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2화
제32장. 단봉공주(丹鳳公主)
한 마리의 붉은 봉황(鳳凰)이 금시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비상할 것만 같았다.
화려한 비단 위에 붉은 색 실로 수놓아진 봉황은 너무나 생동감이 넘쳐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홀려 놓을 듯 했다.
지금 그 붉은 봉황 무늬 궁장을 입은 여인은 커다란 태사의 위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아름다운 봉황이 도사리고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정교한 봉황 무늬가 궁장 전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봉황 무늬 보다는 그 궁장을 입고 있는 사람 자체가 더욱 더 봉황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한 마리 봉황과도 같았다.
높게 틀어올린 탐스런 흑발과 그 아래 자리잡은 고운 이마, 그리고 한없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두 개의 깊고 그윽한 눈… 눈 아래로는 붉은 빛 망사가 씌어져 있었다.
진산월은 왠지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사 아래 숨어 있는 얼굴의 나머지 부분이 모두 드러난다면 마음 속의 흔들림을 억제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망사 아래 살짝 드러난, 턱에서 목 아래로 내려오는 선(線)은 너무도 완벽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 목선은 이내 풍성한 궁장 아래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서 더욱 야릇한 환상과 매혹을 느끼게 했다.
물론 진산월이 붉은 궁장의 여인을 넋이 빠져라 주시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잠깐 그녀의 전신을 훑고는 이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노파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렸던 것이다.
하나 어디를 보고 있건 그의 마음이 온통 그녀에 대한 것으로 꽉 차버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었다.
진산월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한 번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 붉은 봉황은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어놓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억지로라도 궁장여인의 뒤에 서 있는 노파에게로 관심을 집중시키려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는 이내 노파의 이목구비를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노파는 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비단 금포(錦袍)를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궁장 여인의 붉은 색 옷이 더욱 선연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노파의 머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단 한 올도 없는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백발이었다.
그래서 궁장 여인의 짙은 흑발이 더욱 탐스러워 보였던 것 같았다.
노파의 미간과 양 볼에 파여진 깊은 주름살은 노파의 연륜(年輪)을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그것은 궁장 여인의 팽팽한 이마와 너무도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노파의 두 눈은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 냉기를 머금고 있어서 제아무리 철석간장의 호한(豪漢)이라 해도 정면으로 그 눈빛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매서웠다.
그래서일까, 궁장 여인의 맑고 그윽한 눈빛은 한 줄기 청량감과도 같은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세상에는 억지로 막는다고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굳이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일에는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몸을 맡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일 것이다.
진산월은 다시 궁장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매혹적인 눈빛이었다.
보기만 해도 짜릿해 지는 이런 눈빛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그가 본 것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물론 임영옥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포근하면서도 정겨워서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 눈빛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몰랐다.
하나 지금 보는 이 눈빛은 임영옥의 그러한 눈빛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심장의 고동을 빠르게 뛰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진산월은 이런 기분에 취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을 느꼈고,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게도 생각 되었다.
‘확실히 인생이란 다채롭군. 이런 곳,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그는 세상 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며 나름대로 묘한 흥취가 있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궁장 여인의 뒤에 서 있던 노파의 안색이 눈에 띄게 딱딱해지며 차갑기 그지없는 코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흥!”
노파와 궁장 여인이 나타난 뒤로 금교교와 엄쌍쌍은 궁장 여인의 양쪽 옆으로 가서 나란히 시립해 있었다.
심지어는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종리궁도마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공손한 표정으로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상황이어서인지 단지 냉랭한 한 번의 코웃음이었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하게 굳어져 버렸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몹시 어색함을 느꼈을텐데, 진산월은 별반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여전히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최소한 겉으로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노파의 눈꼬리가 꿈틀 치켜 올라가며 얼굴에 거미줄처럼 파여져 있는 주름살들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노파의 비쩍 마른 입술이 열리며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하나 그때 궁장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가요?”
조용한 음성.
참으로 조용한 음성이었다.
그런데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야릇한 매력이 담겨 있었다.
일단 들으면 일부러라도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어지는 그런 음성이었다.
진산월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더할 나위없이 영롱한 두 눈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전신이 짜릿해지는 느낌이었다.
진산월은 담대한 사람이었으나, 이때만은 풋내기처럼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기만을 바랬다.
“일이 내가 예상한 것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 같아서 조금 당황스러웠소. 그런데도…”
궁장 여인의 코 밑에 걸려 있는 망사가 가볍게 흔들리며 예의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라는 말인가요?”
“그렇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이런 음성을 매일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궁장 여인의 음성이나 눈빛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당신은 듣던 것보다 무례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솔직한 점은 마음에 드는군요.”
진산월은 순간적으로 야릇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는 물론 자신이 무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전 처음 만나는 여자를 앞에 두고 이상한 생각을 품고 있으니 당연히 무례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자신의 그런 생각을 그녀가 알아 차렸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기는 커녕 그를 좋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진산월은 태어난 이래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理想)과 목표에 충실하게 살아오도록 노력했으며, 남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를 염려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해 왔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그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적지 않은 지장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 하나 그만큼 그는 좀 더 인간적으로 성숙되는 것이 아닐까? 진산월은 묵묵히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의미를 알지 못할 한숨이었다.
“흐음.”
궁장 여인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왜 한숨을 내쉬는 건가요?”
진산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들어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오. 그래서 조금 어색한 생각이 들었소.”
“나는 당신을 꾸짖거나 추궁하려는게 아니니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보다 이제는 금삼매(琴三妹)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겠지요?”
그녀의 말마따나 진산월은 천봉궁주가 이곳에 없다는 금교교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족자 뒤의 밀실에 있는 사람이 천봉궁주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으나, 그의 추측은 잘못된 것이었다. 진산월은 금교교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순간적이나마 금소저를 의심한 점을 사과드리겠소.”
금교교는 그의 행동이 다소 뜻밖인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일부러 사과하실 것 까지는 없어요. 궁주님은 안 오셨어도 공주(公主)님께서 계시니 큰 차이는 없습니다.”
진산월은 새삼스런 눈으로 궁장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럼 소저께서 천봉궁의 소궁주(少宮主)이시오?”
궁장 여인은 예의 나직하면서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바로 단봉공주(丹鳳公主)에요.”
단봉공주! 그녀에게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이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되뇌이고 있을 때, 갑자기 노파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건방진 놈. 감히 공주님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다니 네 놈의 목은 쇳덩이로 만들었단 말이냐?”
아까부터 못마땅한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고 있던 노파가 주름살로 뒤덮인 눈을 부릅뜨고 버럭 노성을 질렀던 것이다. 그녀의 옆으로 쭉 찢어진 두 눈에서는 감히 바라보기도 힘들 정도로 싸늘한 안광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전신의 장포는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금시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살벌한 모습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몸에서 뿜어나오는 기세만으로 입고 있는 장포를 부풀린다는 것은 공력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지 않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정말 대단한 내공력이군. 무림에 저렇게 내공이 높은 여자가 있었던가?’
진산월은 감탄과 함께 노파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하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강호무림에 눈앞의 노파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진산월은 그녀가 최소한 강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지 삼십 년이 넘은 전대(前代)의 기인(奇人)이거나, 아니면 평생 천봉궁에만 눌러 살던 인물일 거라고 추측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추측은 정확한 것이었다. 자신의 호통소리에도 진산월이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오히려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노파의 주름살 투성이 얼굴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너무도 노화가 솟구쳐 몸 전체가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이런 찢어 죽일 놈이… 노신(老身)이 누구인줄 알고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본단 말이냐?”
그녀의 비쩍 마른 몸이 금시라도 진산월을 향해 날아올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노파의 불같은 성질에 내심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만에 하나라도 노파가 덮쳐온다면 그 가공할 내공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때 단봉공주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일파의 장문인이니 태모모(太姆姆)는 너무 무례를 범하지 마세요.”
그녀의 말 한 마디에 폭발할 듯하던 노파의 기세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노파는 여전히 성이 가라앉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을 한 차례 노려보고는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단봉공주의 영롱한 시선이 다시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내가 요구해도 봉황금시를 내놓지 않을 건가요?”
진산월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망설여졌다. 이치적으로 보아 그녀는 천봉궁의 소궁주이니 천봉궁을 대변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산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 생각은 조금 전과 같소. 천봉궁주 본인이나 모용대협이 보낸 사람 외에는 봉황금시를 건네줄 수 없소.”
“당신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거에요.”
“나는 모든 일을 정확하게 마무리하고 싶은 것 뿐이오.”
단봉공주는 더 이상의 말없이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진산월을 향해 있던 그녀의 시선은 어느 새 거두어진 채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눈빛이 사라지자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잠시 장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나 그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 사람은 제일 처음 진산월을 이곳으로 안내해 왔던 백봉 정소소였다. 정소소는 단봉공주를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모용공자(慕容公子)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뒤를 향했다. 과연 정소소의 뒤를 따라 실내로 들어서는 몇 사람이 있었다. 우선 중인들의 눈에 띄는 것은 앞에서 걸어들어오고 있는 두 명의 중년인이었다. 그들은 짙은 남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강호에 쌍둥이 고수들은 적지 않게 있었지만, 지금 눈앞의 이들처럼 완벽하게 닮은 사람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들은 비단 얼굴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키와 몸집, 머리 모양과 걸음걸이까지 완벽하게 똑같았다. 심지어는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 하나하나까지 같아서 마치 거울에 비친 한 사람의 모습같이 생각될 정도였다.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오면서 조금씩 서로 다른 부분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들 두 사람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하나 진산월은 이내 그들에게서 유일한 차이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병기가 달랐던 것이다. 우측의 중년인이 차고 있는 것은 고색 창연한 보검(寶劍)인 반면에, 좌측의 중년인은 칼날이 두툼한 장도(長刀)를 차고 있었다. 이것 또한 특이한 점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로 쌍둥이들은 자신들의 특징을 살려 특이한 합격술(合擊術)을 익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도 같은 병기를 익히는 법이었다. 그런데 겉모습이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병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진산월의 시선은 곧 두 명의 중년인에게서 떨어져 그들의 뒤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진산월은 더 이상 두 명의 쌍둥이 형제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지금 막 실내로 들어서고 있는 한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비단 진산월 뿐만이 아니었다.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에게로 고정되었다. 갑자기 장내의 공기가 일변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 사람은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있었다. 그 챙 밑으로는 은빛 그물이 총총하게 짜여진 망사가 달려 있어 도저히 그 사람의 용모를 짐작조차 할 수 없게 했다. 엷은 하늘색 유삼(儒衫)에 둘러 싸인 체구는 약간 호리호리한 편이었는데, 키가 크고 허리가 곧아서 마치 바람 앞에 선 옥수(玉樹)를 보는 듯 했다. 한쪽 손에는 매미 날개같이 얇은 재질로 이루어진 섭선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자연스럽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거만해 보일 수도 있는 자세였는데도, 그에게는 몹시도 잘 어울려 보였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고고함과 도도한 기상이 배어나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외경(畏敬)의 마음이 들게 했다. 그것은 결코 억지로 만들거나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타고날 때부터의 특이한 천성(天性)과 오랜 동안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풍겨져 나오는 일종의 품위 같은 것이었다.
진산월은 유삼 문사를 보는 순간, 공연히 위축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야릇한 느낌이었다. 이 하늘색 유삼을 걸친 문사는 태생부터 진산월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귀한 혈통(血統)을 이어받았을 것이고, 진산월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놀라운 학식과 엄청난 무공, 고매한 성품을 함께 지니고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해 스스로 자격지심(自激之心)에 빠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왠지 착잡한 자기비하(自己卑下)의 감정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걸음걸이 하나를 보아도 그 유삼 문사에게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매혹적인 그 무언가가 느껴졌다. 가볍게 섭선을 흔드는 동작만으로도 우아한 품격이 흘러나왔다. 얼굴은 비록 넓은 챙과 그물망상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 속에 담긴 얼굴 또한 절세(絶世)의 미남자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마침내 유삼 문사는 단봉공주의 앞으로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쌍둥이 형제는 이미 양 옆으로 나뉘어서 유삼 문사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단봉공주는 유삼 문사가 처음 문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진산월은 자신을 만날 때와는 달리 영롱한 눈을 반짝이며 유삼 문사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녀를 보자 왠지 기분이 울적해 졌다. 그것이 질투의 다른 모습임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유삼 문사와 단봉공주는 서로를 응시한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각기 망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두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광경은 조금은 색다른 것이었으나, 그들이 몹시도 잘 어울려 보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진산월은 자신만이 낯선 곳에 혼자 동떨어져 있다는 야릇한 소외감이 느껴졌다.
정적을 깬 것은 단봉공주였다.
“삼 년만이군요.”
유삼 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정확히 삼년 이개월 하고도 십칠일 만이오.”
흔히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을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데, 지금 이 유삼 문사의 음성이야말로 듣는 이의 마음을 청아하게 씻어주는 듯이 맑고 깨끗한 음성이었다. 어떤 여자라 할지라도 이런 음성을 듣게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단봉공주의 얼굴에 걸린 망사가 가볍게 흔들렸다. 비록 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으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그녀가 지금 나직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모용공자는 언제나 철저할 정도로 정확하군요. 우리가 만난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는데 어찌 잊을 수가 있겠소?”
유삼 문사의 말은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 속에는 기이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봉공주는 특유의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당시 모용대협께서는 다음에 내가 모용공자를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바로 강호무림에서 제일가는 고수(高手)를 보게 되는 날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뒤로 나는 쭉 오늘같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번에는 유삼 문사의 모자에 달린 망사가 가는 떨림을 일으켰다.
“그건 조부님께서 호기를 부려본 것이오. 조부님과 봉황궁주께서 건재하신데 누가 감히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를 논(論)할 수 있겠소?”
“모용대협께서 결코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아무튼 나로서는 모용공자를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군요.”
그녀같은 여자의 입에서 남자를 다시 만나 반갑다드니, 만나게 되기를 기다렸다느니의 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의 마음에서 유삼 문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여실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 후로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천봉궁이나 모용세가의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진산월과 동중산으로서는 영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진산월은 이렇게 한쪽 구석에 선 채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어야 하는 자신이 몹시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때 그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단봉공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제 모용공자께서 오셨으니 이번 일을 원만하게 매듭지을 수 있겠군요.”
진산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말은 비록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진산월의 고집으로 일이 복잡하게 꼬여졌다는 은근한 풍자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산월은 고개를 돌리다가 유삼 문사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진산월은 알지 못할 감흥에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유삼 문사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몸 속 깊숙한 곳에서 기이한 전율과 흥분이 불같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 떨림은 이내 멎었지만, 진산월은 지금의 이 감흥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먼 후일이 되어서야 진산월은 그것이 바로 숙명(宿命)이라는 이름의 괴물임을 알았다. 망사 사이로 내비치는 유삼 문사의 시선은 맑고 투명했다. 유삼 문사는 진산월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 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귀하가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이구료. 나는 모용봉(慕容峯)이라 하오.”
진산월은 정말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높고 거대한 봉우리처럼 그에게서도 고고하고 도도한 기상이 느껴졌다.
“말로만 듣던 모용세가의 공자를 보게 되니 반갑소. 내 이름은 진산월이오.”
모용봉은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아 시간을 질질 끄는 성격이 아닌 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귀하가 조부님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진산월은 서슴없이 들고 있던 봉황금시를 그에게 내밀었다.
“물건은 여기 있소. 확인해 보시오.”
모용봉은 진산월에게서 건네받은 봉황금시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품 속으로 대충 갈무리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동중산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그동안 적지 않은 고생을 하여 간신히 지켜온 봉황금시가 너무도 쉽게 모용봉의 품 속으로 사라지자 짙은 아쉬움과 허탈함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아쉬운 사람이 어디 동중산 뿐이겠는가? 하나 장내의 누구도 감히 그런 내색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것은 모용세가의 공자(公子)라는 신분이 주는 중압감과 모용봉의 개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엄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봉황금시를 돌려받으면 반색을 하거나 최소한 기뻐하는 기색이라도 보일 줄 알았던 모용봉이 너무도 태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보이자 약간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말의 씁쓸함을 느꼈다. 사례를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호의가 상대에게서 조금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썩 기분내키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단봉공주가 다시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용건이 모두 끝난 것 같군요. 진장문인께선 더 볼 일이 있나요?”
진산월의 얼굴이 처음으로 가볍게 변했다. 그녀의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축객령(逐客令)에 가까운 것이었다. 기껏 사람을 불러와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해놓고는 물건을 내놓자 이제는 어서 사라지라는 식의 말은 모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짙은 밤공기가 폐 속 깊숙이 밀려 들었다. 검은 하늘에 점점이 박혀 있는 희미한 별빛들이 그를 보며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산월의 지금 심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강호에 출도한 이후 적지 않은 수모를 당해왔었지만 그때마다 진산월은 웃음과 여유를 잃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진산월은 단봉공주를 향해 빙긋이 웃어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당당히 나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진산월이 아무리 여유를 보이고 느긋함을 유지하는 척 행세하고 있다 해도 그는 자신이 단봉공주나 모용봉과 동격(同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종리궁도의 말이 맞았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배짱이나 여유는 결국 허세에 불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휘이잉!
때마침 불어오는 밤바람이 옷자락을 스쳐가자 피부에 서늘한 한기가 돋아났다. 깊어가는 가을의 밤바람은 제법 차가웠지만, 진산월의 마음 속에는 그보다 더욱 매서운 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진산월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 사부님!’
둥그런 만월(滿月)속에 임장홍의 근심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힘을 내라, 산월아!’
온화하고 부드러운 임장홍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 했다.
‘자신이 남보다 부족한 것을 탓할 필요는 없다. 부족한 자만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법이다.’
진산월은 우두커니 만월을 올려다 본 채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동중산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동중산은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진산월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너는 왜 나를 따라오는 것이냐?”
동중산은 그의 돌연한 질문에 한 차례 움찔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종남파의 제자입니다. 제자가 장문인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진산월의 음성은 평소와는 달리 엄격한 빛을 담고 있었다.
“너는 이제 봉황금시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굳이 본파의 힘을 빌지 않아도 강호에서 별 지장을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본파를 떠나려 하지 않느냐? 조금 전만 해도 너는 스스로 파문을 자청하지 않았느냐?”
동중산은 진산월이 계속 추궁하자 얼굴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는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장문인과 함께라면 이 험난한 강호를 헤쳐나가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시한 종남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는 모용세가나 천봉궁의 수하가 되어 세상을 호령하는 것이 더욱 낫지 않겠느냐?”
“그들은 제자에게 너무 과분합니다. 저는 그저 종남파의 제자로 만족하겠습니다.”
진산월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자 동중산은 어색하게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저는 종남파가 마음에 듭니다.”
동중산의 그 말은 지금까지 그가 했던 많은 말들 중에서 가장 진산월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돌연 휑하니 몸을 돌렸다.
“늦기 전에 돌아가자. 내일 아침부터는 더욱 바빠질 것이다.”
동중산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두 사람의 모습은 밤의 장막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