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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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1화


제40장. 서장고수(西藏高手)

홍의 여인은 진산월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비도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비도를 흔들어 보였다.

“어때? 한 번 더 받아보고 싶어?”

차갑고 싸늘한 음성이었는데도, 묘한 색기(色氣)가 느껴졌다. 진산월은 그녀의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당장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조금 전에 날아들었던 무시무시한 비도의 공격은 바로 그녀의 솜씨이며, 만약 비도의 숫자가 여덟 개를 넘게 되면 자신도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사양하겠소. 대신 무슨 이유로 내게 비도를 날렸는지 그 이유나 알려 주었으면 좋겠구료.”

홍의 여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두 눈에서는 한 차례 날카로운 안광이 번뜩거렸다.

“자신 없다는건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쟁이로군.”

여느 무림인이 여인에게서 이런 식의 모욕을 당했다면 누구라도 참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솔직히 낭자의 비도는 너무 무섭소. 우리는 서로 초면인데 살벌한 일은 그만 벌이지 않는게 좋지 않겠소?”

진산월의 넉살 좋은 말에 홍의 여인은 어이가 없는지 초생달 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앞으로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진산월은 그녀가 공격하려는 것인줄 알고 순간적으로 주춤거렸으나, 의외로 그녀는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진산월의 두 눈을 빤히 응시했다.

“일개 보표(保驃) 치고는 제법 담력이 있군. 난 그런 남자를 좋아하지.”

이제 보니 그녀는 진산월을 석성의 호위무사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문파의 장문인인 진산월로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홍의 여인은 진산월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 보더니 처음보다는 한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자세히 보니 너는 제법 체격도 좋고 얼굴도 그만하면 밉상은 아니구나. 우리 저 쪽에 가서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이어 두 눈에 야릇한 눈빛을 담아 묘한 추파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진산월은 좀처럼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홍의 여인의 느닷없이 돌변한 태도에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당장이라도 그의 몸에 바람구멍을 낼 것 같았던 여자가 갑자기 은근히 유혹하는 듯한 몸짓을 해오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홍의 여인은 풍만한 가슴을 색정적으로 흔들며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이봐, 사내양반. 뭘 그리 넋을 잃고 보고 있지? 좀 더 호젓한 곳으로 가면 원하는 곳을 자세히 보여줄 수도 있는데…”

홍의 여인은 아예 드러내놓고 적나라한 말을 하며 요염한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 선정적인 모습은 뜨거운 가슴을 가진 남자라면 아찔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묘한 색감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그녀에게 반쯤 넋이 나간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춘풍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걸음 다가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지금까지 멍하니 있던 진산월이 땅이 꺼질 듯한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닌가?

“흐음. 이제 알겠군.”

그녀는 다가가던 몸을 멈추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알다니… 무엇을 알았다는 거지?”

그녀를 응시하는 진산월의 눈빛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담담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당신의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았소.”

그녀의 표정이 변하며 눈빛이 야릇하게 번쩍거렸다.

“내 말투가 이상하다고?”

“그렇소. 당신은 말꼬리가 묘하게 늘어지며 불분명하게 끝맺음을 하는데, 그것은 중원의 말투가 아니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중원인(中原人)이 아니라는 말이오.”

그녀는 말없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과는 또 달랐다. 어느 사이에 처음의 날카롭고 살기어린 눈빛으로 되돌아 와 있는 것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산월은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들은 혹시 서장(西藏)에서 오지 않았소?”

그 말에 홍의 여인의 몸이 한 차례 가늘게 떨렸다. 심지어는 지금까지 무표정하게 한쪽에 말없이 서 있던 꼽추 노인조차 차가운 안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홍의 여인은 곧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요염하고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왠지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그녀는 양 손을 자연스레 늘어뜨려 가느다란 허리에 올려놓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말투 뿐 아니라 당신의 행동도 중원 여인들과는 많이 틀리오. 일전에 서장의 여인들은 자유분방해서 남자를 쉽게 사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짚어본 것이오. 내가 잘못 짚은 거요?”

그녀는 그의 물음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진산월의 전신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진산월의 속마음을 궤뚫어 보려는 듯 날카롭기 그지없는 눈길이었다.

“평범한 보표인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보았나 보군. 이름이 있겠지?”

“물론 이름이야 있지만, 당신에게는 알려 줄 수 없소.”

“왜? 이름이 알려지면 안되는 일이라도 있나?”

“그게 아니라… 낯선 여자에게 함부로 이름을 알려줄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 않아서 그렇소.”

진산월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홍의 여인의 입꼬리가 가늘게 말려 올라갔다.

“배짱이 좋고 눈치도 비상한데다 입담까지 대단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허리에 올려놓았던 양손을 쳐들어 가슴 위에서 십자로 교차시켰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그녀의 열 손가락 사이에는 한광(寒光)을 발하는 여덟 개의 비도가 쥐어져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비도는 네 개 뿐이었다. 대체 나머지 네 개의 비도는 언제 그녀의 손에 쥐어지게 된 것일까?

진산월은 그녀의 허리춤을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한 줌밖에 안되는 그녀의 허리를 질끈 동여맨 가죽 허리띠가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허리띠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요대(腰帶)같았으나, 사실은 비도가 잔뜩 꽂혀 있는 단도집이었던 것이다.

여덟 개의 비도를 양 손에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교태롭거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가슴 섬뜩한 냉랭한 살기가 그녀의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네가 누구이든 우리의 정체를 안 이상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

차가운 교성과 함께 그녀는 세차게 양 손을 떨쳤다. 여덟 줄기의 섬광이 진산월의 전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가공스러운 것은 그 와중에도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무성무음(無聲無音)의 암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드는 괴이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중원(中原)에도 간혹 이런 종류의 암기들을 사용하는 고수들이 있기는 했다. 하나 그것은 암기의 크기가 아주 작거나 날이 예리하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비록 미세하기는 해도 약간의 음향은 발출되는 법이었다.

일전에 진산월이 보았던 파천노괴 혁련삼의 은형인도 칼날을 종잇장보다 얇게 제련한 암기여서 거의 발출되는 기척을 알아차리기 힘들었으나 그래도 청력을 기울여보면 미약하게나마 휘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렸는데, 지금 홍의 여인의 손에서 발출되는 비도는 그야말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서장 특유의 비법(秘法)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으나, 정확한 것은 지금 당장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안력에 의지하여 비도를 피하거나 떨어뜨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 지금과 같은 짙은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드는 여덟 개의 비도를 눈으로 정확하게 식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진산월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나머지는 막아내자.’

생각은 간단하지만 실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신형을 우측으로 최대한 빨리 이동시키며 수중의 장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어댔다.

그의 계산은 정확해서 세 개의 비도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서 있던 허공을 매섭게 가르며 지나갔고, 또 다른 세 개의 비도는 그의 손에 둔중한 충격을 주며 어둠 속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렸다.

하나 나머지 두 개의 비도는 정확하게 그의 왼쪽 옆구리와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어 왔다. 그때 진산월은 이미 몸을 움직이고 검을 떨친 후인지라 도저히 더 이상 비도를 피하거나 떨쳐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아앗!”

석성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요란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진산월이 위기에 처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무공을 모르는 석성의 눈으로는 진산월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석성이 비명을 지른 것은 지금까지 한쪽에 서 있던 꼽추 노인이 바로 그 순간에 그를 향해 거구의 몸을 날려 왔기 때문이었다.

일단 움직이자 꼽추 노인의 신형은 무지하게 빨라서 석성이 무언가 차가운 바람이 자신을 향해 휘몰아친다고 느낀 순간, 이미 그의 몸은 오 장여의 공간을 거의 압축해 석성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석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과 입을 있는 대로 벌리며 새된 비명을 질러내는 일 뿐이었다.

꼽추 노인의 털이 부숭부숭한 커다란 손이 석성의 머리위로 전광석화처럼 다가왔다. 그 손길이 어찌나 빠르고 무섭게 다가오던지 마치 허공을 자욱하게 뒤덮으며 떨어져 내려오는 악마의 그물 같았다.

석성은 피하기는커녕 몸을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눈으로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꼽추 노인의 손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한데 그때 갑자기 거짓말처럼 꼽추 노인의 손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석성은 처음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와중에도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니 의외로 꼽추 노인은 그에게서 이 장 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꼽추 노인의 시선은 석성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석성은 그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곳에는 다름아닌 진산월이 수중에 장검을 굳게 쥔 채로 한 그루 고목처럼 우뚝 서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의 몸을 무섭게 몰아쳤던 두 개의 비도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나 사실을 알고 나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진산월은 사문의 비전인 태을신공을 끌어올려 두 개의 비도를 유운검법중의 절초인 유운축전(流雲逐電)의 수법으로 막아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두 개의 비도를 교묘하게도 꼽추 노인을 향해 쳐냈다. 꼽추 노인이 석성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뒤로 물러난 것은 진산월이 쳐낸 두 개의 비도가 느닷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쉽지만 숨 한 번 내쉬기도 힘든 짧은 순간에 여덟 개의 살인적인 비도를 피하고 다시 석성을 구해낸 진산월의 솜씨는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휘잉!

때마침 불어오는 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펄럭이자 평소에도 듬직한 그의 체구가 더욱 더 당당하게 보였다.

그 모습에 취했는지 홍의 여인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 석성은 이내 그렇게 낭만적인 상황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홍의 여인의 벌어졌던 입술이 천천히 닫히며 그와 동시에 그녀의 두 눈에서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표독스런 눈빛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나의 팔염무흔도(八艶無痕刀)를 막아내다니 과연 한 가닥 재주가 있구나.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진산월은 수중의 장검을 가볍게 흔들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말해주는 거야 어려울게 없지만, 나는 별로 대단한 존재가 못되어서 말해도 당신은 모를 거요. 그보다 당신들이 누구인지 먼저 밝히는 게 도리 아니겠소?”

말을 하면서 그는 매우 자연스럽게 몸을 이동시켜 석성의 옆으로 다가갔다. 홍의 여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의 행동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혀를 내밀어 자신의 도톰한 입술을 핥았다. 요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석성은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붉은 혓바닥으로 자신의 입술을 핥는 모양이 꼭 혀를 날름거리는 한 마리의 붉은 독사를 연상케 했던 것이다.

“내 이름은 희목염(希睦艶)이다. 남들은 나를 홍갈자(紅蝎子)라고 부르지.”

진산월은 빙긋 웃었다.

“붉은 전갈이라… 정말 당신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오. 저쪽의 험상궃게 생긴 노인 양반은 누구요?”

홍의 여인은 왠일인지 순순히 그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는 독나타(毒喇駝) 호반(胡蟠)이라는 사람이다.”

홍갈자 희목염과 독나타 호반. 진산월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었다. 하나 그가 서장 무림(西藏武林)에 대해 조금만 자세하게 알고 있었어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은 서장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인 십육사(十六邪)에 속해 있는 인물들로, 하나같이 손속이 맵고 수단이 악랄해서 서장에서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나이는 호반이 많았지만, 십육사 내에서의 서열은 오히려 희목염이 더 높았다. 그래서인지 희목염이 눈짓을 하자 호반은 어슬렁거리며 느릿느릿 진산월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말이 어슬렁거리는 것이지, 거구의 꼽추인 그가 어깨를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뜩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희목염도 여전히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호노인을 격퇴시킨 솜씨는 제법 괜찮았다. 이번에도 내 비도를 막아내면 쓸만한 사내라고 칭찬해주지.”

그녀의 양 손은 허리띠 부근에 머물러 있었는데, 가늘고 긴 열 개의 손가락이 비도가 가득 꽂혀 있는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는 모양이 마치 무기고에 진열된 수십 개의 칼 중에서 어느 칼을 사용할까 하고 고르는 듯했다.

석성은 진산월의 뒤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삐죽 내밀어 그들을 쳐다보다가 그들이 살벌한 기세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어깨를 움찔거리다가 진산월을 향해 소근거렸다.

“아무래도 저자들이 끝장을 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저들을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물었지만, 그로서는 진산월이 능히 그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지켜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나 왠걸? 진산월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자신 없소.”

석성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진장문인은 농담도 잘하십니다. 아무리 저자들이 서장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일파의 존주(尊主)인 진장문인을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농담을 할 것 같소?”

석성은 그의 음성이 진지한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아래 턱을 와들와들 떨었다.

“아이고… 그게 정말입니까?”

진산월은 턱으로 슬쩍 검을 쥔 자신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호반은 고사하고 저 여자가 한 번만 더 비도를 날려도 나는 감당하지 못할거요.”

석성이 자세히 보니 검을 쥔 진산월의 오른손에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보니 진산월의 오른손은 이미 손아귀가 찢겨져 있었다. 그것이 조금 전에 희목염의 여덟 개 비도를 막아낸 대가였던 것이다. 진산월이 아직까지 검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진산월의 말마따나 비도 하나만 날아와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석성은 울상을 지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힐끗 돌아보더니 이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저 자들을 책임져야 하오.”

석성은 입을 딱 벌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무공은커녕 닭 잡는 칼질도 제대로 못하는 놈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쯤에서 그들을 불러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진산월의 때아닌 말에 석성은 작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그들이라니요?”

“당신의 보표들 말이오. 혼자서는 귀신을 만날까봐 밤길도 못 다닌다는 당신이 보표도 없이 이곳까지 왔으리라고는 생각치 않소. 이제는 그들이 나서서 저들을 막는 수밖에 없소.”

커졌던 석성의 눈이 다시 가늘게 변했다. 석성은 그런 눈으로 진산월을 빤히 응시하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노회한 늙은 돼지의 웃음 같은 그런 미소였다.

“진장문인은 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군요. 여덟 째가 이번에는 사람을 제대로 고른 것 같습니다.”

그들을 향해 다가오던 희목염이 석성의 웃는 모습을 보았는지 두 눈에 표독스러운 빛을 발하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봐, 뚱보!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보지? 그 커다란 머리통에 구멍이라도 몇 개 뚫어줄까?”

석성은 찔끔하여 황급히 웃음을 거두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오. 낭자 때문이 아니었소. 난 그저…”

“우리가 필요한 건 네 몸뚱아리뿐이야. 네가 숨통만 붙어 있으면 팔다리 하나쯤은 없어져도 상관없으니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석성은 우거지상을 지으며 양 손을 마구 비볐다.

“아이고 낭자. 도대체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런 험악한 말씀을 하시오? 그리고 나는 무림인도 아닌데 왜 나를 노리고 있단 말이오?”

희목염의 얼굴에 얼음장같은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무림인은 아니지만 석가장 출신이란 게 문제지. 그러니 탓하고 싶으면 네 출신을 탓해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신형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호반도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사전에 묵계가 되어 있는지 호반은 진산월을 향해 몸을 날렸고, 희목염은 곧장 진산월의 머리를 뛰어넘어 석성에게로 날아갔다. 석성과 진산월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된 순간, 양 손을 비벼대고 있던 석성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짝!

그러자 돌연 멀지 않은 나무 위에서 네 줄기의 인영이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등장이 어찌나 갑작스럽고 신법이 어찌나 민첩했던지, 호반은 진산월을 향해 채 주먹을 내뻗기도 전에 그들에게 에워싸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차차창!

인영들 틈에서 날카로운 검명이 연거푸 터져나오며 호반의 전신으로 삼엄한 검기가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흡!”

호반은 짤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황급히 진산월을 향해 돌진하던 몸을 회전시킴과 동시에 두 주먹을 앞으로 마구 휘둘렀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동작이었으나, 십여 개의 권영이 나타나며 막강한 권풍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파파팡!

권풍과 검기가 부딪치며 요란한 폭음과 함께 세찬 경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호반은 휘청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비록 다친 곳은 없었으나, 그의 양쪽 소매는 검기에 잘려 팔뚝까지 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하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서릿발같은 검기가 그의 미간과 가슴팍, 아랫배를 노리고 쏘아져왔다. 호반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인영들이 짙은 남색 장삼을 걸친 세 명의 검객들임을 알아차리고 괴성을 내지르며 그들을 향해 미친 듯이 두 주먹을 휘둘렀다.

“우와아아!”

밤하늘을 찢어놓는 괴성만큼이나 그가 휘두르는 주먹은 무시무시한 위세가 있었다. 꼽추인 그의 두 팔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길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신체적인 특징을 최대한 살려 아주 특이한 권법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그가 펼치는 타뢰십팔권이었다.

타뢰권은 번개가 내려치듯 빠를 뿐만 아니라 강력한 위력을 담고 있어, 일단 그의 권세 속에 빠지게 되면 누구라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주먹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하나 그토록 막강한 타뢰권을 거푸 펼쳤는데도 호반은 우세를 점하기는커녕 세 사람의 합공에서 벗어나오지도 못했다. 그것은 그를 공격하는 세 명의 검객들이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나이는 삼십 대 초반에서 사십 대 중반까지 제각기 달라 보였는데, 모두 얼굴이 청수하고 전신에서 칼날같은 기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사용하는 검법들도 빠르고 예리해서 호반은 맹렬하게 타뢰권법을 펼쳤으나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세 사람의 절묘한 검술에 조금씩 몰리는 형편이었다.

그들이 치열하게 난전을 벌이고 있을 때, 석성을 향해 날아가던 희목염도 의외의 복병을 만나 고전하고 있었다. 원래 그녀는 석성이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호반이 진산월을 조금만 막아 주어도 쉽게 석성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다음 호반과 합세하여 진산월을 쓰러뜨린다면 어렵지 않게 오늘 일을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막 진산월의 머리를 뛰어 넘어 석성의 면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한 줄기의 싸늘한 기운이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 기운이 날아드는 위세와 속도는 그녀의 등골에 식은 땀을 흐르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스슥!

그녀는 석성을 향해 날아가던 몸을 허공에서 뒤집어 이 장여 옆으로 미끌어지듯 이동하는 신기를 발휘했다. 이것은 비연신법(飛燕身法)중의 교연번운(巧燕飜雲)이라는 신법인데, 그녀의 몸에서 펼쳐지자 그야말로 완벽한 한 마리의 붉은 제비를 보는 것 같았다. 바닥에 내려선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석성의 앞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비쩍 마른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나이였다. 볼이 홀쭉했고 머리는 반쯤 풀어 헤쳐져 있었는데, 이마를 가리고 늘어져 있는 머리카락 사이로 두 줄기의 눈빛이 야수처럼 번쩍이고 있는 모습이 거칠고 강인해 보였다.

사나이의 손에는 도신(刀身)이 유난히 두텁고 짧막한 기형(奇形)의 도(刀)가 쥐어져 있었다. 도가 칼집에서 절반 가량 삐져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의 싸늘한 기운은 그가 발출한 도기(刀氣)임이 분명해 보였다. 희목염은 재빠르게 그의 전신을 훑고는 비웃음이 가득찬 음성으로 냉랭하게 소리쳤다.

“무명소졸은 아닌 것 같군. 너도 석성의 개냐?”

사나이의 얼굴에 한 줄기 고졸(古拙)한 미소가 떠올랐다.

“개라… 듣기 거북한 표현이지만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군.”

사나이의 대답이 조금은 의외였는지 희목염은 두 눈을 빤짝이며 그를 빤히 주시하다가 조금 전 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남의 밑에 있을 사람 같지 않은데 왜 이런 장사치의 호위 무사나 하고 있는 건가요?”

사나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낭자가 잘못 본거요. 나는 지금의 처지에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소.”

희목염은 물론이고 진산월도 그의 말에는 다소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강호(江湖)에서 상인들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아니, 비단 강호 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세상에서도 상인들은 결코 존경받거나 우러러 볼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무림(武林)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서, 무림인들 중에는 아예 상인들과는 상종(相從)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물론 석가장 정도의 부(富)를 축적하게 되면 그 금력(金力)만으로도 강호의 누구도 무시 못할 위세를 떨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무림인들의 마음속에는 상인들에 대한 경멸과 혐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때문에 무림인으로서 상인들의 보표가 된다는 것은 생계를 위한 거의 마지막 수단이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였다. 더구나 절정의 무공을 익힌 인물들은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상인들의 지시를 받는 경호나 호위의 일을 하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나이는 자신이 석성의 호위 무사인 것에 만족해 하고 있다니 희목염이나 진산월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희목염은 사나이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와 칼을 잡고 있는 자세만 보아도 그가 강호에서 보기 드문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임을 짐작할 수 있는지라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정말 자신이 석성같은 일개 장사치의 호위 무사인 것에 만족하고 있단 말인가요?”

그녀는 무림인들이 얼마나 자존심 강한 부류들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나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내가 받는 대우에 만족하고 있소. 그보다 낭자는 이대로 물러날테요? 아니면 내 칼이 얼마나 무거운지 확인해 볼거요?”

희목염의 얼굴이 서서히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두 눈에서 서릿발같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중원인들은 정말 이해 못할 종자들이군. 스스로 몸을 낮춰 남의 개를 자처하다니… 너같은 자에게는 일부러라도 내 비도의 맛을 보여주고 싶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어느 새 쏜살같이 사나이의 면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허리 부근에서 새하얀 네 가닥의 백선(白線)이 폭사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비도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사나이는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내딛으며 수중의 칼을 한 차례 세차게 흔들었다.

스릉!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주위에 울려 퍼지며 눈부신 도광(刀光)이 피어올랐다. 그 도광은 순식간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네 개의 백선을 휘감아 버렸다.

따땅!

귀청이 떨어질 듯한 요란한 음향과 함께 희목염이 던진 네 개의 비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나이가 발출한 도광이 워낙 강력하여 도광과 부딪친 비도들이 그대로 박살난 채 허공에서 한 줌의 먼지처럼 스러져 버렸던 것이다.

하나 희목염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다시 양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부드럽고 아름다운 동작이었는데, 그 순간 다시 네 개의 비도가 사나이의 정면으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녀의 비도를 발출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절륜(絶倫)했다. 사나이의 뒤에 있던 진산월은 그녀의 솜씨를 직접 목도하고는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금현(琴弦)을 튕기듯 손가락으로 허리춤의 요대 부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동작만으로 폭발하는 듯한 가공할 비도를 날려보내는 모습이 아무리 보아도 신기했던 것이다.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비도들이 요대에서 빠져나와 사나이를 향해 날아갔다. 모두 네 개씩의 비도를 세 번이나 발출한 다음에야 그녀의 신들린 듯한 손동작이 멈추어졌다.

그때는 이미 열 두 개의 비도가 새하얀 섬광을 번뜩이며 허공을 종횡(縱橫)으로 누비며 날아가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비도의 그림자로 뒤덮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진산월은 지금 현재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그 열두 개의 비도를 완벽하게 막아낼 자신이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나이도 자신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을 듯한 기세로 날아드는 비도들의 돌진에 놀랐는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우뚝 서 있었다.

그러다가 막 비도들이 그의 몸에 격중되려는 순간, 갑자기 양쪽 어깨를 기이하게 흔들며 수중의 기형도를 풍차처럼 마구 회전시켰다. 사나이의 도가 어찌나 빠르게 회전하던지 마치 그의 손에 하얀 색의 둥그런 방패가 들려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파파파파팍!

무섭게 선회하는 도의 광채 속으로 열 두 개의 비도들이 차례로 날아들었다. 비도들이 하나둘 씩 도기의 방패 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부서진 비도의 파편들이 하얀 먼지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하나 그에 따라 방패의 범위도 조금씩 수축되고 있었다.

파아아…

순식간에 여섯 개의 비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사나이가 휘두르는 도의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져서 도광 뒤에 가려져 있던 사나이의 몸이 훤하게 보일 정도가 되었다.

다시 두 개의 비도가 도광에 부딪쳐 하얀 가루를 날리며 박살나 버렸다. 이제 사나이의 도는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회전하는 속도가 완만해졌다. 그런데도 사나이는 처음과 마찬가지인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칼 끝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비도는 단지 네 개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하나 그 네 개의 비도가 지금까지 날아온 여덟 개의 비도를 합친 것보다 더욱 무섭다는 것은 무공을 전혀 모르는 석성조차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네 개의 비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주 느릿느릿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너무나 느려서 어떻게 이런 속도로 날아오면서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느리게 날아오던 네 개의 비도 중 두 개가 다시 사나이가 휘두르는 도에 부딪혔다.

따앙!

비도와 칼이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굉량한 음향이 터져나오며 사나이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데 의당 쓰러지거나 뒤로 물러날 줄 알았던 사나이의 몸이 휘청거리는 상태 그대로 맹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으로 희목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사나이의 걸음이 단순히 비도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이한 현기(玄機)를 지닌 상승(上乘)의 보법(步法)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순간 마지막 남은 두 개의 비도가 그의 코앞으로 다가들었다. 사나이는 돌진하는 자세를 유지하며 수중의 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水平)으로 휘둘렀다.

번쩍!

마치 거대한 뇌전(雷電)이 치는 것 같았다. 찬란한 도광이 주위를 아주 잠깐 밝혔다가 사라진 후, 두 개의 비도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희목염은 짤막한 비명같은 외침을 토해내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아앗!”

진산월은 정신없이 뒷걸음질치는 그녀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도기에 잘려져 펄럭이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지만, 잘려진 옷자락 사이로 유난히 새하얀 그녀의 피부가 살짝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살벌한 격전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모습이었으나, 그래서인지 보는 이의 시선을 더욱 잡아끄는 것이기도 했다.

뒤로 이 장을 급히 물러난 그녀는 돌연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한 곳으로 날아갔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뜻밖에도 호반이 세 명의 검객들과 싸우고 있는 격전장이었다. 그때 호반은 세 명의 검객의 합공을 뚫지 못하고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한 차례 움직이며 세 개의 비도가 호반을 합공하고 있던 검객들에게 날아갔다. 그들이 황급히 비도를 피하는 순간, 그녀는 호반의 손을 잡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실로 비호(飛虎)가 무색할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 아닐 수 없었다.

창졸지간에 장내의 싸움은 맥없이 끝나 버렸고, 희목염과 호반의 모습은 숲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주위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세 명의 검객들은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석성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나타날 때처럼 홀연히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사나이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칼끝을 쳐다본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산월이 그를 향해 다가가려 하자 사나이는 갑자기 칼을 거두더니 휑하니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한 마디 말도 없이 어두운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달빛도 미치지 못하는 짙은 수림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어둠 속으로 조금씩 멀어지는 사나이의 모습은 마치 스스로 몸을 낮추어 남의 그림자 속에 평생을 숨기로 한 그의 마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어색한 헛기침 소리와 함께 석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험… 다친 손은 괜찮으십니까?”

진산월은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은 후 자신의 오른손을 살펴보다가 옷자락을 찢어 지금도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손을 단단하게 동여매었다.

“별로 심하지는 않소. 하지만 며칠 간은 검을 제대로 쥘 수 없을 것 같구료.”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이제 이삼일 후면 천룡사와 싸우러 떠나야 하는데…”

석성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으나, 진산월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천룡사와 본격적인 대결을 하려면 앞으로도 보름 정도가 남았으니 그때까지는 완쾌될 수 있을 거요.”

의식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모두 조금 전에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사나이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진산월은 사나이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강호무림이 아무리 넓고 고수가 구름처럼 많다고 해도, 사나이처럼 특이한 기형도를 사용하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았다.

게다가 진산월은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도 남의 일개 호위 무사가 되어야만 했던 한 도객(刀客)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진산월이 사나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려 했던 것은 단순히 자신의 짐작이 맞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마음을 짐작이나 한 듯이 사나이는 그가 채 일언반구 말을 묻기도 전에 자리를 피해 버렸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런 사나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굳이 그의 뒤를 쫓거나 석성에게 사나이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석성도 자신의 호위 무사에 대한 것은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은 듯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여자는 얼굴은 예쁜데 손은 매우 무섭군요. 그렇게 무서운 비도를 날리는 여자는 중원에서도 흔치 않을 듯 싶은데 진장문인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석성이 무슨 의도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희목염의 비도를 막다가 손아귀가 찢어진 진산월로서는 쓴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일파(一派)의 장문인이 여자의 비도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느냐는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진산월은 옷자락으로 동여매어진 오른 손을 들어 보이며 빙긋 웃었다.

“이 손이 말해주고 있지 않소? 그보다 그자들이 비록 오늘은 맥없이 물러났지만 다음에 또 다시 당신을 찾아올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할거요. 그때는 아마도 그녀의 비도가 노리는 것은 오늘과는 전혀 다른 것 일거요.”

석성은 찔끔하는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헤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천룡사가 망할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겠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하지만 당신이 그럴 것 같지는 않구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석성을 응시했다.

“당신이 이런 일로 겁을 집어먹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그렇소.”

석성은 짐짓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럴리가요. 조금 전에는 너무나 두려워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뻔했습니다.”

“설사 조금 두렵게 생각하더라도 눈앞에 커다란 이익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신이 순순히 돌아갈 것 같지는 않소.”

“커다란 이익이라니요?”

“그런 쪽은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이번에는 석성이 진산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석성의 뚱한 얼굴에 몇 가닥의 실선이 그어지며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진장문인은 농담도 잘하십니다.”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조금만 있으면 날이 새겠구료. 나는 이만 가보겠으니 당신도 조심하시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진산월은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석성은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선 채로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진산월의 뒷등을 응시하는 석성의 얼굴에는 한 줄기의 이상야릇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진산월의 몸이 소로 저편의 커다란 나무 뒤로 사라질 즈음, 갑자기 석성의 뒤쪽 허공에서 하나의 인영이 그의 뒤로 뚝 떨어져 내렸다.

하나 석성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진산월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소?”

그의 뒤에 홀연히 나타난 인영이 짤막하게 말했다.

“내공(內功)이 너무 형편없소.”

나타난 인영은 다름아닌 조금 전에 진산월을 피해 사라졌던 기형도를 쓰는 사나이였다. 석성은 여전히 그를 뒤에 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그는 비범한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무공이 너무 약한 것 같군. 저 상태라면 이번 천룡사와의 대결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을 거요.”

사나이는 묵묵히 서 있었다. 석성이 자기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석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허공을 올려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튼 이걸로 여덟 째가 셋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군. 그렇다면 남은 것은 넷째와 다섯째인가?”

그의 중얼거림은 너무도 작아 바람결에 흩어져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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