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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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4화


제34장. 난상토론(爛商討論)

이번 소림사에 모인 군웅들이 중원무림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당대의 최고수들 중 상당수가 참석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중에서도 명성이나 지위로 보아 집회를 주관한 소림과 무당의 양파 장문인들이 가장 중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천룡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중인들의 기대에 찬 시선이 두 사람의 진영 쪽으로 집중되었다. 하나 소림과 무당의 고수들은 모두 덤덤한 표정들이었다. 대의 중앙에 서 있는 대현의 얼굴에도 그다지 흥분되거나 격동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번 천룡사의 다섯 번째 중원행(中原行)은 지금까지 와는 달리 상당히 위협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공개적으로 중원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장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지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주위가 조용한 가운데 대현의 음성만이 낭랑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소승이 들은 정보로는 그들은 천룡사 뿐 아니라 서장의 대소 십이개 문파의 정예들이 모두 모여 있는 사실상의 서장무림(西藏武林) 총연합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느 특정 문파 만이 아니라 중원 무림 전체의 힘과 뜻을 뭉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판단 하에 이번의 대집회를 열게 된 것입니다.”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집회가 단순한 천룡사와의 일전(一戰)에 대비하기 위한 모임인줄 알았던 군웅들은 서장무림과 중원무림의 거대한 결전이 벌어지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조금씩 술렁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것은 상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기 보다는 본거지를 침략 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무림인들 특유의 맹렬한 투쟁심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대현은 중인들의 술렁거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미 무당파의 장문인인 현령진인께서 서장과 가까운 사천(四川)에 상당수의 고수들을 파견하여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면 상대 세력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힘을 하나로 뭉쳐서 일사불란하게 전력(戰力)을 정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다시 무당파 쪽으로 쏠렸다. 사실 무당파는 이번 집회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소림사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었으나, 막상 집회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은 누가 보기에도 그들의 역할이 너무나 미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림사는 거의 전 문파의 힘을 기울여 이번 집회에 전력투구하고 있는데 비해, 무당파는 장문인인 현령진인을 비롯한 십 여명의 고수들만이 달랑 참석했을 뿐 별다른 힘을 쏟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현의 말을 듣고서야 중인들은 무당파에서도 이미 이번 일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소림사보다는 무당파가 서장에 더 가깝기 때문에, 소림사는 중원에서 집회를 개최하고 무당파는 천룡사의 동태를 살피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한 모양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효과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중원인들이 서장의 천룡사를 경외하게 된 큰 원인중에 하나는 그들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이었다. 중원과는 너무도 판이한 그들의 복장과 풍습, 그리고 기괴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괴이한 무공 등이 많은 무림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다. 서장의 무공은 대부분이 천축(天竺)의 유가술(瑜伽術)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중원인들의 눈에는 무척 생소해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체내의 잠력(潛力)을 순간적으로 격발하여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방법을 곧잘 사용하는데, 그 때문에 중원인들은 그들의 무공을 방문좌도(傍門左道)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나 그들의 방식은 일반적인 사파(邪派)의 무공과는 달리 몸에 별다른 후유증이 없는 것이어서 중원인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뢰음사의 무공은 유난히 괴이하여 마공사술(魔功邪術)이라 불리워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천룡사는 정통무술에 가까운데다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능히 소림사의 무공에 비할 만 했다. 오십 년 전에 아난대활불이 처음 중원에 진입했을 때, 많은 고수들이 그에게 두려움을 품었던 것도 그의 무공이 괴이신랄하면서도 정종(正宗) 무공의 당당함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밀종(密宗)의 대수인(大手印)으로 당시 강호 최고의 장법(掌法)의 대가(大家)였던 천뢰상인(天雷上人)을 단 일 장(一掌)에 격살시킨 것은 지금까지도 강호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충격적인 일로, 그 이후 대수인은 서장무림의 대표적인 무공으로 많은 무림인들에게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대현은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본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천룡사와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우선적으로 우리의 힘을 하나로 응집시킬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자칫 쓸데없는 혼선을 초래하여 엉뚱한 화(禍)를 초래할 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굉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옳은 말이긴 한데, 이 많은 인원들로 어떻게 체계를 갖추겠다는 말씀이오?”

대현은 슬쩍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쪽에 늘어선 천막 중 한 곳에서 한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덩치가 우람하고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허리춤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보도(寶刀)임을 알 수 있는 고색 창연한 칼이 매달려 있었다. 대현은 그 중연인이 하북(河北)의 오래된 명가(名家)인 하북팽가(河北彭家)의 고수인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팽력(彭靂)임을 알아보고 조용하게 미소지었다.

“팽대협께서 염려하시는 것은 지당합니다. 사실 이곳에 오신 분들은 활동하시는 지역과 강호에서의 명성, 지위 등이 천차만별이라 특정한 체계를 갖춘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본사에서는 이미 그 점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 끝에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이번 천룡사와의 결전에 참여하실 모든 분들을 소속 문파와 활동지역에 따라 열 개의 지역 모임으로 나누는 겁니다.”

팽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웅들을 열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고 해도 각 집단의 규모가 적지 않을 텐데 과연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소?”

“그건 그 지역모임들을 총괄할 수 있는 집합체를 만들면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팽력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듯한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대사의 말씀은 결국 무림을 하나의 집합체로 만들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시 말해서 무림맹(武林盟)을 만들자는 말이 아니오?”

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름 짓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장내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소란스러워졌다. 무림맹은 그동안 말만 무성했을 뿐, 단 한 번도 실제로 결성된 적이 없었다. 강호무림을 하나의 집합체로 만들어 쓸데없는 분규를 없애고 강호의 도의(道義)를 지키자는 취지하에 여러 번 무림맹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강호무림 전체가 너무나 넓고 광활한 데다 제각기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무림인들의 다양함을 수용할 수 없어 시도 단계에서 흐지부지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오십 년 전에 아난대활불이 중원을 침략해 왔을 때도 무림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저 구파일방의 고수들과 모용세가의 인물들만이 서로 힘을 합쳐 그들에 맞섰을 뿐이었다.

무림맹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무림인들의 생리(生理)상 어떤 하나의 틀 속에 매여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무림인들은 원래가 부평초처럼 강호를 떠돌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인지라, 아무리 좋은 명분으로 집단을 만든다고 해도 그 속에 얽매여 있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각 문파의 이해득실이 복잡하게 얽히게 되면 무림을 하나의 집단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소림사는 정식으로 무림맹의 창립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라면 군웅들도 한쪽 귀로 듣고 흘려버렸을 테지만, 그것이 강호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할 수 있는 소림사에서 나왔고, 현재 무림이 커다란 위기를 앞에 둔 상황이기 때문에 한층 주의해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무당파는 이미 소림사와 사전에 교감이 있었는지 별 반응이 없었지만, 그들을 제외한 다른 문파의 고수들은 상당히 술렁이는 모습들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형산파 쪽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무림맹을 만드는 일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닐 텐데 어떻게 만들 생각이오?”

말을 꺼낸 사람은 형산파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듯한 육순의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반백(半白)의 머리에 얼굴이 대추처럼 붉고 눈썹이 유달리 짙었다.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고 형형한지 어지간한 사람은 감히 그와 눈을 마주하기도 꺼려할 정도였다. 그 노인의 이름은 비응검(飛鷹劍) 사공표(司空彪)라 했다.

형산파에서는 이번에 그들의 최고고수인 오결검객 중 세 사람을 수뇌급 인물로 파견했는데, 비응검 사공표는 그 오결검객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별호 그대로 한 마리 매처럼 사납고 날카로운 검법을 구사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성정(性情) 또한 그와 비슷해서 모두들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대현은 사공표의 성격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지라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즉시 입을 열었다.

“무림맹을 창립하는 것은 여러모로 지난(至難)한 일에는 틀림없습니다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창립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며,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어야 무림맹을 만드는 기본 취지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열 개의 지역모임에서 각기 십인(十人) 정도의 대표자들을 선출한 다음 그 대표자들로 맹을 만드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맹이 너무 비대해져서 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게 될 염려도 없고, 공정성이나 맹의 대표성 문제도 제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공표의 짙은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지역모임의 대표는 또 어떻게 선출한단 말이오?”

대현은 이미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해당 지역 모임에 참가한 고수들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어느 지역에 누가 대표로 나설 수 있는지는 그 지역에 계시는 분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공표는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막상 무림맹을 만든다면 필연적으로 맹주(盟主)를 비롯한 수뇌부를 조직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소림사의 복안(腹案)을 듣고 싶소.”

사공표가 꺼낸 질문은 몹시 민감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무림맹에 대한 수많은 논의(論議)와 시도가 번번히 좌절된 것도 결국은 수뇌부를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대한 이견(異見)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무림인이라면 누군들 무림맹의 맹주 자리를 탐을 내지 않겠는가? 또한 어느 문파인들 자신들의 문파에서 맹주가 탄생되기를 기대하지 않겠는가? 설사 맹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그 수뇌부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무림맹의 수뇌부를 어떻게 조직하느냐 하는 것은 무림맹을 탄생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더구나 형산파는 요즘 들어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터라, 자칫 이번 일이 소림사와 무당파의 지위를 공고히 해주는 구실이 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소림과 무당에서 무림맹의 맹주와 수뇌부 자리를 독차지한다면 형산파가 그들을 누르고 강호에서 득세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비단 형산파뿐 아니라 구대문파를 비롯한 여타 문파에서도 은근히 이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대현은 그들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는지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맹도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수뇌부를 어떻게 만들지 논(論)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우선은 이곳에 모인 군웅들을 열 개의 지역모임으로 나누고, 그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무림맹의 수뇌부 선출은 차후에 맹이 조직된 다음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사공표의 경직되었던 표정이 약간 풀렸다. 만에 하나라도 소림사에서 이번 집회를 자신들이 주관한다는 명분하에 무림맹에 대한 어떤 우선권을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대현의 말마따나 아직 생기지도 않은 맹의 수뇌부를 조직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이 결코 단시일내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사공표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주위에는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가득했다.

각파의 고수들은 서로 나직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분주히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었고,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군웅들은 앞으로의 사태가 어떻게 벌어질지 몰라 다소 어리둥절해하는 모습들이었다. 정해는 쓴웃음을 지으며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요. 설마 소림사에서 무림맹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지. 무림맹이 조직된다면 이번 천룡사와의 결전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기존의 구대문파를 비롯한 거대문파들이 수뇌부를 독식(獨食)하고 군소 문파와 나머지 고수들은 들러리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응계성이 퉁퉁 부은 얼굴로 소리쳤다.

“이건 보나마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소림사 땡중들의 얕은 수작이야. 생각해 봐라. 말이 좋아 무림맹이지, 사실은 이미 강호에 명성이 알려진 자들만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꼴이 될 게 아니냐?”

낙일방도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떠들어댔다.

“맞아요. 이런 식이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 거에요.”

진산월은 상원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대협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상원건은 처음 무림맹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눈을 빛내며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무림맹이 결성되려면 대다수 무림인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데, 그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만 일을 진행할 리가 없지 않겠소? 설사 그렇게 하려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용납지 않을 것이오.”

낙일방은 듣고 보니 상원건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찌푸렸던 안색을 풀며 재빨리 물었다.

“그럼 우리도 잘만 하면 수뇌부에 들지도 모르겠군요?”

상원건은 빙긋 웃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열 개로 나누어지는 지역모임에서 대표로 선출되는 게 더 급하지 않겠나?”

낙일방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거야… 중원 전체라면 몰라도 하남성에서는 그래도 본파가 열 손가락 안에는 들지 않겠습니까?”

응계성이 듣고 있다가 그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야 이 녀석아! 하남성에 문파가 몇 개인데 그딴 소리냐? 게다가 문파에 속하지 않은 고수들이 어디 한두 명인 줄 아느냐?”

“어이구… 사형. 말로 하세요, 말로…”

낙일방이 머리통을 싸잡고 뒤로 물러났다. 응계성은 한 차례 더 낙일방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는 다시 진산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문사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림맹을 만드는데 찬성이오, 반대요?”

진산월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물론 찬성이지.”

응계성은 물론이고 정해도 다소 뜻밖인 표정으로 진산월을 응시했다. 진산월이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무림맹이 결성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의 위치에서 도약할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무림맹이 결성된다면 우리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맹의 수뇌부에 들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어차피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림맹은 결성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왕이면 흔쾌히 대세를 타는 게 현명한 일 아니겠느냐?”

응계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림맹이 결성되게 되어 있다니… 그걸 어찌 아시오?”

“소림사에서 아무런 사전 대비도 없이 군웅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냈겠느냐? 모르긴 해도 아마 구대문파의 수뇌부들을 비롯한 강호의 명숙들과 사전에 어느 정도의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무림맹을 결성할 확실한 자신이 없다면 소림사에서 결코 앞장서서 이번 일을 거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인들은 무심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의 말에 확실히 일리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무림맹에 관한 말을 꺼낸 사람은 대현이었지만, 그것이 소림사의 뜻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소림사에서 수많은 군웅들을 모아놓고 정식으로 제기한 안건이 만에 하나라도 부결(否決)되거나 파기된다면 소림사로서는 창피막심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상원건은 안광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진장문인의 말씀대로라면 무림맹이 결성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문제는 수뇌부를 어떻게 조직하느냐만 남은 셈이로군요.”

정해가 큰 머리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 수뇌부도 이미 사전에 내정(內定)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응계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아붙였다.

“만일 그렇다면 소림사의 땡중 놈들 머리통을 모조리 뽑아버리고야 말겠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렇기야 하겠느냐? 구대문파 중 어느 문파도 선뜻 손해 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설사 소림과 무당에서 그런 뜻이 있다 해도 쉽사리 성사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누가 무림맹주(武林盟主)가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연 새로운 무림맹주가 군웅들을 잘 이끌어 천룡사와의 결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응계성은 아직도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된 채 못마땅한 눈으로 진산월을 흘겨보았다.

“장문사형은 참 보살(菩薩)같은 말만 하는구료. 하지만 생전 알지도 못하는 놈이 무림맹주랍시고 나를 부려먹으려 한다면 나는 그 꼴 못 보오. 무림맹이든 천룡사든 다 때려치고 그냥 종남산으로 돌아가 버릴 거란 말이오.”

진산월의 표정이 돌연 엄숙해졌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곳에 모인 군웅들이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가 수긍할 수 있는 인물이 맹주로 선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무림맹의 수뇌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룡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데 일조(一助)하여 본파의 명예를 되찾자는 것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응계성은 화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은 모습이었으나, 진산월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은 평소에는 좀처럼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지만, 지금처럼 표정이 심각해지면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결코 섣불리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성격이 아님을 모두들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대 위에서는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림과 무당을 제외한 구대문파와 남궁세가(南宮世家)를 비롯한 세칭 사대세가(四大世家) 등은 주로 질문을 던지는 편이었고,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을 대현이 매끄럽게 받아넘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남궁세가의 유명한 고수인 철검서생(鐵劍書生) 남궁조(南宮潮)였다. 강남의 남궁세가는 예로부터 부귀와 검술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쳐왔다. 그들은 대대로 강남의 중심지인 금릉(金陵)에 자리를 잡고 권세를 누려왔거니와, 당금에 이르러서도 천하의 사대세가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었다. 남궁조는 남궁세가의 당대 가주인 남궁탄(南宮灘)의 막내 동생으로, 남궁세가는 물론이고 강남일대에서도 손꼽히는 절세의 검객(劍客)이었다. 철검서생이라는 별호답게 그는 얼굴이 준수하고 기개가 헌앙(軒仰)했으며, 삼십대 후반의 한창 나이에 걸맞는 침착함과 패기만만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현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무림맹이 창립된다면 그것은 백 년내 무림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될 겁니다. 그런데 과연 무림맹이 천룡사와의 대결이 끝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건지, 아니면 그 이후에도 계속 존립하는 것인지를 알고 싶군요.”

대현은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도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차차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봅니다.”

남궁조는 대현을 빤히 응시하며 빙긋 웃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소림사의 생각입니다. 아마 소림에서는 이미 나름대로의 방침을 정해놓고 있을 거라고 보는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입니까?”

대현은 남궁조의 약간은 도발적인 질문에도 전혀 얼굴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물론 본사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의견들이 오고 갔습니다만,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형편입니다. 우선 시급한 것은 무림맹을 창설하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여러 가지 문제는 그것이 결정된 다음에 의논하는 것이 순서라고 봅니다.”

대현의 말은 남궁조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 내용은 이곳에 모인 모든 군웅들을 향한 것이었다. 사실 많은 무림인들은 무림맹의 창설에 대해 설레는 기대감과 막연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 안건을 제시한 곳이 오랫동안 무림을 영도(領導)해온 소림사라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일말의 두려움과 망설임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남궁조는 안광을 예리하게 번뜩이며 다시 물었다.

“만일 무림인들의 의견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되면 어떻습니까? 다시 말해서 무림맹을 만들자는 쪽과 만들지 말자는 쪽이 팽팽하게 대치한다면 자칫 이번 일이 쓸데없는 분규(紛糾)로 확산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본사에서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무림인들의 절대다수가 찬성하지 않는다면 무림의 단합을 위해서라도 금번의 안건을 철회한다는 것이 본사의 의견입니다.”

남궁조의 질문은 집요했다.

“절대다수란 너무 막연한 말 같군요. 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겁니까? “

“이곳에 오신 군웅들 중 사분지 삼 정도면 모든 분들이 만족하리라 봅니다.”

그 말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분지 삼이라면 확실히 압도적인 다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궁조도 내심으로는 삼분지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전혀 엉뚱한 것을 물어 보았다.

“무림맹을 창설하려면 상당한 자금이 필요할텐데 그에 대한 복안(腹案)은 있으신지요.”

지금까지 평정을 유지하던 대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야릇하게 변하며 눈에서 한 줄기 날카로운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그 눈빛을 받자 남궁조는 내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서운 눈빛이군. 저 정도라면 큰 형님의 내공(內功)에 전혀 뒤지지 않을 것이다. 대체 소림에는 저런 고수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있는 것일까?’

그는 강호의 소식에 나름대로 상당히 정통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도 소림사에 대현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있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들어보았다. 그런데도 그의 풍기는 기도나 인상이 예사롭지 않자 새삼 소림사에 대한 두려움이 솟구쳐 올랐다. 대현은 이내 다시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나직하게 불호를 외며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본사에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고려치 않고 있습니다. 남궁시주께서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궁조는 오히려 대현이 화살을 자신에게로 넘기자 일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엉겁결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두 남녀(男女)가 앉아 있었다. 그중 남자는 남궁조가 자신을 쳐다보자 눈썹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남궁조는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대현의 날카로운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대현의 시선이 자연스레 남궁조의 뒤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남녀에게로 향해졌다.

두 남녀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오랜동안 명성을 쌓아오면서 자신감이 대단하여 항상 질좋은 금의(錦衣)를 즐겨 입고 옥대(玉帶)와 금색 두건을 착용하길 좋아한다. 그런데 이들 두 남녀는 평범하다 못해 허름해 보이는 마의(麻衣)를 걸쳤을 뿐 아니라, 그 모습이 전혀 판이하여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남자는 앙상하리만치 마른 체구에 얼굴도 누런 황달끼가 엿보였고, 머리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얼마나 말랐는지 별로 크지 않은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자가 커보일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그 옆의 여자는 비정상적이리만치 뚱뚱했다. 피부는 제법 새하얗고 이목구비도 반듯한 편이었는데, 살이 너무나 쪄서 눈코입이 모두 터져 나오는 살에 묻혀버릴 정도였다. 땀이 많이 흘러나오는 체질인 듯 알록달록한 손수건을 손에 들고 연신 이마와 콧등을 닦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들 두 남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그들의 행색이 너무나 괴이하여 모두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쩍 마른 마의 청년은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로 집중되자 남궁조를 힐책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남궁조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듯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대현은 두 남녀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내 그중 마의 청년을 향해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혹시 소주(蘇州)에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마의 청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구… 별 볼일 없는 불초를 대사께서 어찌 아십니까?”

그의 음성은 외모만큼이나 비실비실해서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끌끌… 완전히 피죽도 못얻어 먹은 모양이군.”

“하하… 저래서야 강호에서 제대로 행보나 할 수 있겠나?”

하나 대현의 표정은 엄숙하고도 진지했다.

“아미타불. 무림인이라면 소주의 혁리가(赫里家)에 용 같고 봉 같은 두 분의 기재가 있다는 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시주께선 혹시 그 용봉쌍이(龍鳳雙이)중의 고룡(枯龍) 혁리당(赫里螳) 소협이 아니십니까?”

마의 청년은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듯한 얼굴에 메마른 미소를 떠올렸다.

“용봉이라니 과찬이 지나치시군요. 불초야말로 소림사의 팔대신승 중에서도 가장 신출귀몰하고 행적이 묘연하다는 무영승(無影僧) 대현대사를 뵙게 되어 금생(今生)의 영광이 아닌가 합니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듣고 있던 주위의 군웅들은 그야말로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대현이라는 승려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팔대신승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보다는 영양실조 직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말라깽이 청년이 소주 혁리가의 인물이라는 것이 군웅들에게 더욱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소주 혁리가는 무림의 전통적인 무가(武家)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사천당문처럼 독(毒)으로 명성을 날리거나 제갈의가(諸葛醫家)처럼 이름난 신의(神醫)들을 배출하는 곳도 아니었다. 일반적인 의미의 명문세가(名門世家)라고 할 수도 없었으며, 가전무공(家傳武功) 또한 별 볼 일이 없었다. 하나 당금 무림의 어느 누구도 소주 혁리가를 우습게 보지 않았다. 우습게 보기는커녕 모든 무림인들이 그들을 경외하며 어떻게든 작은 친분이라도 쌓으려고 애를 썼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세 가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소주 혁리가, 장사(長沙)의 구양가(歐陽家), 그리고 낙양의 석가장이 바로 천하삼대부귀가문(天下三大富貴家門)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부(富)를 축적했으며, 천하무림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전장(錢莊)과 상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세 가문의 부는 거의 나라의 부에 육박할 정도였고, 어느 가문이 더 부유한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 혁리가와 구양가는 강남을 양분(兩分)하고 있으며, 석가장은 강북에서 가장 유력한 상인가문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간의 상권(商圈)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다른 가문의 권역에는 절대 침범하지 않는 이른바 상호 불가침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몇 번의 사소한 마찰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정면으로 충돌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강북의 소림사에 벌어지는 무림대회에 강남 혁리가의 사람이 참가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하는 바가 클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용봉쌍이라면 혁리가의 당대가주인 혁리아(赫里鴉)의 일곱 명의 자식들 중에서도 재주가 많기로 소문난 인물들로서, 강북에도 널리 그 명성이 알려져 있었다.

비쩍 마른 청년이 고룡 혁리당이고, 뚱뚱한 처녀가 혁리당의 누나인 반봉(반鳳) 혁리접(赫里蝶)이었다. 용과 봉황이라는 좋은 별호 앞에 마르다는 의미의 ‘고(枯)’와 살이 쪘다는 뜻의 ‘반(반)’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붙어 있게 된 것은 물론 그들의 특이한 외모 때문이었다. 하나 혁리당과 혁리접은 외모만으로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혁리당은 수많은 군웅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죽만 남은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며 약간은 방정맞게 말했다.

“사실 우리 남매는 이번에 소림사에서 무림인들의 거대한 집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동해 평소에 약간 안면이 있는 남궁대협을 졸라 눈요기를 하러 나온 것입니다. 그동안 보고 들은 것만 해도 제가 평생 해야할 구경거리를 모두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이 단순한 구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대현은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그러셨군요. 오신 김에 마음껏 둘러보시고 본사에도 꼭 들려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혁리당은 히죽 웃으며 열심히 머리를 끄덕였다.

“대사께서 초청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의 태도나 모습은 명성이 자자한 혁리가의 인물답지 않게 조금은 옹색하고 경망스러운 것이었다. 군웅들은 대현이 혁리당에게 좀 더 무언가를 물어보리라고 생각했지만, 대현은 다시 한 번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는 이내 몸을 돌리는 것이었다. 군웅들의 얼굴에 모두 실망어린 기색이 떠올랐다. 무언가 엄청난 활극(活劇)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혁리가의 용봉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혁리당은 비쩍 마른 얼굴에 미소인지 울음인지 모를 괴이한 표정을 지은 채 자기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그 옆의 혁리접은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그저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고 있을 뿐이었다. 대현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누구도 이 볼품없는 두 남녀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혁리가의 용봉쌍이 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대현은 이내 대의 중앙으로 돌아가 우뚝 선 채로 주위를 둘러보며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무림맹의 결성에 대한 안건을 토론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니 지금부터 두 시진 후인 미시(未時)경에 다시 모여 이 문제를 보다 상세히 의논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 말에 정사양도(正邪兩道)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군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현의 말마따나 모두 좀 더 심사숙고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대현이 먼저 군웅들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대 위에 있던 각파의 고수들도 서둘러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 아래 있던 상당수의 고수들은 벌써부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림맹 창설에 대한 활발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그만 돌아가서 식사를 한 후에 다시 오도록 하자.”

중인들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갑자기 어디선가 반가움에 가득 찬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 이곳에 계셨군요. 한참을 찾았습니다.”

중인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일제히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전혀 뜻밖의 인물이 활짝 웃으며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질좋은 금의(錦衣)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어 늘어뜨린 그 청년은 다름아닌 석지명이 아닌가? 낙양 석가장의 일곱 번째 공자로 일전에 그들과 친분을 맺었던 석지명이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석공자가 아닌가?”

상원건이 일행 중 제일 먼저 그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뒤이어 정해가 황급히 그에게 다가오며 포권을 했다.

“석공자.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언제 오셨습니까?”

정해는 석지명과 만난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난데없는 출현이 조금 의아스럽기는 해도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석지명 또한 활짝 웃는 낯으로 정해를 향해 마주 인사를 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안녕히 계셨습니까? 모두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군요.”

진산월은 석지명이 중인들과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에게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석공자께선 일전에 다섯 째 형님을 따라 장성에 가신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석지명은 멋적은 웃음을 흘렸다.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는데,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진산월은 그에게 더 이상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았다. 그런데 석지명은 그냥 있기가 머쓱했던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형님과 함께 장성에 가기로 했던 건 그곳에 새로 생겼다는 신흥방파를 찾아가기 위함이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낙일방이 궁금한 듯 잽싸게 물었다.

“없어졌다니요?”

석지명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전에 그 방파가 이미 삼월보에 멸망해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가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거지요.”

그제서야 중인들은 석지명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석지명은 석가장에서 전해내려오는 전통인 도선출재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투자할 대상을 물색하고 있는데, 그게 영 수월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다급하게 이곳 소림사로 진산월 일행을 찾아온 것도 이제는 종남파 외에는 달리 알아볼 곳이 없기 때문이었음이 분명했다. 낙일방은 한편으로는 고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연한 심통이 일어났다.

‘결국 우리가 썩 내켜서 온 건 아니로군. 제길… 기분 같아서는 콱!’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낙일방 혼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응계성이 볼멘 음성으로 투덜거렸던 것이다.

“쳇! 삼월보가 다른 문파를 멸망시키든 말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여기까지 찾아온거야? 정말 속보이는군.”

석지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해가 황급히 응계성에게 눈짓을 보냈으나, 응계성은 오히려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럼 아니란 말이냐? 우리마저 잘못되면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될 것 같아 허겁지겁 달려온게 뻔한데 속 좋게 배실배실 웃고만 있으란 말이냐? 난 그렇게 못한다.”

석지명은 한 차례 어색한 헛기침을 토하더니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소협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확실히 저는 속보이는 짓을 했습니다. 어쨌든 모처럼 다시 만났는데 이런 일로 저를 내쫓지는 않겠지요?”

석지명이 이렇게까지 넉살좋게 말하는데 응계성도 더 이상은 무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응계성이 퉁퉁 부은 얼굴로 다른 곳을 쳐다보자 진산월이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본파는 찾아온 사람을 박대(薄待)하지 않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석공자.”

그제서야 석지명은 어깨를 펴고 활짝 웃었다.

“하하… 진장문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제 안심이 되는군요. 확실히 이곳에 오기를 잘했습니다.”

상원건은 석지명이 연신 싱글벙글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표정이 무척 밝군. 저자는 이들 종남파의 고수들이면 자신이 충분히 도선출재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상원건은 지난 보름 남짓한 기간동안 진산월 일행과 동행하면서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게 되었다. 그가 보는 견지에서 이들 종남파의 젊은 고수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재질을 갖춘 좋은 인재들이었고, 하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이 충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은 여러 모로 미숙한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강호 경험이 일천(日淺)했고, 무공도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아직 무림의 일류 고수들에게는 손색이 있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문하 제자의 수도 많지 않아서 앞으로 세(勢)를 불리는데 상당한 애로점이 있을 게 분명했다.

강호에서 하나의 문파(門派)가 성장을 하려면 단순히 문하제자들의 재질이나 의욕만으로는 부족했다. 문파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커나가기 위해서는 문파 자체에서 축적된 역량(力量)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 역량이라는 것은 풍부한 경험과 높은 사기(士氣), 치밀하게 짜여진 조직체계, 그리고 폭넓은 대외관계(對外關係)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종남파는 그런 면에서 불리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가까운 곳에서 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해줄 경험이 풍부한 선배 고수들도 없었고, 다른 문파와의 친분 관계도 거의 전무(全無)했다. 게다가 열 명 남짓하는 문하제자의 수로는 종남파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것만도 벅차다는 것이 상원건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상원건이 듣기로도 이미 섬서성 남부에서 무섭게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초가보가 호시탐탐 종남파를 넘보고 있고, 섬서성의 패권을 두고 오랜 앙숙 관계였던 화산파(華山派)에서도 종남파의 재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무언가 암계(暗計)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은가?

‘앞으로 삼 년…’

상원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삼 년 동안 종남파가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때는 기대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삼 년이 아니라 당장 오늘 내일부터 문제였다. 이미 봉황금시 건으로 인해 하남성의 유력한 집안인 운문세가를 비롯한 적지 않은 강호의 고수들과 시비가 붙었고, 마도(魔道)의 절대적인 존재인 신목령의 고수들과도 적대관계에 있었다. 게다가 구대문파에서도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는 형산파에서 조만간에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 도전(挑戰)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다면 이번의 무림집회가 종남파의 부흥은커녕 오히려 몰락을 재촉하는 시발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그런 생각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이 갑자기 몇 명의 인물들이 진산월 일행의 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상원건은 그들이 형산파 특유의 복장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들 중 두 명은 진산월 일행이 이미 만났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황일기와 조뢰명이었다. 그들 옆에는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세 명의 검수(劍手)들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을 보자 상원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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