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9화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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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3권 영웅대회(英雄大會)편 : 9화


제30장. 암중행사(暗中行事)

파파파팍!

삽시간에 주위 사방이 온통 시퍼런 칼그림자와 매서운 검풍(劍風)에 휩싸여 버렸다. 하나 운자추는 이미 그들의 이런 행동을 예측한 듯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뒤로 슬쩍 몸을 움직였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으나, 워낙 그의 신법이 신속해서 희끗한 백영이 어른거림과 동시에 그의 몸은 어느 새 삼 장 밖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해 가고 있었다. 포일융은 이를 갈아붙이며 재차 운자추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나 그때는 이미 십이호영의 몇 사람이 그와 운자추 사이에 뛰어든 후였다.

“우와아아!”

포일융은 신음과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그들의 머리를 뛰어넘어 운자추를 향해 다가가려 했으나 십이호영이 그것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쐐쐑!

십이호영의 손에 들린 장검에서 예리한 검기들이 빛살처럼 뿜어나오자 포일융도 더 이상은 운자추의 뒤만을 쫓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벼락같이 몸을 선회하며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른 십이호영의 세 사람을 향해 질풍노도와 같은 십팔권(十八拳)을 벼락같이 갈겨댔다.

꽈르릉!

마치 뇌성벽력이 쳐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노도와 같은 권풍이 십이호영의 세 사람을 향해 몰아쳐갔다. 포일융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기 때문에 이번에 자신의 성명절기인 벽력신권 중의 삼대절초인 벽력진천(霹靂震天), 벽력무궁(霹靂無窮), 벽력파황(霹靂破荒)을 한꺼번에 펼쳐낸 것이다. 그 위세는 가히 놀라워서 반경 삼 장 이내가 마치 지진을 만난 듯 마구 뒤흔들렸다. 십이호영의 세 사람도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향해 몰아쳐 오는 권풍을 바라보고 있다가 일제히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파파팡!

차창!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폭음과 격렬한 마찰음이 연거푸 터져나오며 돌먼지가 사방으로 자욱히 피어올랐다. 그속에서 짤막한 신음성 몇 가닥이 흘러나왔다.

“윽…”

“으음!”

진산월이 안력을 돋구어 바라보니 십이호영의 세 사람은 마치 술취한 사람들처럼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에 비해 포일융은 고리 눈을 부릅뜬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포일융이 득수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 진산월은 포일융의 가슴과 옆구리가 피범벅이 된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포일융은 비록 놀라운 솜씨로 십이호영의 세 사람을 물러서게 했지만 대신에 가슴과 옆구리에 각기 이검(二劍)씩을 격중 당해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진산월이 고개를 흔든 것은 포일융의 상처가 위중하여 그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포일융의 실력은 십이호영 중의 한 사람을 겨우 능가할 정도인데, 세 사람의 합공(合攻)을 동시에 받았으니 당해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여섯 명의 고수와 십이호영의 남은 일곱 사람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면면부절진이 파괴된 상태라 십이호영들은 본신(本身)의 실력으로 상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싸움은 조금 전과는 달리 백중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동안 장내의 격전을 지켜보던 운자추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은 채 진담영을 돌아보았다. 진담영은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장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스슥!

그의 손이 한 차례 허공을 향해 가볍게 휘둘러졌다. 다음 순간,

“크아악!”

갑자기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던 혈검자 두충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피를 뿌리고 쓰러졌다. 그의 목덜미에는 어느 새 시퍼런 단도가 깊숙히 박혀 있었다. 제력이 그것을 보고 안색이 대변해 크게 소리쳤다.

“진담영. 네가 강호의 고수라면 치사하게 암습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싸우자!”

진담영의 입가에 서릿발처럼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칠영(七影). 그 자를 내게 인계하고 자네는 다른 자들을 상대하게.”

제력과 싸우고 있던 십이호영중의 한 사람이 알았다는 듯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력에게 벼락같은 삼검(三劍)을 날린 후 재빨리 신형을 돌려 낭심수사 이세광에게로 덤벼들었다. 제력은 한 차례 숨을 몰아쉰 후 사나운 눈으로 진담영을 노려보았다.

“진담영. 네놈이 그러고도 고수란…”

하나 그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진담영이 허깨비처럼 허공을 훌훌 날아 그를 향해 다가왔다. 제력은 바짝 긴장하여 수중의 나찰망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 순간, 진담영의 오른손이 한 차례 움직였다. 제력은 전력을 다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어찌된 일인지 단 한 개의 비도(飛刀)도 날라오지 않았다. 제력이 어리둥절하여 진담영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진담영은 비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제력은 진담영이 자신을 희롱했음을 깨닫고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었다.

“이 놈….!”

그는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지르며 진담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진담영이 다시 오른 손을 휘둘렀다. 제력은 무의식중에 어깨를 움츠렸으나, 이번에도 비도는 날라오지 않았다.

“미친 놈.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

제력이 계속 몸을 앞으로 날리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희끗한 것이 번뜩이며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의 목덜미를 쑤시고 들어왔다. 제력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딱 벌렸다. 하나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언제 박혔는지 모르게 그의 목덜미에는 진담영의 비도가 깊숙히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진담영은 그를 향해 싸늘한 조소를 던졌다.

“그런 실력으로 내 비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조금 전, 진담영은 오른손으로 비도를 던지는 척 제력을 속이고 사실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왼손으로 비도를 날렸다. 제력은 두 번에 걸친 진담영의 헛손질에 정신을 빼앗겨 뒤이어 날아오는 비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제력은 무어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씰룩거리다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의 실력은 진담영에게 크게 뒤지지 않았으나, 진담영의 비도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제대로 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너무도 허무하게 쓰러지고 만 것이다. 순식간에 강동쌍패와 혈검자 두충이 상대의 손에 당하자 나머지 네 명의 고수들은 절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실 처음 종리궁도의 지시를 받고 이곳에 나타날 때만해도 그들은 나름대로 확고한 자신이 있었다. 운자추가 제아무리 하남성 일대에서 손꼽히는 기재이고 운문세가의 힘이 막강하다 해도 자신들 일곱 명과 종리궁도의 도움만 있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종리궁도는 당문의 독에 중독되어 제 한 몸조차 제대로 운신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들 중 절반에 가까운 고수들이 쓰러져 버렸으니 그들로서는 눈앞이 캄캄해질 수 밖에 없었다. 운자추를 너무 쉽게 보았다는 후회가 밀물 듯 밀려 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으나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홉 명의 십이호영들이 그들을 철통같이 둘러싼 채 맹공을 가하고 있어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고 비명횡사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들은 초조하고 다급한 심정에서 미친 듯이 병기를 휘두르며 대항했으나 누가 보기에도 그것은 헛된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진담영은 그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으려는 듯 양 손에 네 개씩의 비도를 뽑아든 채 그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격전장으로 쏠려 있는 그 순간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선녀화에 중독되어 공력을 끌어올릴 수 없다던 종리궁도가 벼락같이 몸을 날려 운자개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인데다, 종리궁도의 몸을 움직이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중인들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을 때는 이미 종리궁도의 신형은 운자개의 코앞에 도달해 있는 후였다. 천하의 운자추도 이때만큼은 크게 놀랐는지 안색이 대변해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앗!”

그는 종리궁도가 자신을 암습하려는 줄 알고 무심결에 몸을 옆으로 숙였다.

쉬아악!

그 순간 종리궁도는 그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운자추가 아차 싶은 마음에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종리궁도의 신형은 어느 새 오 장 밖을 치달려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공(可恐)스럽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무서운 신법이었다.

“음…!”

운자추의 입에서 도저히 억제하기 어려운 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엄청난 속도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종리궁도의 품에는 하나의 인영이 들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운자추는 한 눈에 그 인영이 바로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의 뒤에 서있던 진산월 임을 알아본 것이다. 운자추가 뜻밖의 사태에 놀라 잠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이 종리궁도의 몸은 어느 새 짙은 어둠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운자추는 그때까지도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안색이 몇 차례 가볍게 변했다. 그는 종리궁도가 사라진 방향을 쏘아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 가벼운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당수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쫓지 않을 건가?”

운자추는 힐끗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속도라면 나로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네.”

당수인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일거야.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빠르군. 그렇다면 조금 전에는 일부러 실력을 숨긴 셈인가?”

“그럴거야. 그때는 그림자라도 보였는데, 지금은 아예 쫓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으니… 정말 그림자 귀신이라는 별호 그대로군.”

당수인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그나저나 그자는 선녀화에 중독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거지?”

당수인으로서는 다른 무엇보다 그 점이 궁금했을 것이다. 선녀화가 비록 당문의 제일가는 절독(絶毒)은 아니었지만, 그 효과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확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문에서 특별히 제조한 해독약이 아니라면 해독(解毒)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한데 의외로 운자추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중독되지 않은 거 겠지.”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그자는 분명히 선녀화가 뿌려진 곳에 있었는데 어떻게 중독되지 않았단 말인가?”

“두 가지 중에 하나겠지. 첫째는 그가 선녀화의 해독약을 미리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고…”

운자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수인은 잘라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일세. 본가의 해독약은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았네.”

운자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해답은 한 가지로군.”

당수인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언가?”

“그가 피독(避毒)할 수 있는 기보(奇寶)를 미리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당수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빛냈다.

“그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로군. 그렇다면 그는 왜 중독되지도 않았는데 중독된 척을 했을까?”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겠지.”

운자추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종리궁도의 목적은 진산월이 지니고 있는 봉황금시였다. 종리궁도가 아무리 피독의 보물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해도 운자추와 당수인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한, 진산월에게 접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를 납치하여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하나 종리궁도가 선녀화에 중독되었다고 믿은 중인들이 방심하는 사이 종리궁도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아 단숨에 운자추와 당수인의 경계망을 뚫고 진산월을 생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산월도 그때는 거의 무방비 상태인지라 도저히 벼락같은 속도로 다가온 종리궁도의 손을 피할 수 없었던게 분명했다. 당수인은 십이호영과 진담영의 손에 하나씩 쓰러지고 있는 낭심수사 이세광 등을 쳐다보다가 운자추를 돌아보며 불쑥 물었다.

“물건은 날아가고 쓸데없는 피만 잔뜩 뿌려졌으니 꼴이 우습게 되었군.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운자추는 종리궁도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특유의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봉황금시의 행방을 알만한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지.”

당수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진산월과 동중산 밖에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그런데 동중산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고, 진산월마저 종리궁도의 손에 넘어갔는데 누구를 찾는단 말인가?”

운자추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나 당수인은 그 미소를 보자 마음 한 구석이 왠지 섬뜩해졌다. 비록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운자추의 두 눈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 있네. 그들 말고도 봉황금시의 행방을 알만한 사람이…”

쉬아악!

정말 무서운 질주였다. 진산월은 여지껏 인간이 이토록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었다. 하나 이제 그는 알았다. 인간의 능력이란 때로는 예상을 몇 배나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혈도(穴道)가 짚힌 채 남의 옆구리에 매달려 허공을 달려가는 것은 생각만큼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달릴 수 없는 속도를 지금 공짜로 실컷 맛보고 있지 않은가? 단지 종리궁도의 몸에서 시큼털털한 냄새가 풍겨나온다는 것과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일파의 장문인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 등이 약간 아쉬울 뿐이었다. 순식간에 몇 개의 봉우리를 넘고 내(川)를 건너 뛰었다. 울창한 수림이 눈깜빡할 새 코앞으로 다가왔다가 다시 등뒤로 멀어지고, 집채만한 커다란 바위가 발밑으로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숭산을 벗어날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가던 종리궁도의 몸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진산월은 그 충격에 몇 차례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진산월은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 보려 했으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닥에 깔린 무수한 돌맹이들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서 음충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녀 왔습니다.”

그 음성은 종리궁도의 것이었다. 그 말로 보아 종리궁도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진산월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과연, 멀지 않은 곳에서 나직하면서도 걸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를 풀어주게.”
뒤이어 진산월은 종리궁도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자신의 몸이 바닥에 똑바로 세워지는 것을 느꼈다.
제압되었던 혈도는 아직 풀려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진산월은 장내의 광경을 둘러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수백 개의 돌로 쌓은 탑(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크고 작은 돌탑들이 월광 아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은 왠지 을씨년스러우면서도 고적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한 눈에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소림사의 후원에서 멀지 않은 탑림(塔林)임을 알아 보았다.
숭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줄 알았던 종리궁도가 의외로 다시 소림사쪽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커다란 탑 아래 한 명의 복면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복면인은 전신에 짙은 금포를 두르고 있었는데, 풍성한 금포에 머리 위까지 복면을 뒤집어 써서 도저히 체구와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다.
금포 복면인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불편한 곳은 없소?”

진산월은 그의 걸걸한 음성이 변성(變聲)된 것임을 알아차렸으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괜찮소. 종리대협의 신법이 너무 좋아서 아주 좋은 경험을 했소.”

진산월의 옆에 서 있던 종리궁도가 진산월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어이가 없었는지 눈을 슬쩍 치켜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정색을 하며 불쑥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종리궁도의 얼굴에는 한 줄기 숨길 수 없는 의혹의 빛이 짙게 떠올라 있었다.

“조금 전에 왜 전혀 반항하지 않고 내 손에 순순히 제압당한 것이냐?”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종리대협의 솜씨가 너무 빨라서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소.”

종리궁도의 송충이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그때는 나도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일파의 장문인이란 놈이 몸을 피하거나 손을 들어 대항할 기색조차 없었다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 아니냐?”

“내가 대항할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종리대협의 손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겠소?”

종리궁도는 눈쌀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네 놈이 일부러 내게 제압당한 것 같은…”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보다 혈도라도 좀 풀어주면 어떻겠소? 당신 말대로 장문인 체면에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서 있으려니 영 모양새가 우스워서 말이오.”

종리궁도는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탐색하듯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금의 복면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해혈(解穴)시켜 주어도 괜찮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금의 복면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궁도는 손을 내밀어 제압되었던 진산월의 마혈(痲穴)을 풀어주며 냉랭하게 말했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다음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겠다.”

진산월은 어깨 관절을 주무르며 조용히 웃었다.

“점혈(點穴)당하는 기분은 상당히 묘하군. 몸이 간지러운 것 같으면서도 묘한 한기(寒氣)와 함께 어깨 쪽에 이상한 통증이 느껴진단 말이오. 아마 종리대협의 공력이 특이해서 그렇겠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는 않군.”

가뜩이나 추악한 종리궁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져서 한층 더 음산하게 변했다.

“흐흐… 제법 배짱이 좋군. 하지만 실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배짱은 단순한 허세에 불과할 뿐이다.”

상당히 모욕적인 말이었는데도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옳은 말이오. 그래서 좀 더 나은 실력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오.”

그의 태도가 너무나 유들유들해서 종리궁도는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놈이로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을 알 수가 없으니…’

종리궁도가 황당함과 호기심이 범벅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사이 진산월은 금포 복면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금포 복면인의 위아래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불쑥 물었다.

“우리는 전에 만난 일이 있소?”

금포 복면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없소. 그런데 왜 그런걸 묻는거요?”

진산월은 싱겁게 히죽 웃었다.

“별건 아니오. 단지 귀하가 복면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목소리를 바꾼 것이 조금 이상해서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오.”

금포 복면인의 눈빛에서 신광(神光)이 번뜩거렸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이전에는 당신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소.”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오.”

진산월이 의외로 순순히 인정을 하자 금포 복면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오?”

진산월은 금포 복면인의 번뜩이는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한 번 본 사람의 눈빛은 그런대로 잘 기억하는 편인데 귀하의 눈빛은 처음 보는 생경한 것이오. 그래서 아직 만난 적이 없다고 생각한거요.”

금포 복면인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을 눈빛만으로 기억할 수 있다니 대단한 재주로군.”

“그건 재주라고 할 것도 아니오. 그보다는 귀하의 솜씨가 진짜 놀라운 것이지.”

“그건 무슨 말이오?”

“귀하는 미리 포섭한 포일융과 여섯 명의 고수들을 보내 운자추의 시선을 혼란시켰소.
그들을 일종의 방패막이로 삼은 셈이지. 게다가 당수인이 독을 쓸 것을 예상하고 종리대협으로 하여금 피독할 수 있는 물건을 지니게 했소. 그리고는 운자추와 당수인이 방심한 틈을 타 나를 빼내온 것이지.”

금포 복면인은 말없이 괴이한 눈빛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진산월은 종리궁도를 돌아보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종리대협의 품에 안겨 올 때 이상한 비린내 같은 게 느껴지더군. 해독(解毒) 성분이 강한 웅정(熊精)이나 동물성 영약의 경우에 종종 그런 냄새가 난다고 들었소.”

종리궁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 한 구석에는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확실히 그는 당수인이 손을 쓸 것에 대비해서 웅보환(熊寶丸)이라는 특이한 영약을 품속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웅보환은 이미 중독된 사람에게는 별 효능이 없지만, 피독(避毒)의 효과만큼은 굉장히 탁월한 물건이었다.
진산월은 금포 복면인을 향해 빙긋 웃음을 날렸다.

“그러니 운자추의 모든 행동을 사전에 훤히 궤뚫어보고 그를 철저히 농락한 귀하의 이런 솜씨야말로 가히 대단한 재주라고 할 수 있지 않겠소?”

금포 복면인은 한동안 묵묵히 진산월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조금 전보다 한결 차가워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군. 당신의 가장 큰 재주가 무엇인지…”

“난 재주 같은건 별로 없소.”

“아니. 한 가지 확실

한 재주가 있군.”

금포 복면인은 돌연 손가락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 미소. 사람들을 속이기 딱 좋은 순진한 미소를 가지고 있지 않소? 그 얼굴에 떠오른
미소만 보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속아 넘어간 자들이 상당히 많았겠지?”

진산월은 궁금한 듯 물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오?”

금포 복면인은 기광(奇光)이 번쩍거리는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속에 여우가 열 마리는 들어있는 사람이오. 심기(心機)가 깊고 잔꾀가 많으며 좀처럼
남에게 속아넘어가지 않지. 하지만 당신의 가장 대단한 점은 그런 점을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오.”

진산월은 뒷통수를 긁적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치 내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드는구료. 하지만 나는
근본이 아주 선량한 사람이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당신은 겉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

진산월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하하… 칭찬으로 생각하겠소. 그런데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려고 이 밤에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요?”

금포 복면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내가 당신을 보려는 목적은 다른 것이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에게 물어볼게 있소.”

“그게 무엇이오?”

“나는 처음에는 종리궁도가 잘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했소. 당신이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의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이제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소. 당신은 아마 일부러 종리궁도
의 손에 순순히 잡혀준 걸 거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소?”

“종리궁도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서였겠지. 다시 말해서 당신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종리궁도의 손에 제압당했다는 말이오. 그렇지 않소?”

진산월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귀하가 그렇게까지 생각하니 나로서도 더 할 말이 없구료.”

금포 복면인은 진산월의 그 말이 분명한 시인이라고 생각했는지 날카로운 음성으로 추궁하듯
물었다.

“그렇다면 이제 묻겠소. 당신은 왜 나를 만나려고 일부러 이곳까지 잡혀 온 거요?”

진산월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단지 귀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뿐이오.”

“그게 무엇이오?”

진산월은 돌연 정색을 했다.

“동중산을 돌려 주시오.”

그 말을 듣자 금포 복면인의 신형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유일하게 복면 밖으로 드러난 그의 눈빛은 몇 차례 세차게 깜박거렸다.
하나 이내 그는 침착함을 되찾은 듯 특유의 걸걸한 음성으로 물었다.

“사라진 동중산을 왜 내게서 찾는거요?”

진산월의 얼굴에 다시 예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그의 음성만큼은 평소와 달리 나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강호의 사람들은 동중산이 기보를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소. 심지어 운자추 조차도 나를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다만 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동중산이 아닌 내가
기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지.”

“그게 어떤 부류요?”

“동중산을 데려간 자들이오. 그들은 동중산에게서 기보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자 내가 기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거요.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기보의 행방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겠지.”

“……!”

“조금 전에 포일융이 강호의 소문 운운하며 나타났을 때 나는 그들이 동중산을 데려간 자들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소. 동중산이 없어진 건 어제 밤이고, 나는 그 사실을 철저한
비밀에 붙혔소. 그러니 소문 따위가 날 리가 없지 않겠소?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종리궁도의 손에 끌려올 필요가 있었던 거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종리궁도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오히려 진산월의 꼬임에 당했다는 것을 알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으나
금포 복면인의 앞이라 차마 화를 터뜨리지는 못하고 무서운 눈으로 진산월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산월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금포 복면인을 주시하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동중산은 누가 뭐래도 본파의 제자요. 나는 장문인의 신분으로 당연히 그를 되찾아올 책임이
있는 거요.”

금포 복면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동안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산월의
두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교차되었다.
잠시 후, 금포 복면인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그 것을 시인하지 않겠다면?”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의 신분으로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소.”

금포 복면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진산월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이 목소리를 바꾼 것은 당신의 음성을 내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만난 적은 없지만 목소리는 들었던 사람이 분명하오. 그래서 나같이
미련한 사람도 당신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지.”

진산월은 금포 복면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늦게 나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소, 백봉 정소소 소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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