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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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4권 무림연맹(武林聯盟)편 : 5화


제35장. 인심막측(人心莫測)

상원건의 시선이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는 사람은 그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큰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어찌나 키가 컸던지 황일기도 작은 키는 아닌데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것 같았다. 형산파는 규율이 엄할 뿐 아니라 문하제자들의 단속을 철저히 하였기 때문에 형산파의 고수들은 항상 자세가 곧고 용모와 복장이 단정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청년은 여타의 제자들과는 복장이나 행동이 상당히 틀렸다. 치렁치렁한 머리는 뒤로 아무렇게나 묶어 늘어뜨렸고, 두 팔을 건들거리며 걷고 있어 흡사 저잣거리를 떠도는 파락호와도 같았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당당한 기색이 가득했고, 입가에는 거리낄 것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어 결코 누추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턱을 약간 들어올리고 있으니 큰 키의 그로서는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 볼 수 밖에 없어 영락없이 천하를 오시(傲視)하는 듯한 광오한 모습이었다.

상원건은 그 청년을 비록 처음 보았지만, 한 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형산파에 젊은 고수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토록 거칠고 자유분방한 인물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형산파의 이대제자(二代弟子)들 중 가장 먼저 사결검객(四結劍客)이 되었으며, 또한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백대행(白大行)이라 하며, 별호는 대로검(大路劍)이었다. 그에게 이런 별호가 붙게 된 것에는 특이한 사연이 있었다. 육 년 전, 백대행은 약관(弱冠)을 갓 넘긴 나이로 형산파의 사결검객이 되었다. 그것은 당시 강호무림에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형산파에서 사결검객은 단순히 일류검수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형산파의 이름을 걸고 강호의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할 수 있는 검객임을 보증하는 일종의 증표인 셈이었다.

백대행은 당시 젊은 나이로 누구나가 선망해 마지 않는 사결검객에 발탁되었으니, 만인(萬人)의 부러움을 살만 했다. 더구나 그의 사부인 조화신검(造化神劍) 사견심(謝牽心)은 오결검객 중에서도 세 번째 서열에 올라있는 절정의 검객이었기 때문에 문파 내에서 백대행의 위치는 다른 누구보다도 확고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백대행이 머지않아 오결검객에 오를 것이며, 어쩌면 다음 대(代) 장문인의 유력한 후보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다. 자연히 백대행의 자부심과 패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부인 사견심이 백대행을 조용히 불렀다. 사견심은 물었다.

“너의 장래 소망은 무엇이냐?”

백대행은 사부가 묻는 의도를 몰라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결연한 의지가 담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정상(頂上)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사견심은 물끄러미 제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참동안이나 묵묵히 제자를 바라보던 사견심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상에도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평탄해 보이지만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험악하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올라갈 수 있는 길이다. 너는 어느 쪽 길을 가겠느냐?”

이번에는 백대행이 한참동안 심사숙고했다. 일각(一刻)이 넘는 시간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백대행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두 눈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제자는 비록 험하지만 올라갈 수 있는 길로 가겠습니다.”

사견심은 흡족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 생각했다. 험로(險路)가 곧 대로(大路)다. 검을 쥔 순간 부귀(富貴)나 공명(功名)은 이미 우리와는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검객의 가야할 길은 오직 검도(劍道) 뿐이다.”

그 뒤로 백대행은 생활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지금까지 남을 의식해서 취해왔던 예의바른 행동거지를 버리고 마음 내키는대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남들이 자신에게 다음 대 장문인의 후보로서 태도를 신중히 하라고 해도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조석(朝夕)으로 열리는 수련회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고, 허락도 없이 하산하여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더러는 흉을 보기도 했다. 몇몇 사람은 그의 사부인 사견심에게 그의 그런 행동을 고자질하기도 했다. 하나 그때마다 사견심은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자 백대행은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이제는 아무도 그를 다음대 장문인의 후보로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 상남(湘南)지방에서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철적진강남(鐵笛震江南) 조광호(趙廣豪)가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백대행을 만나게 되었다. 조광호는 백대행이 비록 사결검객의 신분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퇴락한 생활을 해왔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의 무공을 알고 싶어 그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거듭된 조광호의 도전에도 웃기만 하던 백대행은 조광호가 사부인 사견심마저 들먹거리며 거친 말을 하자 검을 뽑아 한 차례 휘둘렀다.

조광호는 눈앞에 한 줄기 검광(劍光)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조광호의 친구들은 그의 몸에 아무런 검상(劍傷)도 나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의아해 하며 그의 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 떠야만 했다. 조광호의 가슴에 붉은 선(線)이 종횡(縱橫)으로 마구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선은 어찌나 가늘었던지 마치 붉은 색 머리카락이 수백 가닥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백대행의 검봉(劍鋒)이 부린 조화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백대행의 지금까지의 행동이 검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백대행은 장문인의 지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검의 길에만 매진해 왔던 것이다.

그 일 이후 무림인들은 백대행을 대로검이라고 불렀다. 그가 검도의 험한 길을 걷고 있는 것에 대한 칭송이자, 마음 속의 성원인 셈이었다. 지금 현재 형산파의 사결검객은 스물일곱 명이나 되었다. 많은 강호인들은 그들 중 최고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 중 오결검객의 반열에 가장 먼저 오르는 사람은 백대행일 거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상원건은 백대행에 대한 강호의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느닷없는 출현에 내심 크게 놀란 것이다. 백대행은 황일기를 비롯한 네 명의 삼결검객들을 양쪽에 거느린 채 양팔을 휘적거리며 진산월 일행의 앞에 오더니 그들을 한 차례 쓰윽 훑어 보았다. 그야말로 무례하고 거칠 것 없는 그 모습에 응계성을 비롯한 종남파 고수들의 눈에서 험악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백대행의 시선은 곧장 진산월에게 고정되었다.
진산월과 시선이 마주치자 백대행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안녕하시오?”

응계성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자식이…”

가뜩이나 형산파의 고수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올 때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응계성은 백대행의 말투를 듣자 더 이상 솟구쳐 오르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나 백대행은 금시라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 듯 살기등등한 응계성에게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진산월을 응시하며 계속 야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찌 보면 상대방을 비꼬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무언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찌 보면 그저 별다른 뜻없이 막연히 웃고 있는 미소 같았다.
하나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웃음이 별로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화를 내기는커녕 담담한 얼굴로 그를 대하는 것이었다.

“듣자하니 형산파에 기행(奇行)을 일삼는 괴짜가 한 사람 있다고 하더군. 당신은 혹시 대로검백대행이 아니오?”

백대행은 히죽 웃었다.

“괴짜라… 그렇게 좋게 보아주니 고맙소. 어떤 자들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더군. 물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던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

진산월은 그의 다소 무례해 보이는 언사에도 전혀 격동하지 않고 차분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지금 당신이 내 앞을 가로막은 건 자신이 미치광이라는 걸 내게 알려주기 위해서요?”

백대행은 우두커니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고 광소를 터뜨렸다.
어찌나 크게 웃었던지 그의 눈에는 찔끔찔끔 눈물마저 나올 정도였다.

“크하하…”

사람들은 그의 돌연한 행동에 어리둥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허리를 부여안고 미친 듯이 웃어젖히던 백대행은 갑자기 거짓말처럼 웃음을 뚝 그치더니 이글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요즘 강호에 당신에 대한 소문이 제법 많이 떠돌더군. 그 말을 반신반의했었는데, 그중 한 가지는 정확한 것 같아. 정말 입씸 하나는 대단한 친구로군.”

그 말에 종남파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응계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성큼 나서며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미친 자식. 정말 미친 놈이구나.”

성질 급한 응계성이 아니더라도 백대행의 이번 말은 지나친 것이 분명했다.
백대행의 나이가 비록 진산월보다 서너 살 많다고 해도 진산월은 어디까지나 일파(一派)의 장문인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손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고 있으니 종남파 문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백대행은 응계성에게는 여전히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진산월을 빤히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배짱도 좋다고 하던데 나하고 검을 겨뤄볼 배짱이 있는지 궁금하군. 어떤가? 피하지는 않겠지?”

백대행은 이제 본격적으로 진산월에게 하대(下待)를 하고 있었다.
응계성은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미친 놈. 아가리를 찢어 버릴테다!”

황일기와 조뢰명을 비롯한 네 명의 형산파 고수들이 일제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 그 보다 한 발 먼저 응계성을 제지한 사람이 있었다.
응계성은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움켜잡자 팔의 주인을 돌아보며 벌컥 소리를 내지르려다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왜냐하면 그 팔의 주인이 다름 아닌 진산월이었기 때문이다.

“계성. 물러서라.”

응계성은 그렇게 못하겠다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눌러 삼켰다.
이곳에는 자신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문파의 제자가 장문인에게 모독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나 불같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는지 애꿏은 땅을 걷어차고는 찬바람이 나도록 세차게 몸을 돌렸다.

“제기랄…”

진산월은 응계성이 씩씩거리며 자신의 뒤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백대행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백대행을 바라보는 진산월의 얼굴에는 의외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당신은 지금 나에게 도전(挑戰)을 하려는거요?”

백대행은 진산월을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도전이라… 정말 모처럼 들어보는 소리군. 그렇다고 해두지.”

형산파의 사결검객이라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른 누구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비록 그 상대가 일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백대행이 웃으며 순순히 시인을 한 것은 진산월과 손속을 겨루겠다는 자신의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형식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나 진산월은 의외에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 아닌가?

“아쉽게도 당신의 상대는 내가 아니오.”

그 말에 백대행의 짙은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상대가 아니라니… 그럼 누가…?”

갑자기 백대행은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괴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진산월에게서 이동하여 한 사람에게로 옮겨졌다.
일단 움직여진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된 채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는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흰 색 무복을 걸친 여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임영옥이었다.

임영옥은 양 손을 늘어뜨리고 방심한 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전혀 이상할 것도 없고, 기이한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쳐다보는 백대행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지하고 심각한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임영옥을 주시하고 있던 백대행이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는 확실히 넓군. 이 정도 검기(劍氣)를 발출할 수 있는 여검수(女劍手)가 있을 줄이야…”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임영옥에게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조뢰명이 백대행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백대행은 손을 흔들어 그를 제지했다.

“말 안해도 알고 있다. 그녀가 바로 태평검객이 자랑스러워 했다는 그 딸이겠지. 그나저나 정말 이상하군.”

백대행은 다시 한 차례 기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죽립을 눌러 쓴 임영옥의 전신을 쓰윽 훑어 보았다.

“어떻게 문하제자의 검기가 장문인보다 강하단 말인가? 종남파에 모용세가처럼 문파의 최고 고수에게는 적통(嫡統)을 내리지 않는다는 문규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태평검객이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었단 말인가?”

임영옥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신의 선친(先親)인 태평검객을 은근히 비하(卑下)하는 듯한 백대행의 말에도 전혀 분노하거나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중인들은 왠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형산파의 고수들은 오랫동안 검도를 수련해 온 인물들인지라 그것이 그녀의 몸에서 발출되는 무형의 검기가 한층 더 강력해 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모두 안색이 변했다. 마음 속의 분노를 검기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절정의 검도를 익힌 일류의 검객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백대행이 은근히 그녀를 자극하는 언사를 했던 것도 그녀의 이러한 능력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백대행은 슬쩍 오른 손을 늘어뜨려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와 함께 임영옥도 자연스런 동작으로 검을 쥐었다. 두 사람이 서로 검을 잡는 순간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모두 마른 침을 삼킨 채 두 사람을 주시했다. 그들은 이미 두 사람 사이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어떤 격전보다도 삼엄한 기세의 겨루기가 시작되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세의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밀리게 되면 채 싸워보지도 못하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는 수가 많았다. 더구나 그것은 단순한 외상(外傷)이 아닌 막대한 내상(內傷)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고수들도 이러한 식의 겨루기는 좀처럼 하지 않는 편이었다.

돌연 백대행은 성큼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이것은 여타 고수들간의 싸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서로간에 일단 기세를 발출하기 시작하면 고수들은 가급적 움직임을 적게 했다. 섣불리 몸을 움직인다던지 자세를 바꾸는 것은 자칫 치명적인 헛점을 노출시키기 쉽기 때문이었다. 단 한 순간의 폭발적인 분출을 위해서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상대의 예기를 꺾기에 심력(心力)을 기울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백대행은 오히려 상대를 향해 크게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으니, 어찌 보면 경솔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에 맞서는 임영옥의 태도는 더욱 뜻밖이었다. 그녀는 수중에 들고 있던 검을 검집 째 가슴 위로 들어올렸던 것이다. 그 순간, 막 두 번째 걸음을 내딛을 듯 하던 백대행의 몸이 우뚝 멈춰섰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명의 남녀가 서로 특이한 자세로 미동도 않고 있는 광경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한 것이었으나, 장내의 누구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식은 땀 마저 흘린 채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치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진산월이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짝!

“됐다. 이제 식사나 하러 가자.”

금시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장내의 분위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엉뚱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중인들 중 몇몇 사람은 어리둥절하고, 몇몇 사람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진산월을 흘겨보기도 했다. 명색이 장문인이라는 작자가 시도 때도 모르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는 비난의 눈초리였다. 하나 그 순간 장내의 상황은 일변해 버렸다.

백대행은 앞으로 내딛었던 걸음을 거두고 원래의 위치로 물러났다. 그리고 임영옥 또한 가슴 위로 치켜올렸던 검을 허리 아래로 늘어뜨린 것이다. 그와 함께 주위를 질식시킬 듯 했던 살벌한 분위기도 씻은 듯이 가셔 버렸다.

“후우….”

누군가의 입에서 참고 참았던 듯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백대행은 잡았던 검의 손잡이를 풀며 다시 처음의 여유만만하고 다소는 광오해 보이는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명색이 당당한 대장부 체면에 여인과 실갱이를 벌일 수야 없지. 오늘은 내가 실례가 많았소, 임소저.”

임영옥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별 말씀을.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백대행은 이어 진산월에게로 몸을 돌렸다.

“오늘 귀하는 운이 매우 좋았소.”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군.”

백대행은 기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쩌면 운이 좋은건 나인지도 모르지. 당신과 임소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

백대행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혼자 피식 웃으며 까치집 같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무튼 조만간에 당신과 내가 도저히 피하지 못할 길목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드는데… 그때를 기대하고 있겠소.”

“나도 기대하겠소.”

백대행은 한 차례 더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휑하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형산파의 다른 고수들은 백대행의 돌연한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저만큼 걷고 있던 백대행이 돌연 뒤를 돌아보더니 그들을 향해 벼락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뭣들 하고 있는게냐? 네놈들은 진장문인의 말씀도 못 들었느냐? 지금은 밥 먹으러 갈 시간이라 말이다!”

조뢰명을 비롯한 형산파의 고수들은 움찔 몸을 떨더니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그들 중 황일기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진산월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진장문인은 과연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백사형의 걸음을 돌리게 한 사람은 요 몇 년 동안 진장문인이 처음입니다.”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내 사매가 한 것일세.”

황일기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아니오. 백사형은 여인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검을 겨루지 않습니다. 진장문인의 손뼉이 아니었다면 백사형은 절대로 그냥 돌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진산월은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래서 자네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그를 이곳으로 유인해 온 것인가?”

“하하… 확실히 백사형에게 종남파에 백사형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있다고 부추기긴 했습니다만… 그러지 않았어도 두 사람은 가까운 장래에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네는 지금 실망했겠군.”

황일기는 짐짓 눈을 크게 떴다.

“그럴리가요. 저는 오히려 흐뭇합니다.”

진산월은 어리둥절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이유가 무언가?”

황일기는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활짝 웃었다.

“백사형은 보기보다는 집요한 사람입니다. 진장문인께서 일단 백사형의 눈 안에 들어왔으니 절대로 그와 일검(一劍)을 겨루지 않고는 못 견딜 겁니다. 그러니 어찌 흐뭇하지 않겠습니까?”

진산월은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자의 예리한 검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네. 자네는 꼭 내 피를 봐야 속이 시원하다는 말인가?”

황일기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 속에는 야릇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꼭 진장문인의 피일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이 서로 겨루기만 한다면 저는 만족할 겁니다.”

진산월은 그의 말에 무언가 깊은 뜻이 있음을 알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나 그때 황일기는 진산월을 향해 공손하게 포권을 하고는 이내 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이어 진산월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빨리 일행들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정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이상한 사람이군요. 무언가 다른 꿍꿍이 속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튀어나오게 되는 법이다. 그자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면 조만간에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한바탕 검을 휘두르지 않고는 물러나지 않을 줄 알았던 백대행이 순순히 돌아간 것이 신기하군요.”

낙일방이 옆에서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거야 사저를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런 거겠죠.”

정해가 고개를 흔들기도 전에 응계성의 주먹이 먼저 날아왔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떠들지 마라!”

쿵!

“아이구… 응사형. 왜 또 그러세요? 제발 주먹 좀 함부로 휘두르지 마세요.”

낙일방이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머리를 싸매고 뒤로 물러나자 응계성이 눈을 부라리며 소매를 겉어 붙였다.

“그래서? 나한테 알밤 한 대 맞은 게 그렇게 억울해? 정말 내 주먹 맛 한 번 볼래?”

낙일방은 억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재빨리 진산월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것을 보고 있던 임영옥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그 자가 정말 나를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나는 당해내지 못했을 거야.”

낙일방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왜요? 그 자도 사저에게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잖아요?”

깊숙히 눌러 쓴 죽립 아래 살짝 드러난 임영옥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자와 내가 서로 팽팽히 맞선 것 같지만, 나는 그 자의 검기가 나보다 세다는 걸 알고 있었어. 사형이 때맞추어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그를 향해 달려들거나 뒤로 물러섰을 거야.”

고수들 간의 기세 겨룸에서 먼저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스스로 약세를 인정하는 꼴이었다. 낙일방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해가 살짝 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귀띰을 해주었다.

“조금 전에 너도 봤지 않니? 그 자가 걸음을 내딛자 사저께서 검을 들어 올린 것을…”

“그래요. 그건 그자가 먼저 기세를 올리려는 걸 사저가 막은 게 아닌가요?”

“그렇지. 하지만 그건 그 자가 단순히 한 발 움직인 것만으로도 사저는 검을 쓰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걸 뜻한다.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아!”

그제서야 낙일방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백대행과 임영옥의 기세가 똑같았다면 백대행이 한 걸음 다가섰을 때 임영옥도 한 걸음 다가서거나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임영옥은 검을 들어 중단세(中段勢)를 취했다. 그것은 검으로 자세를 잡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그때 백대행이 뿜어낸 기세가 가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록 사소한 일 같았으나 그들과 같은 실력의 고수들에게는 분명한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낙일방은 어려서부터 보아온 임영옥의 무공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막상 진짜로 붙어보기 전에는 누가 이길지 모르는 일 아니에요? 더구나 사저는 본파의 비전검법(秘傳劍法)들을 대부분 알고 있는데…”

“비전검법이라면 백대행도 결코 사저 못지 않을 것이다. 승패야 네 말대로 싸워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해도 일단 기세의 싸움에서 사저가 그자에게 밀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그렇다면 그 자는 왜 먼저 공격하지 않은 걸까요?”

정해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 전에 황일기라는 작자의 말을 듣고 보니 백대행은 처음부터 사저와는 싸울 마음이 없었던 것 같더구나.”

“그건 더 이상하잖아요. 애초부터 싸울 생각도 없었다면 왜 그런 기세 겨룸을 한 거죠?”

“아마 검객의 본능적인 호승심(好勝心)이었겠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검기를 지닌 자를 보면 일단 실력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느냐? 덧붙여 사저를 통해 장문사형의 무공 실력도 파악하려는 것이었겠지.”

“그런데 왜 장문사형에게 덤비지 않고 그냥 돌아간거죠?”

낙일방의 거듭된 질문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주던 정해가 이번에는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나도 그 점이 이상하다고 물었던 거란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뜻밖에도 상원건이었다.

“그건 내게 짐작가는 게 있네.”

낙일방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상대협?”

상원건은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내가 말해도 되겠소, 진장문인?”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낙일방은 상원건이 왜 진산월에게 말을 해도 되느냐고 허락을 받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상원건은 이내 낙일방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백대행은 원래 진장문인과 실력을 겨루어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걸세.”

그점은 낙일방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백대행은 검도를 위해서 장문인직도 포기한 인물인만큼 검으로 어느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상대를 불문하고 도전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지. 하나 그는 조금 전에 진장문인의 실력이…”

상원건은 왠일인지 말을 멈추고 힐끗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계속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계속했다.

“실력이 아직은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 하지만 진장문인의 재질로 보아 조만간에 자신의 좋은 적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순순히 물러난 것일세.”

낙일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장문사형의 실력이 그자보다 뒤지다니요? 장문사형은 그자와 일검도 겨루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백대행 정도의 고수라면 굳이 싸우지 않아도 상대의 무공을 파악할 수 있네.”

낙일방은 속으로 불복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진산월이 그 키만 큰 허수아비같은 놈보다 실력이 떨어진다는 상원건의 말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상원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진작에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렸을 것이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 진산월이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상대협의 말씀이 옳다. 확실히 지금의 나로서는 그자를 당해낼 자신이 없다.”

낙일방은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눈물마저 글썽여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장문사형. 하지만…”

“내가 그자의 도전을 사매에게 미룬 것은 결국 그자에게 본파의 최고고수는 사매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인 셈이었지. 그자는 사매와 기세를 겨루어 보고는 내 실력을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

낙일방이 아직도 서운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상원건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자도 진장문인의 재질을 높게 평가하여 머지 않은 장래에 진장문인의 실력이 자신과 충분히 자웅(雌雄)을 겨룰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진장문인에게 조만간에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한 거지.”

낙일방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자가 말한 ‘도저히 피하지 못할 길목’ 이란 그런 의미였군요.”

“그렇네. 아마 다음 번에 그자가 진장문인을 찾아올 때는 진장문인도 그자와 일검을 겨루지 않을 수 없을 걸세.”

낙일방은 한동안 침울한 얼굴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무거운 표정이었다. 아마 그로서는 자신이 하늘처럼 생각했던 진산월과 임영옥이 싸워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패배를 자인한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자가 형산파의 장문인이나 수뇌급 인물도 아닌 사결검객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종남파는 구대문파에서도 쫓겨나 평범한 군소문파로 전락한지 오래인 상태였고, 형산파는 구대문파에서도 소림과 무당, 화산파에 견줄만한 거대문파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어찌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제서야 낙일방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백대행과 임영옥의 기세가 똑같았다면 백대행이 한 걸음 다가섰을 때 임영옥도 한 걸음 다가서거나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임영옥은 검을 들어 중단세(中段勢)를 취했다. 그것은 검으로 자세를 잡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그때 백대행이 뿜어낸 기세가 가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록 사소한 일 같았으나 그들과 같은 실력의 고수들에게는 분명한 우열을 판가름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낙일방은 어려서부터 보아온 임영옥의 무공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막상 진짜로 붙어보기 전에는 누가 이길지 모르는 일 아니에요? 더구나 사저는 본파의 비전검법(秘傳劍法)들을 대부분 알고 있는데…”

“비전검법이라면 백대행도 결코 사저 못지 않을 것이다. 승패야 네 말대로 싸워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해도 일단 기세의 싸움에서 사저가 그자에게 밀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그렇다면 그 자는 왜 먼저 공격하지 않은 걸까요?”

정해는 한 차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 전에 황일기라는 작자의 말을 듣고 보니 백대행은 처음부터 사저와는 싸울 마음이 없었던 것 같더구나.”

“그건 더 이상하잖아요. 애초부터 싸울 생각도 없었다면 왜 그런 기세 겨룸을 한 거죠?”

“아마 검객의 본능적인 호승심(好勝心)이었겠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검기를 지닌 자를 보면 일단 실력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느냐? 덧붙여 사저를 통해 장문사형의 무공 실력도 파악하려는 것이었겠지.”

“그런데 왜 장문사형에게 덤비지 않고 그냥 돌아간거죠?”

낙일방의 거듭된 질문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주던 정해가 이번에는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나도 그 점이 이상하다고 물었던 거란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사람은 뜻밖에도 상원건이었다.

“그건 내게 짐작가는 게 있네.”

낙일방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상대협?”

상원건은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내가 말해도 되겠소, 진장문인?”

진산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낙일방은 상원건이 왜 진산월에게 말을 해도 되느냐고 허락을 받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상원건은 이내 낙일방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백대행은 원래 진장문인과 실력을 겨루어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걸세.”

그점은 낙일방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백대행은 검도를 위해서 장문인직도 포기한 인물인만큼 검으로 어느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상대를 불문하고 도전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지. 하나 그는 조금 전에 진장문인의 실력이…”

상원건은 왠일인지 말을 멈추고 힐끗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계속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한 차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계속했다.

“실력이 아직은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 하지만 진장문인의 재질로 보아 조만간에 자신의 좋은 적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순순히 물러난 것일세.”

낙일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장문사형의 실력이 그자보다 뒤지다니요? 장문사형은 그자와 일검도 겨루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백대행 정도의 고수라면 굳이 싸우지 않아도 상대의 무공을 파악할 수 있네.”

낙일방은 속으로 불복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진산월이 그 키만 큰 허수아비같은 놈보다 실력이 떨어진다는 상원건의 말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상원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진작에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렸을 것이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 진산월이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상대협의 말씀이 옳다. 확실히 지금의 나로서는 그자를 당해낼 자신이 없다.”

낙일방은 무언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눈물마저 글썽여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장문사형. 하지만…”

“내가 그자의 도전을 사매에게 미룬 것은 결국 그자에게 본파의 최고고수는 사매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인 셈이었지. 그자는 사매와 기세를 겨루어 보고는 내 실력을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

낙일방이 아직도 서운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상원건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자도 진장문인의 재질을 높게 평가하여 머지 않은 장래에 진장문인의 실력이 자신과 충분히 자웅(雌雄)을 겨룰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진장문인에게 조만간에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한 거지.”

낙일방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자가 말한 ‘도저히 피하지 못할 길목’ 이란 그런 의미였군요.”

“그렇네. 아마 다음 번에 그자가 진장문인을 찾아올 때는 진장문인도 그자와 일검을 겨루지 않을 수 없을 걸세.”

낙일방은 한동안 침울한 얼굴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무거운 표정이었다. 아마 그로서는 자신이 하늘처럼 생각했던 진산월과 임영옥이 싸워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패배를 자인한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자가 형산파의 장문인이나 수뇌급 인물도 아닌 사결검객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종남파는 구대문파에서도 쫓겨나 평범한 군소문파로 전락한지 오래인 상태였고, 형산파는 구대문파에서도 소림과 무당, 화산파에 견줄만한 거대문파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어찌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직접 눈앞에서 이런 일을 보게 되니 종남파 고수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자 석지명이 짐짓 밝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난 기념으로 제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반대하시는 분은 안계시겠죠?”

상원건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있나? 마침 시장하던 참인데 잘됐군.”

정해가 재빨리 진산월의 눈치를 살피고는 이내 석지명에게 다가가며 활짝 웃었다.

“하하… 이제 드디어 석가장 여덟 번째 공자님의 식사 대접을 받게 되었군요. 사실 낙양에서도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그냥 나오게 되어 아직도 서운해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석지명은 계면쩍은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는 사정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돈이 넉넉치 않으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석지명이 아직 도선출재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석가장의 십이지공자 중 한 사람이면서도 그 지위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중인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의 솔직한 말에 모두 호감을 느꼈고, 사람들의 표정도 한층 밝아졌다. 심지어는 퉁명스런 표정의 응계성조차도 커다랗게 소리치며 먼저 성큼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떠들고 있을게 아니라 아무데라도 가자구. 배가 고파 흙이라도 파먹고 싶을 지경이야.”

아닌게 아니라 시간은 오시(午時)를 훨씬 지나고 있었고, 모두들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중인들은 앞서 걷고 있는 응계성의 뒤를 따라 자연스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림사에서는 이번 무림집회에 모인 군웅들을 위해 상당히 치밀한 준비를 해 놓았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루(酒樓)였다. 숙소 부근은 물론이고, 집회가 열리는 초조암 앞의 공터에도 적지 않은 수의 주루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주루마다 각 지방의 고유 음식들을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어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는 군웅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훌륭히 소화해 내고 있었다.

중인들은 수십 개의 각기 다른 깃발을 내걸고 있는 주루들 앞에서 잠시 멈추어섰다. <산동취선루(山東醉仙樓)>, <하남제일루(河南第一樓)>, <강소반점(江蘇飯店)>, <산서일품관(山西一品館)> 등 깃발에 적힌 이름만 보아도 어느 지방의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주루들이 줄지어 늘어선 채 군웅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었다. 응계성은 머뭇거리다가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장문사형은 무얼 드시겠소?”

진산월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후 한 곳을 가리켰다.

“모처럼 이곳에 왔으니 강남지방의 음식을 먹어보자.”

진산월이 가리킨 곳에는 붉은 빛 주사(朱砂)로 <광동수강관(廣東水江館)>이라고 쓰인 노란 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낙일방이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달려나갔다.

“광동음식 정말 좋죠. 제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놓겠습니다.”

그는 광동에서 가까운 호남이 고향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광동지방의 음식을 무척 좋아했다. 응계성은 벌써 저만치로 달려가고 있는 낙일방의 등을 노려보며 눈을 부라렸다.

“저 자식이 건방지게 장문사형의 허락도 안받고…”

진산월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가 가리킨 것은 <광동수강관>이 아니라 그 뒤의 <절강취화성(浙江聚華城)>이었던 것이다. 하나 지금 그 말을 했다가는 낙일방이 응계성에게 한바탕 경을 칠 것이 뻔했던지라 진산월은 조용히 웃으면서 낙일방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절강취화성>이라고 씌여진 깃발 근처에 가니 낙일방은 이미 주루안에 들어가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식사시간이 거의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주루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서 빈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빈 자리를 찾던 낙일방은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비어 있는 탁자를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한데 그가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퍽!

“어이구, 응사형! 왜 또…”

낙일방은 처음에는 응계성의 짓인줄 알고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뒤에는 얼굴에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봉두난발의 거지 하나가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웃으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거지는 어찌나 행색이 남루하고 초라했던지 원래 입고 있는 의복이 무슨 색깔이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허리춤에는 꼬질꼬질한 새끼줄을 묶고 있었는데, 분명 짚으로 만들었을 그 새끼줄은 너무나 더러워져서 아예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머리는 까치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마구 뻗쳐 있었고, 신고 있는 신발 또한 여기저기가 찢어져서 더러운 발가락이 송두리째 드러나 보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는 어찌나 지독한 악취가 풍겨나오고 있던지 주위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코를 쥐어막으며 허겁지겁 자리를 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그 거지는 누렇게 변색된 대문짝만한 이를 활짝 드러내며 낙일방을 보고 웃고 있는 것이다. 낙일방은 거지의 꾀죄죄한 몰골과 몸에서 풍겨나오는 악취 때문에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은 누구인데 내게 함부로 주먹질을 하는거요?”

거지의 입이 더욱 크게 벌어지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악취가 마구 흘러나왔다.

“우하하… 소방(小方)! 네놈은 그새 이 형님도 몰라본단 말이냐?”

행색과는 달리 음성이 제법 낭랑하고 힘이 넘치는 것으로 보아 거지의 나이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낙일방은 거지의 말에 당혹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눈이 점점 커지며 말을 더듬거렸다.

“너… 호… 혹시… 소풍자(小風子) 아니냐? 그렇지?”

거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웃고만 있자 낙일방은 펄쩍 뛸 듯이 그에게 달려와 더럽지도 않은지 그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렇구나. 꼬마 미치광이 소풍자! 바로 네놈이구나!”

“와하하… 소방, 네놈은 이제서야 이 형님을 알아보는구나!”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소리내어 웃다가 뺨을 부비기도 하고 서로의 뺨을 꼬집기도 하며 온갖 법석을 떨었다. 진산월 일행은 막 주루 안으로 들어서다 이 광경을 보자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응계성은 낙일방이 왠 거지 녀석과 서로 끌어안은 채 희희낙락하고 있는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가 불쑥 다가서며 낙일방의 머리통을 툭 두드렸다.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거냐? 이 거지가 네 아버지라도 된단 말이냐?”

평상시 같으면 아무리 상대가 응계성이라도 이런 식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낙일방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응계성을 돌아보며 흥분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응사형, 일전에 내가 말했죠? 소풍자라고… 이 녀석이 바로 내 친구 소풍자에요.”

응계성은 뭐라고 한 마디 더 하려다 그 말을 듣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나오려던 말을 속으로 집어 삼켰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낙양에 갔을 때, 낙일방이 그곳에서 사는 자기의 친구를 만날 거라며 기대에 부풀어하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후에 그들은 뜻밖의 사건을 만나 낙일방은 미처 그 친구에게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낙양을 떠나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를 소림사의 대집회장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정해가 재빨리 그들에게 다가오며 낙일방의 어깨를 친근하게 쓰다듬었다.

“일방. 어릴 적 친구를 만난 모양이구나. 축하한다.”

정해의 시선이 재빠르게 거지의 위아래를 훑고 지나갔다. 비록 순간적인 일이었으나, 정해의 예리한 시선은 거지의 허리춤에 있는 새끼줄에 천으로 된 두 개의 매듭이 묶여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결(二結)이라… 일방의 옛친구가 개방(?幇)의 고수 일 줄은 몰랐군.’

거지의 새끼줄에 매어진 매듭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결(衣結)이라고 하는데, 구파일방(九派一幇)중의 하나이며 강호무림에서 가장 세력이 거대하다는 개방의 소속임을 알리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천하는 워낙 넓어서 사방에 깔린 것이 거지들이었다. 이 거지들을 하나하나 떼어 놓으면 별 볼일이 없지만, 그들이 하나의 집단 아래 뭉치게 되면 그 힘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것이 되고 만다.

흔히 개방의 문하 수를 십만(十萬)이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아무리 개방이 거대하다 해도 십만의 휘하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지는 못하다. 거지들 중 개방에 가입하지 않은 자들도 상당 수 있는데다, 개방의 소속이라고 해도 그들 중 태반은 무공을 모르는 평범한 거지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하무림에 산재한 개방의 분타(分舵)수가 천 여개에 육박하고, 소속 인원이 수만을 헤아린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들 중 일류고수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그 거대한 인원의 힘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강호의 소식에 정통한 것은 어느 문파도 개방에 필적할 수 없었다. 천하무림의 구석구석에 개방문도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데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세력 또한 엄청나기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개방의 상징과도 같은 오의(汚衣)를 벗고 상인이나 장사치로 행세하는 자들도 상당 수 있어서, 무림에서 평생을 산 고수들조차도 그들이 개방의 고수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개방에 처음 입문한 거지는 백의개(白衣?)라고 하여 아무런 의결(衣結)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런 상태로 삼 년동안 활동하여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하나의 의결을 받게 되며, 다시 몇 년의 수련기간을 거쳐 확실한 성과가 입증되었을 때 이결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개방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백의개와 일결 제자들이며, 그중에는 평생동안 일결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낙일방의 친구라는 이 거지는 아직 어린 나이에 이결의 매듭을 가지고 있으니, 나름대로 상당한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결과 이결의 제자들은 개방에서 가장 바닥에 위치한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임무는 상당히 막중했다. 천하무림에 퍼져있는 수많은 정보들을 수집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방에서는 그들을 개목(?目)이라고 불렀다. ‘개방의 눈’ 과도 같은 존재라는 뜻이었다.

개목에서 더 성장하여 분타주가 되면 비로소 삼결(三結)의 고수가 되며, 강호무림에서도 일류고수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다. 응계성도 그제 서야 거지의 허리춤에서 의결을 발견했는지 가뜩이나 찌푸려졌던 인상이 더욱 구겨져 아주 험상궃은 얼굴이 되었다.

종남파가 구파일방에서 쫓겨난 이후, 종남파의 고수들은 구파일방의 인물들에게 막연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과거 천치검 하원지가 구파회동에서 형산파의 장문인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참관인(參觀人)으로 있던 인물이 당시의 개방 용두방주(龍頭幇主)였던 천지일걸(天地一乞) 도조산(陶照山)이었기 때문에 더욱 개방의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었다. 자연히 응계성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제 보니 개방의 떨거지였군. 일방, 네 놈은 변변한 친구도 하나 없단 말이냐?”

낙일방의 얼굴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시뻘겋게 변했다. 아무리 그가 평소에 응계성을 두려워 하고 있다고 해도 모처럼 만난 친구 앞에서 이런 식의 말을 듣게 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응사형!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소풍자는 내 하나 뿐인 친구란 말이에요!”

낙일방이 핏대를 올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응계성은 어이가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차츰 그의 부릅떠진 두 눈에서 흉흉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네놈이 감히 내게 큰 소리를 치다니…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

응계성이 소매를 겉어 붙이며 낙일방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 하자 정해가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응사형. 참으십시오. 일방이 모처럼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잠시 흥분했나 봅니다. 일방이 평소에 언제 응사형에게 이런 적이 있었습니까?”

응계성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왠일인지 더 이상은 성질을 내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실 응계성은 정해의 말을 듣고 문득 자신도 꼭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 친구의 생각을 하니 더 이상 화를 낼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대인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응계성에게 친구가 많을 리 없었다. 그 친구는 응계성에게는 유일무이한 벗으로, 고향인 방산에서 함께 자란 오랜 동안의 죽마고우였다. 응계성이 방산을 떠난 뒤로 그 친구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으니, 사 년이 넘게 소식도 모르고 지내온 셈이었다.

‘사 년이라…. 벌써 그렇게 되었나?’

응계성이 잠시 과거의 회상에 젖어 있을 때, 낙일방을 끌어안고 법석을 피우던 젊은 거지가 어슬렁어슬렁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거지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제일 먼저 진산월을 향해 포권을 했다.

“종남파의 진장문인이시죠? 저는 일방의 친구인 위적풍(衛赤風)이라고 합니다.”

진산월은 예전에 낙일방에게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었다. 위적풍은 낙일방과는 동갑내기로, 어려서부터 달리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적풍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도 유난히 붉은 기가 많이 감도는 비쩍 마른 다리로 믿을 수 없을만큼 빠르게 달리기 때문이었다. 위적풍은 다소 느긋하고 쾌활한 성품이어서 성질 급한 낙일방과는 여러모로 달랐으나,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처음 볼 때부터 서로가 마음에 들어 다른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내왔다. 낙일방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등지게 되었을 때, 위적풍도 낙일방을 따라 고향을 떠나왔다. 두 사람은 강남 일대를 함께 전전하다가 강북으로 건너오면서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떠도는 것보다는 서로가 각기 다른 인생을 찾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젠가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성공하면 반드시 다시 만나자라는 굳은 언약을 하며 못내 아쉬운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위적풍은 문물(文物)이 풍부하고 예로부터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득실거린다는 낙양으로, 낙일방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종남파로 방향을 잡았다. 낙일방이 종남파를 목표로 삼은 이유는 오직 하나, 소위 강호의 명문정파 중에서 자신과 같은 이름 없는 떠돌이를 받아줄 만한 곳이 그곳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위적풍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위적풍의 행색은 비록 남루하기 이를데 없었고 몸에서는 악취가 진동을 했지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눈빛은 제법 맑고 초랑초랑했다. 게다가 때구정물이 주르르 흐르는 얼굴도 자세히 뜯어보면 나름대로 상당한 개성과 매력이 있는 모습이었다.

위적풍은 진산월이 말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어색한 듯 까치집같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이내 히죽 웃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여자들이 넋을 잃고 저를 보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만…. 남자가 이러는 건 처음이군요.”

당돌하면서도 무례한 말이었으나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미안하군. 일방에게서 자네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네.”

위적풍은 귀가 번쩍 뜨이는지 반색을 했다.

“그렇습니까? 일방이 저에 대해 무어라고 하던가요?”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다리 껍질이 다 벗겨져서 빨갛게 되도록 여자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름도 적풍이라고 한다던데…”

정해와 상소홍 등은 폭소를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키득거렸고, 점잖은 상원건도 웃음을 참기 힘들어 나직히 헛기침을 했다. 하나 위적풍은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지 넉살 좋게 입을 놀렸다.

“일방, 저 녀석이 저를 부러워해서 엉뚱한 말을 한 모양이군요. 사실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닌게 아니라 저를 쫓아다니는 여자들을 피하느라 그렇게 된 겁니다.”

정해와 상소홍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 거렸다. 낙일방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무안한 표정으로 진산월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위적풍의 옆구리를 찔렀다.

“소풍자, 이 망할 녀석아. 아무리 그래도 장문사형 앞에서 허튼 소리를 하다니… 장문사형에게 더 이상 실례를 범하면 네놈의 갈비뼈를 모조리 분질러 버리겠다.”

위적풍은 재차 무어라고 이죽거리려다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왜냐하면 낙일방이 살짝 응계성 쪽을 가리키며 눈짓을 했기 때문이다. 위적풍이 슬쩍 응계성을 바라보니 응계성은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며 금시라도 위적풍을 향해 덤벼들 듯한 기세로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위적풍은 절로 찔끔하여 진산월을 향해 조금 전보다도 한층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진장문인을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너무 장난스럽게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원래 제 성격이 이렇게 생겨 먹어서 아무리 고치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군요.”

진산월은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떠올렸다.

“괜찮네. 나도 일단의 책임이 있으니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네. 그런데 저쪽에 계신 분들은 혹시 자네 일행이 아닌가?”

진산월의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진산월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주루의 입구에서 멀지 않은 길가에 몇 명의 거지들이 선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는 나이가 삼십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의 거지가 있었고, 양쪽으로 위적풍 또래의 소년 거지들이 역시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서 있었다. 중앙의 거지는 체구가 건장하고 눈빛이 강렬했는데, 허리춤에 세 개의 매듭이 매어져 있었다.

위적풍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저 분은 저의 대형(大兄)이신 철골개(鐵骨?) 이동평(李東平)이라고 합니다. 저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시죠.”

정해가 살짝 진산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동평이라면 낙양의 개방 분타주입니다. 제법 강단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낙양은 개방의 총단(總壇)이 있는 개봉부(開封府)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예로부터 개방의 세력이 강력한 지역이었으며, 특히 낙양분타는 하남성 내에 산재한 수많은 개방 분타 중에서도 능히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커다란 분타였다. 그곳의 분타주라면 삼결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할 것이다. 이동평은 진산월 일행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위적풍만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양 위적풍은 멋적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낙일방의 어깨를 툭 쳤다.

“일방. 아무튼 이곳에 있는 것을 알았으니 앞으로 종종 만나자.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다.”

낙일방은 모처럼 만난 친구가 회포를 풀기도 전에 그냥 떠나려하자 내심 서운한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그래. 우리 숙소는 지방 팔십칠호니까 아무 때고 나를 보고 싶으면 찾아와라.”

“물론이지. 조만간에 꼭 찾아가마.”

위적풍은 낙일방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진장문인,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어 그는 진산월에게 머리를 조아리더니 냉큼 몸을 돌려 이동평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이동평은 이미 저만큼 앞에서 걷고 있었다. 위적풍은 빠른 걸음으로 잽싸게 그의 곁에 다가가더니 나직하게 무어라고 소근거렸다. 이동평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는 모습이었으나, 막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그의 두 눈에서는 두 줄기의 칼날같이 예리한 안광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종남파 고수들의 입맛은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인심막측(人心莫測)이라더니 한낮 거지들까지 종남파를 무시하는 것 같아 모두들 기분이 착잡해졌다. 특히 낙일방은 금새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위적풍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급한 성격만큼이나 직선적이고 뜨거운 가슴을 가진 낙일방으로서는 절친했던 친구와의 해후가 너무 맥없이 끝나버리자 허탈함을 넘어 까닭 모를 분노와 서글픔이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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