검을 잘 배우긴 했지만 아직 대전(對戰) 경험이 부족하구나.’

모용건은 이런 상태라면 자신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강호에서는 실력이 삼푼, 경험이 칠푼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남과 싸운 경험이 부족하다면 실제의 싸움에서는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이제 두 걸음만 더…’

모용건은 흑우선을 활짝 펴 마치 유람온 문사처럼 가볍게 흔들면서 다시 빠르게 한 걸음 전진했다. 임영옥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중단세를 유지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모용건의 발이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채 일 장도 되지 않았다.

‘지금이다!’

모용건은 두 눈을 횃불처럼 반짝이며 임영옥의 우측으로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하나 채 반도 움직이기 전에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좌측으로 날아갔다.

스슥!

그의 몸놀림이 어찌나 빠르고 갑작스럽게 변했는지 얼핏 보기에는 두 명의 모용건이 그녀의 양쪽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것은 일지이로(一枝二路)라는 신법으로, 한쪽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반대쪽으로 다가서는 동작이었다. 단순한 속임수 동작과 비슷했으나, 그 공격하는 투로(套路)가 워낙 빠르고 변화가 신속해서 지금과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는 어떤 절정신법(絶頂身法)보다도 효과적인 공격방법이었다. 과연, 임영옥은 모용건의 변화무쌍한 공격에 당황했는지 신형이 한 차례 흔들렸다.

모용건은 그녀의 좌측으로 무섭게 돌진해 들어오며 흑풍십이선 중의 흑풍소설(黑風掃雪)과 흑풍비화(黑風飛花)를 거푸 전개해냈다.

쏴쏴쏴….

마치 바람이 대나무숲을 스치는 듯한 음향이 들려오며 임영옥의 주위가 온통 검은 선영(扇影)에 휘감겨 버렸다. 모용건의 공세는 치밀하면서도 날카로운 것이었다. 임영옥은 오른 손에 검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왼쪽은 아무래도 수비가 허술한 편이었다. 일지이로 신법으로 그녀의 자세를 허물어 뜨리고 뒤이어 좌측으로 공격해 들어간 것은 과연 강호에서 명성을 떨친 고수다운 노련한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한데 모용건이 펼친 흑우선의 경기가 막 임영옥의 전신을 무차별로 강타하려는 순간, 흔들거리던 그녀의 몸이 갑자기 더욱 크게 흔들리며 한 줄기 예리한 검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 검기는 날카로웠는지 주위가 갑자기 차가운 빙굴에 들어간 것처럼 싸늘해진 느낌이었다. 모용건은 엄밀한 공세 속에 갇혀 있던 그녀의 신형이 유연하게 선영을 뚫고 비스듬히 자신의 우측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그녀의 가슴팍에 세워져 있던 검의 모습이 사라지며 한 줄기 차가운 검광(劍光)이 자신의 목덜미로 쏘아져 오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하나의 광채로 변한 것 같았다.

“흡!”

모용건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피하지 않고 흑우선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오는 검광을 후려쳐갔다. 그런데 검광과 흑우선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려는 찰나,

팟!

갑자기 검광이 반으로 갈라지며 두 줄기 예리한 광채가 모용건의 양쪽 옆구리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변초(變招)라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모용건은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며 전력을 다해 흑우선으로 몸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났다.

팟!

“큭!”

한 차례 어지러운 검광이 허공을 수놓으며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중인들은 모두 눈을 부릅뜬 채 장내의 광경을 주시했다. 모용건은 뒤로 네 걸음이나 물러난 채 전신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옆구리는 길게 베어진 채 맨 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그 사이로 엷은 혈흔(血痕)이 내비치고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호의 유명한 고수인 흑수사 모용건이 불과 이 초만에 무명(無名)의 여자에게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모용건은 자신이 그녀의 일검(一劍)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패퇴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임영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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