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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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6화


제27장. 소림집회(少林集會)

숭산(嵩山)의 아침은 언제나 청명했다.
계절은 가을의 정점을 지나 아침 저녁으로는 서리가 내리고 있는데, 푸른 산을 지고 서있는 맑은 하늘은 끝없이 창괄(蒼括)하기만 했다.
하남성의 중부에 있는 숭산은 예로부터 오악(五嶽)중의 하나로 천하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거니와, 소림사가 창건된 이후에는 천하무학(天下武學)의 대본산(大本山)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옛 이름은 외방(外方), 숭고(嵩高)라 하였고, 준극봉(峻極峯), 태실봉(太室峯), 소실봉(少室峯)의 세 봉우리가 높게 솟아 올라 있었다.

숭산에 들어선 진산월 일행은 남다른 감회에 젖어 있었다.
종남파가 구대문파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은 지금부터 정확히 십팔 년전이었다.
그때 구대문파에서는 무섭게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형산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곳 숭산의 소림사에서 구파회동(九派會同)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종남파 장문인은 태평검객 임장홍의 사부인 천치검(天痴劍) 하원지(賀原志)였는데, 하원지는 사람은 좋으나 무능하고 무공에 재능이 없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원지는 거듭된 형산파의 독촉에 못이겨 구파 장문인들 앞에서 형산파 장문인과 비무(比武)를 하게 되었으나, 불과 십 초만에 참패하여 종남파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려 버렸다.
또한 하원지의 사제들이자 종남파의 최고 고수들인 종남삼검(終南三劍)도 형산파 고수들의 손에 차례로 무릎을 꿇어 치욕을 더하고 말았다.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구대문파에서는 오랜 동안의 숙고 끝에 종남파가 구대문파로서의 위신과 지위를 잃어버렸다고 결정하고 형산파를 종남파 대신 구대문파의 하나로 인정한다는 선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기산취악(棄山取嶽)’ 이라고 불렀다.
종남파가 있는 종남산을 흔히 남산(南山)이라고 부르고, 형산파가 있는 형산 또한 남악(南嶽)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구대문파가 ‘남산을 버리고 남악을 취했다’ 라고 풍자한 것이다.
그 이후 종남파는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비운의 주인공인 하원지는 장문인 직을 제자인 임장홍에게 물려주고는 홧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반대로 형산파는 엄청난 기세로 세력을 확장시켜 구대문파에서도 몇 손가락안에 꼽히는 거대문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알고 있는 진산월 일행에게 이곳 소림사는 단순한 무림대집회가 열리는 곳 뿐만이 아니라 종남파의 흥망성쇠가 판가름되는 운명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제 십팔년 만에 숭산으로 들어서는 진산월 일행의 마음 속에는 과거의 치욕을 씻고야 말리라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미래에 대한 묘한 두려움과 설레임이 교차되어 지나가고 있었다.


무림대성회가 열리는 오유봉은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小室峯)의 뒤쪽에 있는 봉우리였다.
이곳에는 전설적인 신승(神僧) 달마대사(達摩大師)가 면벽구년의 수련을 했던 달마동(達摩洞)이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외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었다.
평소 소림사는 특정한 날을 잡아 향화객(香火客)들만을 받아 들였으나, 이번에는 많은 무림인들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서인지 산문(山門)을 활짝 열어놓고 몰려드는 군웅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산월 일행이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소림사의 산문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이미 중천에 떠오르는 정오 무렵이었다.
진산월 일행 중에서 과거에 소림사에 한 번이라도 와본 적이 있던 사람은 임영옥 뿐이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상원건 조차도 소림사는 아직 방문한 적이 없었고, 동중산 또한 오랫동안 강호에서 굴러먹은 인물이었으나 소림사에는 처음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소림사(少林寺)> 라는 고색창연한 현판이 달린 산문을 보자 모두의 얼굴에는 한 줄기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낙일방의 설레임은 다른 누구보다도 컸다.
아직 나이가 어린 그는 준수한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채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막 들어서는 산문에서는 소림사의 지붕들만이 간간이 보일 뿐이었지만, 멀리 보이는 석탑(石塔)들과 주위의 경관이 어울려져 사람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석탑군(石塔群)들은 소림사의 역대 고승(高僧)들의 유골과 사리를 안치한 곳으로, 탑림(塔林)이라고 했다.
산문에는 세 개의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고, 세 명의 소림 승인(僧人)들이 탁자앞에 앉아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소림사를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나가 그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과 고향, 소속 방파(幇派)를 적어야만 비로소 소림사 경내(境內)로 들어설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낙일방은 경쾌한 걸음으로 가운데 탁자로 다가갔다.
머리에 네 개의 계인(戒印)을 찍은 승려가 탁자에 앉아 있다가 진산월 일행을 올려보며 물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낙일방은 히죽 웃으며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종남산에서 왔습니다. 저 분이 본파의 이십일 대 장문인이시고, 저는 저 분의 사제인 낙일방이라고 합니다.”

승려의 시선이 힐끗 진산월을 향했다.
하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방명록에 무언가를 적었다.
낙일방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힐끗 곁눈질을 해 보더니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종남파 장문인외 칠인(七人).>

방명록에는 달랑 한 줄의 글만이 씌여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종남파가 구대문파에서도 쫒겨난 문파라고는 하나 그래도 명색이 일파(一派)의 장문인이 찾아왔는데, 방명록에 이름조차 적지 않은 것은 너무 매몰찬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낙일방은 기분 같아서는 그 승려에게 무어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솟구쳐 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러 삼켰다.
소림사에서는 절대로 말썽을 부리지 말라고 진산월이 몇 번이나 신신당부한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더구나 옆에는 자기보다도 훨씬 더 성격이 급하고 난폭한 응계성마저 있었다.
만약에 응계성이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낙일방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는지 정해가 눈치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해는 낙일방의 시선을 따라 방명록을 힐끗 내려다 보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잘 적었군. 일방, 어서 올라가자.”

그는 아직도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낙일방의 손을 슬며시 잡아 끌었다.
낙일방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해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따가운 시선 하나를 느끼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두 명의 남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남자는 이십 대 후반의 짙은 녹색 장삼을 입은 청년이었는데, 얼굴빛이 유난히 창백하여 시선을 끌었다.
녹삼(綠衫) 청년은 이마에 백색 두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고, 유달리 긴 두 팔은 뒷짐을 진 채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여인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자주색 저고리에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낙일방을 쳐다보며 입가에 한 줄기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해는 그녀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그녀가 어제 주루에서 잠깐 보았던 아미파의 여제자, 장옥연임을 알아본 것이다.
장옥연은 낙일방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킥킥거리더니 이내 녹삼 청년을 향해 나직하게 무어라고 소근거렸다.
그러자 녹삼 청년이 시선이 힐끗 낙일방을 향했다.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낙일방은 가슴 한 구석이 섬뜩해졌다.
녹삼 청년의 시선이 어찌나 날카로웠던지 자신의 내부가 송두리째 그의 눈에 드러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녹삼 청년의 시선은 이내 낙일방을 지나 정해를 거쳐 진산월 일행에게 향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그의 눈빛이 더욱 강렬하게 번뜩거렸다.
그의 시선이 칼날처럼 꽂힌 곳은 다름아닌 낙일방의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동중산의 얼굴이었다.
녹삼 청년은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 했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자리에 몸을 멈춘 채 잠시 생각에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시선은 줄곧 동중산에게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낙일방은 별다른 생각이 없이 그들을 지나쳤지만, 정해는 녹삼 청년의 시선이 계속 신경에 쓰였다.
미루어 짐작컨데 녹삼 청년은 동중산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정해는 혹시라도 용문에서 겪은 보물 쟁탈전이 다시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 졌으나, 녹삼 청년은 그저 그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 시비를 걸거나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옥연이 낙일방을 향해 금시라도 무언가 입을 열 듯한 기세였다.
하나 녹삼 청년은 그녀의 소매를 슬쩍 잡아 끌며 그녀를 제지했다.
장옥연은 다소 뾰로통한 표정이었으나 그의 제지를 받아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해는 걸음을 빨리 하여 저만큼 앞서 가고 있는 동중산의 뒤로 따라 붙으며 그에게 나직히 소근거렸다.

“저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동중산은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정해를 돌아보다 정해가 눈짓을 하자 슬쩍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다 녹삼 청년을 발견하고는 이내 안색이 굳어졌다.

“저 자가 누구요?”

동중산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더니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당수인(唐秀仁)입니다.”

“당수인? 당문칠영(唐門七英) 중의 그 당수인이란 말이오?”

정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동중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문칠영은 사천(四川)지방의 패주(覇主)로 군림하는 사천당문(四川唐門)에서도 손꼽히는 후기지수(後起之秀)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당문의 직계 후손들로 이루어진 당문오공자(唐門五公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무공실력과 재질이 강호의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은 젊은 인재들이었다.
사천당문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독(毒)과 암기술에 관한 한 절정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천하무림인들 중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실정이었다.
이 전통 있고 명망(名望) 있는 가문은 삼 백 년 동안 강호의 누구도 범접치 못할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들이 사마외도(邪魔外道)에 물들지 않고 정도(正道)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나 강호무림 전체에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들이 자칫 마도(魔道)에 빠져들었다면 많은 강호인들이 그들의 손에 비명횡사했을 것이고, 그들 또한 삼백 년간이나 가문의 전통을 이어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독과 암기술을 두려워한 강호인들이 진작에 그들의 가문을 멸(滅)해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강호에서 오랫동안 이름을 떨쳐온 가문은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들 중 어느 가문도 그 명성이 백 년 이상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강호인들의 특성상 어느 한 가문의 가세(家勢)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기 때문에 반드시 견제를 하게 되고, 그 결과 때아닌 혈겁(血劫)을 당하거나 가세가 이어지지 못하고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기 일쑤였다.
강호에서 백 년이 넘게 명성을 떨쳐온 가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흔히 십대세가(十大世家)니 팔대세가(八大世家)니 지칭하고 있지만, 그들 중 진정으로 구대문파에 견줄 수 있는 가문은 오직 사천당문뿐이었다.
하나 당금 무림에서 천하제일의 가문은 사천당문이 아니었다.
오십 년 전부터 새롭게 일어선 가문 하나가 천하제일세가(天下第一世家)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모용세가(慕容世家)!

달리 모용제일가(慕容第一家)라고도 불리웠다.
그들이 처음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오십 년 전이었지만, 그동안 그들이 쌓아놓은 업적은 가히 전설적인 것이었다.
강호의 최고고수를 꼽을 때 백도의 삼성구봉(三聖九峯), 흑도의 일령사마(一令四魔)를 거론하지만, 진정한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은 오직 모용세가에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구대문파가 강호에 우뚝 솟아 있지만, 모용세가는 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구봉상삼성(九峯上三聖),
사마복일령(四魔伏一令).
구파종횡진(九派縱橫盡),
모용제일가(慕容第一家).
아홉 개의 봉우리 위에 세 명의 성자가 있고,
네 명의 마두는 일령에 복종한다.
구파가 천하를 종횡하나,
진정한 강호제일은 오직 모용가 뿐.”

흔히 ‘강호제일가(江湖第一歌)’라 불리우며 당금 무림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이 노래는 모용세가의 위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하나 모용세가의 인물들은 강호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 그들을 직접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행적이 너무나 신비하고 명성이 지나치게 신격화(神格化)되어 있어서 실재가 아닌 신화(神話) 속의 존재인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에 비해 사천당문의 고수들은 비록 흔하지는 않지만 곧잘 강호의 크고 작은 일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때문에 강호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존재감은 사천당문이 훨씬 더 생생한 것이었다.
중인들은 녹삼 청년이 사천당문의 인물임을 알자 표정이 무거워졌다.
정해는 동중산을 향해 다시 물었다.

“저 자와 과거에 무슨 은원(恩怨)이라도 지은 적이 있소?”

동중산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건 없습니다. 단지…”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동중산에게 향했다.
동중산은 쓴웃음을 짓고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수인은 운문세가의 운자추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해는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동중산의 말을 듣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저 자가 당신을 뚫어지게 쳐다본 이유를 알겠구료. 결국은 저 자도 봉황금시를 노리고 있단 말이겠군.”

동중산은 표정이 굳어진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동중산이라도 자신 때문에 지금까지 적지 않은 시련을 당한 종남파 고수들이 다시 또 이곳 소림사에 와서까지 귀찮은 일에 휘말린다면 미안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그런 동중산의 마음이야 어쨌든 그때 진산월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우선은 숙소부터 정하고 앞으로의 일을 차근차근 의논해 보자.”

말을 하는 도중 그들은 소림사의 산문을 지나 지객당(知客堂) 근처에 도달하게 되었다.
소림사에서는 이번의 무림대집회를 위해서 상당히 많은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
산문에서 멀지 않은 지객당 뒤편의 넓은 후원에 제법 많은 선방(禪房)을 만들어 소림사에 찾아온 군웅(群雄)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선방은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에 의해 세워졌는지, 군웅들의 출신문파와 성격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여덟 군데로 나뉘어진 선방들은 각기 ‘천지현황우주홍황(天地玄黃宇宙洪荒)’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정해는 주위를 몇 차례 둘러보고서 선방들이 세워진 위치가 일종의 기이한 현기(玄機)를 띤 진(陣)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한 팔괘진(八卦陣) 같지는 않은데 무슨 진인지는 기문진식(奇門陣式)에 나름대로 정통한 정해로서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정해가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선방 앞에 서 있던 몇 명의 승려 중 한 사람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아미타불. 어서 오십시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승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합장을 한 후 그들을 안내했다.

“소승을 따라 오십시오.”

승려는 경쾌한 걸음으로 그들을 길게 늘어선 선방의 우측 방면으로 인도했다.
그곳은 정파(正派)의 고수들이 주로 기거하는 천방(天房)과 지방(地房)이 있는 방향이었다.
정해는 그가 자신들의 신분을 묻지도 않고 그곳으로 안내하는 것이 신기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희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승려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종남에서 오신 분들이 아니십니까?”

정해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명록에 두서없이 적은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에 대한 지시가 이미 내려진 모양이구나. 과연 소림은 대단하군.’

그는 승려의 뒤를 따라가다 아무리 보아도 그 승려의 행동거지나 모습이 비범해 보여서 다시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스님의 법호(法號)를 알 수 있겠습니까?”

“소승은 정각(丁覺)이라 하옵니다.”

그 말에 정해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정(丁)자배라면 소림의 이대제자(二代弟子) 신분이었다. 어느 문파건 이대제자라면 일대제자의 뒤를 이어 문파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법이었다. 더구나 소림사의 이대제자라면 여타 문파의 일대제자 못지않은 실력을 지닌 인재들인데, 이곳에서 군웅들의 안내를 맡고 있다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만 보아도 소림사에서 이번 집회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각이 중인들을 안내한 선방에는 <지방(地房) 팔십칠호(八十七號)>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이곳에는 모두 네 개의 방이 있습니다. 방이 조금 부족하겠지만 워낙 많은 분들이 본사에 오시는지라 장소의 여유가 많지 않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각이 정중하면서도 깎듯이 예의를 갖추자 진산월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아미타불. 소승에게 용무가 있으시면 대청의 한쪽 구석에 매달린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정각은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의 발걸음은 표홀하면서도 경쾌해서 그의 내외공(內外功)이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해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정도의 고수가 한낱 안내 일을 맡고 있다니… 소림사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구나.”

그들의 숙소로 정해진 지방 팔십칠호는 그리 넓지 않았으나 정갈하면서도 깔끔했다. 정각의 말대로 그 안에는 네 개의 방과 작은 대청이 있었다. 방들은 모두 대청에서 직접 들어갈 수 있어서 간편하면서도 효율적인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진산월은 장내를 한 바퀴 둘러본 후 각자의 방을 배정해 주었다.

“상대협과 상소저가 북쪽 방을 쓰시고, 사저가 그 옆 방을, 정해와 일방, 계성은 남쪽 방을 사용해라. 그리고 중산은 나와 한 방을 쓰면 되겠군.”

낙일방이 아쉬움을 토해냈다.

“에이. 내가 장문사형과 한 방을 쓰고 싶었는데…”

응계성이 대뜸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왜? 나와 한 방 쓰는 게 그렇게 싫으냐?”

“그게 아니라… 응사형은 코를 너무 심하게 곤단 말이에요.”

“뭐라고? 이 자식이… 그러는 너는 코를 안고는 줄 아느냐?”

“전 안 골아요.”

응계성이 바짝 약이 올라 막 화를 내려 할 때 정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는 코는 안 골지만 잠버릇이 고약해서 이불을 제대로 덮고 자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도 너하고 한 이불 쓰는 건 별로 원치 않는다.”

낙일방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원래 난 잠만 들면 더운 걸 못 참아요. 하지만 잠버릇 고약하기는 응사형이 더 심할 거예요.”

응계성의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했다.

“이 자식이 꼭 나를 걸고 넘어지려고 해? 너 정말 혼 좀 나 볼래?”

낙일방은 움찔하여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그들의 숙소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낙일방은 움찔 놀라 불쑥 물었다.

“누구요?”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를 보자 중인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들어온 사람은 짙은 남색 경장을 간편하게 차려입은 날씬한 미녀였다. 그녀는 다름 아닌 천봉팔선자 중의 남봉 엄쌍쌍이 아닌가?

엄쌍쌍은 중인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향해 있자 아름다운 얼굴에 한 줄기 홍조를 피워 올리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유난히 새하얀 얼굴에 그린 듯 고운 아미(蛾眉)를 지닌 그녀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모두들 때아닌 그녀의 출현에 놀란 듯 어리벙벙해 있었으나, 정해만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며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다시 뵙게 되니 반갑군요. 우리가 온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소림사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녀의 말은 소림사의 승려에게 부탁을 해서 그들이 도착한 것을 전해 들었다는 뜻이었으나, 정해는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그녀에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들이 채 여장(旅裝)을 풀기도 전에 그녀가 찾아올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녀에게 소식을 전한 사람은 소림사의 산문에 있는 승려들이거나, 그들을 숙소로 안내한 정각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소림사와 천봉궁은 의외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정해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상원건이 빙긋 웃으며 그녀를 향해 친근한 음성으로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시오?”

엄쌍쌍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소근거리듯 말했다.

“대협께서 치료해주신 덕분에… 지금은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엄쌍쌍은 일전에 신목령의 고수에게 혈라인(血羅印) 장력을 얻어맞고 빈사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진산월 일행에게 구원을 받았는데, 특히 상원건의 도움으로 상세를 치료받아 위급한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당시의 치료받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완전히 홍시처럼 붉어진 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듯한 모습이었으나, 다행히 노련한 상원건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낭자께서 오늘 이곳에 오신 건 단순히 인사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듯싶구료.”

“예. 사실은… 진장문인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여러분들이 소림사에 오시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인들은 뜻밖의 말에 그녀와 진산월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백봉 정소저의 전갈을 받으셨소?”

“예? 예…”

엄쌍쌍은 움찔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으나, 얼굴 한 구석에는 희미한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진산월이 단번에 자신의 목적을 알아차릴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큰 언니는 조만간에 진장문인을 뵈었으면 하십니다.”

“정소저도 소림사에 왔소?”

“아직 오시지는 않았습니다만, 조만간에 도착하실 겁니다.”

“그럼 이곳에는 낭자 혼자 왔소?”

엄쌍쌍은 진산월의 질문에 다소곳히 대답했다.

“셋째 언니와 막내가 함께 왔습니다.”

셋째와 막내라면 천봉팔선자 중의 영봉 금교교와 옥봉 누산산을 말한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정소저는 어떤 식으로 나를 만나려 하시오?”

“큰 언니께서 소림사에 도착하시면 따로 사람을 보내 진장문인을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언니께서는 진장문인 일행이 그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은밀히 강호에 소문이 퍼져 물건을 노리는 인물들이 적지 않으니 그들의 암습을 주의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한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야릇한 표정이 되었다. 엄쌍쌍의 말은 엄격히 말하면 일파의 장문인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것이었다. 백봉 정소소가 아무리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천봉팔선자의 맏이라 해도 일파의 장문인에게 사람을 시켜 오라가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안하무인격인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듯 당부의 말까지 전했으니 모욕도 이만저만한 모욕이 아닌 셈이었다.

엄쌍쌍은 중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아차하는 심정이 되어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무심코 백봉 정소소의 말을 그대로 전했으나, 그것이 진산월을 은근히 비하(卑下)하는 말이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 제 말은 그러니까 조심을 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그녀가 당황하여 더듬거리자 진산월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의 말을 명심해 두겠소. 정소저에게도 잘 알아들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시오.”

엄쌍쌍은 더욱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아리따운 얼굴을 홍시처럼 물들인 채 안절부절하다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몸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송구스러움과 죄송함이 마구 교차되는 얼굴로 중인들에게 몇 번이고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의 몸이 문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응계성이 참았던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도대체 그 여자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오라가라 하는 거야? 기껏 도와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사람을 보내서 장문사형을 부르겠다고? 자기들은 발이 없나?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 하는구나.”

정해가 그를 제지했다.

“응사형. 참으세요. 밖에 다 들리겠습니다.”

“들리면 어떠냐? 내가 틀린 말을 했느냐?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굽신거리니까 그 여자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거다.”

응계성이 더욱 언성을 높이려 할 때 진산월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소리 지르는 걸 보니 이제 몸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구나. 내일부터는 많은 일들이 벌어질 테니 오늘은 일찍 쉬자꾸나.”

응계성이 쌍심지를 돋우며 무어라고 한 마디 더 하려 했으나 진산월은 어느 새 휑하니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응계성은 입이 퉁퉁 부은 채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옆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낙일방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넌 뭐가 좋아서 웃고 있느냐? 그 여자만 보면 그렇게 신난단 말이지?”

“아이구… 응사형. 제발 그만 좀 하세요.”

“그만두긴. 어서 들어와. 있다가 잠자리에서 코만 골아봐라. 아주 숨도 못 쉬게 만들어버릴 테다.”

“어휴…”


중정지백수서아 (中庭地白樹棲鴉),
냉로무성습계화 (冷露無聲濕桂花).
금야월명인진망 (今夜月明人盡望),
부지추사재수가 (不知秋思在誰家)…

뜨락엔 흰 달빛, 나무엔 까마귀 둥지,
찬이슬 소리 없이 계수 꽃 적시네.
저 하늘 밝은 달이야 보는 이 많으련만
가을밤 그리운 마음은 누구에게 있을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진산월은 침상에 누운 채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소리 없이 스며드는 희미한 월광(月光)이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陰影)을 드리우고 있었다. 옆 침상에서는 동중산의 코고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리고 있었지만, 진산월은 멍하니 상념에 잠긴 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이 십삼일이니 보름도 이제 이틀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검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거의 만월(滿月)에 가까운 둥근 모습이었다. 진산월의 눈에 비친 둥근 달은 마치 사부인 임장홍의 웃는 얼굴 같았다.

‘사부… 제가 잘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임장홍은 그를 내려다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너는 잘할 수 있을 거다. 너 자신을 믿어라.’

이제 이틀 후면 이곳 소림사에서 무림사상 초유의 대집회가 열리게 된다. 그 대집회는 종남파로서는 절호의 기회인 동시에 위기였다. 그 기회를 잘 살린다면 종남파는 다시 한 번 도약하여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진산월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나빠도 지금보다 나빠지지는 않겠지. 지금은 더 떨어질 곳도 없으니 말이야.’

종남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그리 길지 않은 동안에 그는 강호(江湖)란 곳이 얼마나 철저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인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사소한 일 하나에서 커다란 안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강한 자의 편의 위주로 결정되었다. 똑같은 일을 해도 강호에서 얼마나 명성이 나 있느냐에 따라 그 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가 일쑤였다. 지금의 종남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흥 방파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무림인들의 인식을 깨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여정에서 진산월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생각을 거듭하여 몇 번의 격전을 잘 이끌어 왔다. 운문세가와의 첫 격돌이나 용문에서의 혈투(血鬪), 그리고 형산파와의 시비 등 거듭된 격전을 종남파는 용케도 잘 헤쳐왔다. 하나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상당 부분 운(運)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진산월은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신목칠호 심옥당과의 결전에서도 기병(奇兵)의 묘(妙)를 살려 득수했지만, 조금만 더 싸웠다면 오히려 낭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운문세가의 대공자인 운자추와의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운자추가 아무렇게나 던진 옥패조차 그는 사력을 다해 간신히 받아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의 절대적인 내공 열세 때문이었다. 많지 않은 싸움에서 진산월은 내공(內功)의 부족을 몇 번이고 절감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운 좋게도 부족한 내공으로 용케도 패하지 않고 버텨왔지만 앞으로도 과연 계속 운이 좋을 수 있을 것인가? 진산월은 운(運)이라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 편이었다. 운이란 좋을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나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면 앞으로 언젠가는 운 나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 자신은 과연 종남파의 위신을 잃지 않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진산월이 잠을 못 이루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부족한 내공을 당장 보충시키는 방법은 없다. 내공이란 꾸준한 수련의 과정을 통해서만 향상되는 법이었다. 물론 절세의 영약(靈藥)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하늘의 연(緣)이 닿지 않는 한 그런 영약은 쉽게 구할 수 없을 뿐더러, 설사 천우신조로 구할 수 있다 해도 절정(絶頂)의 공력(功力)을 지닌 절세고수가 진원지기(眞元之氣)를 다스려주지 않으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낼 수 없는 법이다. 결국 지금의 진산월이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진산월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을 때였다.

스슥!

갑자기 지붕 위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진산월은 무의식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은 삼경이 가까워오는 한밤중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천하무림의 본산(本山)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의 경내(境內)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시각에 야행인(夜行人)이 있다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이상한 일은 지붕 위를 스쳐 지나갈 듯하던 야행인의 발걸음이 멈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야행인이 지금 진산월이 누워 있는 거처의 지붕 위에 서 있다는 뜻이었다.

진산월은 슬쩍 옆 침상에 누워 있는 동중산을 쳐다보았다. 동중산도 어느 새 자리에서 일어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강호에서 비천호리라는 별호로 알려진 동중산인 만큼 자고 있으면서도 주위의 작은 인기척도 놓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휘이…

마치 나뭇잎 사이를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음향이 들려왔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상 밑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창문 밖에서 대여섯 줄기의 섬광이 백선(白線)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파파팍!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산월과 동중산이 누워 있었던 침상 위에 여섯 개의 비도(飛刀)가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그 비도는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 했는데, 특이하게도 도신(刀身) 한 복판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고, 손잡이에 꽃 모양의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얼핏 보기에는 마치 여인들의 노리개 같았다.

하나 침상 밑에서 일어나 그 비도를 발견한 동중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진산월은 그에게 턱짓을 하고는 소리 없이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동중산도 창문가로 가서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한데 그의 머리가 채 창문을 반도 나오기 전에 다시 귓전으로 휘파람 소리 같은 음향이 들려왔다. 동중산은 움찔 놀라 황급히 목을 움츠렸다.

파앗!

그의 머리카락 몇 올이 우수수 잘려지며 한 개의 백광(白光)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 위를 스쳐 방바닥에 내리꽂혔다. 동중산은 모골이 송연한지 창문 옆에 바짝 붙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진산월은 그에게 가만 있으라고 눈짓을 하고는 슬쩍 방문을 열었다.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어둠에 잠긴 대청이 살짝 드러났다. 대청 밖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한동안 방문 앞에 비스듬히 선 채 어둠에 잠긴 대청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대청 안은 여전히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진산월은 대청을 가로질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월광(月光)이 너무 밝아서 주위가 마치 수백 개의 등불을 켜놓은 것처럼 환했다. 주위는 고적했고,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신형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소림사의 모습은 한적하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방을 몇 번이나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이어져 있는 객방(客房)들뿐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그때까지도 창문은 반쯤 열린 채였고, 동중산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방의 창문 밑에 몸을 도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별수 없이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방이 텅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 동중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이 밖에 나갔다 온 그 짧은 순간에 동중산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건 혈응비(血凝匕)로군.”

상원건은 침상 위에 꽂혀 있는 비도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단정 짓듯 말했다. 진산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응비? 특이한 이름이로군요.”

상원건은 비도의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날이 너무 날카로워서 한 방울의 피밖에는 흘러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오.”

아닌 게 아니라 상원건의 손에 들려 있는 비도의 날은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도광(刀光)을 뿌려대고 있었다.

“누구의 병기인지 아시겠습니까?”

“강호에서 혈응비를 사용하는 곳은 오직 한 군데뿐이오.”

그 해답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천당문이로군요.”

상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응비는 당문의 십이대암기(十二大暗器) 중 하나요. 따라서 동중산을 데려간 인물은 사천당문의 인물이 분명하오.”

진산월은 잠시 침음했다. 동중산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후에 그는 상원건만을 조용히 불렀다. 다른 사람들을 깨우지 않은 것은 지금이 깊은 밤중이라 쓸데없이 그들을 경동(驚動)시켜 피곤하게 잠에 빠져 있는 그들을 깨우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상원건은 강호 경험이 풍부하여 동중산의 실종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특별히 그의 거처에 가서 그를 데리고 온 것이다.

상원건은 진산월의 기대대로 단번에 창문 밖에서 날아온 비도의 정체를 알아냈다. 상황은 얼핏 보기에 간단명료한 것 같았다. 암습자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어 진산월을 경각시킨 다음 비도를 날려 그를 밖으로 유인해낸 후, 혼자 방안에 있던 동중산을 제압하여 그를 끌고 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상원건의 말대로라면 그 암습자는 사천당문의 인물이며, 오늘 산문 입구에서 보았던 당수인일 확률이 높았다.

하나 진산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수인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짧은 순간에 기척도 없이 동중산을 제압하고 사라질 수 있을까요?”

상원건은 눈을 번쩍 빛내며 물었다.

“진장문인의 말씀은 무슨 뜻이오?”

“제가 밖에 나갔다 들어온 시간은 굉장히 짧습니다. 그때 동중산은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절정의 무공을 지닌 인물이라 해도 쉽게 제압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더구나 그때 그는 창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암습자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오기도 수월치 않았을 겁니다.”

상원건은 진산월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진장문인의 생각은 어떤 거요?”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동중산이 스스로 창문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상원건은 흠칫 놀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라도 있소?”

“두 가지입니다. 우선 첫째로 암습자가 정말로 당수인이었다면 처음부터 혈응비를 던져 우리에게 쉽게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혈응비가 그토록 유명한 물건이라면 암습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다른 암기를 사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암습자는 보란 듯이 혈응비를 바닥에 남겨 놓았습니다. 이건 곧 자신을 사천당문의 인물로 보아달라는 암중의 신호입니다.”

상원건은 진산월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진산월은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둘째로 동중산은 침상에서 너무 빨리 일어났습니다.”

상원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림의 고수라면 그 정도 반응은 당연한 것인데 그게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동중산은 그 전부터 코를 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거의 같은 시각에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의 내공(內功)이 저보다 월등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잠이 들었던 것이 아니라 잠든 척하면서 사실은 밖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요.”

상원건은 그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저에게 자신이 납치되었다고 믿게끔 하려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가 밖으로 나갔다면 진장문인의 눈에 띄었지 않았겠소?”

“암습자는 제가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방에서 저의 행동을 살피다가 제가 다시 대청으로 들어설 때 동중산과 함께 창문 밖으로 나간 것이 분명합니다.”

진산월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차분히 설명해 나갔다.

“아마 동중산도 처음에는 암습자가 당수인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가 혈응비를 보고 표정이 변한 건 그 때문이었죠. 하나 제가 밖으로 나간 후 그는 암습자가 당수인이 아니라 자기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겠죠. 그래서 그는 상대가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았던 겁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당초 계획대로 내 눈을 피해 함께 밖으로 사라진 겁니다.”

상원건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급히 물었다.

“혈응비를 날리고 동중산과 함께 사라진 사람이 당수인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이오?”

“동중산은 낮에 당수인을 본 후로는 굉장히 불안한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녁 때는 평온을 되찾아서 오히려 남들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당수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죠.”

“……”

“동중산으로 하여금 당수인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를 스스로 따라오게 할 수 있는 곳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동중산이 접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 뿐이죠.”

“그게 어디요?”

진산월은 짤막하게 말했다.

“천봉궁.”

상원건의 얼굴에 한 줄기 경악어린 빛이 떠올랐다.

“지… 진장문인의 말은 그러니까…”

“오늘 오후에 엄쌍쌍은 단순한 안부를 묻기 위해 온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때 동중산에게 오늘 밤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했을 겁니다. 동중산은 천봉팔선자에게 몸을 의탁하면 아무리 당수인이라 해도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순순히 그녀를 따라간 것일테구요.”

상원건은 강호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마음 속의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왜 그런 짓을…”

“우리에게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동중산과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엄쌍쌍 뿐이니 그녀들로서도 다른 길이 없었겠죠.”

상원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녀는 정말 착하고 고운 여자처럼 보였는데…”

“엄쌍쌍은 틀림없이 심성이 고운 여자일테지만 그런 만큼 다른 사람의 지시를 거역하지 못할 겁니다. 그녀가 안절부절하며 급히 자리를 뜬 것도 단순히 계면쩍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그곳에서 계속 우리들 얼굴을 대하고 있기가 미안해서 였을 겁니다.”

상원건은 우두커니 진산월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무거운 탄식을 토해냈다.

“정말 인심막측(人心莫測)이라고 하더니… 그렇다면 물건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한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로 의심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구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이 왜 동중산을 빼돌리려 한거요?”

“그녀들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봉황금시를 회수할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그것을 요구할 명분도 없고, 그랬다가는 남들의 주목을 받게 되니 이런 식으로 편법을 쓴 걸 겁니다.”

상원건은 알겠다는 듯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얼굴에 쓴웃음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모든 짐을 종남파에 지우고 자신들만 살짝 빠져나가겠다는 심보로군. 이건 정말 괘씸한 일이 아니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우리 입장에서야 그렇지만 그녀들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겠지요.”

상원건은 천봉팔선자의 소행에 불쑥 의분이 치밀어 오르다가 진산월의 천연덕스러운 말을 듣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이 자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남에게 이런 꼴을 당하고도 화가 나지 않는단 말인가?’

하나 그가 지금 진산월의 속마음을 어떻게 짐작하겠는가? 상원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그럼 진장문인은 이제 어떻게 할거요?”

진산월은 한동안 우두커니 선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운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동중산이 비록 제발로 그녀들을 따라 갔다 할지라도 아직은 본파의 제자입니다. 그러니 장문인으로서 당연히 문파의 제자를 되찾아 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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