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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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3화


제33장. 무림대회(武林大會)

대망(大望)의 아침이 밝았다. 낙일방은 아침 일찍 일어나 침상 위에 우두커니 앉은 채 창문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은 위치에서는 멀리 울창한 수림 너머로 조금씩 올라오고 있는 태양의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한동안 낙일방은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고 잠옷을 입은 채로 멍하니 동터오는 태양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느냐?”

낙일방이 돌아보니 언제 일어났는지 정해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침상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낙일방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정해를 쳐다보았다.

“정사형. 사형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얼 말이냐?”

“사형은 우리가 정말 이번 무림대회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세요?”

정해는 느닷없는 낙일방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으나 이내 자신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먼 길을 달려왔겠느냐?”

낙일방의 얼굴은 좀처럼 활짝 펴지지 않았다.

“저도 얼마전까지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오늘부터 무림대회가 열린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자신이 없어지는군요. 사형도 보았잖아요? 형산파의 이대제자 조차도 저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요. 형산파 내에서도 그보다 무공이 강한 고수들이 즐비할텐데 강호 전체에는 또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있을까요?”

정해는 낙일방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도 그런 걱정 때문에 지난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새벽까지 뒤척거렸던 것이다. 어디 정해 뿐이겠는가? 평소에 자신만만하고 배짱이 좋기로 소문난 응계성조차도 간밤에 몇 번이나 창문가를 서성이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었다는 것을 정해도 알고 있었다. 정해는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호에 고수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무공실력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미 이 길을 가기로 결정해놓고 이제 와서 주저하거나 망설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제서야 낙일방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주저했던 건 아니에요. 단지 걱정이 좀 되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사형 말을 듣고 보니 다시 힘이 나는군요.”

정해는 낙일방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들겨 주었다.

“어깨를 펴고 활짝 웃어라. 그게 너 다운 모습이다.”

“헤헤… 알았어요.”

그때 갑자기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제길…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다니 정말 한심한 놈들이구나. 자꾸 떠들면 입을 봉해 버릴테다!”

낙일방이 움찔 놀라 돌아보니 언제 일어났는지 응계성이 침상위에 앉자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낙일방은 어마 뜨거라 하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는 방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정해가 급히 물었다.

“일방, 어딜 가느냐?”

낙일방은 조금이라도 이곳에 더 있다가는 응계성에게 한바탕 경을 칠거라고 생각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며 대답했다.

“장문사형이 일어났는지 가보려고요. 사형도 빨리 나오세요.”

말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낙일방의 모습은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해는 멋적은 모습으로 응계성을 돌아보다가 자신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희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사형도 준비하고 나오십시오.”

응계성은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못마땅한 기색을 얼굴에 송두리째 드러내며 방문을 나서는 정해의 뒷모습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정해마저 밖으로 나가자 갑자기 머리통을 박박 긁으며 투덜거렸다.

“아… 짜증나는군. 간밤에 뒤척이다가 새벽에 간신히 잠들었는데 저 녀석들 때문에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깨었으니…”

응계성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가 얼마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났다.

“제기랄! 어차피 잠은 다 잤군.”

그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자신도 어슬렁거리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청에는 이미 몇 사람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원건과 대화를 하고 있던 진산월은 걸어나오는 응계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벌써 일어났느냐?”

응계성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일방 녀석이 하도 떠들어서 잠이 다 깨 버렸습니다. 게다가 전 원래 아침 잠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응계성은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멀지 않은 곳에 동중산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치켜 떴다. 동중산은 응계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동중산은 그동안 응계성이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말도 없이 떠나갔다 다시 돌아온 자신을 보면 길길이 날뛸 거라고 예상하고 미리 움츠려 든 것이다. 하나 응계성은 한 차례 매서운 눈으로 동중산을 쏘아보았을 뿐,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응계성 뿐 아니라 조금 전에 얼굴을 마주쳤던 낙일방과 정해 또한 동중산을 보고도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다. 동중산은 처음에는 몹시 불편했으나, 이내 그들이 자신을 일부러 따돌리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불안했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곧이어 방에서 나온 임영옥이 동중산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척을 했을 때, 동중산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샘물처럼 솟아나왔다.

“잘 잤어요?”

임영옥은 마치 하룻 밤 외박을 하고 돌아온 동생을 대하듯 동중산을 대했던 것이다.
동중산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예. 달게 잤습니다. 사고(師姑)께서도 편안히 주무셨는지요?”

임영옥은 부드럽게 웃었다.

“난 별로 잘 자지 못했어요.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에 간신히 눈을 붙였죠.”

그때 진산월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 일어난 것 같은데, 여기서 애만 태울 것이 아니라 조금 일찍 나가도록 하지.”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를 나온 중인들은 이내 혀를 내둘렀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무림집회가 벌어지는 초조암으로 가는 길은 인파로 빽빽이 들어찼던 것이다.
각종 병장기를 소지한 각양각색의 무림인들이 한 곳으로 몰려가는 광경은 강호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낙일방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하구나. 무슨 사람들이 아침부터 이렇게 많이 몰려나온단 말인가?”

정해가 그의 머리를 툭 쳤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냐?”

낙일방은 뒷통수를 긁적이며 멋적게 웃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오늘은 정말 볼만하겠군요.”

그의 옆에 있던 상원건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볼만 할 정도가 아니라 일생(一生)에 한 번 볼까말까하는 놀라운 경험이 될걸세.”

아닌게 아니라 강호에서 경험이 풍부한 상원건 조차도 오늘과 같은 인파는 별로 본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이 강호에서 크고 작은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림인들임을 생각한다면 이번 집회가 무림사(武林史)이래 최고의 모임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행렬은 초조암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늘어나서 종내에는 옆 사람과 부딪치지 않고 걷기조차 힘들 정도가 되었다.
낙일방이 지대가 조금 높은 구릉에 올라가서 뒤를 돌아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끝없이 늘어선 전각들 사이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낙일방은 사람들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마침내 응계성에게 핀잔을 듣고 말았다.

“멍청한 자식. 그러다 또 쓸데없는 시비를 벌이려 하느냐? 대체 세상구경을 처음 하는 놈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신기하다고 토끼눈을 뜨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거냐?”

낙일방은 히죽 웃었다.

“그러는 응사형도 눈이 빨간걸 보니 어제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잔 모양이죠?”

“뭐라고? 네 녀석이 무얼 안다고…”

응계성이 고리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낙일방은 재빨리 진산월의 뒤로 몸을 숨기며 딴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야! 세상에 저렇게 뚱뚱한 사람도 있구나…!”

응계성은 처음에는 낙일방이 딴청을 부리는 줄 알고 호통을 치려다가 낙일방이 여전히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들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괴이한 행색의 인물이 걸어가고 있었다.
낙일방의 말대로 그는 무척이나 뚱뚱한 몸집의 인물이었다.
반백(半白)의 머리에 얼굴은 어린 아이처럼 붉었는데, 어찌나 살이 쪘는지 마치 물 밖으로 나온 하마(河馬)를 보는 듯 했다.
게다가 전신에는 이상야릇한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어서,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이는 뱃살과 장신구가 서로 부딪치며 기이한 음향을 내고 있었다.
더구나 두 눈은 퉁방울만하고 코는 왠만한 어린 아이의 주먹만큼이나 크며, 입은 두툼한 메기 입이어서 간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사나운 인상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낙일방과 응계성을 따라 일제히 그 사람에게로 향했다.
정해와 상소홍 등 젊은 사람들은 그 뚱뚱보의 행색이 재미있는지 신기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상원건과 동중산 등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특히 진산수 뇌일봉은 뚱뚱보를 보고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며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이었다.
낙일방은 재빨리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고는 뇌일봉을 향해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뇌일봉은 퉁명스런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노부가 어찌 저런 인간백정을 안단 말이냐?”

말은 모른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낙일방은 슬쩍 뇌일봉의 눈치를 살폈지만, 뇌일봉이 험상궃은 얼굴로 노려보자 재빨리 상원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협…”

상원건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뇌일봉이 계속 언짢은 표정이자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만간에 알게 될테니 너무 서두르지 말게.”

낙일방은 궁금한 생각이 가득 일어났으나 상원건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동중산에게 묻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운 일이었다.

‘대체 저 자가 누구길래 뇌숙부가 저토록 험악한 표정을 짓는 거지?’

낙일방은 불같이 일어나는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힐끔힐끔 그 뚱뚱보를 쳐다보았다.
뚱뚱보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인파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는 동안 진산월 일행은 마침내 초조암 앞에 도착했다.
초조암은 오유봉의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는 조용한 사찰이었다.
평상시에는 출입이 통제되어 소림사 내에서도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만이 들락거릴 수 있었으나, 오늘은 수많은 사람들로 초조암 앞의 넓은 공터가 가득 메워져 있었다.
공터의 넓이는 대략 이천 여평쯤 되어 보였는데, 그 공터의 중앙에 사방이 십 여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대(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의 높이는 일 장쯤 되었고, 사방으로 천막과 의자들이 빽빽이 놓여져 있어 한 눈에 보기에도 더할 나위없이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그 천막의 앞에는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낙일방은 안력을 돋구어서야 그 깃발들이 강호에 이름난 문파들의 명호를 적어 놓은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천막 안에는 벌써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대의 아래에도 수 백개에 달하는 간이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 위로 올라가지 않고 그 간이의자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낙일방은 일행들의 제일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대 위로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대의 입구에 서 있던 승려 중 한 사람이 그의 앞을 가로 막으며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시주는 어느 문파에서 오셨는지요?”

낙일방은 가슴을 펴고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섬서성의 종남에서 왔소. 본파의 장문인도 오셨으니 길을 비켜 주시오.”

승려는 낙일방과 낙일방의 뒤에 서 있는 진산월 등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다시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죄송합니다만 시주들께서는 대 아래에 자리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낙일방은 눈을 치켜 떴다.

“아니 왜 우리는 올라갈 수 없단 말이오?”

“이 대 위에는 강호무림의 삼십 이개 대문파와 명숙(名宿)들만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삼십 이개 대문파라니? 본파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단 말이오?”

“아미타불. 빈승이 보고 받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낙일방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변해 버렸다. 특히 응계성의 표정은 욹으락붉으락하여 금시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정해가 재빨리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응계성의 주먹은 벌써 그 얄미운 승려를 향해 날아갔을 것이다. 모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뇌일봉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거 재미있군. 그 삼십이개 문파는 누가 정한 것인가?”

승려는 뇌일봉의 기색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이번 집회를 주관하시는 본사와 무당, 양파(兩派)의 장문인들께서 심사숙고하여 결정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이라면 현재 강호무림의 제일가는 실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합의하여 결정했다고 하면 누구라도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뇌일봉의 얼굴에도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진산월이 몸을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

“내려가자.”

낙일방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장문 사형. 하지만…”

“어디에 앉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다. 우리는 집회에 참석하러 왔으니 어디에 앉던 간에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진산월이 먼저 몸을 돌려 대 아래로 내려가자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하나 모두의 표정이 별로 밝지 못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상원건은 나직히 혀를 찼다.

“쯧. 강호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는 소림과 무당에서도 사람을 차별할 줄은 몰랐군. 강호에 어찌 명문정파와 명숙들만 존재한단 말인가?”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집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라도 신분과 지위에 따라 군웅(群雄)들을 구분해 놓을 필요성이 있었을 겁니다.”

상원건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산월 본인이 이렇게 말하자 속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다니… 어떻게 저런 나이에 마음 속의 화를 억누르는 방법을 알고 있을까?’

대 아래에는 이미 수 백 개의 간이 의자들이 놓여 있었는데, 벌써 대에서 가까운 곳에는 대부분의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진산월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운이 좋게도 대에서 오 장 쯤 떨어진 곳에 빈 자리 몇 개를 발견하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 구석진 곳이어서 아직 그곳까지 사람들이 들어차지 않았던 것이다. 낙일방은 여전히 분하고 억울한 표정이 얼굴 한 구석에 남아 있었으나 그래도 자리에 앉자 눈을 빛내며 대 위를 주시했다. 아마 그 마음 속에는 대체 얼마나 잘난 놈들이 대 위에 앉아 있나 구경 좀 하자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몇 차례 대 위를 바라보던 낙일방이 자신도 모르게 경호성을 터뜨렸다.

“어? 저 여자들도 와 있군.”

중인들은 낙일방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의 중앙 부근에는 유난히 호화스러운 천막이 차려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붉은 얼룩 문양의 천막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는데, 자세히 시력을 돋구어 보면 그것은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정교한 봉황 무늬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봉황 무늬 천막 안에는 중인들의 낯에 익은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다름아닌 천봉팔선자 중의 금교교와 엄쌍쌍, 누산산 등이었다. 하나 진산월의 시선은 그녀들의 뒤에 앉아 있는 두 남녀에 쏠려 있었다. 화려한 두 개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남녀는 각기 하늘색 유삼과 붉은 색 궁장을 차려 입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망사가 씌워져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천막에서도 가장 깊숙한 그늘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진산월이 있는 곳에서는 안력을 돋구어야 간신히 그들의 형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그들은 서로 어깨를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다정한 두 연인(戀人)이 사랑의 밀어(密語)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산월은 곧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중인들 중 동중산을 제외하고는 그 두 남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남녀가 있는 붉은 천막의 양 옆으로는 천하에 명성이 높은 소림과 무당의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낙일방도 엄쌍쌍과 누산산의 얼굴을 몇 차례 보다가 이내 우측의 천막으로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냈다. 우선 중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붉은 색과 황색이 강렬하게 조화를 이룬 소림사 특유의 복장이었다. 천막은 높고 컸으며, 그 안에는 모두 열 다섯 개의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중앙의 몇 자리는 비어 있었고, 중간에 위치한 대 여섯 개의 의자에는 근엄한 표정의 고승들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어린 사람은 오십 대 중반쯤 되었고, 가장 많은 사람은 칠십에 가까워 보였다. 가장 뒤쪽에는 체격이 건장한 젊은 승려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들의 눈에서 뿜어나오는 형형한 신광(神光)을 볼 수 있었다. 상원건이 눈을 빛내며 그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귀한 구경을 하는군. 저 뒤에 서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우측의 인물은 일전에 만난 적이 있네. 이런 자리가 아니라면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사람이니 눈여겨 보도록 하게.”

중인들이 보니 그 승려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듯한 거구에 부리부리한 호목(虎目)과 정광(精光)이 번뜩이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어 위맹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더구나 손에는 자기 키보다 더 큰 거대한 선장(禪杖)을 들고 있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왕(天王)을 연상케 했다. 낙일방은 조금 전부터 입이 근질거렸던 참이라 재빨리 물었다.

“상대협. 저 자가 누구인데 그러십니까?”

“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팔대신승(八大神僧)중의 한 사람인 대정(大丁)일세.”

상원건의 말에 모두들 해연히 놀랐다. 소림사의 팔대신승은 비단 소림사 뿐만 아니라 강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원래 소림의 일대 제자들은 의무적으로 십 년동안 나한당(羅漢堂)에 기거하며 천고(千古)의 절진(絶陣)으로 알려진 소나한진(小羅漢陣)을 연마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들 중 기재가 특출난 열여덟 명이 십팔나한(十八羅漢)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데, 당대에는 어찌된 일인지 십팔나한 보다는 팔대신승의 명성이 더욱 드높았다. 알려진 바로는 그들 여덟 명의 신승들은 그 재주가 가히 하늘도 놀라고 땅도 꺼지게 할 정도여서 나한당주(羅漢堂主)의 특별 배려로 나한당을 벗어나 마음껏 재주를 연마하도록 허가 받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팔대신승이 머지않아 소림을 이끌어갈 동량(棟梁)이 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아! 저 사람이 바로 한 번 성을 내면 지하의 염라대왕이 놀라 뛰쳐나온다는 바로 그 염라승(閻羅僧) 대정이로군요.”

낙일방은 그에 대한 소문을 이미 많이 들었는지 호기심과 흥미가 뒤섞인 얼굴로 한참 동안이나 대정을 보고 있었다. 대정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그와 비슷한 나이의 승려들이었다. 한 사람은 비쩍 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유난히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원숭이처럼 기형적인 체형이었는데, 그 기다란 두 팔로 자연스럽게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유유자적해 보였다. 다른 한 사람은 새하얀 피부에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자였다. 대충 보기만 해도 두 사람 모두 하나같이 신태비범한 모습들이었다. 하나 강호에서 경험이 풍부한 상원건도 두 사람의 정확한 신분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대정과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팔대신승 중의 인물들이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다시 몇 명의 고수들이 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낙일방은 자신들을 제지했던 승려가 그들에게는 순순히 길을 터주는 것을 보고는 심통이 잔뜩 난 얼굴로 투덜거리다가 갑자기 눈을 치켜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이제보니 저 놈들은 바로 그때 그 자식들 아니야?”

중인들이 그의 고함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대 위로 올라가고 있는 인물들은 다름아닌 형산파의 고수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일전에 팽파진에서 진산월 일행과 시비가 붙었던 황일기와 조뢰명, 좌동도 섞여 있었다. 정해가 쓴웃음을 지으며 낙일방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산파는 구대문파에 속해 있으니 당연히 올라갈 수 있겠지. 그런 걸 가지고 자꾸 속상해 하면 괜히 기분만 언짢아진다.”

낙일방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런 놈들이 잘난 척 뻐기면서 대 위로 올라가는걸 보니 정말 미치겠어요.”

“알았으니 이제 그만 해라.”

“하지만…”

정해는 살짝 눈짓을 하며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이 바보야. 그만 하라니까.”

그제서야 낙일방은 주위를 힐끗 둘러보다가 응계성이 금시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으로 씩씩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상원건과 낙일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평상시에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있던 진산월의 표정마저 왠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낙일방은 공연히 머쓱해져서 진산월의 눈치를 살피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았다. 진산월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자에 단정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우두커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그윽한 향기와 함께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걱정이 되세요?”

진산월은 문득 상념에게서 깨어나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투명하고 맑은 눈빛의 임영옥이 약간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게 아니야.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임영옥은 말없이 그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진산월은 그녀의 그런 표정을 언제나 좋아했다. 지금도 그는 그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저곳에 올라간 사람들도 반드시 편안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자세들이 하나같이 뻣뻣하게 굳어 있어서 말이야.”

진산월의 말마따나 대 위에 앉아 있는 중원의 내노라하는 문파들의 고수들은 다소 불편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많은 군웅들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다보니 다소 긴장되고 어색한 모양이었다. 게중에는 노골적으로 짜증을 부리며 어서 빨리 대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때였다.

둥…!

갑자기 어디선가 둔중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 북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저자거리처럼 소란스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둥둥….!

북 소리는 두 번을 더 울린 다음 진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 인파로 가득 들어찬 대회장의 남쪽에 하나의 통로가 뚫리며 십 여명의 인물들이 그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가장 앞에는 중년의 승려와 도인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중년의 승려는 얼굴이 네모지고 두 눈이 부리부리했으며, 오른 손에 은은한 옥빛이 아른거리는 불장(佛杖)을 들고 있었다. 도인은 머리에 도관(道冠)을 쓰고 푸른 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턱밑까지 내려오는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어 청수한 인상이었다. 그들을 보자 주변에 몰려 있던 몇몇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들이다!”

과연 그들은 소림사의 장문인인 대방선사(大方禪師)와 무당파의 장교인 현령진인(玄靈眞人)이었다. 당대 무림의 거두(巨頭)들이라 할 수 있는 소림과 무당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오고 있는 광경은 그 장면 자체로도 가히 볼만한 것이었다. 그들의 뒤로는 소림과 무당의 수뇌급 인물들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비범한 인상의 승려와 도인들이 다섯 명씩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대 위에 나타나자 장내에 구름같이 몰려든 군웅들이 일제히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우와아!”

“드디어 시작이다!”

그 함성은 드넓은 공터를 뒤흔들고 숭산의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 함성을 듣고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무림인이 아닐 것이다. 낙일방과 정해 등도 조금 전의 일들을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며 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와아아!”

그야말로 장내는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무림의 역사이래 지금과 같은 장관은 일찍이 없을 것이다. 중원의 각지에서 몰려든 수 천명의 군웅들이 한마음이 되어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는 광경은 아직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상원건과 뇌일봉같은 명숙들 조차도 가슴 벅찬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뇌일봉은 이 말만을 뇌조리고 있었고, 상원건은 연신 눈을 빛내며 턱밑의 수염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환호성을 받으며 대 위로 올라온 소림과 무당의 인물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각파의 인물들과 가볍게 인사를 교환한 후 자신들의 문파가 있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도 장내의 함성과 열광은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다. 낙일방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정해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소림사 장문인이 생각보다 훨씬 젊군요. 난 주름살 투성이의 고승인줄 알았는데…”

장내가 어찌나 소란스럽던지 왠만큼 큰 목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옆 사람에게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에 낙일방의 음성은 마치 고함을 지르듯 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상원건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대방은 소림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장문인에 오른 인물이라네.”

“아! 그럼 굉장한 기재인 모양이군요.”

상원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그가 보기드문 인재라는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가 소림사의 장문인이 된 것에는 나름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

낙일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복잡한 사정이라니요?”

“전대(前代)의 소림 장문인은 대방의 사부인 굉요대선사(宏了大禪師)였는데, 그 분은 인덕(人德)이 훌륭하고 불심(佛心)이 깊기로 유명한 분이셨네.”

굉요대선사라면 낙일방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강호인들이 소림생불(少林生佛)이라 부를 정도로 명망이 자자한 일대고승(一大高僧)이었다. 오 년전, 굉요선사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遺命)을 달리하여 소림의 장문인 자리는 공석(空席)이 되고 말았다. 당시 굉요에게는 여섯 명의 사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한 사람이 장문인 지위를 맡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이 모두 고사(固辭)를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다음 대(代)의 제자들인 대자배(大字輩)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대자배의 일대제자들 중 최연장자는 대광(大廣)이었다. 대광은 굉요의 유일한 사형인 굉법(宏法)의 대제자로, 과감하면서도 야망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굉법은 자신의 제자를 장문인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굉요의 다른 사형제들은 침착하고 은인자중한 대방에게 더 호감을 가졌다. 당시 대광을 지지하는 무리들과 대방을 후원하는 무리들이 서로 대립하여 소림사는 한바탕 풍운(風雲)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양심당(養心堂)에 은거해 있던 세 명의 장로(長老)들이 나서서 대방을 장문인으로 지목하였기 때문에 사태가 원만히 수습될 수 있었다. 당시 대방의 나이는 서른 아홉으로, 소림사에서 그 정도 나이의 승려가 장문인 자리에 오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방은 몇몇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문파를 별 탈 없이 잘 영도하여 작금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성세(盛勢)를 능가할 정도로 소림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그때문인지 대방을 대하는 소림사 고수들의 자세에는 은은한 경의의 빛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는 미리 의자에 앉아 있던 굉자배(宏字輩)의 고승들조차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리는 형편이었다. 대방은 그들에게 예의를 잃지 않고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장내의 들뜬 분위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대방은 자신의 뒤를 수행하던 승려 중 한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 승려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대의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천천히라고는 했지만, 그의 신형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이삼 장의 거리를 쑥쑥 내딛고 있었다. 그것은 보는 이들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와아…!”

중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져나왔다. 승려가 펼친 것은 소나이신법(小那移身法)이라는 것으로,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절정(絶頂)의 수련을 쌓지 않고서는 완성하기 어려운 상승(上乘)의 경신술이었다. 그 승려는 나이가 서른 정도 되어 보였는데, 평범한 용모에 체구도 그리 크지 않아서 보통 때였다면 전혀 세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 위에 앉아 있는 각파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대 아래 운집한 엄청난 수의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스읏!

두 세 번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것 같았는데 승려는 어느 새 대의 중앙부근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단정한 자세로 한 손을 들어 소림사 특유의 예를 취하며 불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사의 대현(大賢)이라 하옵니다. 오늘 여러 군웅들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의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의 심후한 공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게중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무공 실력이나 공력의 정도로 보아서 필시 유명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전혀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다만 대자배의 항렬을 쓰고 있는만큼 대방선사의 사제 쯤 되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대현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본사에서 개최하는 무림대회는 석달 전에 본사의 장문인과 무당파의 장교(掌敎)이신 현령진인께서 처음 발의하신 것으로, 그 목적은 익히 알려진대로 조만간 벌어질 서장(西藏) 천룡사(天龍寺)와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천룡사라는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희낙락하던 군웅들의 표정이 모두 무겁게 가라앉아 버렸다.

천룡사!

이 이름은 중원인들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두려움과 경이의 상징이었다. 천룡사는 원래 서장 홍모교(紅帽敎)의 일파(一派)로, 그 역사는 소림사보다도 오래 되었다고 한다. 흔히 밀종(密宗)이라고 불리우는 천축(天竺)의 밀교(密敎)가 홍모교와 황모교(黃帽敎)로 갈라지고, 그중 홍모교가 다시 천룡(天龍)과 보수(寶樹)의 양 파로 갈라진 것이 오백 년 전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수많은 분파가 생겨났으나,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천룡의 일맥을 차지하고 있는 천룡사와 황모교의 분파 중 하나인 뢰음사(雷音寺)였다. 천룡사와 뢰음사는 서장 밀교의 주도권을 놓고 오랫동안 치열한 암투를 전개했으나, 오십 년 전에 천룡사에서 한 명의 절대천재가 탄생한 뒤로 천룡사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 고수가 서장 밀교 사상 최고의 고수라 불리우는 아난대활불(阿難大活佛)이었다. 아난대활불의 지도로 천룡사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단숨에 서장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중원무림마저 넘보게 되었다. 하나 당시에는 중원도 그에 못지 않은 무적의 고수가 버티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일대대협 모용단죽이었다. 아난대활불은 천여명의 천룡사 승인(僧人)들을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오다 모용단죽을 정점으로 하는 구파일방 고수들의 제지를 받았다. 필연적으로 아난대활불과 모용단죽은 필생(必生)의 격전을 벌이게 되었으며, 두 사람의 싸움은 무림사(武林史)에 기록될만한 놀라운 것이었다고 한다. 그 싸움의 결과 아난대활불은 천룡사 승인들을 이끌고 다시 서장으로 돌아갔으며, 모용단죽은 불후(不朽)의 명성을 남기게 되었다. 하나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의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떠나기 전, 아난대활불이 모용단죽을 향해 남긴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뿐이었다.

  •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십 년 후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그때 진짜 승부를 갈라야 할 것이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사자인 아난대활불과 모용단죽 중 어느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원무림은 십 년후에 지금보다 더욱 커다란 홍역을 치루게 되리라는 것 뿐이었다. 십 년 후, 아난대활불은 약속대로 다시 중원으로 돌아왔으며 이번에도 역시 모용단죽이 그를 맞이했다. 달라진 것은 아난대활불이 천룡사의 승인을 아무도 데려오지 않고 단지 열두 명의 제자들만을 이끌고 왔다는 것이며, 모용단죽 또한 홀홀단신으로 그를 대했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경천동지의 대 격전을 벌였다. 아난대활불은 다시 서장으로 돌아갔으며, 이번에도 십년지약(十年之約)을 남겼다. 다시 십 년후, 아난대활불은 칠십이 넘은 나이로 세 번째 중원원정을 왔다. 이번에 그는 단지 한 명의 제자만을 이끌고 왔을 뿐이었다. 모용단죽과의 세 번째 대결이 끝난 후, 아난대활불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이렇게 말했다.

  • 당신과 나와의 싸움은 이번이 마지막이오. 하지만 본사(本寺)와 당신과의 싸움은 아직 끝난게 아니오. 앞으로는 이 아이가 내 대신 당신을 상대할 것이오.

모용단죽은 물었다.

  • 이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오?
  • 야율척(耶律拓).

아난대활불은 야율척을 데리고 서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번에는 십년지약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모용단죽은 십 년후에 반드시 그들이 다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십 년후, 중원으로 찾아온 사람은 야율척 한 사람 뿐이었다. 모용단죽은 야율척의 말을 듣고서야 아난대활불이 이미 십 년전에 서장 천룡사로 돌아간 후 바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모용단죽은 탄식하며 물었다.

  • 아난이 남긴 말은 없었느냐?

야율척은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 사부는 당신에게 감사한다고 했소. 당신 덕분에 사부는 세 가지를 알게 되었소.
  • 그게 무엇이냐?
  • 처음 당신에게 패한 후 사부는 세상의 광활함을 깨달았다고 하오. 두 번째 당신에게 패한 후 사부는 인간의 위대함을 알았소.
  • ……!
  • 그리고 세 번째로 당신에게 패한 후 사부는 세월의 무상함을 알게 되었소.

모용단죽은 물끄러미 야율척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아난은 행복한 사람이다. 너같은 제자를 둘 수 있으니 말이다.

야율척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 사부의 마지막 말도 그랬소. 당신 덕분에 나같은 제자를 키울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고….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움을 시작했다. 그들의 싸움은 지금까지 무림에서 벌어진 어떠한 싸움보다 흉험한 것이었다. 모용단죽은 아난대활불과 벌인 세 번의 싸움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싸움이 끝난 후, 야율척은 조용하게 말했다.

  • 당신이 이겼소.
  • …….
  • 하지만 십 년후에는 내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오.

모용단죽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야율척은 모용단죽을 빤히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떠나갔다. 떠나는 그의 뒷등을 바라보는 모용단죽의 얼굴에는 승자(勝者)의 미소 같은 것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 속에는 그저 깊은 우울과 시름,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걱정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십 년 후 어느 날, 소림사와 무당파의 장문인 앞으로 누런 편지가 한 통씩 날아들었다. 편지 속에는 짤막한 글이 써 있을 뿐이었다.

<시월 십팔일(十月 十八日). 중원을 접수하겠다. 야율척.>

그 편지를 펼쳐본 후, 소림사와 무당파의 장문인은 이번의 무림집회를 결의했다. 그리고 정확히 석 달만에 드디어 강호무림에 그 전례를 볼 수 없는 사상 최고의 대집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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