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3화
제42장. 산중기변(山中奇變)
우지끈!
가뜩이나 대나무 몇 개로 엉성하게 세워져 있어서 바람만 세게 불어도 날아가 버릴 것 같던 간이 주점이 폭삭 주저앉아 버리자 그 안에 있던 중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엇?”
“피해… 피해라!”
다급한 외침이 거푸 터지며 한바탕의 소동이 벌어졌다. 단순히 천막이 무너진 것에 불과했지만, 머리 위에서 자욱한 먼지와 함께 넓은 천막 지붕이 통째로 떨어져 내리자 일시지간 어떻게 피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하나 곧 누군가가 세차게 검을 휘둘러 천막의 지붕을 찢자 뒤이어 몇 사람이 천막을 찢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런 제기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낙일방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자욱히 뒤집어쓴 채로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죽립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놈들을 보기만 하면…”
낙일방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눈에 불을 켜고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수림 쪽으로 뛰어가려 하자 정해가 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참아라. 지금 어디 가서 그자들을 붙잡겠단 말이냐?”
“하지만 이런 꼴을 당하고도 참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 그 망할 놈의 주방장 녀석부터…”
낙일방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간이 주점의 잔해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정해가 피식 웃으며 다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놈이 지금까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겠느냐? 진작에 꽁무니를 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왠걸? 잔해 더미의 한 부분이 들썩거리더니 그곳에서 사람 머리 하나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 나 죽는다!”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써서 두 눈만 빼꼼히 보이는 머리통의 주인은 다름 아닌 주방장이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까치집 같았던 주방장의 머리는 완전히 풀어헤쳐진데다 땀과 눈물, 먼지로 범벅이 되어 그야말로 밀가루 반죽을 해 놓은 것 같았다.
주방장은 때아닌 날벼락에 혼이 나간 듯 퉁방울만한 두 눈을 껌벅거리며 연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졌구나. 하늘이 무너졌어… 천지신명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정해는 그의 넋두리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그가 아직까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다면 기둥을 쓰러뜨린 것이 이자의 짓이 아니란 말인가?’
멀쩡하던 대나무 기둥이 저절로 부러질 리는 없으니 필시 누군가의 소행임은 분명한 일이었다. 진산월 일행은 물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고, 두 명의 죽립인들 또한 당시에는 전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해는 당연히 주방장의 짓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당 죽립인들과 함께 도망갔을 줄 알았던 주방장이 잔해 더미 속에서 기어나오자 평소 총명한 머리를 자랑했던 정해도 일시지간 어리둥절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자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대나무 기둥을 부러뜨리고 죽립인들을 도망치게 한 것일까?’
정해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대나무 기둥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나무 기둥은 질 좋은 청죽(靑竹)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굵기가 어른의 손목만 해서 어지간한 칼질로는 자르기도 수월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지금 대나무 기둥은 너무도 깨끗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그 잘려진 면(面)이 어찌나 매끈하던지 손으로 만지면 베어질 정도였다.
정해가 세어보니 잘려나간 대나무 기둥의 수는 모두 여덟 개나 되었다. 그것을 본 정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일 대나무 기둥을 자른 것이 한 사람의 솜씨라면 그 사람은 단 일순간에 여덟 군데로 검광(劍光)을 날려 대나무 기둥을 베었다는 말이었다. 그 정도 솜씨라면 강호무림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절정의 검법이 아닐 수 없었다.
정해는 다시 한 번 주방장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하나 온통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주방장의 멍청한 얼굴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일검(一劍)에 팔방(八方)으로 검광을 날리는 일류검객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방장 외에 다른 고수가 숨어 있었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작고 허름한 간이 주점에는 누가 숨고 자시고 할 공간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정해가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상원건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하게!”
정해는 퍼뜩 정신이 들어 주방장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의 코앞으로 쏘아져 들어오고 있는 하나의 뭉툭한 칼날이었다. 그 칼이 요리할 때나 쓰이는 날이 두꺼운 주방용 칼이라는 사실에 웃음이 나올 법도 했으나, 칼이 날아드는 위세와 속도가 너무도 무시무시해서 정해는 등줄기에 소름이 쭈욱 끼쳤다. 정해가 그 칼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옆에서 호시탐탐 주방장을 주시하고 있던 낙일방 때문이었다.
“끝까지 약은 수작을 부리는구나!”
낙일방은 버럭 노성을 지르며 번개같이 장검을 뽑아 세차게 앞으로 찔렀다.
땅!
불똥이 튀기며 낙일방의 장검은 정해의 목덜미로 날아들던 칼날을 정확하게 후려쳤다. 하나 그 칼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력하던지 후려쳤던 낙일방의 장검 끝이 부러져 나갔고, 칼날은 여전히 정해를 향해 날아갔다. 다행히 칼날의 속도가 약간 느려져서 정해는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팟!
머리카락 몇 가닥이 칼날의 스쳐 지나가는 기세에 잘려나가자 정해는 가슴이 섬뜩했으나 이내 번개같이 몸을 돌리며 칼날이 날아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하나 그는 다시 황급히 신형을 멈춰 세우며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의 옆을 스치듯 지나간 칼날이 허공에서 괴이하게 꺾이며 재차 그의 옆구리를 베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두껍고 뭉툭해서 닭 잡는 데나 쓰일 것 같은 칼이 이토록 신묘한 조화(造化)를 부릴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해는 다섯 걸음이나 허겁지겁 물러났으나, 여전히 칼날의 집요한 추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단순히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는 것 같은데도 쉽사리 칼 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장검이 잘려진 충격에 잠깐동안 멍하니 서 있던 낙일방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이놈! 용서하지 않겠다!”
낙일방은 비록 장검을 즐겨 사용하는 편이 아니었으나, 자신의 장검이 남에게 잘려나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참고 있을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칼날의 주인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검법의 예리함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그의 전신에서 뿜어나오는 기세만큼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데 낙일방의 검이 채 절반도 다가오기 전에 정해를 향해 쏘아져가던 칼날이 허공에서 한 차례 부르르 떨더니 돌연 방향을 바꾸어 낙일방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칼날의 변화하는 속도와 움직임은 마치 물 위에서 퍼득거리는 잉어처럼 약동(躍動)적이면서도 위협적인 것이었다.
“헙!”
낙일방의 입에서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낙일방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번에야 말로 조금 전에 장검의 끝이 부러진 것에 대한 설욕을 하겠다는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의 무모한 행동에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앗? 조심해!”
“저런 바보 같은 놈!”
깡!
낙일방이 전력을 다해 후려친 장검이 이번에도 정확하게 칼날과 맞부딪혔다. 그리고 또다시 장검의 일부분이 잘려나가고 말았다. 하나 그 순간, 의당 크게 당황하여 뒤로 물러날 줄 알았던 낙일방이 재빠르게 옆으로 빙글 돌며 칼날의 주인의 왼쪽 옆구리 쪽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상황이었다. 낙일방이 지금 펼친 것은 장괘장권구식 중의 천성탈두라는 초식으로, 지금과 같이 가까운 거리에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이었다. 막 낙일방의 주먹이 칼날 주인의 옆구리에 틀어박히려는 순간, 갑자기 칼날 주인의 몸이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없어져 버렸다.
“엇?”
낙일방은 전력을 기울인 주먹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바람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예의 칼날이 돌연히 그의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낙일방은 칼날 주인이 무슨 수로 자신의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칼날만 날아드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 낙일방의 목덜미가 칼날에 관통당하려는 순간, 갑자기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칼날이 다시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낙일방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 사이엔가 칼날 주인과 정해가 그의 코앞에서 불꽃튀기는 공방(攻防)을 벌이고 있었다. 낙일방의 위기를 본 정해가 검을 뽑아들고 칼날 주인을 대신 막아선 것이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 여초를 주고받았다. 하나 두 사람의 우열(優劣)은 곧 판가름이 났다. 정해가 칼날 주인의 무시무시한 칼질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정신 없이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뭉툭하고 볼품없는 칼날이 칼날 주인의 손에서 어찌나 영활하고 쾌속하게 움직이는지 정해는 처음에 한 두 번만 먼저 공격을 하고는 그 뒤로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낙일방은 절로 다급해져서 반토막 밖에 남지 않은 장검을 힘껏 움켜쥐고 다시 장내로 뛰어들려 했다. 그때 하나의 손이 그를 제지했다.
“사매에게 맡겨라.”
낙일방은 그 음성이 진산월의 것임을 알았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격동했던 마음이 점차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의 말대로 임영옥은 이미 칼날 주인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팟!
그녀의 뱅어같이 고운 손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고 느낀 순간, 한 줄기 백광(白光)이 눈부신 곡선을 그리며 칼날 주인을 향해 쏘아져갔다.
“엇?”
막 정해의 몸을 난도질할 듯 매섭게 몰아붙이던 칼날 주인의 입에서 뜻밖이라는 듯한 경호성이 흘러나왔다. 뒤이어 정해를 향해 무섭게 몰아쳐가던 칼날의 방향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여전히 정해를 압박해 가면서도 그중 몇 가닥의 도광이 흘러나와 임영옥이 발출한 검광을 막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솜씨는 강호무림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놀라운 것이었다.
임영옥은 찔러가던 장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백광이 돌연 세 가닥으로 나뉘어지며 칼날 주인의 양쪽 옆구리와 오른쪽 어깨를 향해 날아갔다.
“흐흐… 제법이군.”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칼날 주인의 신형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마치 허공을 미끄러지는 허깨비와도 같은 신묘한 신법이었다.
“사제. 괜찮아?”
임영옥이 빠르게 검을 회수하며 정해에게 다가가자, 정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사저. 고맙습니다.”
하나 말과는 달리 그의 온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서 낭패스러운 몰골이었다. 불과 십 여초 동안이었지만 하마터면 참변(慘變)을 면치 못할 뻔 했는지라, 정해의 얼굴에는 아직도 놀람과 두려움의 빛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임영옥은 정해가 무사한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칼날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시무시한 도법을 선보였던 칼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주방장이었다. 직접 보지 못했다면 이토록 비쩍 마르고 볼품 없는 용모의 그가 무서운 도법을 지닌 고수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주방장은 머리와 어깨에 묻어 있는 먼지를 털어낸 후 임영옥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중원 여자들은 보기 좋은 무공만 익힌다고 하던데 중원에도 제법 검다운 검을 쓰는 여자가 있군. 어떠냐? 자신이 있다면 나와 일대일(一對一)로 붙어보자.”
임영옥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 전에 먼저 자신의 정체부터 밝히는게 도리 아닐까?”
“흐흐… 여자가 물어보는데 안 밝힐 수는 없지. 내 이름은 맹파(孟芭)다.”
그 말에 상원건이 움찔 놀라는 표정이더니 임영옥을 향해 빠르게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임소저. 저 자는 야차도(夜叉刀)라는 별호로 신강(新疆) 땅에서 이름이 나 있는 유명한 살수(殺手)요.”
맹파는 슬쩍 상원건을 쏘아보더니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흐흐… 이곳에도 나를 아는 자가 있었군. 이제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질펀하게 한 번 겨뤄보자.”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는 임영옥을 향해 곧장 몸을 날렸다. 그의 수중에 들린 칼이 질풍처럼 움직이며 수십 개의 도영(刀影)을 만들어냈다.
파파파팍!
사방이 온통 칼그림자에 휩쓸리며 임영옥의 옷자락이 금시라도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거렸다. 임영옥은 상대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전신을 짓쳐오는데도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그러다 도영이 막 몸에 닿기 직전 수중의 장검을 빠르게 앞으로 휘둘렀다.
채채채챙!
그녀의 검과 도영이 허공에서 여러 차례 부딪치며 격렬한 마찰음을 토해냈다. 낙일방은 조금 전에 맹파의 칼에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검이 맥없이 잘려나간 것을 생각해 내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눈에 불을 켜고 앞을 바라보았으나, 장내가 온통 도영과 검기(劍氣)에 휩싸여 있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온통 살벌한 칼바람 소리와 고막을 후벼파는 듯한 예리한 파공음뿐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장내의 격전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자신들의 등 뒤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식간에 맹파와 임영옥은 수십 초를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의 동작은 갈수록 빨라져서 상원건같은 무림의 고수도 그들의 행동을 정확하게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정말 대단하군. 그녀의 실력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증강된 것 같구나.’
상원건은 맹파의 야차도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는 임영옥의 검술에 대해 진심으로 찬사를 보냈다.
상원건의 고향인 감숙은 신강과 청해성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감숙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상원건은 그쪽 지방의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맹파는 비록 서장의 절정고수들인 십이기나 십육사에는 속해 있지 않았지만 신강에서의 명성은 오히려 십육사를 능가하는 뛰어난 도객(刀客)이었다. 일단 손을 쓰면 무자비하게 상대를 도륙하기 때문에 일대살성(一代煞星)으로 소문이 났고, 그래서 그의 이름만 들어도 웬만한 사람들은 안색이 변해 도망치기 일쑤였다.
솔직히 그 자신도 맹파의 야차도를 받아낼 수 있을지 별로 확신할 수 없었는데, 임영옥은 그 무시무시한 야차도를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상원건이 임영옥의 검술을 처음 본 것은 어느 허름한 주루의 후원이었다. 그때 그녀는 단신으로 운문세가의 팔염라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상원건은 한 눈에 그녀가 여인으로는 보기 드문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불과 한달도 흐르지 않았는데, 그녀의 검술은 당시에 비해 훨씬 더 정진(精進)되어 있는 상태였다. 물론 상원건은 그 동안 그녀가 몇 차례의 살벌한 격전을 겪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한 사람의 실력이 이렇게 단기간에 발전할 수 있는지 상원건은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녀의 실력이 늘어났다기 보다는 손을 쓰는 마음 자세가 처음과 달라져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상원건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임영옥은 낙수의 선상(船上)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생애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충격이 사라진 후 그녀의 검은 훨씬 더 날카로워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첫 살인(殺人)이 그녀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피에 대한 혐오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지금도 맹파의 야차도가 일으키는 살벌한 도기는 웬만한 무림고수들이라면 싸우기도 전에 그 난폭함에 기가 질리거나 겁을 먹었겠지만,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약 조금이라도 맹파의 도법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면 절대로 지금처럼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을 것이다.
깡!
그때 갑자기 지금까지보다 몇 배나 더 큰 마찰음이 터져나왔다. 상원건이 황급히 전면을 바라보니 맹렬하게 싸우고 있던 두 사람의 신형이 어느 새 삼 장여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맹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다 두 눈에서 연신 흉광(凶光)이 흘러나오고 있어 그야말로 지옥의 야차(夜叉)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수중에는 여전히 예의 그 뭉툭한 부엌칼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 칼날 사이로 한 줄기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상원건은 깜짝 놀라 임영옥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다행히 그녀의 몸에 별다른 부상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고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선혈은 맹파의 칼에 묻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옷소매를 타고 칼날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상원건은 그제서야 맹파의 오른 팔뚝에 두 치 정도의 검상(劍傷)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내심 적지 않게 놀랐다.
물론 임영옥의 실력으로 맹파를 물리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남자인 자신이 보아도 무시무시한 맹파의 도법을 뚫고 그를 부상입힌다는 것은 실력 이전에 냉정하고 결의에 찬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크하하… 좋아, 좋아! 중원에도 제법 쓸만한 여자가 있군. 넌 내가 차지하겠다!”
그의 광오한 말에 중인들의 표정이 모두 굳어졌다. 특히 성질이 급한 낙일방과 응계성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분노하여 당장 맹파를 향해 덤벼들려 했다.
바로 그때 지금까지 별다른 말이 없이 장내의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던 뇌일봉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주위에 숨어 있는 쥐새끼 몇 마리를 믿고 함부로 아가리질을 하는 거냐?”
중인들은 뇌일봉의 호통에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얼굴이 변했다. 그제서야 자신들의 주위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고, 별다른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흔한 산새의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풀벌레나 산짐승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아서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하나 중인들은 이런 기이한 침묵이 오히려 더욱 불길하고 위험한 징후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인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당혹해하고 있을 때, 숲 속에서 별안간 이십여 개의 암기들이 빗발치듯 중인들을 향해 퍼부어졌다.
파파팍!
암기들은 대부분이 탈수표(脫手표)였으나, 게중에는 섬뜩한 붉은 빛을 발하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혈륜(血輪)도 섞여 있었다.
암기들이 날아오는 속도와 위세는 매우 위력적이어서 중인들 중 무공이 가장 약한 상소홍은 아버지인 상원건의 도움을 받은 덕에 겨우 부상을 면했으나, 얼굴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중인들이 황급히 암기들을 피하느라 우왕좌왕하는 순간, 칠팔 개의 인영이 숲 속에서 뛰어나와 그들을 향해 덮쳐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립을 깊게 눌러 쓴 인물들이었는데, 손에는 각기 다른 기형의 병기들을 쥐고 있었다. 낙일방은 그들 중 가장 왼편의 두 명이 조금 전에 주루에서 사라졌던 죽립인들임을 알아보고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네놈들이 이번에도 도망칠 수 있나 보자!”
낙일방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그들에게 달려들자, 그가 서두르다 낭패를 당할 것을 걱정한 정해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하나 그들보다 먼저 죽립인들을 향해 덤벼드는 인영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응계성이었다. 응계성은 주루의 천막이 무너져 먼지를 뒤집어쓸 때부터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는데, 죽립인들이 자신들을 협공해 오자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으로 불문곡직 그들을 향해 마주 달려간 것이다.
차창!
검광이 하늘 높이 솟구치며 예리한 파공음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조금 전만 해도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던 장내는 삽시간에 고함과 호통 소리, 검풍(劍風)과 도광(刀光)에 휩싸여 버렸다. 진산월 일행을 습격한 죽립인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응계성은 혼자서 그들 중 세 명이나 상대하고 있었고, 낙일방과 정해는 각기 한 명의 죽립인을 맞아 팽팽한 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머지 세 명의 죽립인들은 동중산과 진산월을 향해 덤벼들었으나, 그때 갑자기 한 줄기 막강한 경력이 그들을 쓸어갔다.
“네놈들은 노부의 몫이다!”
굉량한 호통 소리와 함께 뇌일봉이 어느새 그들에게 다가서며 오른손을 휘젓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가볍게 오른 소맷자락을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마치 폭풍노도와 같은 세찬 경기가 무서운 기세로 세 명의 죽립인들을 향해 몰아쳐 갔다.
꽈릉!
진산수라는 별호가 허명이 아님을 보여주는 놀라운 일수(一手)였다. 세 명의 죽립인들은 슬쩍 신형을 움직여 뇌일봉의 막강한 공격을 피했다. 그들의 몸놀림은 비호처럼 빠르고 민첩했으며, 뇌일봉의 무서운 공세를 보고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용맹스럽게 돌진해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호랑이를 향해 달려드는 세 마리의 굶주린 늑대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뇌일봉은 크게 호기가 치밀어 오르는 듯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감히 노부에게 맞서 보겠다는 게냐?”
세 명의 죽립인은 각기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와 낭아곤(狼牙棍), 흑피편(黑皮鞭) 등의 기형 병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수법이 하나같이 괴이하면서도 악랄하여 중원의 무공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다른 다섯 명의 죽립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어서 뇌일봉이 아닌 다른 고수였다면 상당한 곤궁에 처했을 것이다. 하나 뇌일봉은 이미 오랫동안 두 개의 손만으로 강호무림에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답게 여유만만한 동작으로 양쪽 소매를 번갈아 휘둘렀다.
파파팍!
그의 소맷자락 속에서 세찬 경풍이 노도처럼 밀려나와 세 명의 죽립인들을 압박해 갔다. 그가 펼치는 것은 노도번천수(怒濤飜天手)라는 무공이었는데, 쌍당장(雙撞掌), 진악신권(震嶽神拳)과 함께 뇌일봉이 가장 자신하는 삼대절학 중 하나였다. 그 위력은 이름 그대로 노한 파도가 하늘을 뒤덮듯이 패도무쌍한 것이었다. 세 명의 죽립인들은 뇌일봉의 공세가 거세게 몰아닥치면 재빨리 흩어졌다가 공세를 피함과 동시에 이내 다시 모여들어 벌떼처럼 공격하는 특이한 합격진(合擊陣)을 펼치고 있었는데, 삼재진(三才陣)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훨씬 진퇴(進退)가 빠르고 변화가 무궁하여 보는 사람의 눈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마 뇌일봉이 강호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괴이한 움직임에 크게 당황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아쉽게도 그들의 상대인 뇌일봉은 강호의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절정의 실력을 지닌 노련한 고수였다. 그는 몇 번의 헛손질을 한 후 이내 죽립인들이 특이한 절진(絶陣)을 펼치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대응 방법을 바꾸었다. 즉, 빠르고 위력이 강한 노도번천수 대신 변화무쌍하면서도 날카로운 쌍당장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쌍당장은 두 개의 손을 마치 두 개의 봉(棒)처럼 뻣뻣이 곤두세워 찌르기를 위주로 하는 특이한 장법(掌法)인데, 팔꿈치와 손목의 관절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공격 방향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 방비하기가 힘이 들었다. 과연, 뇌일봉이 쌍당장을 펼치자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세 명의 죽립인들은 조금 전과 같은 민활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쩔쩔매기 시작했다. 뇌일봉의 장세가 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봉쇄하여 자신들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자꾸 발생했던 것이다.
마침 삼첨양인도를 든 죽립인과 흑피편의 죽립인이 서로 부딪혀 휘청거리는 순간, 뇌일봉의 장세가 그들의 옆구리를 향해 화살처럼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사력을 다해 피했으나 흑피편의 죽립인은 완벽히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에 장력을 정통으로 격중당하고 말았다.
쾅!
“크헉!”
흑피편의 죽립인은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구부리고 뒤로 나뒹굴었다. 모르긴 해도 그의 오른쪽 갈비뼈는 대부분이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말은 긴 것 같았지만, 그것은 뇌일봉이 광소를 터뜨리며 그들에게 달려든 지 불과 십여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원건은 뇌일봉이 채 숨 몇 번 내쉴 사이도 되지 않아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이던 세 명의 죽립인들 중 한 명을 쓰러뜨리자 내심 그의 놀라운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대홍산(大洪山)의 호랑이라는 소문 그대로군. 그나저나 저자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느닷없이 우리를 암습한 것일까?’
죽립인들의 정체에 대해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신강성에서 명성을 날리던 야차도 맹파의 등장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으로 보아 그들이 서장의 고수들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왜 다짜고짜 진산월 일행을 암습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었다고 숨어 있던 다른 고수들까지 떼로 몰려 나와 공격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진산월 일행은 이번 천룡사와의 결전에 나서는 무림맹의 주축도 아니었고, 무슨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립인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습격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원건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뇌일봉는 더욱 거세게 남은 두 명의 죽립인들을 몰아쳐가고 있었다. 세 사람이 특이한 절진을 사용하고도 감당해 내지 못했던 뇌일봉을 한 사람이 쓰러져 절진이 깨진 상태에서 당해낼 리가 없었다. 두 명의 죽립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 금시라도 뇌일봉의 장력에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쐐쐐쐐!
갑자기 멀지 않은 나무 위에서 대여섯 줄기의 혈광(血光)이 뇌일봉의 등판을 향해 쏘아져 가는 것이 아닌가? 그 혈광이 어찌나 빠르게 날아들었던지 상원건의 눈에는 단지 여섯 개의 혈선(血線)이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나 뇌일봉은 이미 누군가가 나무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껄껄 웃으며 양 손을 풍차처럼 마구 휘두르는 것이었다.
“하하… 쥐새끼가 언제까지 숨어 있을 줄 알았더니 결국 꼬리를 드러내는구나!”
파파팍!
그의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들이 마치 담벼락에 부딪힌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상원건이 자세히 보니 그 혈광들은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한 작은 혈륜이었다. 앙증맞도록 조그마한 혈륜의 테두리에는 날카로운 톱니바퀴 모양의 칼날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전체가 진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였다. 혈광을 모두 격퇴시킨 뇌일봉의 거구가 한 마리 붕새처럼 허공을 날아 혈광이 날아왔던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순간, 나무 위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 나오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음소(陰笑)가 흘러나왔다.
“크케케… 힘 하나는 제법 좋은 늙은이구나. 그 정도면 이 노신(老身)이 기꺼이 귀여워해 줄만 하지.”
그 인영은 작달막한 체구에 알록달록한 채의(彩衣)를 입고 있는 쭈글쭈글한 노파였는데, 용모가 어찌나 추악하던지 밤에 보았다면 누구라도 지옥의 나찰(羅刹)이 현신한 것으로 오인했을 것이다. 게다가 옆구리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색과 노란 색, 파란 색의 가죽주머니 세 개를 차고 있었는데, 체구에 비해 지나치게 주머니가 커서 자칫하면 바닥에 끌릴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노파의 신형은 유부(幽府)의 귀신처럼 표홀하기 그지 없었다. 뇌일봉은 자신을 암습한 자가 금시라도 무덤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 추악한 노파임을 알자 싸울 맛이 달아났는지 눈쌀을 찌푸리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하나 노파는 오히려 그에게 바짝 다가들며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호호… 노신이 좋다고 달려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꽁무니를 뺀단 말이냐? 중원의 남자들은 변덕이 죽 끓는 듯 하다고 하더니 네가 꼭 그짝이구나?”
노파의 주름진 손이 붉은 색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러자 다섯 줄기의 붉은 혈광이 뒤로 물러서는 뇌일봉의 전신 오개대혈(五個大穴)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것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악독한 솜씨였다. 뇌일봉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두 걸음 이동하며 혈광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왠걸?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갈 듯 하던 혈광이 돌연 허공에서 기이하게 선회하며 더욱 빠르게 그에게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천하의 뇌일봉도 이때만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양 쪽 소매자락을 세차게 내저었다.
꽈릉!
노도번천수의 막강한 기운이 그의 전신으로 짓쳐오는 다섯 개의 혈광을 휩쓸어갔다. 상원건은 의당 이번에도 뇌일봉이 다섯 개의 혈광을 가볍게 격퇴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뇌일봉의 노도번천수는 패도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는 놀라운 무공이었다. 그런데 노도번천수에 격중되어 튕겨져 나갈 줄 알았던 혈광들이 괴이하게 꿈틀거리더니 노도번천수의 경력을 뚫고 다시 앞으로 전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 기경(奇驚)할 광경에 상원건은 물론이고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뇌일봉 조차도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앗?”
혈광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자기 멋대로 움직이며 경력과 경력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 들며 다가오는 모습은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뇌일봉은 다급하게 왼손을 거두어 들이며 오른 손의 손가락 다섯 개를 번갈아가며 튕겨냈다.
파파팍!
다섯 줄기의 지공(指功)이 그의 몸 가까이 다가온 혈광들을 향해 폭사되었다. 뇌일봉이 지금 펼친 것은 벽력지공(霹靂指功)이라는 것으로, 번갯불처럼 빠를 뿐 아니라 금석(金石)을 종이장처럼 뚫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과연 다섯 개의 혈광들은 단 하나도 벽력지공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격중되고 말았다. 그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파앗!
벽력지공에 격중된 혈광들이 그대로 터져나가며 시뻘건 핏물이 뇌일봉의 전신으로 쏟아져 버린 것이다. 뇌일봉은 안색이 대변해 전력을 다해 뒤로 몸을 날렸으나 핏물 중 몇 개가 몸에 묻고 말았다.
피시시식…
핏물에 닿은 옷자락이 매퀘한 냄새와 함께 그대로 타들어갔다. 바닥을 구르다시피 이 장여 밖으로 물러났던 뇌일봉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언제나 즐겨 입던 붉은 홍포는 여기저기가 구멍이 뚫어지고 검게 변색되어 보기 민망할 정도로 흉칙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뇌일봉의 시선이 자신의 더럽게 변한 옷자락에서 바닥으로 이동했다. 조금 전에 그가 서 있던 땅바닥에는 다섯 개의 혈광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혈광이 아니었다.
정체가 드러난 혈광은 다름아닌 다섯 마리의 붉은 뱀이었다. 붉은 뱀들은 크기가 어른의 손바닥 만하고 굵기가 새끼 손가락만 했는데, 하나같이 머리가 박살난 채 질펀한 피바다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추악한 노파가 붉은 색 주머니에서 집어 던진 것은 놀랍게도 혈륜이 아니라 다섯 마리의 붉은 뱀이었던 것이다. 추악한 노파가 처음에 평범한 혈륜을 사용했기 때문에 뇌일봉은 상대의 공격이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방심을 했다가 하마터면 커다란 낭패를 당할 뻔 했다. 그 붉은 뱀은 비단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뿐 아니라, 스스로 몸을 움직여 장력의 틈새를 파고 들만큼 영특했고, 게다가 그 핏물은 옷을 녹여버릴 정도의 강력한 독성(毒性)을 지니고 있으니 실로 귀물(鬼物)이라 할 만 했다. 단지 핏물 만으로도 이와 같을진데, 그 붉은 뱀에 물리기라도 했다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뇌일봉은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지만, 강호상에 이런 기이한 모양의 뱀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나 상원건은 그 뱀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 안색이 경직된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홍선사(紅線蛇)…! 이제보니 당신은 삼색귀파(三色鬼婆) 호용(呼容)이었구료.”
추악한 노파는 상원건이 한 눈에 자신을 알아보자 의외인지 독사같은 눈초리로 그를 힐끗 노려보았다.
“이곳에서 노신을 알아보는 놈이 있다니… 네놈은 누구냐?”
상원건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같은 무명소졸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겠소? 그나저나 당신은 신강의 오독동(五毒洞)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안 거요?”
“크헤헤… 무명소졸이라는 놈이 아는 것도 많구나. 오독동은 물론 노신의 편안한 안식처이지만 이번에 모처럼 중원의 바람을 쏘이러 나왔지. 너도 노신의 삼색사(三色蛇) 맛 좀 볼테냐?”
그녀가 히죽히죽 웃으며 자신의 주머니 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상원건은 황급히 뒤로 삼 장이나 물러났다.
“나는 아직 그럴 담량이 없소.”
상원건은 감숙성에서 오랫동안 비룡객이라는 명호로 활약해 온 뛰어난 고수였다. 평소에 성격이 침착하고 아는 것이 많아서 좀처럼 남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상원건이 노파의 장난같은 한 마디에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나자 중인들은 내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삼색귀파 호용은 비록 신강에서도 오지(奧地)인 오독동에서 주로 기거하여 중원에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강과 청해를 비롯한 서장 일대에서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칠 만큼 무시무시한 명성을 날리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비단 무공이 괴이무쌍할 뿐 아니라, 기물(奇物)들을 자유로이 조종하여 더욱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고 있었다. 그녀가 키우는 많은 기물들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삼색사였다. 삼색사란 홍선사와 황관사(黃冠蛇), 청설사(靑舌蛇)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들은 비단 맹독(猛毒)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무공의 고수라 해도 막기가 힘이 들었다. 그녀는 서장의 최고고수들인 십육사(十六邪)에도 속해 있었으며, 그 서열은 구위 였다. 상원건은 그녀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뇌일봉과 진산월에게 빠른 어조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호용은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에 괴이한 미소를 지은 채 중인들이 놀라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행동은 마치 상원건의 설명으로 중인들이 자신의 위명을 알게 된 것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호용의 정체를 알게 되자 뇌일봉은 오히려 격탕되었던 가슴이 진정된 듯 부리부리한 호목에 신광을 번뜩이며 호용을 쏘아보았다.
“흥! 곧 무덤 속으로 들어갈 할망구가 가만히 집에서 관(棺) 속으로 들어갈 준비나 하고 있지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노부에게 덤벼들다니… 그까짓 시시한 뱀 몇 마리를 믿고 중원에서도 행세할 수 있다고 믿었단 말이냐?”
호용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한 줄기 붉은 빛이 떠올랐다.
“시시한 뱀 몇 마리라고? 제법 힘 좀 쓸 것 같아서 귀여워 해주려고 했더니 아가리를 함부로 놀려서 밥맛이 떨어지는구나. 어디 노신의 귀염둥이 맛 좀 봐라!”
호용의 양 손이 붉은 주머니와 노란 주머니를 동시에 움켜쥐었다. 이를 본 상원건이 바짝 긴장하여 소리쳤다.
“조심하십시오, 뇌선배. 그녀의 황관사는 홍선사보다 몇 배나 더 무섭습니다.”
“낄낄… 남 걱정하지 말고 네 놈 목숨부터 신경써라!”
호용의 양 손이 주머니 속을 빠져나왔다. 그와 함께 뇌일봉의 앞가슴을 향해 세 개의 황선(黃線)이 그려졌고, 상원건에게도 다섯 개의 혈광이 쏘아졌다. 뇌일봉은 홍선사로 인해 한 차례 뜨거운 맛을 보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큰소리를 쳤으면서도 이미 양 손에 가득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세 마리의 누런색 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오른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감히 뱀 몇 마리 따위로 노부를 상대하려 하다니!”
꽈릉!
주먹이 쥐어지며 앞으로 내밀어지는 간단한 동작이었는데도, 우레와 같은 굉음이 터지며 한 줄기 막강한 압력이 불기둥처럼 세 마리의 뱀을 향해 몰아쳐갔다. 그가 뻗은 일권(一拳)의 위력은 그야말로 가공해서, 허공을 날아오던 세 마리의 뱀이 그 권세를 피하기 위해 마구 요동을 쳤으나 오히려 더욱 가운데로 몰리며 전진하는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뇌일봉이 펼친 것은 그가 가장 자신하는 진악신권으로, 비록 뇌일봉이 칠성(七成)의 공력만을 사용했지만 바위를 먼지처럼 으스러뜨리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 마리의 뱀은 홍선사처럼 가늘고 길었는데, 특이하게도 머리 부분에 오돌도돌한 닭 벼슬 같은 주름이 잡혀져 있었다. 얼핏 보면 마치 머리에 작은 관(冠)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뱀이 바로 황관사로, 그 독성은 홍선사를 몇 배 능가할 뿐 아니라 빠르고 영리해서 웬만한 장력(掌力)이나 검기 속은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영물(靈物)이었다.
하나 황관사가 아무리 영악하다 할지라도 뇌일봉이 펼친 진악신권의 권세에 갇히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황관사는 그 권세를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갈수록 진악신권의 위력이 강해져서 종내에는 허공을 채 반도 날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파앗!
황관사가 권세의 막강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가며 시뻘건 핏물이 사방으로 튕겼고, 느끼한 피비린내가 사위를 진동시켰다. 장력을 날려 홍선사를 물리치고 있던 상원건이 이 광경을 보고 안색이 대변해 소리쳤다.
“뇌대협, 숨을 멈추십시오. 그 냄새를 맡으면 안됩니다.”
뇌일봉은 단 일권에 세 마리의 황관사를 피떡으로 만들고는 득의해 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급히 숨을 멈추었다. 하나 이미 한 줄기의 비린내가 그의 콧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비린내를 맡자 뇌일봉은 머리가 어찔해지며 현기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겨우 한 줌의 냄새만으로도 이 정도라니 대체 저 할망구의 뱀은 얼마나 지독한 독성(毒性)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뇌일봉은 재빨리 공력을 운기(運氣)하여 독기를 몰아내는 한편, 호용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들이마신 양이 워낙 경미하여 공력을 일주천(一週天)하는 것만으로 독기를 몰아낼 수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홍선사보다 황관사의 독기가 세 배나 강하고, 황관사보다 청설사의 독기가 세 배나 강하다는 데… 저 할망구가 청설사를 쓰는 날에는 뜻밖의 낭패를 볼 지도 모르겠구나.’
정말 두려운 것은 호용이 주머니속에 가지고 있는 뱀들을 마구잡이로 뿌릴 경우였다. 뇌일봉은 그렇다치고, 무공이 약한 몇몇 사람들은 참변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뇌일봉은 호용이 청설사를 풀어놓기도 전에 단 일격에 그녀의 숨통을 끊어놓을 확실한 자신도 없었다. 그녀와 정면 격돌한다면 패할 리가 없겠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그녀의 신법으로 보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뇌일봉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망설이고 있자, 호용은 특유의 징그러운 미소를 날리며 그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호호호…. 이제 슬슬 노신이 두려운 생각이 드느냐?”
뇌일봉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왜 이곳에 숨어서 노부를 암습했는지 그 이유나 밝혀라.”
“이유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이유. 너희들이 하필이면 노신이 있는 이곳으로 온 것이 잘못이지. 너희들의 재수 없음을 탓하는 게 좋을 거다.”
하나 뇌일봉은 그녀를 비롯한 맹파와 죽립인들이 자신들을 암습한 것이 결코 그녀의 말처럼 우연히 벌어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더 추궁해 보았자 바른 대답을 듣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뇌일봉은 재빨리 장내의 상황을 살피며 생각을 굴렸다. 맹파와 임영옥은 여전히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고, 응계성과 낙일방 등도 죽립인들을 잘 막고 있었다.
문제는 뇌일봉에게 혼쭐이 났다 호용의 도움으로 무사히 살아난 두 명의 죽립인들이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나머지 일행을 노리고 있었는데, 평상시라면 그다지 걱정할 일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진산월은 오른손을 다쳐 아직 남과 싸울 수 없는 상태였고, 상소홍은 무공이 워낙 달려 혼자의 힘으로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동중산은 진산월을 지키고 있고, 상원건 또한 상소홍을 돌보랴 자신을 공격하는 홍선사를 막아내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뇌일봉은 결국 호용은 자신이 쓰러뜨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럴 때는 검(劍)을 익히지 않은게 후회가 되는군.’
뇌일봉은 양 손 만으로 오랫동안 강호에서 행세해 왔고, 남과 싸우는 일을 두려워 한 적이 없었다. 하나 호용이 가지고 있는 뱀들은 맨손만으로 상대하기에는 걸끄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뱀을 상대하는데는 검이나 도(刀)같은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손에 익지도 않은 검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뇌일봉은 오른 손에는 진악신권을, 왼손으로는 벽력지공의 기운을 끌어올리고는 자신을 향해 조금씩 다가오는 호용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녀와 자신의 거리는 삼 장. 그 거리가 이장 이내로 좁혀지면 뇌일봉은 주저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최대한 빨리 그녀를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최악의 경우, 한 손을 희생해서라도 가급적 빨리 그녀를 쓰러뜨리는 것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호용도 뇌일봉의 기세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조금 전과는 달리 신중한 모습이었다. 가볍게 늘어뜨린 그녀의 양 손은 허리춤에 달린 세 개의 주머니를 연신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그중 어느 쪽 주머니를 사용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섭게 노려본 채 조금씩 서로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손에 어떠한 병기도 쥐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다른 어떤 살벌한 격전보다도 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뇌일봉이었다. 뇌일봉은 그녀와의 거리가 두 장으로 좁혀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력을 다해 그녀를 향해 돌진해가며 양 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던 것이다.
꽈르릉!
전력을 다한 만큼 그의 공격은 무서운 것이었다. 벽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호용의 전신은 뇌일봉의 가공할 권세에 휩싸여 태풍 속의 나뭇잎처럼 위태로운 신세가 되었다. 호용은 설마 뇌일봉의 공세가 이토록 빠르고 강력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하며 신형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하나 그녀의 몸은 마음 먹은대로 민첩하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뇌일봉의 권세에 일단 휩쓸리게 되자 상상도 못했던 압력이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 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악신권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호용은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괴성을 내지르며 빨간 주머니와 노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던 양 손을 빠르게 빼내들었다. 일곱 마리의 홍선사와 다섯 마리의 황관사가 허공을 자욱히 수놓으며 뇌일봉을 향해 날아갔다. 그 와중에 호용의 손이 다시 파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것은 뇌일봉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이얍!”
뇌일봉은 우렁찬 호통과 숨겨 두었던 왼손의 손가락으로 다섯 대의 벽력지공을 내갈겼다.
파팟!
홍선사들은 진악신권의 막강한 권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채 일 장도 날아오기 전에 그대로 몸이 터져 버렸다. 그와 비슷한 순간에 다섯 마리의 황관사도 벽력지공에 머리를 격중당해 사방으로 진한 피비린내와 핏물을 튕기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실로 놀라운 위세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뇌일봉은 황관사의 독기가 담긴 냄새에 대비해 이미 숨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호용을 향해 날아가며 진악신권의 두 번째 권세를 질풍같이 내뻗었다.
콰르르릉!
주위가 마구 뒤흔들리며 도저히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굉량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호용은 머리를 산발한 채 마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권세를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녀의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은 점차로 강해지고 있었다.
“아악!”
마침내 그녀는 구슬픈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삼 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쿵!
바닥에 처박히듯 쓰러진 그녀는 이내 몸을 일으켰으나, 이미 입과 코로 핏물이 뿜여져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풀어헤쳐진 머리는 여기저기가 뽑혀져 그야말로 꿈에 볼까 무서운 흉칙한 몰골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입가를 비틀며 괴이하게 웃어대고 있었다.
“크헤헤… 네놈도 이제 끝장이다…”
울컥!
다시 그녀는 입으로 한 사발의 검은 피를 토해냈다. 하나 그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 듯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비수처럼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뇌일봉은 막 그녀를 향해 다시 진악신권을 휘두르려다 이 광경을 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진악신권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그녀가 겁을 집어 먹기는커녕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할망구. 이번에는…”
뇌일봉의 음성이 갑자기 끊기며 그의 몸이 벼락을 맞은 고목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아앗! 뇌대협!”
중인들 틈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하나 그 경악성은 이내 참담한 신음으로 변해 버렸다.
“으음…”
바닥에 쓰러진 뇌일봉의 허리춤을 뚫고 하나의 물체가 삐져 나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물체는 너무 가늘어서 마치 하나의 청색 실을 보는 것 같았다. 하나 꾸불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그 물체는 실이 아니라 뱀이었다. 그 뱀은 특이하게도 눈도 달려있지 않았고, 코도 없었다. 단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입만 뚫려 있을 뿐이었다. 온 몸이 보기만해도 징그러운 짙은 청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는 그 뱀은 뇌일봉의 허리부근 옷자락 사이로 빠져나오더니 빠른 속도로 호용을 향해 다가갔다. 호용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면서도 입을 벌리고 웃었다.
“호호호… 어서 오너라, 나의 귀염둥이야.”
그녀는 그 청색 뱀을 손으로 잡아서 입술을 맞추더니 다시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파란 색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그 뱀이 삼색사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청설사 임을 알고는 표정이 침통하게 변했다. 대체 호용은 언제 청설사를 내보내 뇌일봉을 쓰러뜨린 것일까? 아니, 청설사의 그 가늘고 보잘 것 없는 몸뚱아리로 진악신권의 가공할 권세를 뚫고 뇌일봉에게 접근했다는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