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7화
제28장. 집회전야(集會前夜)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진산월은 대청의 한쪽 구석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정각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승을 찾으셨습니까?”
진산월은 조용히 웃으며 포권을 했다.
“너무 이른 아침에 실례를 범한게 아닌가 모르겠군요.”
“실례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소승은 원래 새벽 잠이 없어서 아침 일찍 기상한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몇 가지 여쭈어 볼 것이 있어서 스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집회 날짜가 내일인데, 집회가 개최되는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미타불, 집회는 내일 사시(巳時)에 오유봉의 초조암(初祖庵) 앞에서 벌어질 예정입니다. 지금 그곳에 집회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으니 내일 시간에 맞춰 그곳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진산월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오늘까지 이곳에 오신 분은 얼마나 됩니까?”
정각은 진산월이 왜 이런 것을 물어보는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소승이 알기로는 현재까지 본사에 찾아오신 분은 대략 구백 여명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오시는 분들까지 합치면 집회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천 여명쯤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천 명이라면 얼핏 생각할 때는 별로 대단할게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말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강호 무림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림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이번 집회가 무림 역사상 최고의 대성회(大盛會)라는 소문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 많은 사람들이 운집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을텐데요.”
정각의 단정한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히 본사에는 그런 일에 재주가 많은 분이 계셔서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분의 명호를 알 수 있을까요?”
정각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대각(大覺)이라 하십니다. 제게는 사숙이 되시는 분이지요.”
진산월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오! 제가 듣기로는 소림사에 좀처럼 보기 힘든 기승(奇僧)이 있어, 그 학식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재주가 하늘도 희롱할 정도로 놀라워서 농천승(弄天僧)이라 불리우고 있다고 하던데… 혹시 그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분이 바로 대각사숙이십니다.”
대자(大字) 배(輩)라면 소림사의 일대제자 신분이었다. 소림사에 일대제자는 모두 스물 아홉 명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도 특히 팔대신승(八大神僧)이라 불리우는 여덟 명의 제자들이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각은 그 팔대신승 중 한 사람으로, 박학다식하고 재주가 많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진산월은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럼 혹시 이곳 숙소의 배치도…”
“예. 그렇습니다. 이 팔대객방의 구조와 설치는 모두 그 분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천 여명이 기거할 수 있는 객방을 만든다는 것은 기관진식과 토목설계에 관한 뛰어난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번 소림사의 후원에 설치된 객방들은 그 구조와 배치가 정교하면서도 효율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감탄과 찬사를 받고 있었다.
“과연 대단하군요. 어쩐지 객방들의 배치가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팔대객방의 배치는 대각사숙께서 특별히 고안하신 천문연환팔괘진(天門連環八卦陣)의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객방 상호간에 쓸데없는 간섭을 피하고 외부인의 침입을 억제하는데 제법 효과가 있습니다.”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던 정각의 얼굴에 미미하게나마 자신에 찬 미소가 떠오른 것으로 보아 정각이 말과는 달리 천문연환팔괘진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렇다면 객방을 제멋대로 옮겨 다니거나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일은 쉽지 않겠군요?”
“물론입니다. 저희의 안내를 받지 않고 함부로 돌아다녔다가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할 겁니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찾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일일이 스님께 신세를 질 수도 없고…”
“찾으시는 분이 계시면 명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소승이 알아보고 계시는 곳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너무 신세를 끼치게 되는군요. 제가 찾으려는 사람은 운자추라고 합니다.”
정각의 눈에서 한 줄기 신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시는 분은 혹시 운문세가의 소가주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그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아미타불. 그 분이 이곳에 오셨는지를 확인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
“당장 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중으로만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각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 분께 무어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물건에 대한 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십시오.”
“물건이라면…”
“그렇게만 전하시면 그가 알아들을 겁니다.”
정각은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뒤돌아 나가는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천장을 응시하며 소리없이 웃었다.
‘이제 미끼는 던졌으니 고기가 물기만을 기다려야겠군.’
그때 갑자기 굵직한 음성과 함께 한 사람이 대청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이곳에 있었구나. 한참을 찾았다.”
진산월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니 문의 입구에는 어느 새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체구가 우람하고 얼굴에는 수염이 가득한 오십 대의 건장한 중늙은이였다. 전신에는 붉은 색이 짙게 들어간 홍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위맹하게 생긴 그의 얼굴과 무척 잘 어울려 보였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서는 연신 번뜩이는 광망이 뿜어나와 마음이 약한 사람은 눈빛만 보아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를 보자 진산월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급히 홍포노인의 앞으로 다가가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뇌대협(雷大俠) 아니십니까?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홍포 노인은 진산월을 보자 홍소(哄笑)를 터뜨렸다.
“우하하… 용케도 아직 노부를 잊지 않은 모양이구나?”
“제가 뇌대협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홍포노인은 웃다 말고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이곳에 오자마자 노부를 찾았어야 할게 아니냐?”
진산월의 얼굴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어제 늦게 도착하여 미처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해하십시오.”
홍포노인은 태평검객 임장홍의 몇 되지 않은 친구 중 한 사람으로, 진산수(震山手) 뇌일봉(雷一峯)이라 했다.
살아 생전에 임장홍은 조용한 성품답게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안탕산(雁蕩山)의 괴걸(怪傑)인 팔비신살(八臂神煞) 곽자령(郭紫靈)과 뇌일봉 만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였다.
뇌일봉은 진산수라는 별호답게 양 손의 공력이 절륜하고 내공이 뛰어난 인물로, 성격이 직선적이고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호쾌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와 임장홍은 성격이 정 반대여서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으나, 의외로 서로 통하는 것이 많았다.
나이는 임장홍이 두 살 더 많았으며, 무공실력이나 강호에서의 명성은 당연히 뇌일봉이 더 뛰어났다.
뇌일봉은 임장홍이 살아 있을 때는 일 년에 한 두 번씩 종남산을 찾아왔으나, 임장홍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거의 발길을 끊고 있었다.
그런 뇌일봉이 소림사에서 제일 먼저 진산월을 찾아온 것은 다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뇌일봉은 자리에 앉자마자 임영옥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옥아(玉兒)는 어디 있느냐?”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불러오지요.”
뇌일봉은 손을 내저었다.
“일부러 깨울 것 없다. 그보다…”
돌연 뇌일봉은 정색을 하며 진산월을 향해 물었다.
“듣자하니 너희들이 종남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군데에서 말썽을 일으킨 모양이더구나. 소문으로는 운문세가의 고수들과 충돌이 있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진산월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뇌일봉은 질책어린 시선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네가 종남파를 맡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운문세가 같은 곳과 시비를 일으키느냐? 그런 강적은 되도록 만들지 않는 것이 종남파의 앞길에 더욱 이롭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
“운문세가는 하남성 일대에서는 누구도 무시 못할 세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과 충돌을 일으켜서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가뜩이나 초가보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서 어려운 형편에 운문세가 마저 등을 돌린다면 나중에 뒷수습을 어찌 하려느냐?”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추궁어린 말을 듣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해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저는 크게 염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뇌일봉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염려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강호에서 활동하면서 적이 생기고 동지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의 적에 다른 적이 추가되었다고 해서 크게 두려워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뇌일봉은 진산월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거친 콧숨을 내쉬었다.
“흐으… 말은 그럴 듯하다만 막상 일이 닥치면 그렇게 한가한 소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법이다. 강호에 출도하자마자 제일 처음 한 일이 강적을 만드는 일이라면 너무 무모한 일이 아니냐?”
“그때의 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강호에서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고 뇌대협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뇌일봉은 화광이 이글거리는 듯한 눈으로 진산월을 노려보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커다란 손을 내저었다.
“그만 두자.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네 놈은 뱃속에 보살(菩薩)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사람 속을 터지게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리다가 된통 당한 다음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진산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잘 알겠습니다.”
마침 그때 자신의 방에서 대청 밖으로 나오던 임영옥이 뇌일봉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고 다가왔다.
“아! 뇌숙부님.”
뇌일봉은 언제 얼굴을 찌푸렸느냐는 듯 활짝 웃으며 그녀를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하하… 안 본 사이에 더욱 예뻐졌구나. 그동안 별 일 없었느냐?”
임영옥은 그의 두 손을 잡은 채 반가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덕분에 무사합니다. 뇌숙부께서는 언제 오셨습니까?”
뇌일봉은 그녀만 봐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며칠 되었다. 이곳에서 너희들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지. 다른 녀석들도 왔느냐?”
“정사제와 응사제, 그리고 낙사제가 왔습니다.”
“일방, 그 꼬마 녀석도 왔단 말이지? 그런데 그 녀석은 왜 이 어르신이 왔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뇌일봉의 음성은 대청을 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우렁찬 것이었다.
그 음성을 들었는지 문이 열리며 낙일방의 모습이 나타났다.
낙일방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뇌일봉을 발견하자 눈을 크게 떴다.
“어? 언제 오셨어요?”
“뭐라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어서 냉큼 와서 절을 하지 못할까?”
낙일방은 찔끔하고 놀라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하나 그가 채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기도 전에 뇌일봉이 재빨리 일어나며 그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치는 것이었다.
“이 녀석, 그동안 제법 컸다고 노부를 우습게 본단 말이냐?”
딱!
“아앗! 제발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
낙일방이 우거지상을 지으며 머리통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뇌일봉은 껄껄 웃으며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하하… 네 놈 머리통은 예나 지금이나 물러터졌구나. 지금까지 그렇게 많이 맞고도 아직도 여물지 않았으니 정말 걱정이 된다.”
낙일방은 기겁을 하고 잽싸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방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뇌일봉은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지 우렁찬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녀석.”
원래 뇌일봉은 종남파의 제자들 중에서도 유독 낙일방에게 관심이 많았다.
뇌일봉은 낙일방의 얼굴이 준수하고 순진할 뿐 아니라 성격이 급한 게 꼭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고 했지만, 그가 낙일방을 볼 때마다 알밤을 먹이는 통에 낙일방은 멀리서 뇌일봉의 모습만 보아도 도망치기 바빴다.
지금도 낙일방을 모처럼 본 뇌일봉은 낙일방이 미처 꽁무니를 빼기도 전에 그의 머리통에 큼지막한 혹을 만들어 놓고는 득의만면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임영옥은 모처럼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고 있었고, 진산월도 그녀와 나란히 서서 이 광경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조심스레 떠오르고 있었다.
‘뇌일봉이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 정말 단순히 우리를 걱정하기 때문이었을까?’
정오 무렵, 진산월 일행은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숙소를 벗어났다.
그들이 있는 지방(地房)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은 중앙의 넓은 통로뿐이었다.
진산월이 문득 생각난 듯 뇌일봉을 돌아보며 물었다.
“뇌대협께서는 어디에 묶고 계십니까?”
뇌일봉은 낙일방을 붙잡고 한창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부는 현방(玄房)인가 하는 곳에 있다. 번호가… 그러니까… 이백팔십칠 호던가 팔 호던가…
아무튼 정명(丁明)이라는 땡중이 그쪽의 안내를 책임지고 있으니 그 녀석에게 물어보면 된다.”
“이곳은 지리가 무척 복잡한데 용케도 저희가 있는 곳을 찾아오셨군요.”
“며칠 전부터 정명이란 땡중에게 부탁을 해 뒀지. 종남파 사람들이 도착하면 바로 알려달라고.
어제 밤에 정명이 와서는 너희들이 지방에 묶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아침에 눈뜨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거지.”
그때 그들의 맞은 편에서 한 명의 백의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진산월 일행은 무심코 그를 지나치려는데, 그때 백의인이 진산월의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정중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왔다.
“혹시 종남파의 진장문인 아니십니까?”
진산월이 보니 백의인은 삼십 대 초반의 단정한 용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하나 아무리 살펴 보아도 진산월이 처음 만나는 얼굴이었다.
“그렇소만 누구신지….”
백의인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저는 주인님의 심부름으로 진장문인을 뵈러 왔습니다.”
“귀하의 주인이 누구요?”
“이걸 보면 아실 겁니다.”
백의인은 한 손을 품속으로 집어 넣었다.
낙일방과 정해가 바짝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행동을 주시했으나, 다시 빠져나온 백의인의
손에 한 통의 편지가 들려 있는 것을 보고는 표정이 풀어졌다.
백의인은 두 손으로 편지를 진산월에게 내밀었다.
“받아보십시오.”
진산월은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 편지를 받으려 했다.
그때 갑자기 뇌일봉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조심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의인이 내민 편지 밑에서 돌연 날카로운 섬광이 진산월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팟!
그것은 너무도 돌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중인들은 놀란 외침도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다.
진산월의 몸이 한 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한 줄기 백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장문사형…”
낙일방은 그가 암습에 격중된 줄 알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다 진산월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산월은 편지를 받으려고 손을 내민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으로 내밀어진 그의 손에는 편지가 봉투 째 쥐어져 있었고, 전신의 어디에도 상처나
부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뇌일봉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 답게 진산월의 옷깃이 한 치쯤 잘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낙일방은 황급히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무사하셨군요.”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조금 전만 해도 진산월의 앞에 서 있던
백의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놈이 누구인데 감히 암습을….”
낙일방이 이를 갈아붙이며 사방을 둘러볼 때 멀리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이번의 것은 정중한 경고요. 다음에 만날 때는 내 탈수비검(脫手飛劍)이 지금처럼
옷깃만을 노리지는 않을 거요.”
그 음성은 벌써 십 여장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조금 전에 백의인이 일부러 진산월의 옷깃을 향해 비검을 던졌다는
것을 깨닫고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의 암습은 워낙 빠르고 갑작스러워서 그것이 진산월의 목을 노렸다면 자칫 치명적인
상황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상대가 일부러 진산월의 옷깃을 노린 것은 그만큼 자신의 솜씨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를테면 언제라도 진산월의 목을 격중시킬 수 있다는 무언의 과시인 셈이었다.
“대체 저 놈이 누구길래 저런 짓을 한 걸까요?”
낙일방이 중인들의 마음 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르고 있는 의문을 던졌다.
백의인의 솜씨로 보아 그는 결코 무명지배(無名之輩)가 아니었다.
비검을 날리는 실력과 느닷없이 사라진 신법(身法)은 가히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에 말한대로 누군가의 수하라면, 저런 고수를 수하로 거느리고 있는 그 주인이란
사람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 아닌가?
하나 진산월은 별로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옷깃을 힐끗 내려보고 있다가 나직이
혀를 찼다.
“쯧. 몇 번 입지도 않은 옷인데 아깝게 됐군.”
뇌일봉이 어이가 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느냐?”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요.”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진산월은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쥐어져 있는 편지를 슬쩍 쓰다듬었다.
“우선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겠지요. 그러니 이걸 먼저 읽어보는게 순서일 겁니다.”
진산월은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질 좋은 하얀 색의 편지 안에는 단정한 몇 마디의 글이 씌어져 있었다.
<오늘 밤 일경(一更). 소실봉 북쪽 봉우리 영취암(靈鷲岩) 아래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싶소. 운자추.>
월광천추(月光千秋).
달빛은 천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교교(皎皎)한 달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니 마치 흰 서리가 내린 것 같았다.
그래서 옛날 시인들은 달빛 아래에서는 서리가 내려도 내리는 줄 모르고,
흰 모래를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고 노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실봉의 뒤쪽 봉우리는 유난히 기암괴석들이 많이 솟아 있었다.
이곳은 오유봉과는 반대쪽이며, 소실봉의 입구인 소실궐(少室闕)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어
평소에는 거의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짙은 달빛에 비친 각양각색의 바위들은 흡사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거인들처럼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모습은 왠지 을씨년스러우면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야릇하게 자극하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었다.
그 북쪽 봉우리의 중간 쯤에 특이한 형상의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 바위는 높이가 오 장여쯤 되고 폭은 삼장 쯤 되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뾰쪽하고 아래는 넓직했다.
그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 마치 한 마리의 사나운 독수리가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영취암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특히 지금처럼 월광이 진하게 드리울 때면 바닥에 비치는 영취암의 그림자가 영락없이
독수리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진산월은 그 독수리 그림자의 머리 부분을 밟으며 영취암의 그늘 아래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간혹 이따금씩 울어대는 밤새의 울음소리만이 한 밤의 정적(靜寂)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영취암이 워낙 커서인지 달빛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무척 넓었다.
그 짙은 그늘 속으로 들어가자 사방이 온통 암흑에 잠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늘 한 가운데 돛자리가 펼쳐져 있었고, 돛자리 위에는 작은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눈부신 백의를 입고 머리에는 영웅건을 두른 준수한 청년이었다.
백의 청년은 손에 비취로 만든 술잔을 들고 술잔 속의 향기를 음미하다가 천천히 술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 진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는 듯한 주향(酒香)이 퍼져나왔다.
탁!
백의 청년은 술잔을 비운 다음 진산월은 쳐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리 와서 한 잔 하시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앞으로 가서 앉았다. 백의 청년은 그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것은 본가에서 빚은 일존향(一尊香)이라는 것인데, 제법 마실 만하오.”
진산월은 술잔을 들고 향기를 맡아 보았다. 콧속 깊숙이 스며드는 진한 주향은 달콤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이었다. 진산월은 단숨에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하다가 눈을 번쩍 뜨며 짤막하게 말했다.
“좋은 술이로군.”
백의 청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술맛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안주는 간단한 산채(山菜)요리 뿐인데 괜찮겠소?”
“원래 좋은 술일수록 안주는 간단한 것이 더 어울리는 법이오.”
이번에는 진산월이 백의 청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잠시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이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별로 크지 않은 술병은 금새 동이 나 버렸다. 밝은 달빛 속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 아래에서 달콤한 주향이 가득한 술잔을 들이키는 기분은 나름대로 정취가 있는 것이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함께 술을 마시는 상대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니라는 것 뿐이었다. 백의 청년은 물론 운문세가의 대공자인 운자추였다. 운자추는 오늘 따라 허리에 금색 허리띠를 두르고, 양쪽 소맷자락이 유난히 넓은 옷을 입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별빛처럼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와 새하얀 치아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운자추는 이빨을 살짝 드러내고 웃으며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 마음이 변한거요?”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마음이 변한 건 아니오. 단지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오.”
“상황이 달라지다니?”
“동중산이 사라졌소.”
운자추는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다시 빙긋 웃었다.
“그 말을 내가 믿으리라 생각하오?”
진산월은 솔직하게 말했다.
“아니오.”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거요?”
“그게 사실이니까.”
운자추는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후에 그는 알 듯 모를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군. 당신은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훨씬 멍청한 사람이오.”
“그럼 틀림없이 멍청한 쪽일거요. 내가 똑똑했다면 동중산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테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그런데…”
운자추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은 혹시 동중산이 나에게로 왔다고 생각하고 있소?”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게 사실이오?”
“물론 아니오.”
“당신은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소?”
운자추의 눈에 한 줄기 예리한 광채가 번뜩였다.
“말장난은 그만 합시다. 동중산이 어디로 사라졌든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소.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봉황금시 뿐이오.”
“그건 동중산이 가지고 있소.”
운자추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지만, 조금 전과 같은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당신의 농담을 듣고 싶지 않소.”
“그렇소? 그럼 나는 이만 작별을 고하고 가야겠군.”
진산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은 잘 마셨소. 다음에는 내가 한 잔 대접하겠소.”
진산월이 채 한 발자국도 떼기 전에 그의 눈앞에 백영이 어른거리더니 하나의 인영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진산월은 한 눈에 그 인영이 낮에 보았던 백의인임을 알아보았다. 백의인은 양 손을 소매속에 집어 넣은 채 진산월을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아직 주인님의 말씀이 끝나지 않았소.”
그는 비록 웃고 있었지만, 말 속에는 섬뜩한 무언가가 담겨져 있었다. 그와 함께 진산월은 한 가닥 싸늘한 기운이 자신의 전신으로 조여 들어오는 것을 깨달았다. 금시라도 소맷자락 속에 들어가 있는 그의 두 손이 뽑혀져 나오며 예의 그 무시무시한 비검이 발출될 것만 같았다. 그때 운자추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담영(曇永). 진장문인께 무례를 범하지 마라.”
그 음성을 듣자 백의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단순히 한 걸음 물러났을 뿐인데도, 진산월은 조금 전까지 자신을 무섭게 압박해 오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백의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이 일발견혈(一發見血) 진담영(秦曇永)이오?”
백의인의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얼굴에 떠올라 있는 차가운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소.”
진산월은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진담영은 한 자루 암기로 오랫동안 강북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일단 손을 쓰면 반드시 피를 본다고 하여 붙여진 별호가 일발견혈이었다. 강호에서 암기로 이름을 날린 고수들은 많이 있었지만, 진담영은 그들 중에서도 수법이 잔인하고 손속이 악독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무서운 고수가 스스로 운자추의 종복임을 자처하고 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운자추는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나를 불러내놓고 그냥 가버린다면 너무 우스운 일 아니오?”
진산월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물건을 내놓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게 아니오. 단지…”
“단지 무엇이오?”
“단지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오.”
운자추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누가 그걸 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진산월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다.”
그와 함께 영취암의 꼭대기에서 두 개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두 인영 중 하나는 진담영에게로 날아갔고, 다른 한 인영은 운자추의 머리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꽈르릉!
운자추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인영이 두 주먹을 질풍처럼 휘두르자 마치 우레가 이는 듯한 음향과 함께 막강한 경풍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가히 하늘에서 수십 개의 거대한 뇌전(雷電)이 바닥에 내리꽂히는 듯한 광경이었다.
“벽력신권(霹靂神拳)?”
운자추의 입에서 짤막한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진담영에게로 날아가던 인영도 양 손을 활짝 폈다. 그러자 돌연 허공에서 커다란 그물망이 펼쳐지며 진담영의 전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물망에는 작은 쇠침들이 빽빽이 달려 있어 일단 그물망에 걸려들기만 하면 제아무리 천부의 신력(神力)을 지닌 역사(力士)라 해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것은 나찰망(羅刹網)이라는 것으로, 신축(伸縮)이 자유롭고 수발(收發)이 간편한 반면 능숙하게 익히기가 어렵고 재질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강호무림에서는 별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지금 진담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나찰망의 방위와 속도는 가히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진담영은 소맷자락 속에 끼었던 두 손을 빠르게 뽑았다.
다음 순간,
쐐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그의 양 손에서 네 줄기의 빛살 같은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 광채는 눈깜짝할 새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나찰망에 격중되었다.
따땅!
그런데 의당 나찰망을 뚫고 나갈 줄 알았던 광채들은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힘을 잃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진담영의 안색이 처음으로 약간 변했다.
“견혼사(牽魂絲)로 만든 나찰망이라면… 너는 금혼수라(禁魂修羅) 제력(齊歷)이구나!”
그는 버럭 호통을 내지르며 다시 양 손을 세차게 뿌려댔다.
파팍!
그의 손에서 다시 두 줄기의 백광(白光)이 뿜어나왔다. 이번의 백광은 처음의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나 그 백광이 나찰망과 부딪치는 순간, 나찰망이 힘을 잃고 그대로 끊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쇄혼비(碎魂匕)…”
나찰망을 던진 인영의 입에서 탄성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담영이 던진 것은 금옥(金玉)을 두부처럼 자른다는 절세의 신병(神兵)이었던 것이다.
나찰망을 뚫고 나간 쇄혼비는 무서운 속도로 금혼수라 제력을 향해 쏘아져가고 있었다. 제력은 다급한 표정으로 허공에서 이선비응(二旋飛鷹)의 식으로 두 번 연거푸 몸을 회전시켰다.
파앗!
“음…!”
쇄혼비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가며, 그의 신형이 한 차례 휘청거리다가 바닥으로 내려섰다. 제력의 얼굴은 약간 창백해진 채 한 줄기 낭패스런 빛이 떠올라 있었다.
견혼사로 만든 나찰망 만을 믿고 무작정 진담영을 덮쳐오다 하마터면 쇄혼비에 목덜미를 관통당할 뻔 했던 것이다.
제력이 멈칫거리는 사이에 진담영은 구멍이 뚫린 나찰망의 틈새를 교묘한 신법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제력이 황급히 나찰망을 회수했으나 그때는 이미 진담영의 몸이 나찰망의 범위 밖으로 이동한 후였다.
제력은 막 거두어 들였던 나찰망을 다시 던지려다 순간적으로 몸을 멈춰세웠다. 삼 장여 떨어진 곳에 우뚝 서 있는 진담영의 양 손에 각기 네 개씩의 비도가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다섯 손가락 사이에 비도를 하나씩 쥔 채 두 다리를 정(丁)자 형으로 벌리고 서 있는 진담영의 두 눈에서는 뼈골이 시릴 것 같은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력은 그 자세가 진담영의 가장 큰 절학인 연환팔쾌섬령도(連環八快閃靈刀)를 펼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폭음이 터져나왔다.
콰앙!
제력은 흠칫 놀랐으나 감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바로 앞에서 진담영이 여덟 개의 비도를 쥐고 있는지라 그에게서 함부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포대형(鮑大兄)!”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운자추를 공격했던 동료를 불렀다.
그가 포대형이라 부르는 사람은 강호에서 권법의 고수로 명성이 자자한 벽력진군(霹靂眞君) 포일융(鮑一融)이었다. 포일융은 두 주먹만으로 능히 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까지 알려진 인물로, 제력과 함께 강동쌍패(江東雙覇)라 불리우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괜찮네.”
하나 그 음성을 듣자 제력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포일융의 음성이 왠지 힘이 별로 없는데다 미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포일융은 별호 만큼이나 성격이 화급하고 불같아서 평상시에는 음성만으로도 간이 약한 사람을 벌벌 떨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음성을 듣건데, 아마도 운자추를 공격했던 일에서 별로 이득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제력은 더 이상 치밀어 오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진담영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린 후 슬쩍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에게서 몇 장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짙은 남색 장포를 걸친 우람한 체구의 중노인이 서 있었다. 남포 노인은 얼굴이 대추처럼 붉었는데, 지금 그 붉은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변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력은 처음에는 남포 노인이 부상이라도 입은 줄 알고 크게 놀랐으나, 이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포 노인은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단지 솟구쳐 오르는 노화를 억지로 눌러 참느라 숨이 거칠어 졌던 것이다.
제력은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재빨리 물었다.
“대형.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그때 갑자기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포대협은 단숨에 나를 쓰러뜨리지 못한 것이 천추(千秋)의 한(恨)이라도 되는 모양이오.”
제력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니 운자추가 백삼 자락을 펄럭이며 담담한 자세로 웃고 있었다.
조금 전에 포일융은 오 장 높이의 영취암 꼭대기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자신의 장기인 벽력신권을 펼쳤는데도 불구하고 운자추는 가벼운 일장(一掌)만으로 그를 어렵지 않게 격퇴 시켰던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것이 아래에서 위로 공격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위력적이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포일융이 맥없이 격퇴당한 것은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의 무공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포일융에게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포일융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도 운자추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것에 경악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자추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포일융을 향해 다가왔다.
“두 분께서 이토록 깊은 밤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본 공자에게 무례를 범한 것은 필유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오만…”
포일융은 몇 차례 안색이 변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음충 맞은 웃음을 흘렸다.
“흐흐… 과연 소문에 듣던대로 운문세가의 대공자는 실력이 비범하구나.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말로만 듣던 그 보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보물이라니?”
“흐흐… 시치미를 떼도 소용없다. 운문세가에서 종남파의 풋내기 장문인을 위협하여 보물을 가로채려 한다는 소문은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원래 보물에는 주인이 없는 법이니 우리가 구경한다고 해도 잘못된 일은 아니겠지?”
뜻밖의 말에 운자추의 눈에서 기이한 신광이 번뜩거렸다.
하나 운자추는 조금도 표정의 변화없이 침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소문을 어디서 들었소?”
“그건 알 필요 없다. 아무튼 이번의 거래에는 우리도 끼어들어야겠다.”
운자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문이란 원래 꼬리는 있어도 머리는 없는 법이니 그것만으로 진위(眞僞)를 판단하기란 힘들겠지. 그런데 두 분께서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의 마지막 말은 포일융과 제력에 대한 은근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포일융은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했으나 이내 날카롭게 소리쳤다.
“운자추. 운좋게 한 수 득수 한 걸로 득의양양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포대협의 말씀을 들으니 이곳에 온 것은 단순히 두 분만이 아닌 모양이구려?”
포일융은 움찔 놀랐다가 이내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과연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물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취암의 이곳저곳에서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의 수는 다섯 명이나 되었는데, 하나같이 안광이 예리하고 기도가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운자추는 그들을 둘러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낭심수사(狼心秀士) 이세광(李世光), 혈검자(血劍子) 두충(杜沖), 적수일괴(赤手一怪) 파흠(巴欽), 거기에 예중쌍매(豫中雙魅) 혁련형제(赫連兄弟)까지…. 과연 두 분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준비하셨구료.”
운자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히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했으나, 영취암 주위에 나타난 다섯 명의 고수들은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낭심수사 이세광은 뛰어난 심기와 독랄한 손속으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고, 혈검자 두충은 하북(河北)일대에서 손가락으로 꼽는 절정의 검객이었다. 적수일괴 파흠은 중조산(中條山)의 이름난 괴걸이었으며, 예중쌍매 혁련송(赫連松), 혁련병(赫連屛) 형제는 신법과 금나술이 뛰어난 투도(偸道)의 대가(大家)들이었다. 이들은 각기 거주하는 곳도 틀리고 정사(正邪)가 혼합되어 있어 함께 어울리기 힘든 인물들인데도 지금은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을 보니 서로간에 치밀한 사전 모의가 있었음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