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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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3화


제24장. 점입가경(漸入佳境)

한편, 변천붕은 혁련삼과 임영옥의 싸움을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진산월에게로 다가갔다.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는 우리 차례요?”

변천붕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너무 늦었지. 자네가 신목칠호 심옥당을 물리쳤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노부는 자네가 결코 심옥당보다 실력이 뛰어났다고는 믿지 않네. 단지 자네는 그보다 운(運)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이네.”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잘 보았소. 확실히 나는 운이 좋은 편이오.”

변천붕은 진산월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운이란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 노부를 만난 이상 자네의 운도 이제 마지막이네.”

진산월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은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았소? 나의 좋은 운(運)은 상대의 나쁜 운(運)과 직결된다.”

변천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금시초문이군.”

진산월은 히죽 웃으며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들켰군. 사실은 내가 만들어 본 말이오. 하지만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변천붕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은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돌연 눈가에 스산한 빛을 번뜩이며 성큼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는 무언(無言)의 표시였다. 진산월도 조금 전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두며 신중한 눈으로 변천붕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변천붕은 진산월이 지금까지 강호에 출도하여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무서운 고수였다. 강호에서는 그의 심기와 두뇌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사실 무공면으로 볼 때도 그는 혁련삼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는 되도록 무공보다는 머리로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더 좋아하여 좀처럼 남들 앞에서 손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나 일단 손을 쓰기로 결심하면 다른 누구보다도 매섭고 날카로운 솜씨로 순식간에 상대를 쓰러뜨리곤 했다. 지금도 진산월을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한 마리 독수리처럼 빠르고 사나워 보였다.

팟!

변천붕의 몸이 채 가까이 오기도 전에 그의 오른손에서 한가닥 예리한 지풍(指風)이 뿜어나왔다. 원래 사람마다 싸울 때는 제각기 자기만의 독특한 버릇같은 것이 있었다. 변천붕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단 지법을 날려 상대의 반응을 본 다음 적당한 무공을 사용하여 상대를 쓰러뜨리는 수법을 곧잘 사용하곤 했다. 지금 그가 펼친 것은 탁약지(拓躍指)라는 것으로, 살인적인 위력은 없으나 빠르고 경쾌하여 상대의 반응을 탐색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무공이었다.

진산월은 변천붕의 지공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다가오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막 탁약지공(拓躍指功)이 화개혈(華蓋穴)에 닿으려는 순간, 옆으로 슬쩍 한 걸음을 움직였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시기가 적절하여 변천붕의 탁약지공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 버렸다. 변천붕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오른 손으로 짧게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내밀었다.

쐐액!

그의 손에서 칼날같은 경기가 뿜어나오며 진산월의 어깨를 압박해 들어왔다. 진산월은 다시 옆으로 두 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변천붕이 발출한 경기는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진산월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진산월의 움직임은 얼핏 보기에는 그냥 무작정 옆으로 발을 떼어놓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상대의 공격이 날아오는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여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빈 곳으로 이동하는 고도의 솜씨였다.

변천붕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안된다!”

호통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두 가닥의 장력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쏘아져왔다. 이번의 두 장력은 각기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날아 들었기 때문에 진산월로서는 어느 쪽으로도 완벽하게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변천붕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는 진산월로 하여금 피하지 못하고 자신의 장력과 정면으로 격돌하게 하려는 것이다. 장력을 겨룬다는 것은 내공(內功)의 차이로 그 우열이 가려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변천붕처럼 자신의 내공에 자신이 있는 고수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변천붕은 이미 심옥당과 진산월의 싸움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초식으로 겨루게 되면 쉽사리 진산월을 이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판단은 사실 예리하고 정확한 것이었다. 진산월의 가장 큰 약점은 뭐니뭐니 해도 그의 내공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으로서 종남파에서 내려오는 대부분의 절학들을 두루 섭렵한 그였으나, 뛰어난 내공심법(內功心法)을 익히지 못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무공을 수련한 것이 아니라 너무 늦은 나이에 입문(入門)을 했기 때문에 내공에 관한 한 기초가 썩 잘 닦여진 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진산월은 심옥당과의 싸움에서 입은 내상을 아직 치유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진산월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변천붕과 정면으로 격돌하는 일만은 피해야 했다. 변천붕의 장력이 양쪽에서 날아들자 피할 곳은 두 군데 뿐이었다. 뒤로 물러나거나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 둘 중 어느 곳으로 피하더라도 불리한 위치에 빠지게 될 것은 분명했다. 진산월이 생각을 굴릴 사이도 없이 변천붕의 장력은 이미 그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진산월은 주저없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랐다.

파아앙!

그의 발밑으로 두 개의 장력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허공에서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변천붕의 몸이 한 마리 거대한 박쥐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오며 연속해서 네 개의 장력과 다섯 개의 지공을 폭포수처럼 내갈기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팍!

진산월의 주위가 온통 변천붕이 펼쳐낸 사장오지(四掌五指)의 그림자로 뒤덮여 버렸다. 이것은 변천붕의 절학인 구홍구격(九鴻九擊)이라는 수법이었다.

진산월은 허공에 몸을 띄운 상태인지라 더 이상 신형을 움직여 피할 곳이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며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다음 순간,

파앗!

갑자기 어두운 장내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검광(劍光)이 피어오르며 싸늘한 검기가 위에서 아래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변천붕은 이제야말로 진산월이 피하지 못하고 맞서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가 설마 검법을 펼치리라고는 미처 짐작치 못하고 있던 터라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사실 진산월의 허리춤에는 장검 하나가 달랑 매달려 있기는 했으나, 그가 아직 그것을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변천붕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심옥당과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을 때도 그가 검을 사용하지 않아서 경험이 풍부한 변천붕조차도 그가 검에는 별다른 조예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일단 검을 뽑아 휘두르자 진산월의 검초는 임영옥에 못지 않게 날카로웠다. 그가 펼친 것은 유운검법 중의 유운비격(流雲飛擊)이라는 초식인데, 지금처럼 허공에 뜬 상태에서 펼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검초였다.

변천붕의 두 눈에서 번갯불같은 안광(眼光)이 흘러나왔다. 돌연 그의 몸이 섬전처럼 선회하며 서릿발같은 검기가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그 검기는 진산월이 펼쳐낸 유운검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까까깡!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마찰음이 연속해서 터져나오며 예리한 검기가 사방을 마구 휘젓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에서 삼 장여를 훌훌 날아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내려선 다음에도 몇 차례나 신형을 휘청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충격을 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에 비해 변천붕은 제 자리에서 두 걸음 뒤로 물러선 상태로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우유빛 검광(劍光)을 뿌리는 연검(軟劍)이 쥐어져 있었다. 조금 전에 변천붕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연검을 뽑아 휘둘렀던 것이다. 변천붕은 슬쩍 자신의 왼쪽 팔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왼쪽 소매 끝이 조금 잘려져 있었다. 별로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변천붕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변천붕은 천천히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진산월은 안색이 약간 창백해진 것 외에는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하나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의 앞가슴과 옆구리쪽의 옷이 찢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변천붕은 그에게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지난 오년동안 노부로 하여금 검을 뽑게 만든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세. 자네는 그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진산월은 씁쓸하게 웃었다.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오. 솔직히 나도 검을 사용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었소.”

변천붕의 눈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 말은 노부를 놀리는 건가, 칭찬하는 건가?”

“물론 칭찬하는 말이오. 나는 아직 이런 일로 사람을 놀릴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하오.”

“그렇다면 다행이군.”

변천붕은 서서히 수중의 연검을 들어올렸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그런데 의외로 진산월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미 늦었소.”

변천붕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늦다니?”

“그가 왔소.”

그 말에 변천붕은 움찔 놀라 급히 물었다.

“그라니… 누구 말인가?”

진산월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을 뒤에서 사주한 인물 말이오. 그는 아무래도 당신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오.”

변천붕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하더니 급히 몸을 돌려 한 곳을 돌아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어느 새 장내의 싸움은 모두 멈춰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배의 한쪽에 있는 선실로 향해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칠흑같이 어두웠던 선실은 환하게 불이 밝혀 있었다. 그리고 선실 안에는 괴이한 물체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사각형의 호화롭게 장식된 상자였다. 하나 상자라기에는 너무 크고 거대했으며, 문까지 달려 있어 용도를 의심케 했다. 정해는 그 상자의 모습이 어딘지 눈에 익다고 생각하고 유심히 바라보다 갑자기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아! 운룡신차다…”

과연 그것은 상자가 아니라 운룡신차였다. 단지 마차를 끌던 말들이 보이지 않았고, 네 개의 바퀴도 모두 떼어내어 일시지간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백마도 없고 바퀴도 떼어낸 운룡신차가 좁은 석실 안에 동그마니 놓여져 있는 광경은 왠지 괴이하고 신비스러워 보였다. 그때 마차의 문이 서서히 열리며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눈부신 백삼을 입고 머리에는 영웅건(英雄巾)을 두른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허리에는 백금(白金)으로 만든 요대를 두르고 있었고, 신발마저 새하얀 백단화(白緞靴)를 신고 있어 흡사 순백(純白)의 정령(精靈)을 보는 것 같았다. 백삼 청년의 얼굴은 입고 있는 의복 만큼이나 수려하고 헌앙한 것이었다. 피부는 여인의 그것처럼 희고 부드러웠고, 짙은 검미(劍眉)에 붉은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코는 유난히 날카로운 매부리코여서 전체적인 인상을 차갑게 만들었다. 하나 그것이 또 그의 다소 오만해 보이는 표정과 잘 어울려 나름대로 독특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백삼 청년은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쑥스러워 하거나 계면쩍어 하는 빛 없이 담담하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약간 독특했다. 언뜻 보면 다른 사람의 걸음과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소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바닥의 뒷부분부터 먼저 바닥에 닿게 된다. 정해는 간혹 무림에서 발의 앞쪽을 먼저 땅에 닿게 하고 걷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부류의 인물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살수(殺手)이거나 경공(輕功)의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백삼 청년은 발바닥의 바깥쪽부터 바닥에 닿고 있었다. 정해는 이 광경이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하나 그 광경을 본 진산월의 표정은 더할 나위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발의 바깥쪽부터 바닥에 내딛는 걸음걸이는 부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결코 태어나면서부터 잘못된 습관이나 일시적인 버릇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인간이 태어나면서 오직 무공에만 매달리고 정진해서 생활 자체를 하나의 연무장(練武場)으로 만들었다면, 그는 걸음걸이 하나, 손동작 하나조차도 결코 무의미하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천부적인 재질을 소유하고 더불어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최고의 여건속에서 지내왔다면, 그자의 무공경지는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진산월은 눈앞의 백삼 청년이야 말로 그런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백삼 청년은 진산월에게서 삼장 여 떨어진 곳까지 다가온 다음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진산월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마침내 당신과 만났구료.”

진산월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당신이 언제 나타날지 궁금했었소.”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백삼 청년은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왜 나를 기다린거요?”

진산월은 그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서야만 오늘의 일 마무리될 수 있기 때문이오. 사실 나는 지금 지치고 피곤해서 빨리 쉬고 싶은 생각 뿐이오.”

백삼 청년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오. 그 배짱과 느긋함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구료.”

진산월은 히죽 웃었다.

“과찬의 말씀. 나야말로 귀하의 대담함과 뻔뻔스러움에 감탄하고 있었소.”

백삼 청년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대담하다는건 나도 인정하오. 그런데 뻔뻔하다니… 나의 어떤 점이 뻔뻔하단 말이오?”

“몰라서 묻는다면 거기에 어리석음이 첨가될 수도 있소.”

백삼 청년은 허리를 잡고 웃었다.

“하하…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하하하…”

백삼 청년은 한동안 미친 듯이 웃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흔들었다.

“내 앞에서 이토록 직설적으로 나를 욕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나도 당신처럼 욕을 들으면서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뱉는다면 당신은 너무 좋아서 웃다가 죽을지도 모르겠군.”

“하하… 정말 대단한 입씸이오. 귀하의 심계와 배짱, 말솜씨는 가히 삼절(三絶)이라 할만 하오.”

백삼 청년은 무심코 말했으나, 자신이 내뱉은 이 말로 인해 나중에 강호무림에 삼절무적(三絶無敵)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실 나는 당신 앞에 직접 나타나고 싶지 않았소.”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타나지 않고도 충분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솔직히 그렇소. 당신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당신이 나를 애먹일 줄은 정말 몰랐소.”

“내가 대단한게 아니라 당신의 계획에 처음부터 헛점이 있었던거요.”

백삼 청년은 뜻밖인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소? 나는 나름대로 꽤 치밀하게 일을 진행시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헛점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겠소?”

“귀하는 처음부터 모든 힘을 한 곳으로 모았어야 했소. 그랬다면 우리는 견뎌내지 못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솜씨를 부렸소.”

“듣고 보니 그런 면이 있는 것도 같군.”

“당신은 당신이 관여된 사실을 숨기고 일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원래 이런 일은 자신의 손을 더럽혀야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법이오.”

백삼 청년은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이야기요. 나는 확실히 그런 점을 소홀히 했소.”

“그래서 당신이 늦게라도 직접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소.”

진산월의 말을 듣고 있던 백삼 청년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다른 사람에 관련된 일인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진산월의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백삼 청년은 한동안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혹시 내가 나타날 것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니오?”

“준비라니… 그런 건 없소. 난 그저 당신이 좀 더 경우를 아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오.”

그제 서야 백삼 청년의 얼굴에 다시 예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안심이오. 나는 지금까지 경우에 어긋나는 짓을 한 적이 없으니 당신은 마음을 놓으시오.”

“……”

“당신은 그저 동중산에게서 열쇠 하나를 받아서 나에게 건네주면 되오. 그런 다음 우리들은 각기 제 갈길로 가면 일은 깨끗하게 해결되는거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소?”

백삼 청년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면 더욱 간단한 방법이 있소.”

진산월은 그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는 듯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물건을 입수하는 길 말이오?”

백삼 청년은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바로 그렇소. 당신은 정말 말하기가 편한 사람이군!”

진산월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거요.”

“그건 나와 생각이 조금 틀리군. 나는 전혀 어렵지 않다고 보는데…”

“당신이 저들과 합세하면 물론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거요.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소.”

백삼 청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건 무슨 소리요?”

진산월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당신이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조금 전에 천봉궁 사람들을 만났었소. 그녀들은 그 열쇠의 행방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더군.”

백삼 청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있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천봉팔선자중의 옥봉 누산산이 나타난 것은 나도 변대협에게 들어서 알고 있소. 하지만 그녀는 곧 떠났다고 하더군.”

“그런데 아쉽게도 그녀는 변천붕을 보았소.”

백삼 청년은 물론이고 한쪽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변천붕의 얼굴도 가볍게 변했다. 변천붕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불쑥 입을 열었다.

“그녀가 노부를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네.”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물론 누산산 혼자였다면 귀하를 보고도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을거요. 하지만 그곳에는 그녀 말고도 또 한 사람이 더 있었소.”

변천붕은 급히 물었다.

“그가 누군가?”

“영봉 금교교요.”

이 말에 변천붕의 어깨가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금교교는 변천붕이 떠난 후에 왔기 때문에 변천붕은 미처 그녀의 출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변천붕은 진위(眞僞)를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내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이 믿겠소?”

변천붕은 눈자위를 실룩거렸으나 더 이상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생각에 잠겨 있던 백삼 청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 금교교까지 왔다면 그녀들이 왜 순순히 물러났단 말이오?”

“그녀들은 아직 그 물건의 처리에 대해 천봉궁주의 명령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던거요.”

“그렇다면 그녀들이 떠난 이상 지금의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겠구료?”

“그녀들이 떠난 것은 물건이 우리 수중에 있다면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오. 따라서 그녀들은 그 물건이 다른 사람의 수중에 넘어가는 일은 몹시 꺼려하고 있소.”

그제서야 백삼 청년은 진산월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영봉 금교교는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가장 두뇌가 뛰어나고 지략이 탁월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변천붕을 보았다면 당연히 변천붕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조만간에 변천붕이 다시 손을 써오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순순히 떠난 것은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변천붕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궤뚫어 보고 있을지 몰랐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백삼 청년은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비록 천봉팔선자를 두려워 하지는 않았으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아직은 그녀들과 정면으로 격돌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운자추. 당신은 감히 천목지약(天目之約)을 어기고 본궁의 물건을 노린단 말인가요?”

어디선가 조용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음성은 가까이서 소리친 듯 아주 선명하게 들렸으나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당신은 좀 더 빨리 손을 썼어야 했소.”

백삼 청년은 힐끗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이내 허공을 올려보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금소저께서 오신 것을 미처 몰랐으니 본 공자의 실책이 크구료. 금소저의 옥용(玉容)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겠소?”

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헛짚었군요. 나는 금교교가 아니에요.”

백삼 청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계속 웃었다.

“하하… 금소저가 아니라면 백봉(白鳳) 정소저겠구료. 설마 정소저까지 오실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백봉 정소소(鄭素素)는 천봉팔선자의 맏이로, 천봉궁에서도 특수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알려진 바로는 그녀는 천봉궁주의 외조카로, 천봉궁주의 신임이 두터워 천봉궁의 대외(對外)적인 일을 총괄하고 있다고 했다.
여인은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백봉이라고 어떻게 단정하는거죠?”

백삼 청년은 빙긋 웃었다.

“간단하오. 소저의 말씀 하시는 투로 보아 금소저보다 항렬이 높은 게 분명한데, 금소저의 위로는 오직 두 분만이 있을 뿐이오.
그중 취봉 두소저는 워낙 차가운 성격이라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네지 않는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오직 백봉 정소저 한 분 밖에는 없지 않겠소?”

한동안 주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후에 다시 들려온 여인의 음성은 처음보다는 한결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과연 예리한 판단력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말은 우리 자매를 은근히 비웃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천봉궁에 실례를 범할 정도로 무모하고 어리석지 않소.”

“운자추.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당신은 천목지약을 어길 생각인가요?”

백삼 청년은 다름 아닌 운문세가의 소가주인 운자추였다.
운자추는 정소소의 말을 듣자 정색을 했다.

“그럴 리 있겠소?”

“그렇다면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무언가요?”

운자추는 진산월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저 강호에 처음 출도한 종남파의 진장문인이 마음에 들어 친분을 쌓아두고 싶었을 뿐이오.
그렇지 않소, 진장문인?”

정해는 그의 넉살좋은 모습에 내심 실소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한데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진산월의 반응이었다.
진산월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운자추의 말에 동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운공자(雲公子)의 기상이 몹시 마음에 드는구료.
더구나 이곳의 야경(夜景)은 나름대로 독특한 정취가 있어 사람을 사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오.
술이 없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운자추는 눈을 반짝이며 급히 말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본가(本家)가 있소.
그곳에 가면 비록 천하제일의 명주(名酒)는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맛이 좋은 술이 있소.”

진산월은 빙그레 웃었다.

“초청하는 거요?”

운자추는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진장문인께서 기꺼이 초대에 응해주리라 믿고 있소.”

정해는 진산월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정해 뿐 아니라 임영옥과 동중산 등 종남파의 고수들과 변천붕 등도 모두 진산월을 주시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운자추를 비롯한 중인들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매달았다.

“나는 물론 당신의 초청에 응하겠소.”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불안한 빛을 감추지 못했고, 변천붕 등은 오히려 어리둥절한 모습들이었다.
운자추는 확인하듯 재차 물었다.

“정말 본가에 오겠소?”

“물론이오.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진산월은 그를 놀리듯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본파는 이번에 일이 있어 강호에 출도한 만큼 바삐 가야 할 곳이 있소.
그 일을 모두 마치고 나서 운공자의 초청에 기꺼이 응해주겠소.”

운자추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어졌다.
웃음이라고 할 수도 없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야릇한 표정이었다.

“원래 정취란 장소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다음이라면 오늘과 같은 기분은 느끼지 못하게 될 거요.”

진산월은 여전히 웃었다.

“그래서 나도 아쉬워하고 있는 중이오.”

운자추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더니 이내 다시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하긴… 기회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지.
어쨌든 가까운 시일 내에 본가를 방문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겠소.”

“실망시키지 않겠소.”

“이렇게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고… 진장문인을 만난 기념으로 조그만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운자추는 허리춤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옥패(玉佩)였다.
옥패는 크기가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 했는데,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유빛 광채가 아롱거리고 있어 한눈에 보아도 무척 진귀한 것임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옥패의 겉 표면에는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비룡(飛龍)의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운자추는 그 비룡옥패를 만지작거리며 빙긋 웃었다.

“이것은 내 신표인데, 언제고 본가를 방문할 때 입구에서 보여주면 어렵지 않게 나를 만날 수 있소.”

이어 그는 자연스런 동작으로 비룡옥패를 진산월 쪽으로 던졌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이내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자추가 던진 비룡옥패는 진산월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고 완만해서, 그런 속도로 날아오면서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게 신통할 정도였다.
하나 그것을 본 종남파 고수들의 표정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 비룡옥패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공할 경력(勁力)이 담겨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진산월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비룡옥패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룡옥패는 답답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진산월을 향해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하나 안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그 비룡옥패가 미약하게 흔들리며 속도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간 지점까지 날아온 비룡옥패의 속도가 갑자기 두드러지게 빨라지더니 이내 한 줄기 백선(白線)을 그리며 진산월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 속도의 변화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쾌액!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는 비룡옥패는 마구 선회하고 있어, 그야말로 무엇이라도 관통해 버리는 공포의 뇌전(雷電)과도 같았다.

“앗?”

누군가의 입에서 다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순간, 진산월은 불쑥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 오는 비룡옥패를 움켜쥐려 했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무모한 동작이었다.

팍!

백선이 사라지며, 주위에 이상한 정적이 감돌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진산월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산월은 비룡옥패를 오른손에 쥔 채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손안에 쥐어져 있는 비룡옥패는 몇 차례 가느다란 떨림을 보이다가 점차로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버렸다.
진산월은 비룡옥패를 내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그것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이것은 남만(南蠻)의 진귀한 온옥(溫玉)으로 만든 것 같구료.
고맙게 받아 두겠소.”

운자추는 진산월이 태연한 표정으로 비룡옥패를 품안에 갈무리하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연신 괴이한 안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중인들은 그가 당장이라도 진산월을 향해 덤벼들 것 같아 긴장된 안색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 운자추는 한참동안이나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말없이 몸을 돌려 운룡신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촤르르…

운룡신차의 휘장이 영롱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가 다시 내려졌다. 한 번 내려진 휘장은 두 번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운자추가 일언반구 말도 없이 운룡신차 안으로 사라지자 잠시 장내에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진산월은 한 차례 운룡신차를 둘러보다가 변천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밤이 깊었으니 귀하만 괜찮다면 우리는 이쯤에서 작별을 했으면 하오만…”

변천붕은 음침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좋을대로 하게.”

“가까운 곳에 배를 대어 주시면 고맙겠소.”

변천붕은 말없이 오른손을 슬쩍 들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범선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근처에서 멀지 않은 강변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변천붕은 별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진산월을 향해 매섭게 손을 쓰던 것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이어서 의아스러운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정해는 내심 침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콧대높고 도도하던 운자추는 물론이고 무림의 괴걸(怪傑)로 불리우는 변천붕마저 정소소의 말 몇 마디에 모두 고분고분해지다니… 이게 바로 천봉궁의 위력이란 말인가?’

그는 새삼 강호무림에서 명성을 떨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선이 강변 가까이에 접근하자 진산월은 변천붕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하고는 배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뒤를 이어 임영옥과 정해, 동중산 등이 차례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모두 바닥에 내려서자 범선은 다시 강물을 거슬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강물 위를 움직이는 범선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진산월 등이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범선은 곧 어두운 강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범선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며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소저의 옥안(玉顔)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소?”

그의 목소리는 잠시 어두운 허공을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중인들이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즈음에야 정소소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은 기회가 아닌 것 같군요. 당신 말대로 밤이 너무 깊었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어요.”

그녀의 음성은 중인들의 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렸으나, 당체 어디서 들려오는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육합전성(六合傳聲)이라는 상승(上乘)의 절학으로, 공력이 한 갑자(甲子)이상 되기 전에는 익힐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쉽구료. 그럼 소저께서는…”

“우리는 조만간 만날테니 당신은 너무 서운해 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때가 되면 당신은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녀의 마지막 음성은 점차로 희미해져서 종내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그 음성을 끝으로 몸을 날려 사라진 모양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음미하느라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때 갑자기 진산월이 정해와 임영옥을 돌아보았다.

“자리를 이동하자.”

이어 그는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몸을 날렸다. 정해는 진산월이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주저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임영옥과 동중산도 벌써 저만큼 앞서서 달려가는 진산월의 뒤를 말없이 뒤따르고 있었다. 오리(五里)쯤 갔을까? 그동안 일언반구 말도 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던 진산월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숲이 우거지고 지형이 은밀해서 좀처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정해는 더 이상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장문사형. 대체 왜 이런 곳으로…”

“으웩!”

그 순간, 진산월은 입으로 한바탕 시커먼 피를 토해냈다. 중인들은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산월은 거의 한 바가지나 되는 피를 토해낸 다음에야 겨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바로 내가 그 자리를 빨리 떠난 이유다.”

“장문사형…”

“운자추가 내던진 비룡옥패의 위력은 정말 무서웠다. 멀쩡한 몸이었더라면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내상(內傷)을 입고 있어서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었지. 간신히 참고 있기는 했지만, 언제 피가 나올지 몰라 가슴이 조마조마 했었다.”

진산월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왠지 울적한 심사가 담겨 있는 듯 했다. 정해는 걱정스런 빛을 감추지 못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장문사형. 괜찮으십니까?”

“한 바탕 죽은 피를 게워냈으니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운기조식을 하면 괜찮아 질게다.”

“그럼 어서 빨리 운공(運功)을 하십시오. 저와 사저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이어 그는 중인들의 가장 뒤에 서 있는 동중산을 돌아보았다.

“중산. 이리 오너라.”

동중산은 진산월이 자신을 부르자 몸을 한 차례 움찔거리다가 쭈삣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진산월의 눈에는 평소와는 다른 엄격한 빛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는 네가 무엇을 하던 네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

“너도 보았다시피 이번 일은 단순히 네 개인의 신상(身上)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본파(本派)의 존망(存亡)에도 영향을 끼치는 커다란 사안(事案)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본파가 무엇을 하건 운문세가나 신목령과 한바탕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동중산은 묵묵히 진산월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사실 그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일시적으로 몸을 피할 생각으로 종남파에 가입한 것이 오히려 일을 엄청나게 크게 만들고 말았다는 후회감은 이미 진작부터 가슴 가득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앞으로 일을 수습하기 힘들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 종남파에 대한 미안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그는 종남파야 어찌 되었건 자신이 무사히 물건을 지니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상태였다. 진산월은 동중산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네가 입수한 물건이 무엇이든 그것은 네 소유물이므로 내가 그것의 처분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해주었으면 한다. 네가 본파에 몸을 담고 있는 한 본파는 끝까지 너를 지켜줄 것이며, 너 또한 본파에 충성을 바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동중산은 잠시 망설이다가 불쑥 물었다.

“충성을 바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그는 내심 진산월이 물건을 내놓으라고 할까봐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여차하면 또 한바탕의 악전고투(惡戰苦鬪)를 각오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들의 무공으로 보아 자신에게 별로 승산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진산월의 부상을 틈타 기습을 가하면 의외로 뚫고 나갈 길이 열릴 지도 몰랐다. 동중산이 이렇게 비장하기 조차한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와 네가 소유한 모든 물건은 본파의 소중한 재산이다. 그것을 다치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 네가 본파에 충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동중산은 그의 말 속에 묘한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차리고 잠시 눈쌀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진산월의 말은 어떻게 들으면 동중산에게 물건이나 잘 지키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 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동중산과 그가 지닌 물건은 이미 종남파의 것이니 엉뚱한 마음을 먹지 말라는 경고의 말로도 들렸다. 동중산이 혼자 열심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임영옥이 진산월에게로 다가왔다.

“사형. 더 늦기 전에 어서 상처를 치료하세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평평한 곳을 찾아 바닥에 정좌해 앉았다. 임영옥과 정해가 재빠르게 그의 양 옆에 나누어 섰다. 진산월은 그들을 둘러 보고는 이내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장문인 체면에 영 말이 아니군. 아무튼 이것도 새로운 경험이겠지.”

임영옥이 어서 서두르라는 눈짓을 하자 진산월은 두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으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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