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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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2화


제23장. 선상격전(船上激戰)

진산월이 범선 위로 올라왔을 때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하나의 커다란 주먹이었다. 그가 채 범선의 갑판 위에 내려서기도 전에 화웅이 어느 틈에 달려들며 벼락같은 일권(一拳)을 내뻗은 것이다. 화웅의 주먹은 남패자라는 그의 별호답게 패도무쌍(覇道無雙)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가공할 경력을 담고 있어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지고 마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패권이라고까지 불리우는 화웅의 벽력신권(霹靂神拳)이었다.

진산월의 몸은 그때 막 삼 장여의 범선 위를 날아 바닥에 내려서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리 허공에서 몸을 틀어 피할 수가 없었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정면으로 그 주먹에 맞서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진산월의 무공이 아무리 절묘하다 해도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닌 화웅의 강력한 패권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화웅뿐 아니라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나 그때 갑자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진산월의 어깨쪽에서 갑자기 하나의 섬광이 화웅의 미간을 향해 폭사해 온 것이다.

“쾌액!”

그 섬광이 어찌나 빠르고 갑작스러웠는지 화웅은 막 진산월을 향해 거칠 것 없이 주먹을 내뻗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그 섬광에 미간이 갈려지고 말 뻔했다.

“으헉!”

화웅은 그야말로 간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 황급히 내뻗던 주먹을 거두어들이며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쉬앙!

진산월 주위의 공기가 한 차례 파동치며 그의 옷자락을 펄럭거렸다. 이것만 보아도 조금 전에 화웅이 내뻗은 주먹의 위력이 얼마나 가공스러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나 정작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화웅이었다. 금시라도 그의 미간을 꿰뚫을 듯 쏘아져오던 섬광이 그가 주먹을 거둠과 동시에 마치 아침 햇살을 만난 안개처럼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섬광이 진산월의 뒤에서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죽립 여인이 뻗어낸 검광(劍光)의 잔영(殘影)임을 알아본 사람은 장내에서 오직 화의 노인, 변천붕뿐이었다. 변천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절세검수(絶世劍手)로구나!’

검광을 하나의 그림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과 뛰어난 재질이 필요한 법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오르는 와중에 앞 사람의 어깨 너머로 검영(劍影)을 날려보낸다는 것은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검객이 아니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아무리 보아도 이제 갓 스물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여인이 펼쳐 보였으니 변천붕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화웅은 아직도 자세한 영문을 몰라 놀라고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나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진산월의 뒤를 이어 갑판 위에 올라오고 있는 임영옥의 솜씨임을 알아차렸는지 화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임영옥의 등뒤에는 여전히 장검이 꽂혀 있었다. 변천붕조차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눈부신 일검으로 삼 장 밖의 화웅을 물리치고 다시 검을 등뒤에 꽂았다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진산월은 갑판 위에 내려선 후 화웅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좋은 솜씨였소. 강호의 물이 얼마나 쓴지 이제 알 것도 같군.”

화웅의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마도 진산월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면 틀린 생각도 아닐 것이다. 화웅은 금시라도 잡아먹을 듯이 무서운 눈으로 진산월을 노려보았으나 웬일인지 선뜻 덤벼들지 않았다. 아마도 조금 전에 본 임영옥의 일검(一劍)이 적지 않게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는 생각보다 더 넓은 것 같았다. 그들이 서 있는 갑판만 해도 웬만한 대청보다 훨씬 컸으며, 돛대의 높이도 삼 사장은 되어 보였다. 그들이 선 곳에서 반대쪽 위치에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그 안쪽은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어 전혀 볼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변천붕과 혁련삼, 하남삼수 외에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커다란 범선이 움직이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음이 분명한데도 선실 안쪽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산월이 짙은 어둠에 잠겨 있는 선실 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 변천붕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열쇠는 어디 있나?”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마지막으로 대답하겠소. 모르겠소.”

변천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쩍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하남삼수 세 사람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들은 이미 사전에 묵계가 되어 있었던 듯 삼각형의 대형을 이루면서 진산월에게로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하나 그들이 채 진산월을 에워싸기도 전에 임영옥의 신형이 그들에게로 쏘아져갔다.

휘이잉!

그와 함께 싸늘한 검광이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하남삼수는 그 검광의 예리함에 놀란 듯 달려오던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뿔뿔이 흩어져 검광을 피했다. 그들의 신형은 두 줄기로 갈라졌다. 화웅과 정소명은 이 장을 날아 그녀의 앞을 막아섰고, 양취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회전시키며 진산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나 그때 정해가 양취록의 앞을 막아섰다.

곧 장내에는 두 쌍의 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화웅과 정소명은 이미 임영옥의 일검을 보았기 때문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맹렬한 합공(合攻)을 가하고 있었다. 건장한 두 명의 남자가 여인 하나를 합공하는 모습은 별로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의 모습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만큼 임영옥의 검법은 예리하고 날카로웠던 것이다.

화웅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장 자신하는 절기인 벽력신권을 펼쳐내고 있었고, 정소명은 빠른 신법으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수리검(袖裡劍)을 발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나 두 사람은 좀처럼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임영옥이 펼치고 있는 것은 유운검법이었는데, 빠르고 변화무쌍한 유운검법의 초식이 펼쳐질 때마다 화웅과 정소명은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았는데, 화웅의 이마에는 벌써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화웅의 벽력신권은 강맹한 위력만큼이나 진기의 소모가 막심한 무공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검이 워낙 날카롭게 주먹과 주먹 사이를 파고 들어오는지라 화웅은 자신의 주먹이 그녀의 검기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 평상시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변초(變招)해야만 했다.

정소명의 상태는 더욱 다급했다. 그의 장기는 지금과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의 접근전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대의 빈틈을 노려 암기를 발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소맷자락을 이용한 암기술로는 강호무림에서도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가 없었다. 임영옥과의 거리가 워낙 가까운데다 그녀가 좀처럼 뒤로 물러설 기회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가 거리를 확보하려고 화웅의 뒤로 돌아가려는 순간, 그녀의 검에서 두 가닥의 예리한 검광이 뿜어나와 그의 전면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검광은 한눈에 보기에도 비할 수 없는 예리함이 담겨 있어 마치 거대한 도끼날이 휘둘러 오는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연마해야만 검으로 이와 같은 검광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없이 정소명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으며 다시 되돌아가야만 했다. 하나 그의 신형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그의 곁을 지나갈 듯하던 두 줄기 검광이 빙글 선회하며 하나로 합치더니 그의 어깨를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헛?”

정소명은 다급한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황급히 철판교 신법을 펼치며 신형을 뒤로 뉘였다.

팟!

싸늘한 검광이 그의 콧등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잘려진 머리카락 한 줌이 바람에 휘날렸다.

정소명은 절로 모골이 송연해져서 두 바퀴나 더 뒤로 나뒹군 다음에야 겨우 신형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어서는 그의 안색은 아직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조금 전에 임영옥이 시전했던 것은 유운검법중의 유운쌍봉(流雲雙峰)이라는 초식으로, 두 개의 강력한 검광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출되었다가 하나로 합쳐져서 상대를 격상(擊傷)시키는 놀라운 수법이었다.
이때 뿜어내는 검광은 여타의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그 위력이 파괴적이고 날카로운 것이어서 능히 바위조차 갈라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종남파에서는 이 검광을 검봉(劍峰)이라고 부르는데, 검으로 일정한 봉우리에 올라서야만 발출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유운쌍봉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발출 할 수 있는 검봉의 수가 늘어나서, 절정에 이르면 모두 서른두 개의 검봉을 동시에 발출할 수 있다고 한다.
서른두 개의 검봉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다니다가 하나로 합쳐져 찔러 들어온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가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유운삼십이봉(流雲三十二峰)은 아직 단 한 번도 강호무림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유운검법의 창시자인 곽일산 조차도 말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열여섯 개의 검봉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곽일산은 당시에 희대의 검귀(劍鬼)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누구도 천지사방을 회돌아쳐 오는 열여섯 개의 살인적인 검광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의 임영옥도 간신히 네 개의 봉우리만을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이상은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되고 적어도 한 갑자(甲子) 이상의 내공을 지니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었다.

정소명은 간신히 유운쌍봉의 일식을 피할 수 있었으나 아직도 얼굴 전체가 칼에 난자당한 것처럼 쓰라렸고, 머리칼을 잘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조금만 더 빨리 정신을 차렸더라면 지금이야말로 간격이 벌어져 암기를 날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나,

그가 채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임영옥이 허공을 훌훌 날아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려오며 일검(一劍)을 찔러왔다.

그것을 본 정소명의 얼굴에 암담한 빛이 떠올랐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의 일검은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것 같았으나, 정소명의 전신 십육개 대혈(大穴)을 모두 노리고 들어왔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 몸을 움직여도 완벽하게 피해낼 수 없었다.

마침내 정소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직 거리를 확보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양쪽 소매를 크게 휘둘렀다.

쐐애액!

그의 넓게 펼쳐진 소맷자락에서 두 개의 수리검이 빠른 속도로 임영옥의 목덜미와 관자놀이를 향해 쏘아져 나왔다.
하나 완벽한 상태에서 발출한 것이 아니어서인지 그 수리검의 위력은 평상시보다 훨씬 약화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소명의 위기를 본 화웅이 커다란 고함을 내지르며 벼락같은 십이권(十二拳)을 내질렀다.

“우야야압!”

휘휘휘휙!

주위 사방이 온통 폭발하는 듯한 권풍(拳風)에 휘감겨 버렸다.
벽력신권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초식인 연환벽뢰(連環霹雷)가 폭풍과 같은 기세를 동반하며 임영옥의 등뒤로 몰아쳐왔다.

임영옥이 그 권세를 막거나 피하기 위해서 몸을 비튼다면 그때는 정소명이 발출한 두 개의 수리검이 그녀의 몸을 궤뚫어 버릴 것이다.
반대로 그녀가 계속 검을 찔러온다면 수리검을 떨쳐내고 정소명을 쓰러뜨릴 수 있겠지만, 그녀 또한 연환벽뢰의 가공할 주먹을 등뒤로 고스란히 격중당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나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 정소명을 향해 검을 내찔러갔다.

따땅!

정소명이 내던진 두 개의 수리검은 그녀의 검에서 뿜어나오는 검광을 맞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정소명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뒤로 빼내려 했으나 이미 어느 새 그녀의 검은 그의 옆구리를 피투성이로 만들고 지나가고 있었다.

“크윽!”

정소명은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순간 화웅의 주먹은 훤히 노출된 임영옥의 등판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아니, 가격하려 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꼼짝도 못하고 화웅의 주먹에 격중당했으리라고 생각했던 임영옥의 몸이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더욱 빠르게 앞으로 쏘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속도는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쉬악!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이 장이나 앞으로 쭈욱 전진했다.
그와 함께 오른 발을 축으로 하고 왼발을 번쩍 들어 몸을 뒤로 완전히 제끼며 장검을 뒤로 쭉 내밀었다.

화웅의 주먹이 그녀의 등뒤로 도달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몸은 저만치 앞으로 나간 채 뒤로 젖힌 그녀의 몸 위로 검광이 번뜩이고 있는 것이다.
말은 길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도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웅은 자신의 주먹에 피떡이 될 줄 알았던 그녀의 몸이 꺼지듯 사라지며 오히려 시퍼런 검광이 눈앞에 가득 쏘아져오자 경악으로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이… 이럴 수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미처 뇌리에 전달 되기도 전에 그는 가슴이 화끈거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화웅은 두 주먹을 앞으로 내민 자세 그대로 몸이 굳어진 채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가슴팍은 작은 구멍이 뚫린 채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검끝이 살짝 피부를 뚫고 들어온 것에 불과했다.
하나 그 검끝에서 흘러나온 검기가 심맥을 건드려 화웅은 온 몸을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강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검이 한 치만 더 깊이 들어갔어도 그는 심장이 베어져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을 것이다.

화웅은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고 임영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임영옥은 단정한 자세로 그의 일 장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침착하고 고요해서 조금 전에 경이적인 검법을 구사하여 두 명의 고수들을 물리친 절세의 여검객(女劍客)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화웅은 그녀의 손에 들린 장검 끝에 묻어 있는 한 방울의 선혈을 응시하며 힘겨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초식이오?”

임영옥은 나직한 음성으로 소근거리듯 말했다.

“천외비홍(天外飛鴻).”

“이것도 종남파의 무공이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파에서 여인에게만 비전(秘傳)되는 월녀검법(越女劍法) 중의 한 초식이에요.”

화웅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그는 마음속의 격동이 심한 듯 몇 차례나 표정이 일그러지다가 이내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 평생 이토록 절묘한 검술은 처음 보았소.”

“과찬의 말이에요.”

화웅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지난 팔 년동안 강호의 물을 먹은 놈이오. 그 동안 적지 않은 검객들을 보았지만 소저와 같은 여인의 몸으로 이런 검법을 지닌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었소.”

그는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한 차례 더 내려다보고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소저가 손에 사정을 보아준 점은 고맙게 생각하겠소. 하지만 소저는 방금 전에 그 일검을 조금 더 세게 찔렀어야 했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오른 발로 세차게 그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것은 너무도 불의(不意)의 일격이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임영옥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비록 정통으로 옆구리를 가격 당하지는 않았으나, 워낙 아슬아슬하게 화웅의 발이 스치고 지나갔는지라 그쪽 부위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화웅은 그녀가 뒤로 물러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그녀의 코앞으로 돌진해 들어오며 두 주먹을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알겠습니다. 아래는 요청하신 조건을 반영한 수정본입니다.


휘휘휙!

그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고 지나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임영옥은 다시 세 걸음을 빠르게 물러났으나, 여전히 화웅의 권세를 피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그녀는 검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다시 옆으로 빙글 회전하여 몸을 피했다.

팟!

화웅의 주먹이 그녀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그녀의 옷자락이 살짝 찢어졌다. 그녀는 비록 아무런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으나 방립 아래에 내비치는 그녀의 눈살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화웅은 더욱 맹렬하게 그녀를 향해 육박해 들어오며 계속 주먹을 질풍처럼 내질렀다. 그의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쉴 틈을 주지 않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쉭! 쉬익!

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거친 그의 콧김과 뒤섞이며 묘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임영옥은 계속 교묘한 보법(步法)으로 화웅의 질풍노도와 같은 공세를 피해 나갔으나, 여전히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화웅이 그녀를 쓰러뜨리기 전에 먼저 지치느냐, 아니면 그녀가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화웅의 주먹에 쓰러지고 마느냐 하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한데 임영옥이 막 바닥에 눕다 시피하며 화웅의 두 주먹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신형을 옆으로 비틀어 일어서려 할 때였다.

쾌액!

갑자기 난데없이 시퍼런 두 줄기의 섬광이 그녀의 미간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정소명의 수리검이었다. 조금 전에 그녀의 일검에 옆구리를 베이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정소명이 어느 틈엔가 일어나 그녀를 향해 수리검을 날렸던 것이다. 이번의 일격은 정소명이 완벽하게 기회를 잡고 던진 것이라서 먼저번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인적이고 위력적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막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라 도저히 그 수리검을 피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절대절명의 순간, 그녀의 눈에 기이한 신광(神光)이 어른거렸다. 찰나, 그녀는 수중의 장검을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촤아아악!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시퍼런 검기가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처절한 비명 하나!

“크아악!”

그 비명소리는 밤하늘을 갈가리 찢으며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비명소리가 사라지자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쪽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던 정해와 양취록의 싸움도 어느 새 그쳐 있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한 사람에게 집중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뚝… 뚝….

선열하게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섬뜩하도록 차갑게 빛나는 야릇한 검광. 임영옥은 처음의 자세 그대로 검을 비스듬히 가슴 앞에 세워든 채로 조용히 서 있었다. 방립 아래로 내보이는 그녀의 턱은 단아한 선을 이루고 있어, 그녀의 차분한 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하나 지금 그 턱선은 가느다란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은 사람을 죽였다…’

임영옥은 착잡한 눈빛으로 자신의 수중에 들린 검을 바라다보았다. 검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핏물이 꼭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 같았다. 강호에 출도한 이후 그토록 조심을 했건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검에 남의 피를 묻히고 만 것이다.

그녀의 이 장 앞에는 하나의 인영이 길게 쓰러져 있었다. 짙은 남포의 우람한 체구를 지닌 청년. 그는 다름 아닌 남패자 화웅이었다. 화웅의 몸은 아랫배에서부터 턱까지 길게 잘라진 채 검붉은 피를 흘려내고 있었다. 갑판 위는 온통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물들어 있어 흡사 붉은 물감을 엎어놓은 것 같았다. 공격을 한 사람은 정소명이었는데 왜 화웅이 쓰러진 것일까? 그리고 절대적인 위기에 처해 있던 그녀는 어떻게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짙은 의문이 감돌았으나,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 사람이 천천히 임영옥에게로 다가갔다.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왼손을 꼬옥 잡았다.

“사매.”

임영옥은 그를 돌아보았다. 진산월은 그녀의 눈에 한 줄기 처연한 빛이 어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임영옥은 심성이 곱고 마음이 여린 여자였다. 뛰어난 재질로 놀라운 검술을 익히고 있으면서도 아직 강호에 그 명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고사하고 다치게 하는 것조차도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살인(殺人)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로서는 마치 자신이 칼에 찔린 듯한 기분일 것이다. 하나 조금 전의 상황은 너무나 급박해서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화웅의 권세 속을 채 빠져 나오기도 전에 정소명의 수리검이 날아들자 그녀는 전력을 다해 태을신공을 끌어올려 월녀검법 중의 은홍사현(銀虹乍現)을 펼쳐냈다. 정소명이 던진 두 개의 수리검은 그녀의 은홍사현에 산산이 부서지고, 그 파편을 피하려던 화웅은 그녀의 검기에 휘말려 그대로 아랫배에서 이마까지 잘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진산월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매…”

임영옥은 한동안 우두커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그녀의 눈가에 떠올라 있던 처연한 빛은 어느 새 사라지고 있었다. 임영옥의 나이는 올해 스물 하나. 종남파의 이십대 장문인이었던 태평검객 임장홍의 무남독녀이며, 태어나면서 줄곧 종남산에서 자라왔다. 어렸을 때부터 무술에 재질이 많았으며, 특히 검법에 특이한 재능을 보였다. 그녀의 나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임장홍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종남파 비전의 검법인 유운검법을 가르켰다. 그녀는 임장홍의 시범을 단 한 번만 보고 그대로 따라하여 임장홍을 놀라게 했다. 그때 임장홍은 한 번 본 검로(劍路)를 조금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하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보고 있다가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아깝구나…”

그는 그녀의 재질이 천부적인 것을 알아보았으나, 그녀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여인은 체질 상 절정(絶頂)의 무도(武道)를 익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검법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백년 내 강호에서 여인의 몸으로 최고의 반열에 오른 고수로 사람들은 흔히 천수관음(千手觀音)과 자죽신니(紫竹神尼)를 꼽았다. 천수관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제일의 암기고수였다. 그녀가 한참 명성을 날릴 때는 단 일수(一手)만으로 강북의 칠대고수(七大高手)를 모두 쓰러뜨렸다고 했다. 자죽신니는 아미파(峨嵋派)가 배출한 사상 최고의 고수로, 평생을 아미산의 금정(金頂)에서만 살며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하나 그녀는 사십 년전의 아미대집회(峨嵋大集會)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당시 소림과 무당의 최고 고수들의 합공을 물리쳐 당시 집회에 참석했던 군웅들을 경악케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금정에서 내려와 정상적으로 강호에서 활동을 했다면 천수관음을 능가하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 거라고 믿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천수관음이 비록 강호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암기무공의 달인이었어도, 최전성기에 조차 강호의 십대고수(十大高手)에는 꼽히지 못했다. 자죽신니가 아미의 최고 어른으로 불리우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무림 최고의 배분인 환우삼성(?宇三聖)에는 속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녀들의 재질이 뛰어나고 명성이 대단해도 무림인들은 무공에 관한한 강호 최절정의 고수들에게 손색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임장홍은 임영옥이 재질만으로 놓고 보면 천수관음에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 여인의 몸으로 검법을 절정에 이르도록 익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한계를 알고 있기에 임장홍은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던 것이다.

아울러 그녀가 그런 재질 때문에 여느 여염집 여자들과 같은 평범하고 소박한 가정을 꾸리지 못할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의 두 가지 걱정은 진산월이 종남파에 들어온 다음에야 비로소 해소되었다.

하나 진산월은 무공면으로 볼 때는 아직 발육이 더딘 미숙아였다. 지금의 종남파 최고 고수는 누가 뭐래도 임영옥이었다. 임영옥의 단점은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과 천성적으로 심성(心性)이 착해 상대를 베어야 할 때 베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피를 싫어했다.

하나 그런 그녀가 마침내 첫 살인을 했다.

이제 비로소 강호(江湖)의 무인(武人)이 된 것이다.

아마 그녀는 지금의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러한 마음은 조금씩 퇴색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녀의 검은 조금씩 더 강해질 것이다.

살인을 해야만 강호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살인을 함으로써 그녀는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가장 큰 약점을 없애게 되었다. 앞으로 그녀의 검은 더욱 매섭고 날카로워질 것이며, 강호인들은 무림에 한 명의 절정검객(絶頂劍客)이 나타났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진산월은 마음 한 구석으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한 가지를 잃고 한 가지를 얻었지만, 그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인지는 먼 후일에야 밝혀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밝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강호인의 영원한 비애(悲哀)가 아닐까?

화웅의 죽음으로 장내는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양취록과 정소명은 화웅의 시신을 내려다 본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변천붕과 혁련삼 또한 뜻밖의 사태에 놀란 듯 날카로운 눈으로 연신 임영옥의 전신을 쓸어보고 있었다.

특히 변천붕의 시선 속에는 칼날같은 예리함이 번뜩이고 있었다. 변천붕은 심계가 깊고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조금 전에 임영옥이 화웅의 죽음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던 것으로 보아 그녀로서는 첫 살인(殺人)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때 바로 그녀를 공격했어야 했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그녀의 손끝의 떨림은 어느 새 멈춰 있었고, 방립 아래 드러난 그녀의 눈빛은 처음의 냉정한 안광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변천붕은 내심 쓴 입맛을 다셔야 했다.

무엇이든 첫 번째가 제일 어려운 법이라는 것을 그는 오랜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제일 어려운 관문을 돌파한 만큼 앞으로 그녀의 검을 상대하려면 한층 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변천붕은 빠르게 양취록과 정소명을 훑어 보았다. 양취록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정소명은 화웅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지 화웅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온 몸을 가늘게 떨며 격동에 잠겨 있었다.

‘쯧. 저 놈은 안되겠군.’

변천붕은 정소명에게는 더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암기의 고수에게 가장 큰 금기(禁忌)는 마음이 흔들리거나 격동에 차는 것이었다. 마음이 흔들리면 손끝이 흔들리고, 흔들리는 손끝으로는 제대로 암기를 발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암기를 발출하는 것은 장인(匠人)이 도자기를 만드는 것과 같다. 정(精)과 기(氣), 그리고 심(心)이 완벽하게 일치해야만 비로소 일격필살의 암기를 쏘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정소명이 설사 정신을 차린다고 할지라도 제대로 암기를 쏘아보낼 수 있을지는 심히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화웅이 죽고 정소명마저 쓸모 없게 되었다면 이제는 변천붕이 직접 나서는 수 밖에는 없었다. 변천붕은 결심을 굳히고 천천히 진산월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뒤를 혁련삼이 어슬렁거리며 뒤따라왔다.

어떤 말도 필요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출수한 것은 변천붕의 뒤에서 따라오던 혁련삼이었다. 혁련삼은 일언반구 말도 없이 변천붕의 뒤를 돌아 진산월에게로 날아갔다. 짙은 고동색 장포를 걸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그가 허깨비처럼 허공을 훌훌 날아 다가오는 모습은 괴기스러워 보였다.

하나 그의 신형이 채 반도 날아오기 전에 서늘한 검기가 피어오르며 임영옥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으히히… 이 계집애야! 우리 질펀하게 한 번 놀아보자!”

혁련삼은 그녀가 자신을 막아설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조금도 놀라지 않고 듣기 민망한 소리를 지껄이며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임영옥은 그의 추잡한 소리에도 전혀 흔들리는 기색없이 수중의 장검을 세차게 흔들었다.

쏴아아…

마치 대나무 숲에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음향이 울리며 수십 개의 검영이 차례로 나타나 혁련삼의 주위를 삼엄하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천하삼십육검중의 천하밀밀(天河密密)이란 초식이었다.

원래 천하삼십육검은 종남파의 검법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어서 평소에 임영옥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대뜸 천하삼십육검 중의 초식을 펼친 것은 상대가 강호에서 살성(煞星)으로 알려진 혁련삼이었기 때문이다.

혁련삼의 입버릇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지만 그의 무공만큼은 명성에 어긋나지 않는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비마환영신법을 펼쳐 허공에서 미끄러지듯 신형을 이동시키며 삼엄한 검영을 뚫고 임영옥에게로 바짝 접근해 왔다.

“흐흐… 이 어린 것아. 노부의 손이 맵다고 원망하지 마라.”

혁련삼은 징그럽게 웃으며 비쩍마른 오른 손을 기이하게 흔들었다.

파파파팍!

유현하면서도 날카로운 장세가 줄기줄기 뿜어나와 임영옥의 전신을 억압해갔다. 그가 가장 자랑하는 음명장의 장세가 펼쳐진 것이다.

음명장의 공력은 과연 무서워서, 임영옥의 전신은 금시라도 그 음독(陰毒)한 장세에 갈가리 찢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나 임영옥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침착한 모습으로 수중의 장검을 재빨리 거두어 들였다가 다시 떨쳐냈다.

파앗!

갑자기 어두운 장내가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며, 한 줄기 예리한 검광이 음명장의 장영을 뚫고 혁련삼의 인후혈을 향해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혁련삼은 막 음명장 중의 절초인 음풍취죽(陰風吹竹)으로 임영옥의 어깨를 후려치려다 이것을 보자 그야말로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헛!”

그는 다급한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황급히 몸을 옆으로 숙였다.

찌익!

혁련삼은 목덜미가 관통당하는 참변은 면했으나, 덕분에 어깨위의 옷자락이 찢어져 맨살이 훤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평소에 스스로를 강호무림의 절정고수라고 자부하고 있던 혁련삼으로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창피막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 가랑이를 찢어 죽일 년이…”

혁련삼은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를 내뱉으며 막 몸을 일으켜 임영옥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바로 그때,

스윽!

혁련삼의 목덜미 대신 어깨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던 임영옥의 장검이 허공에서 빙글 돌며 그대로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야말로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일이라 천하의 혁련삼도 안색이 새카맣게 변하고 말았다.

이것은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수조라는 초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수법 중에는 천하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절초 중의 절초였다.

혁련삼은 황급히 몸을 뒤로 눕히며 풍차처럼 마구 회전했다.

파팍!

그의 몸이 선풍처럼 돌아가며 그와 동시에 십여 개의 새하얀 섬광이 눈부시게 폭사해 나왔다.

다급해진 혁련삼이 가지고 있던 은형인을 십여 개나 발출한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너죽고 나죽자는 식이었다.

임영옥이 계속 검을 내려친다면 비록 혁련삼의 몸을 두동강이낼 수 있겠으나, 그녀 또한 은형인에 몸이 꿰뚫리고 말 것이 분명했다. 임영옥은 혁련삼의 관자놀이를 향해 떨어지던 검의 방향을 슬쩍 바꾸며 손을 흔들었다.

따따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이 연거푸 들려오며 혁련삼이 발출한 은형인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제서야 혁련삼은 바닥을 한 바퀴 굴러 이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강호에서 동귀어진(同歸於盡)이란 실력이 떨어지는 고수가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혁련삼은 당당한 무림의 선배로서 불과 오초도 되지 않아 자신보다 새파랗게 젊은 여인에게 이 수법을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으니, 이 사실이 강호에 퍼진다면 그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

혁련삼의 눈가에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혁련삼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사생결판(死生決判)을 내겠다는 듯 딱딱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은 비장하기조차 해 보였다.

임영옥은 상대의 공세가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험해진 것을 알아차리고 한층 신중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파파팟!

곧 두 사람의 주위에는 새하얀 검광(劍光)과 시퍼런 장영(掌影)이 거의 동시에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두 사람의 격전은 그야말로 치열하여 일시지간 누구도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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