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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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8화


제29장. 월하경변(月下驚變)

나타난 다섯 명의 고수들은 운자추가 자신들의 정체를 한 눈에 파악하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자 약간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나 그들은 이내 조금씩 장내를 에워싸며 다가서고 있었다.

처음에 습격을 했다가 뜻밖의 낭패를 당했던 포일융과 제력도 의기소침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날카로운 눈으로 운자추와 진담영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그들 중 누구도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진산월에게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진산월이 단순히 먹기 좋은 사냥감으로만 보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특유의 담담한 표정으로 장내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한가하고 유유자적해서 어찌 보면 늦은 밤에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강동쌍패를 비롯한 일곱 명의 고수들은 노골적으로 살의를 드러내며 운자추와 진담영을 향해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운자추와 진담영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들 만으로 이들 일곱 명의 고수들을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포일융은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자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운자추. 아직도 늦지 않았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난다면 피차간에 얼굴을 붉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운자추의 옥(玉)을 깎아 만든 듯한 준수한 얼굴에 한 줄기 야릇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차갑고 냉랭한 웃음이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포일융의 눈빛이 한층 흉흉해지며 전신에서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슬쩍 다른 사람들에게 눈짓을 하며 운자추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것을 신호로 한 듯 낭심수사 이세광과 혈검자 두충, 적수일괴 파흠은 운자추를 향해, 그리고 예중쌍매 혁련형제와 제력은 진담영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이것은 아주 현명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포일융과 파흠은 내공이 막강한 인물들이고 이세광과 두충은 수법이 교묘하면서도 뛰어난 고수들이어서 그들이 합공(合攻)한다면 제아무리 운자추가 당대 무림의 손꼽히는 기재라 할지라도 상대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혁련형제는 신법이 뛰어나고 동작이 민첩하여 진담영의 장기인 비검술을 충분히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공세에 제력의 나찰망 수법이 더 해진다면 진담영은 낭패를 당할 확률이 높았다.
하나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그들의 신형이 채 운자추와 진담영의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갑자기 운자추의 입에서 예리한 휘파람소리가 터져나왔다.

“휘익!”

그와 함께 주위의 기암괴석 사이에서 난데없이 십 여줄기의 인영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 인영들의 신법(身法)이 어찌나 표홀하고 재빨랐던지 포일융 등이 그들의 출현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들의 신형은 포일융 등의 지척으로 다가들고 있는 중이었다.
대낮같이 밝은 월광(月光) 아래 그들의 손에 들린 십 여개의 장검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검광(劍光)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일곱 명의 고수들은 운자추와 진담영을 공격하기에 앞서 느닷없이 나타난 인영들의 살인적인 검광을 피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파파파팍!

쐐쐐쐐애액!

주위 사방이 삽시간에 살벌한 검광과 장풍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갑자기 나타난 십여 명의 인영들은 하나같이 좀처럼 보기 힘든 놀라운 검술의 소유자들이었다.
하나 그에 맞서는 포일융 등 칠인(七人)도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는 고수들인지라 그들의 격전은 자못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십 명에 가까운 무림의 고수들이 환한 달빛 아래에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광경은 일대 장관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인영들의 수는 모두 열둘이었다.
그들은 일신에 하얀 색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는데, 모두 이십 대 초반에서 중반까지의 젊은이들이었다.
얼핏 보기에 그들의 동작들은 산만하고 어수선해 보였으나, 진산월은 한 눈에 그들이 특이한 검진(劍陣)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진산월이 묵묵히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때 등뒤에서 운자추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더 유리할 것 같소?”

진산월은 힐끗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장내의 싸움으로 시선을 돌리며 짤막하게 말했다.

“먼저 지치지 않는 쪽이오.”

그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물어본 사람이 맥이 빠질 정도였다.
하나 운자추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옳은 말이오. 저들이 펼치는 것은 내가 심심풀이로 만들어 본 면면부절진(綿綿不切陣)이라는 것인데, 지금같이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는 제법 쓸모가 있소. 하지만 공력의 손실이 적지 않아 쉽게 지치는 게 단점이지.”

운자추는 공격하는 열 두 명의 백의 청년들보다는 그들에게 갇힌 일곱 명의 고수들의 공력의 소모가 훨씬 더 심할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원래 면면부절진은 열 두명의 검수(劍手)들이 계속적으로 돌아가면서 공세를 펼쳐 진세(陣勢)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 두 명 개개인이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동작과 호흡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의 수련과 각고가 있어야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위력은 놀라운 것이어서, 일단 그 진안에 갇힌 사람들은 톱니바퀴처럼 쉴 사이 없이 몰아닥치는 검세에 질려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포일융 등이 일류 고수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폭풍처럼 몰아치는 검진의 위력에 피를 토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그들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흠뻑 젖어 있었고, 입에서는 연신 거친 숨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대로 지나가면 채 일각도 견디지 못할 것이 뻔했다.
진산월은 턱으로 열 두 명의 백의 청년들을 가리켰다.

“저들도 운문세가의 고수들이오?”

“그렇소. 본가에서는 그들을 십이호영(十二護影)이라고 부르고 있소.”

진산월은 포일융 등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해지자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오늘 이 주변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숨어 있는 거요?”

운자추의 눈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내가 데려온 사람은 얼마 많지 않소. 그보다는 쓸데없는 쥐새끼들이 너무 많이 몰려든 게 문제지.”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그들이 쥐새끼인지 호랑이새끼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운자추는 진산월을 똑바로 노려보다가 불쑥 물었다.

“당신도 혼자 온 것은 아니겠지?”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난 오늘 혼자 왔소.”

운자추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오?”

“술 한 잔 하는데 몇 사람씩이나 우르르 끌고 올 필요가 있겠소?”

운자추는 그의 말이 술 마시자고 불러내서는 주위에 수하들을 매복시키고 있던 자신을 넌지시 비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강호의 음험함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할 거요. 그보다 이제는 순순히 물건을 건네줄 마음이 들었소?”

진산월은 다시 한 차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보물은 임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소. 엉뚱한 소문 때문에 자칫 봉변을 당하게 생겼으니 더욱 그 물건에 대한 정이 떨어지는구료.”

운자추는 더 이상 그의 말은 듣고 싶지 않은 듯 약간 차가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물건은 어디 있소?”

진산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숨겨서 무얼 하겠소? 물건은…”

한데 바로 그때였다.

차차창!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크아악!”

진산월은 움찔하여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내에는 전혀 뜻밖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줄 알았던 포일융 등은 멀쩡히 서 있는 반면, 무서운 기세로 그들을 공격해 들어가던 십이호영이 오히려 연신 뒤로 물러서고 있지 않은가? 바닥에는 십이호영 중의 두 사람이 피를 질펀히 흘린 채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 십이호영들도 하나같이 전신에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두 명의 호영들은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숨이 끊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진담영은 물론이고 얼음장 같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던 운자추마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아악!”

그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에 다시 십이호영 중의 또 다른 한 명이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쩌억 갈라진 채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장내에는 분명 십이호영과 포일융 등 밖에 없었다. 포일융 등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십이호영을 쓰러뜨린 흉수(兇手)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 실력으로 십이호영을 이토록 간단히 쓰러뜨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운자추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신광이 뿜어나왔다. 갑자기 그의 신형이 진산월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진산월이 흠칫 놀라 주위를 돌아보니 운자추의 신형은 한 줄기 백선을 그리며 오 장여 밖에 있는 커다란 암석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 속도는 그야말로 무영지경(無影之境)이라고 할 만큼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무서운 기세로 암석으로 떨어져 내리던 운자추의 오른쪽 소매가 크게 휘둘러졌다.

꽈르릉!

단순히 소맷자락이 휘둘러졌을 뿐인데도 주위의 공기가 요동을 치며 강력한 경풍이 폭풍노도처럼 암석을 향해 휘몰아쳐갔다.

콰쾅!

집채만 한 커다란 암석이 산산이 박살나며 사방으로 부서진 돌조각들이 비산(飛散)되었다.

찰나,

휘익!

박살난 암석의 파편들 사이에서 희끗한 인영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모습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인영은 사람의 몸통만 한 바위조각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 있어서, 운자추가 남달리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흥! 어림없다!”

운자추의 입에서 냉랭한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반대쪽 소맷자락이 세차게 허공에 펄럭거렸다.

콰아앙!

노도와 같은 경력이 재차 몰아치며 바위조각들이 완전히 먼지처럼 으스러져 버렸다.

가히 엄청난 수공(袖功)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 허깨비같은 인영의 모습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분명 바위조각 뒤쪽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는데 바위조각이 박살나 수백 개의 자잘한 파편이 되어 흩날리는 와중에도 그 인영은 행방이 묘연해 버린 것이다. 만일 운자추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 인영의 신법은 경인(驚人)할 만한 것임이 분명했다.

운자추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이 더 이상 차가울 수 없을 만큼 예리하게 번뜩거렸다. 다음 순간,

쉬이익!

그의 몸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떨어져 내리던 그의 신형이 마치 돌풍을 만난 나뭇잎처럼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진산월은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성을 발했다.

“정말 멋진 회풍무류(廻風舞柳)로구나!”

사실 지금 운자추가 펼친 회풍무류신법은 강호의 최절정 신법은 아니었다. 반대로 많은 무림인들이 어렵지 않게 펼치고 흔하게 익히는 널리 알려진 신법이었다.

하나 지금 운자추처럼 회풍무류라는 이름을 그대로 되살려 자신의 몸을 선회시키며 그 힘을 이용하여 다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산월도 저토록 능숙하면서도 완벽한 회풍무류는 시전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한 줄기 바람을 타고 춤을 추는 버들잎처럼 허공으로 솟구친 운자추의 신형은 삼 장여 떨어진 어느 기암괴석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양쪽 소매자락이 마치 커다란 방패처럼 빳빳하게 곤두세워져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 소맷자락이 일단 휘둘러지면 주위가 거의 초토화(焦土化)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때 운자추가 날아가는 기암괴석 위에서 갑자기 희끗한 인영이 불쑥 튀어올랐다. 그 인영의 신법이 어찌나 표홀하고 민첩했는지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단순히 달빛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도망갈 수 없다!”

운자추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며 그의 몸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하나 그때는 이미 그 허깨비같은 인영은 삼 장여 밖의 기암괴석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운자추의 신법도 빨랐지만 그 인영의 신법은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휘리리릭!

운자추의 신형이 허공에서 다시 한 번 빠르게 선회하며 그 인영이 사라진 기암괴석 쪽으로 날아갔다.

허공에서 몇 번이고 방향을 바꾸며 날아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붕새를 연상케 할 만큼 멋진 것이었으나, 이번에도 그의 신형이 채 다가오기도 전에 그 허깨비같은 인영은 또 다른 바위 뒤로 이동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쫓고 쫓기는 숨 가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 운자추의 신법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언제까지 허공에서 날아다닐 수만은 없었다.

결국 그는 다섯 번째의 선회를 마치고는 바닥으로 내려서고 말았다.

팟!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는 다시 오른쪽의 암석으로 몸을 날렸다. 비호처럼 허공을 쏘아져가는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종리궁도(鍾里宮道)! 언제까지 도망갈 수 있나 보자!”

운자추의 씹어뱉는 듯한 음성을 듣고서야 진산월은 허깨비 같은 인영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매신(魅神) 종리궁도는 강호무림에서 두 가지 면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하나는 그의 신법이 당금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선천적인 기형(奇形)을 딛고 그런 절정의 신법을 익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종리궁도는 원래 곱추에 심한 곰보 투성이의 흉칙한 외모였다. 게다가 한쪽 다리는 소아마비를 앓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어려서부터 종리궁도는 이런 외모와 불편한 다리 때문에 주위에서 심한 핍박과 수모를 받아야만 했다.

나중에 그가 우연히 오십 년전의 절세고수인 무영신마(無影神魔)의 비급인 무영경(無影經)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적어도 신법 하나만큼은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것은 절름발이인 자신을 비웃는 무림인들에 대한 복수인 동시에, 추악한 자신의 용모를 결코 남들에게 보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의 각고 끝에 종리궁도는 마침내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당대무림의 십대신법대가(十大身法大家)중 하나로 손꼽히는 절정의 인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무영신마의 무영화마신법(無影化魔身法)에 몇 가지의 보법(步法)을 보완하여 좀처럼 남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공할 무공을 창안해 내었다. 그것이 바로 매영보(魅影步)였다.

매영보를 완성한 후 종리궁도의 진실한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직 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신출귀몰하고, 허깨비처럼 종잡을 수 없는 신묘한 그의 몸놀림은 무림인들에게는 하나의 전설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유명한 종리궁도가 기암괴석으로 뒤덮힌 소실봉의 뒤쪽 계곡에 모습을 나타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운자추도 종리궁도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눈을 몇 번이나 따돌리고 계속 기암괴석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그의 신법이 강호에서 전설처럼 떠도는 매영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상대의 정체를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 순간, 허공에서 괴이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크크크… 나인줄 알면서도 감히 따라붙으려 하다니, 네놈에게 과연 그런 재주가 있겠느냐?”

그 음성은 마치 쥐가 나무를 갉아먹는 듯이 거칠고 카랑카랑해서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더구나 기암괴석 사이를 허깨비처럼 누비는 희끗한 그림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섬뜩한 것이었다.

운자추는 그 말에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더욱 빠르게 우측의 암석을 향해 날아가며 오른쪽 소매를 세차게 휘둘렀다.

콰앙!

폭음이 터지며 반경 일장쯤 되는 거대한 바위가 산산이 박살나 버렸다. 보면 볼수록 무시무시한 위력의 수공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운자추가 펼치는 것은 철수진기(鐵袖眞氣)라는 것으로, 소맷자락을 이용한 무공으로는 강호무림에서도 손꼽히는 절학이었다.

하나 아무리 철수진기의 위력이 뛰어나다해도 상대의 종적을 제대로 쫓을 수 없는 상태에서는 제대로 그 효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운자추가 바위를 박살낸 순간 종리궁도의 신형은 벌써 삼 장 밖의 또 다른 바위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쫓아가기는커녕 눈으로 쫓기에도 벅찰 정도로 빠른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운자추도 이런 식으로 계속 그의 뒤만 따라다니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갑자기 신형을 뚝 멈춰 세웠다.

그러자 종리궁도의 괴이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크크크… 벌써 지친거냐, 운가 애송이?”

운자추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두 눈을 번뜩이며 종리궁도가 모습을 감춘 바위를 노려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 대단한 신법이오. 그동안 매영보의 기기묘묘함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는 말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 일줄은 몰랐소.”

종리궁도는 운자추의 반응이 다소 뜻밖인 듯 목소리가 한층 더 음산하게 변했다.

“크큿… 말은 제법 그럴싸하게 한다만 속마음은 나를 잡아 죽이고 싶겠지. 하지만 네 마음대로는 안될 것이다.”

운자추는 평소의 여유를 완전히 되찾은 듯 느긋한 표정이었다.

“내 마음대로 될지 안될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오. 다만 당신이 무슨 이유에서 내 수하들을 살해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구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직 한 마디 뿐이다.”

“그게 뭐요?”

“사람은 죄가 없으나 보물은 죄가 있다는 것이지.”

종리궁도의 말은 비록 단순했으나, 운자추는 영리한 인물이었으므로 즉시 그 말속에 품은 뜻을 파악해 냈다.

“그럼 당신도 물건을 노리고 있단 말이오?”

“흐흐… 너는 포일융이 자신들의 실력만을 믿고 너에게 덤벼들었다고 생각했단 말이냐?”

운자추는 그제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안색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렇군. 당신이 뒤에서 저자들을 사주했군.”

“흐흐… 네가 이 주변에 적지 않은 운문세가의 고수들을 매복시켜 놓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그럼 당신은 이미 그들에게도 손을 써 놓았단 말이오?”

“물론이지. 운문세가의 팔염라(八閻羅)와 네가 수족처럼 거느리는 일월성진(日月星辰) 사위사(四衛士)도 이미 모두 제압해 놓았다.”

운자추는 그의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종리궁도가 숨어 있는 암석을 노려보다가 손뼉을 가볍게 쳤다.

짝!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는 사람은 없었다. 종리궁도의 비웃음이 가득 담긴 음성이 들려왔다.

“크흐흐.. 과연 여우처럼 의심이 많구나. 하나 나는 쓸데없는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제 이곳에 남은 놈들은 너희들 뿐이다.”

운자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이더니 슬쩍 포일융 등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비록 그들을 제압했다고 해도 나와 진담영이 건재하는 이상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거요. 당신은 설마 저자들이 나를 견제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크흐흐… 서툰 격장지계(擊將之計)를 쓸 생각은 말아라. 포일융이 비록 네 상대로는 미흡하지만 내가 암중에 도와준다면 너를 상대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너와 진가놈만 쓰러진다면 나머지 허수아비들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다.”

운자추는 되도록 종리궁도로 하여금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고 했으나, 종리궁도는 쉽사리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운자추는 일단 종리궁도가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를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하나 종리궁도가 계속 숨어 있는 한, 운자추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종리궁도의 말마따나 그가 계속 숨어서 암습을 가해 온다면 뜻밖의 낭패를 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운자추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종리궁도는 그것을 운자추의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였는지 웃음소리가 한층 더 카랑카랑해졌다.

“크흐흐… 간단하다. 너는 지금 당장 진담영과 나머지 수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면 된다. 팔염라와 사위사는 내일 돌려 보내 주겠다.”

운자추는 맥이 풀린 듯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물건을 얻겠단 말이구료.”

“흐흐… 강호에서는 실력있는 자만이 모든 걸 얻을 수 있다. 네가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잡을 수 있는 실력을 키우면 될게 아니냐?”

“확실히 옳은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운자추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종리궁도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냐?”

운자추의 음성은 이상하리만치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은 순순히 물러서는게 신상에 좋을거요.”

뜻밖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하나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당사자인 종리궁도였다. 잠시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종리궁도가 미처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잠시 후, 이를 가는 듯한 종리궁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운자추…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네놈이 지금 감히 나를 협박하는거냐?”

어찌나 화가 치밀었던지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운자추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난 단지 당신에게 충고를 해주는 것 뿐이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난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은 지킬 수 있을거요.”

“미친 놈…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다니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종리궁도가 숨어 있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 희끗한 것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운자추의 신형이 옆으로 반 자쯤 이동했다. 그것은 너무도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인지라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운자추의 몸이 한 차례 흔들렸다가 바로 선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운자추의 얼굴에는 별반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 만큼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알 수 있을만큼 괴이한 신광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종리궁도. 당신의 무형인(無形刃)은 비록 빠르고 날카롭지만 미리 방비하고 있는 자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요. 마지막 충고요. 이곳을 떠나시오.”

진산월은 운자추의 말을 듣고나서야 조금 전 종리궁도가 무형인을 발출했으며, 운자추가 그것을 피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자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종리궁도의 무형인은 결코 쉽게 피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형인은 무색투명한 은정지모(銀精之母)를 거의 종잇장처럼 얇은 두께로 잘라 만든 것으로, 금석을 두부처럼 자를 정도로 날카로울 뿐 아니라 눈에도 보이지 않고 발출할 때의 소리도 거의 없는 공포의 병기였다. 특히 종리궁도가 종적을 숨긴 채 이 무형인을 발출하면 그 위력은 더욱 배가되어 상대는 영문도 모른 채 쓰러지기 일쑤였다. 종리궁도는 운자추가 자신이 발출한 무형인을 너무도 수월하게 피해내자 마음 한 구석이 섬뜩해 졌으나 이내 악독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것이야말로 네놈의 마지막 헛소리가 될 것이다. 이놈. 각오해라!”

운자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할 수 없군. 나를 탓하지 마시오.”

이어 그는 다시 손뼉을 쳤다.

짝!

종리궁도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 네놈의 부하들은 불러보았자 소용없다니까. 네놈은 귀가 있어도 말을 듣지 못한단 말이…. 헉!”

갑자기 종리궁도가 숨어 있던 바위 뒤에서 다급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중인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눈으로 종리궁도의 음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바위 뒤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초조한 표정으로 바위를 기웃거리던 포일융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종리대협. 무슨 일이오?”

하나 바위 뒤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없었다. 포일융 등은 모두 안색이 변해 바위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로서는 운문세가의 고수들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종리궁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형편이었다. 하나 그들이 채 일 장도 다가서기 전에 갑자기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바위 뒤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그 인영을 본 중인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나타난 인영은 실로 흉측한 몰골의 괴인이었다. 두 눈은 옆으로 쭉 찢어져 흡사 독사(毒蛇)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고, 코는 들창코에 심한 뻐드렁니였다. 게다가 얼굴이 어찌나 심하게 얽었는지 마치 귤 껍질을 보는 것 같아 끔찍스럽기조차 했다. 더구나 괴인의 등은 낙타처럼 구부정한 곱사등이였고, 앙상한 두 다리는 크기가 달라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곱사등이 괴인은 두 눈에서 연신 흉악한 안광을 이글거리며 운자추를 찢어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

그 음성은 조금 전에 들려온 것과 같은 것이었다. 중인들은 눈앞의 이 추악한 곱사등이에 절름발이의 괴인이 바로 당대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경공대가(輕功大家)인 매신 종리궁도임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중 누구도 종리궁도의 이름만 들었을 뿐, 실제로 그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포일융마저 그와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운자추는 뒷짐을 진 채로 담담하게 웃었다.

“더 숨어있지 왜 스스로 뛰어나온거요?”

종리궁도는 몇 차례 안색이 변하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명문세가의 공자라고 자처하면서 독(毒)을 쓰다니… 네놈은 대체 무슨 수로 나를 중독시켰느냐?”

중인들은 종리궁도의 말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종리궁도가 중독되었다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좀처럼 남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종리궁도가 스스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님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운자추는 오장이나 떨어진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있는 종리궁도를 어떻게 중독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운자추는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독을 쓰지 않았소.”

“이놈. 거짓말하지 마라! 조금 전부터 내 내공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는데 그럼 이게 중독된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종리궁도가 화를 낼수록 운자추의 표정은 태연해졌다.

“물론 당신은 중독 되었겠지. 하지만 하독(下毒)한 것은 내가 아니오.”

종리궁도은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나요.”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집중되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영취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 위에 하나의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짙은 녹색 장삼을 입은 청년이었는데, 때마침 불어오는 밤바람에 그의 녹색 장삼이 펄럭이고 있는 모습이 보는 이들의 마음에 묘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녹삼 청년은 유달리 긴 두 팔을 늘어뜨린 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종리궁도는 녹삼 청년의 특이한 옷 색깔과 그의 이마에 동여 매어진 백색 두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너는 혹시 당문에서 나오지 않았느냐?”

녹삼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당수인이라 하오.”

당수인이란 말에 운자추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핼쓱하게 변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조건에 맞게 정리해서 작성해드리겠습니다.


당수인이라면 사천 당문의 신진 고수들 중에서도 가장 명성이 자자한 당문칠영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강호인들이 사천 당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독술과 암기를 방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독술이나 암기 중에는 아예 해독(解毒)할 수조차 없는 것들도 상당수 있어서 더욱 강호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사천 당문의 고수들이 사용하는 독술과 암기의 종류가 대체 얼마나 되는지를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직계와 방계 제자를 철저히 선별해서 무공을 전수하여, 자신들의 수법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무리 직계라 해도 딸에게는 가문의 비전(秘傳) 수법들을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시집간 딸에 의해 비전이 외부로 유출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오직 당씨(唐氏) 일문으로만 이루어진 사천당문이 수백 년 동안 강호무림에 명성을 날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철저한 통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강호인들은 머리에 백건을 두르고 허리춤에 사슴 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차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가 당문의 사람이든 아니든 시비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당문의 고수와 시비가 벌어진다면 언제 한 줌의 핏물로 녹아버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 당문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로 알려진 당수인이 나타났으니 중인들이 모두 안색이 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던 종리궁도마저 당수인의 손에 중독되었다면 승패(勝敗)는 보나마나한 것이었다.

종리궁도는 얼굴이 욹으락붉으락하게 변하다가 불쑥 소리쳤다.

“나는 아직 당문과 원한을 지은 일이 없는데 왜 내게 독을 쓴 것이냐?”

당수인의 백지장처럼 얇은 입술이 살짝 열리며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 입으로 말하지 않았소? 사람에는 죄가 없으나 물건에는 죄가 있다고. 당신이 운자추의 말대로 순순히 물러났으면 내가 왜 당신에게 독을 썼겠소?”

그제서야 종리궁도는 당수인이 운자추의 일행임을 알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나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당수인이 대체 무슨 수로 자신을 중독시켰는지 알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

“네 하독하는 솜씨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내 신법을 따를 수는 없었을 텐데 너는 어떻게 나를 중독시켰느냐?”

종리궁도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상대를 중독시키려면 그 상대에게 가급적 가까이 접근하여야 한다. 독성(毒性)이 강한 독일수록 가까이서 펼쳐야 하며, 때로는 직접 접촉해야만 독성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 종리궁도같이 신법이 빠른 고수에게는 이런 일반적인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채 독성이 효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이미 상대가 독성이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사천 당문의 고수들이라고 함부로 마구 독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천 당문의 절독(絶毒)은 그 위력이 가공스러운 만큼이나 취급에 주의를 요하는 것이어서 자칫 잘못 펼쳤다가는 엉뚱한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거나 오히려 자기 자신이 중독될 수도 있다.

더구나 그 독약들은 워낙 제조 방법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어서 아무리 직전(直傳) 제자라 할지라도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양은 극히 적었다.

그 독의 강력한 위력만큼이나 엄격한 통제와 무분별한 남용의 방지가 바로 사천 당문이 여타 독을 사용하는 문파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 때문에 독술과 암기라는 다소 정당치 못한 수법을 사용하면서도 그들이 명문세가(名門世家)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당수인은 사천 당문에서도 명성을 날리는 당문칠영의 일인(一人)인만큼 결코 함부로 독을 뿌리거나 무분별하게 살포할 리가 없었다.

당수인이 종리궁도를 중독시키려면 그에게 접근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의 발길을 묶어두어 독을 뿌릴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수인은 이미 종리궁도를 중독시켰으니, 종리궁도가 솟구치는 의혹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수인의 입꼬리에 차가운 미소가 매달렸다.

“물론 당신의 신법은 가히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당신을 중독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나는 당신이 운자추와 처음 대치하고 있을 때 당신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바위 부근에 선녀화(仙女花)를 뿌려 놓았소.”

종리궁도는 흠칫 놀랐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운자추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이미 이곳에 와 있었단 말이냐?”

“그렇소. 일이 잘 되었다면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는데, 당신이 나타나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쓴 거요. 그리고는 당신이 내가 선녀화를 뿌린 바위 쪽으로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종리궁도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운자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네놈이 미친 듯이 철수진기를 휘두른 것이 나를 이쪽으로 유인하기 위함이었단 말이냐?”

운자추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신법은 너무 빨라서 나로서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소.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잘 피한다 해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당수인이 손을 써둔 바위 쪽으로 움직일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내가 이쪽으로 온 뒤에 손을 멈춘 것이로구나!”

“하하… 정확하게 맞추었소. 선녀화가 발동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당신의 말을 들으면서 선녀화가 효과를 발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그럼 네놈이 친 손뼉은…”

운자추는 빙긋 웃었다.

“처음에 친 손뼉은 물론 팔염라 등을 부르기 위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 손뼉은 전혀 아니었소. 그건 당신의 귀로 음공(音功)을 보내 당신이 공력을 끌어올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소. 그래야만 선녀화가 당신 체내에 구석구석으로 퍼지게 될 테니까 말이오.”

그제서야 종리궁도는 자신이 운자추와 당수인의 계략에 철저하게 놀아났음을 깨닫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이 놈들이 감히 나를 우롱하다니…”

종리궁도는 금시라도 운자추와 당수인을 향해 달려들 듯했으나 왠일인지 선뜻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당한 선녀화는 비록 단숨에 사람의 목숨을 끊는 맹독(猛毒)은 아니었지만, 일단 당하게 되면 마음대로 공력을 일으킬 수 없는 기묘한 효능이 있던 것이다.

선녀화! 이름으로만 본다면 독약이라기보다는 몸에 좋은 영약(靈藥)이라고 착각할 만했다.

사실 선녀화는 공력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몸에 별다른 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일단 공력을 끌어올리면 체내의 진력(眞力)이 점차로 사라져 종내에는 자신의 한 몸조차 제대로 운신(運身)할 수 없게 되는 특이한 절독이었다.

그래서 선녀의 음성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결코 큰소리를 치거나 공력을 함부로 운기할 수 없다고 하여 선녀화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종리궁도는 조금 전에 운자추가 손뼉을 칠 때 일어난 음공을 막기 위해서 무심코 공력을 끌어올렸다가 체내의 진기가 마치 바닷물 속으로 빠지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선뜻 공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무림인에게 있어 내공력(內功力)이란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공을 상실한 무림인의 최후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더욱 처참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우두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종리궁도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형국에 처해 있자 포일융 등은 모두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다.

가뜩이나 불리한 처지에 믿었던 종리궁도는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사천 당문의 고수인 당수인이 운자추에게 가세하여 그들로서는 전혀 승산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포일융은 기회를 봐서 도망이라도 칠 요량으로 주위를 슬쩍 둘러보다가 이내 얼굴에 암담한 표정이 떠올랐다.

십이호영 중의 남아 있는 아홉 명이 이미 그들의 주위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운자추는 장내의 정세를 완전히 자신이 장악했음을 확신한 듯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올 때는 마음대로 올 수 있었을지 몰라도 갈 때는 그럴 수 없소.”

포일융은 안색이 변하여 급히 물었다.

“운공자. 그 말은 무슨 뜻이오?”

“당신들은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우리를 습격하여 본가의 고수들을 다치게 했소. 그런데 이대로 당신들을 순순히 돌려보낸다면 강호인들이 본가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운공자. 그건…”

포일융이 다급하게 무어라 말하려 하자 운자추는 손을 내저었다.

“긴 말은 필요 없소. 피에는 피로 상대를 응징하는 것 본가의 철칙(鐵則)이니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포일융은 물론이고 나머지 여섯 명의 고수들은 그의 단호한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듯 모두 몸을 흠칫 떨었다. 운자추가 금시라도 공격명령을 내릴 듯 서서히 손을 쳐들자 포일융이 황급히 소리쳤다.

“운공자.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모두 팔 하나씩을 두고 떠나시오. 그러면 오늘 일의 시비(是非)를 따지지 않겠소.”

포일융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꼭 그래야만 하겠소?”

운자추는 더 생각할 여지가 없다는 듯 분명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그것이 싫다면 실력으로 이곳을 뚫고 나가도 좋으니 각자 알아서 선택하시오.”

포일융의 얼굴에 점차로 붉은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당혹감과 수치심,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그의 흉성(兇性)을 자극한 것이다. 포일융뿐 아니라 제력을 비롯한 다른 여섯 명의 고수들도 하나같이 안광을 무섭게 번뜩이며 사나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강호인들은 이상하리만치 명예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부류들이었다. 그들이 명성에 집착하는 것은 일면 인간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정도는 세인(世人)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누구나 처음 무공을 익힐 때는 강호에 협의(俠義)를 펼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하나, 그 내면에는 강호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 명성을 떨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구대문파니 십대세가(十大世家)니 하는 이름들이 사람들의 입으로 오랫동안 회자(膾炙)되는 것도 자신들의 명성을 확고히 하려는 그들 자신의 피나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져왔다. 문파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명성을 날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정 문파에 속하지 않은 고수들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그들은 자신의 명성을 순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고 보존해야 했기에, 때로는 한 줌도 안 되는 명성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포일융같이 강호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쌓은 고수들에게 있어 스스로의 팔을 자르고 물러나라는 말은 혀를 깨물고 죽으라는 소리보다 더욱 치욕적인 것이었다. 만일 이곳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어쩌면 하나뿐인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하나 이곳에는 수십 개의 눈이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목숨을 구걸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진다면, 그때의 치욕을 어찌 감수할 수 있겠는가?

포일융 등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운자추는 딱딱하게 굳어지는 포일융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다가 비웃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선택을 한 모양이구료.”

포일융은 조금 전과는 달리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 그렇다. 우리는 이미 결정했다.”

그의 입에서 ‘결정했다’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운자추를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것을 신호로 한 듯 다른 여섯 명의 고수들도 일제히 운자추와 진담영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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