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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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7화


제46장. 급전직하(急轉直下)

황의 청년은 한 차례 중인들을 둘러보더니 이내 백의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시오?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나게 되었구료.”

백의인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나를 아시오?”

황의 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더욱 활짝 웃었다.

“하하… 당신을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잊어버리겠소? 아무리 당신이 모습을 가리고 있어도 그 음성과 태도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황의 청년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품 속에서 하나의 옥패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크기가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했는데, 겉 표면에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올라가는 용(龍)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당신이 선물한 비룡옥패는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소. 요즘 날씨가 제법 쌀쌀해 졌는데, 이 놈을 품에 가지고 있으면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서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오.”

백의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다가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 옥패가 곤륜온옥(崑崙溫玉)으로 만든 것이라 그럴거요.”

“오! 곤륜온옥은 온옥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으로, 남만에서 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나는 정말 귀한 선물을 받았던 셈이었구료.”

대들보 위에서 내려온 황의 청년이 자신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백의인과만 대화를 나누고 있자 노승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다. 황의 청년이 혹시 백의인과 같은 일행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 그 의구심은 곧 풀렸다. 황의 청년을 바라보는 백의인의 눈빛이 독사의 그것처럼 차갑고 싸늘한 것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노승은 짐짓 부드럽게 웃으며 백의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허허… 시주는 우리의 제의를 수락하겠소?”

백의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고개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

“그 제의만 수락하면 사람을 넘겨받을 수 있는 거요?”

“그렇소. 물론 그 전에 당초 청부의 대가로 받기로 했던 지도는 넘겨주어야 하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백의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의 청년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귀하와 나는 전생(前生)에 그리 좋지 못한 인연이 있었던 듯 하군.”

황의 청년은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그건 내 탓이 아니오.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지저분한 일에 손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는 구료. 내가 그때도 말했지만 그런 일일수록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결하는 것이 더 좋은 법이오.”

백의인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냉랭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내 손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오.”

“잘 생각했소. 그런데 넘겨받기로 한 사람이 분명한지 확인해 보았소?”

백의인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남의 청부에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일일수록 청부한 물건이 확실한지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오.”

백의인이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노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은 확실하네.”

백의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확인해 본다고 해서 일이 잘못될 건 없겠지.”

노승은 잠시 못마땅한 시선으로 황의 청년을 쏘아보다가 자신의 등뒤에 서 있는 세 명의 홍포인 중 한 명을 향해 말했다.

“뒷뜰에 가서 사람을 데려오너라.”

지시를 받은 홍포인이 허깨비처럼 날렵한 동작으로 대웅전을 빠져나갔다. 백의인은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가 황의 청년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황의 청년은 슬쩍 옆에 서 있는 젊은 도사를 가리켰다.

“이 분을 따라 왔소.”

백의인의 시선이 젊은 도사에게로 향했다.

“그는 누구요?”

황의 청년은 피식 웃었다.

“직접 물어보시오.”

백의인은 한동안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젊은 도사의 전신을 살펴 보았다. 젊은 도사는 그 눈길이 부담스러운지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백의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었다.

“무량수불. 안녕하십니까, 운공자?”

백의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소?”

“처음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았소?”

“천하에 비룡옥패의 주인이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빈도는 일전에 운문세가 대공자의 신물(信物)이 비룡옥패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빈도의 짐작이 어떻습니까?”

백의인은 그 말에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무언(無言)의 긍정(肯定)이 아니겠는가?

백의인은 다름 아닌 운문세가의 대공자인 운자추였던 것이다. 운자추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는데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단지 젊은 도사의 등뒤에 삐죽 나와 있는 장검을 힐끗 쳐다보고는 차가운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을 뿐이다.

“송문검(松紋劍)에 청사(靑絲)라…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모시는 일파(一派)중에서 푸른 색을 숭상하는 곳은 한 곳밖에 없지. 당신은 무당산(武當山)에서 왔겠군.”

이번에는 젊은 도사가 의외인 듯 눈을 살짝 치켜 떴다.

“무량수불. 운공자의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빈도는 무당의 청운(靑雲)이라 합니다.”

그 말에 황의 청년은 새삼스러운 듯 젊은 도사를 쳐다보았다. 그 뿐만 아니라 노승과 지금까지 석상처럼 묵묵히 앉아 있던 다른 세 사람도 젊은 도사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황의 청년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헛… 이제 보니 무당십이검(武當十二劍) 중의 한 분이신 청운도장(靑雲道長)이셨군요. 그동안 함께 다니면서도 미처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무당십이검은 구파일방 중에서도 최고의 성가를 구가하는 당파에서 배출한 열 두 명의 후기지수(後起之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수백 명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들로, 소림의 팔대신승에 비견되는 뛰어난 검객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무당파의 장로급 고수들보다 뛰어난 검술을 지닌 인물들도 있다고 하며,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도 그들 중에서 배출되리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렇게 허름한 사찰 안에 천하에서 명성이 자자한 무당십이검 중의 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확실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운은 황의 청년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미처 알려드리지 못한 빈도의 죄가 큽니다. 그러고 보니 빈도도 아직 시주의 성함을 알지 못했군요.”

“하하… 제 이름은 진산월이라고 합니다.”

청운은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되뇌이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시주께서 이번에 종남파의 새로운 장문인이 되신…”

“제가 미흡하나마 종남파를 이끌고 있습니다.”

청운은 즉시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시주께서 일파의 장문인이신 줄도 모르고 결례(缺禮)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황의 청년, 진산월은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런 자리에서 격식을 따져 무얼 하겠습니까? 그나저나 이자가 너무 늦는군요.”

때아닌 말에 청운은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대웅전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노승의 안색도 약간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뒤뜰로 간 홍포인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승은 다른 두 명의 홍포인에게 눈짓을 했다.

그때 묵묵히 앉아 있던 마의 사나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가보겠소.”

이어 그는 노승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렸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은 어느 새 대웅전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그의 몸이 한 줄기 연기처럼 흐릿하게 변하는 광경뿐이었다. 그야말로 가공(可恐)스럽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청운과 진산월의 얼굴이 홱 변했다. 청운은 마의 사나이의 신법에 내심 경각심이 크게 일었기 때문이었고, 진산월은 전혀 다른 한 가지 일이 뇌리에 떠올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놀랐는지는 나중에 밝혀질 일이었다.

마의 사나이는 사라질 때보다 더욱 빠르게 다시 나타났다. 얼핏 보면 그가 단지 몸을 한 차례 허공으로 솟구쳐 잠깐 중인들의 시야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 같기도 했다. 하나 그가 그 짧은 순간에 뒤뜰까지 갔다 왔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었다.

그의 오른 팔에 축 늘어진 홍포인의 몸이 들려 있는 것이다. 마의 사나이는 홍포인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노승은 황급히 물었다.

“여자는?”

마의 사나이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사라졌소.”

“사라지다니…”

“뒤뜰에 가보니 이자만 쓰러져 있었고,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소.”

노승은 홍포인의 몸을 살펴보더니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홍포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홍포인은 분명 누군가에게 혈도(穴道)를 제압당한 것 같았는데, 노승은 해혈법(解穴法)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강호에 제혈수법(制穴手法)은 수백 종(種)이 있지만, 그것을 해혈(解穴)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각각의 제혈법이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두 서너 가지의 해혈법만 알아도 웬만한 혈도를 모두 풀 수 있는 것이다.

하나 간혹 아주 특이한 독문수법(獨門手法)으로 제압된 혈도는 제압한 당사자가 아니면 풀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눈앞의 홍포인이 바로 그러한 수법에 당한 경우였다.

노승은 홍포인의 몸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진산월과 청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노납이 자네들을 너무 가볍게 보았던 모양이군. 자네들이 또 다른 방수를 데리고 온 줄을 미처 몰랐으니 노납의 잘못이 크네.”

하나 어리둥절한 것은 진산월과 청운도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은 물론이지만, 청운도 일행을 전혀 대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승은 그들의 표정을 보자 자신이 잘못 짚었음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어 노승의 시선은 자연스레 운자추에게로 향해졌다.

운자추는 이미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는지 냉랭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나를 의심하는 거요?”

노승은 그의 말에는 가타부타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누구의 솜씨이든 우리가 뒷통수를 한 방 맞은 것은 분명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

이어 노승은 운자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자는 곧 찾아올 수 있을 거네. 그러니 자네는 저자들을 처리하게.”

운자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빛이 역력했다. 노승은 다시 웃었다.

“노납의 말을 믿게. 그녀를 데려간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곧 제 발로 다시 우리를 찾아올 걸세.”

운자추는 반신반의했지만, 노승이 평소에 실없는 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납이 굳이 저자들을 자네에게 맡기려는 것은 자네에게 쓸데없는 빚을 남기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일세. 잊었나? 자네는 우리에게 두 사람의 목숨을 빚졌다는 것을…”

노승의 말에 운자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십대호령의 두 사람과 저자들을 비교하면 내가 손해일텐데…”

“허헛… 그건 이자라고 생각해 두게.”

운자추는 마음을 결정했는지 천천히 진산월과 청운을 향해 돌아섰다.

“아무래도 그렇군. 역시 내 손으로 결정지어야 될 일이었어.”

진산월은 왠지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조금은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대신 청운이 합장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무량수불. 시주들께서는 빈도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운공자를 앞세워 빈도를 핍박하시는 겁니까?”

노승은 소리내어 웃었다.

“허허… 무당십이검 중 세 명이 그동안 꾸준히 본당의 호북지부(湖北支部)를 탐색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그러니 우리 뒤를 쫒아 이곳까지 찾아온 자네의 정성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나?”

청운의 눈에서 한 줄기 번쩍이는 신광(神光)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으니 부인하지도 못하겠군요. 그나저나 대사의 신분으로 무엇이 아쉬워 일개 청부집단의 하수인(下手人)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노승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노납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청해(靑海) 해심산(海心山) 해심사(海心寺)의 주지이신 금불(金佛) 대사가 아니십니까?”

“잘 알고 있군.”

“대사께선 청해에서 신선과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쾌의당 같은 좋지 않은 무리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다니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허허…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지. 노납에게는 청해의 신선보다 본당의 신분이 더욱 마음에 드는 걸 어쩌겠나?”

노승은 부드럽고 온화하게 웃었지만, 그 미소를 보고 있는 청운의 얼굴은 점차로 굳어지고 있었다. 청해성(靑海省)에서 금불대사의 명성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부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쾌의당의 일개 수하가 된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고 있으니, 이것만 보아도 쾌의당이 얼마나 가공스런 집단인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쾌의당이 언제 조직되었는지는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강호인들 사이에 쾌의당이란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나 그들이 강호에서 활동한 시기는 무척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衆論)이었다. 왜냐하면 이후에 벌어진 여러 가지 일들로 미루어 그동안 강호에서 벌어졌던 적지 않은 괴사(怪事)들이 그들의 소행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쾌의당은 전문적인 청부집단이라고 했다. 강호에 청부(請負)를 담당하는 단체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쾌의당이 짧은 시간내에 강호상에 널리 이름이 퍼져나간 것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크고 작은 수많은 청부를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모두 완수했기 때문이었다. 게중에는 적지 않은 살인청부(殺人請負)도 있었다.

사실 살인청부만 아니라면 아무리 완벽한 청부집단이라도 강호인들이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하나 상당수 고수들의 느닷없는 변사(變死)가 그들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쾌의당이라는 이름은 급속도로 무림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는 것에는 많든 적든 살인이 연관이 된다. 강호에서의 고수란 결국은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죽여 명성을 쌓고, 그 명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살인을 해야 하는 것이 무림인들의 숙명(宿命)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쾌의당의 이름이 빠른 시간내에 강호에 널리 퍼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수뇌부와 조직은 철저한 비밀에 가려 있어 무림인들에게 두려움과 함께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운자추가 천천히 진산월과 청운을 향해 다가왔다. 운자추는 여전히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자 앞에 달린 망사가 바람도 없는데 조금씩 펄럭이고 있었다. 청운은 그것이 운자추가 공력(功力)을 끌어 올렸기 때문에 생긴 현상임을 알아차리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공력(內家功力)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군. 과연 강호에서의 명성이 허언(虛言)이 아니었구나.’

청운은 힐끗 진산월을 쳐다보며 물었다.

“장문인께서 먼저 하시겠습니까?”

진산월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청운도장께서 먼저 하십시오.”

그리고는 이내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제 실력으로는 그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서 말이죠.”

청운은 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청운이 진산월에게 의중을 물어본 것은 그래도 그가 일파의 존주(尊主)이기에 베푼 최소한의 예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럴 때는 자신의 지위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도 이 자는 태연하게 상대를 당해낼 수 없으니 자신보고 나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한 문파를 거느리고 있는 장문인의 신분으로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청운은 이 자의 낮짝이 원래 두꺼운지 아니면 다른 속사정이 있는지 궁금하여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언뜻 보기에도 착실해 보이는 웃음을 지은 채 그를 마주보고는 고개까지 까닥거리는 것이었다.

“부탁합니다. 무당파의 놀라운 솜씨를 견학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상대가 이렇게 까지 나오는데 청운도 더 이상은 사양을 할 수가 없었다. 청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운자추를 향해 마주섰다.

“무량수불. 운공자와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운자추는 묵묵히 안광을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청운은 다시 한 차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운공자의 강호에서의 명망(名望)과 운문세가의 이름을 생각하면 이번에 운공자가 쾌의당에 청부를 한 것은 정말 너무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군요.”

“……”

“게다가 그들의 사주를 받아 우리를 살인멸구(殺人滅口)하려 하다니 운가주(雲家主)께서 나중에라도 이런 사실을 알면 얼마나 통탄스러워 하시겠습니까?”

운자추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나 망사 사이로 내비치는 그의 안광이 마치 두 자루의 섬뜩한 칼날처럼 무섭게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마음 속에 살심(殺心)이 가득 차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청운은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등뒤에 삐죽 삐져 나와 있는 장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찰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던 운자추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쾌액!

여인의 옥수(玉手)를 연상케하는 새하얀 손 하나가 번개같은 속도로 청운의 관자놀이를 향해 쏘아져갔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산월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빠르기였다. 단순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진산월은 온 몸이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그로서는 설사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눈을 멀게 하는 듯한 섬광이 뿜어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앗!

진산월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청운의 등뒤에서 무언가 하얀 빛이 번쩍거리며 주위의 공기를 반으로 가르는 듯한 백색 섬광이 흘러나왔다는 것 뿐이었다. 옥수는 쏘아져올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그와 함께 백색 섬광도 텅빈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그것은 너무도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져,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나 진산월은 말못할 감흥에 휩싸여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가까운 거리에서 진정한 고수들의 일초(一招)겨룸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 섬광과 같은 순간에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일수일검(一手一劍)의 초식들은 지금의 진산월로서는 따라 할 엄두도 내지 못할 빠르고 정교한 무학(武學)들이었다. 운자추가 시전한 것은 낙화섬수(落花閃手)라는 최절정의 수공(手功)이었고, 청운이 펼친 것은 무당의 비전(秘傳)인 구궁영검법(九宮影劍法) 중의 두전성이(斗轉星移)라는 초식이었다. 두 무공 모두 강호상에서 손꼽히는 상승절학(上乘絶學)들이었고, 두 사람의 화후(火候) 또한 거의 절정에 다다라 있었기에 단 한 번의 초식교환 만으로도 능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번개같은 일초를 교환한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너무도 팽팽해서 누군가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의 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파팍!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끗한 두 개의 인영 뿐이었다. 대신에 세찬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칼바람 소리만이 허공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진산월은 장내에서 뿜어 나오는 경기(勁氣) 때문에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야만 했으나,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두 사람의 싸움을 주시했다. 먼저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한 사람은 청운이었다. 청운은 무당의 구궁영검법 중의 절초들을 거푸 사용해 운자추를 압박해 가고 있었다.

무당파에는 수십 종(種)의 검법이 있지만, 그중 강호상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태청검법(太淸劍法)과 소청검법(少淸劍法) 외에 양의문(兩儀紋), 삼절황(三絶荒), 사상류(四象流), 구궁영(九宮影)의 소위 도가사대검학(道家四大劍學)이라고 불리우는 네 가지 검법이었다. 특히 도가사대검학은 익히는 사람의 수위(修位)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력을 보이는 것으로, 그중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완벽하게 익히기만 하면 천하의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절정의 검객(劍客)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무당의 검법은 도가에서도 가장 공명정대하며 나름대로의 고고한 기상을 담고 있었다. 강호에 널리 퍼져 있는 ‘청연무당(靑然武當)’ 이라는 말은 단순히 무당산(武當山)의 기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당파와 그에 몸담고 있는 문인(門人)들의 기상과 자긍심을 함께 나타내는 것이었다. 지금도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한 자루 송문고검을 휘두르고 있는 청운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학(鶴)을 보는 것처럼 맑고 깨끗했다. 단순히 자세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초식들은 하나같이 군더더기가 없고 절도가 있으면서도 추상(秋霜)과 같은 삼엄함을 담고 있었다.

진산월은 내심 마음 속으로 종남파의 진산절학인 유운검법, 천하삼십육검과 지금 청운의 검법을 비교해 보았다. 날카로움은 유운검법도 못지 않았고, 당당함은 천하삼십육검도 능히 비길 만 했다. 하나 달리 생각해 본다면 청운의 검법은 유운검법만큼이나 날카로우면서도 그보다 훨씬 거센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천하삼십육검과 엇비슷하게 당당하면서도 훨씬 변화무쌍하고 예리했다. 진산월은 지금 청운이 사용하고 있는 검법의 정확한 명칭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유운검법과 천하삼십육검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하나 어쩌면 그런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어느 검법이 더 우월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검법을 얼마나 완벽하게 터득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산월의 천하삼십육검에 대한 화후는 겨우 팔성(八成) 정도였고, 유운검법은 간신히 오성(五成)을 넘어섰을 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유운검법이나 천하삼십육검이 청운의 검법보다 낫다 못하다는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청운은 구궁영검법을 완벽에 가깝도록 익히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저토록 유연하고 매끄러운 동작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산월은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한 문파를 거느리고 있는 장문인으로서 내공의 부족은 물론이거니와 무공에 대한 습득 정도도 다른 문파의 일개 제자에 뒤지고 있음을 알았다면 누구라도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파파팍!

지금도 청운이 옆으로 반쯤 몸을 선회시키며 부채를 흔들 듯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무려 열 두 개의 검영(劍影)이 파도치듯 겹겹이 일어났다. 진산월은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최대한의 검영이 여덟 개 뿐임을 알고 있기에 부러움이 담긴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하나 운자추의 움직임은 더욱 빨랐다. 검영이 채 그의 몸을 뒤덮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한 줄기 희끗한 백선(白線)을 그리며 청운의 우측으로 돌아갔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정도의 열 두 개 검영 속을 그처럼 유연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운자추는 순식간에 청운의 옆으로 접근하며 양 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쐐액!

낙화섬수의 가공할 경력을 동반한 양 손이 검풍 사이를 뚫고 무서운 속도로 청운의 양쪽 관자놀이를 향해 다가왔다. 청운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앞으로 내뻗었던 장검을 거두어들임과 동시에 검봉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서릿발같은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운자추의 양손을 휘감아 가는 것이 아닌가? 운자추의 양 손에 아무리 대단한 경력이 담겨 있다 해도 그 검기에 휘말리게 되면 그대로 잘려지고 말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흣… 좋은 초식이군.”

운자추는 탄성인지 경악성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몸을 빠르게 선회시켰다.

파파팍!

그의 몸 주위에 기이한 경력이 일어나며 주위 사방으로 수십 개의 손그림자가 자욱히 일어났다. 그것은 삽시간에 청운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손그림자가 어찌나 빽빽하던지 청운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누가 보기에도 그것은 청운의 절대적인 위기였다.

“합!”

손그림자 속에서 한 줄기 낭랑한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그와 함께 마치 폭발하는 듯한 검광 한 가닥이 손그림자를 뚫고 운자추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천하의 운자추도 이때만은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 검광이 날아드는 속도와 방위가 실로 상상을 불허했던 것이다. 운자추는 황급히 회전하던 몸을 멈추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너풀!

그의 모자 아래 매달려 있던 망사가 잘려 나가며 허공에서 수 백개의 작은 조각이 되어 흩날려졌다. 그러자 마치 대웅전 안에 꽃비가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운자추의 몸은 뒤로 젖혀진 자세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망사 조각 사이로 뇌전같은 섬광(閃光) 하나가 찬연히 피어 올랐다.

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지며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 졌다. 진산월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긴장된 표정으로 전면을 주시했다. 청운은 여전히 송문고검을 든 채 처음의 위치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검을 자신의 가슴 앞에 세운 자세였는데, 검신(劍身)의 끝부분에 묵묵히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청운의 얼굴에는 무어라고 딱 꼬집어 표현하기 힘든 괴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무언가에 몹시 놀란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당혹스러운 표정 같기도 했으며, 또 어찌 보면 어이가 없어 하는 것도 같았다. 진산월은 황급히 그의 전신을 살펴 보았으나, 다행히 별다른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 비하면 운자추는 모자 아래에 달려 있는 망사가 찢어지고 바닥에 한 차례 쓰러졌다 일어났기 때문인지 옷의 여기저기가 더럽혀져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운자추가 손해를 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망사가 없어지며 드러난 운자추의 얼굴은 여전히 준수했고 피부는 여자의 그것처럼 희고 깨끗했다. 그의 얼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특유의 매부리코는 오늘따라 그의 모습을 한층 더 날카롭게 부각시키고 있었다. 운자추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옷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때까지도 청운은 여전히 자신의 장검을 응시한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진산월은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침음성을 발했다.

“음…”

이제 보니 청운이 들고 있는 송문고검의 끝 부분이 조금 부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부러진 부위는 어린 아이의 새끼 손톱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미세한 크기였으나, 그것을 본 진산월은 내심 적지 않은 충격을 느꼈다. 검봉(劍鋒)이 부러졌다는 것은 검객으로서는 수치스럽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조금 전에 청운은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는데, 대체 운자추가 무슨 수로 그의 검봉을 부러뜨릴 수 있었단 말인가? 청운은 한참동안이나 자신의 부러진 검 끝을 응시하더니 돌연 운자추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운공자가 사용한 것은 혹시 밀종(密宗)의 검원지(劍元指)가 아니오?”

운자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운공자는 하남의 명문(名門)인 운문세가의 적통(嫡統)을 이을 후계자로서 어찌 밀종의 무공을 익혔단 말입니까?”

운자추는 힐끗 그를 쳐다보더니 모처럼 입을 열었다.

“중원인(中原人)이라고 해서 밀종의 무공을 익히지 말라는 법은 없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무공을 익혔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강해지느냐 하는 것이오.”

“과연 소문으로 듣던 대로 광오하군. 운공자가 서장의 불순 집단인 쾌의당과 손을 잡았을 뿐 아니라 밀종의 무공까지 연성한 것을 안 이상 빈도도 생각이 달라질 수 밖에 없소.”

청운의 눈빛이 냉엄하게 굳어지며, 전신에서 점차 맹렬한 기세가 구름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각오하시오, 운공자. 이번에는 조금전과 같은 요행을 바라기 힘들거요.”

운자추는 조금도 위축된 빛이 없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무당의 무공은 잘 견식했소. 기대했던 것보다는 형편없더군.”

청운은 아무 말없이 수중의 장검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촤악!

그의 부러진 검끝에서 시퍼런 검기가 솟아나와 운자추의 미간을 엄습해 갔다. 그의 이 한 수는 진산월 뿐 아니라 지금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장내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금불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청운이 보여준 것은 검기상인(劍氣傷人)의 신기(神技)였던 것이다. 이것은 검술의 최고봉이라는 검강(劍?)의 초입단계로서, 특정한 초식을 구사하지 않고도 단지 검기만으로 사람을 살상케 하는 놀라운 무공이었다. 하나 운자추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어 단지 한 차례 몸을 휘청거렸을 뿐이었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는데도 청운이 발출한 살인적인 검기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두 발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몸을 흔들어 검기를 피하는 운자추의 신법 또한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멋진 암향부동(暗香不動)의 신법이구나…”

금불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운과 운자추는 다시 맹렬하게 격돌하기 시작했다.
이번의 격투는 먼젓번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벌하고 흉험한 것이었다.
청운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살기가 가득담긴 검법으로 운자추의 전신을 난도질 할 듯 했고,
운자추 또한 반격하는 수법 하나하나가 전혀 손속에 사정을 보지 않는 악랄한 것이었다.

파파파팍!

삽시간에 대웅전 안은 그들이 뿜어내는 검광과 경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그들이 격돌하는 기세가 어찌나 강력하던지 진산월은 물론이고 금불을 비롯한 쾌의당의 인물들마저 뒤로 몇 걸음씩 물러나야만 했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그들이 지금까지 아직 자신들의 진정한 실력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운자추의 실력이야 어느 정도 짐작했었지만, 청운의 무공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무당파의 일대제자가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들의 수뇌급들은 대체 어느 정도의 고수란 말인가?
진산월이 야릇한 기분에 젖어들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앞으로 한 사람이 성큼 다가왔다.

“구경만 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군. 우리도 한 판 어울려 보자.”

진산월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머리를 헝클어뜨린 마의 사나이였다.

“꽁무니를 뺄 생각은 아예 말아라. 네놈은 도망갈 곳도 없으니…”

아마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들었다면 분기탱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파의 장문인에게 이런 식의 말은 치욕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화를 내는 대신 호기심어린 눈으로 마의 사나이의 전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마의 사나이의 몸은 깡말랐고, 키는 진산월보다 조금 작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머리를 지나 거의 목덜미까지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머리카락 사이로 두 개의 시퍼런 눈동자가 섬뜩한 안광을 발하며 번뜩이고 있었다.
진산월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자 마의 사나이는 자신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녹슨 장검을 툭툭 건드렸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가? 이 검을 꺾어 보라구. 그러면 자연히 알게 될테니.”

다분히 도발적이며 모욕을 느끼게 하는 언동이었다.
진산월은 어깨를 편 채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을 뽑으시오.”

마의 사나이는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 그래도 장문인의 체통을 지키고 싶다는 거로군. 하지만 곧 후회하게 될걸.”

“당신은 원래 싸우기 전에 그렇게 말이 많소?”

마의 사나이는 웃음을 그치고 무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진산월은 그가 바로 손을 쓰리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마의 사나이는 돌연 어깨를 들썩이며 우렁찬 광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크하하… 크하하하…!”

마의 사나이는 한동안 정신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웃어댔다.
어찌나 몸을 흔들며 웃어대던지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이 마구 펄럭이며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일부분이나마 드러나 보였다.
진산월은 드러난 그의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다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반쯤 드러난 그의 얼굴은 피부가 온통 검은 색 선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얼굴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오랜 가뭄으로 바닥이 쩍쩍 갈라진 논두렁을 보는 것 같았다.
하나 진산월이 좀 더 자세히 보기도 전에 마의 사나이는 웃음을 멈추었고, 그 바람에 그의 얼굴은 다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의 사나이는 언제 웃었냐는 듯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광오한 놈이로군. 시시한 종남파의 무공을 믿고 감히 내게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네놈 따위는 굳이 검을 쓰지 않아도 삼 초면 쓰러뜨릴 수 있다.”

진산월이 아무리 느긋한 성격에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말까지 듣고도 참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종남파 전체의 위신에 관련된 문제였다.
진산월은 씁쓸하게 웃으며 천천히 허리춤의 장검을 움켜 잡았다.

“언제고 당신은 지금의 그 말을 꼭 후회하게 될 거요.”

마의 사나이의 몸이 움직인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래? 어디 후회하게 만들어 봐라.”

싸늘한 냉소와 함께 무언가 희끗한 것이 진산월의 코앞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그것이 마의 사나이의 주먹이라는 것을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진산월의 몸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마의 사나이의 주먹은 곧장 일직선으로 진산월의 콧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특별한 변화는 없었으나, 그만큼 빠르고 매서웠다.
진산월이 처음부터 옆으로 움직였다면 어쩌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무심코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마의 사나이의 권세(拳勢)를 빠져나올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진산월은 손을 들어 마의 사나이의 주먹을 막으려 했다.
그때 마의 사나이의 주먹이 갑자기 부르르 떨리며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무작정 빠르게 날아오는 줄로만 알았던 마의 사나이의 주먹이 미세하나마 마구 요동을 치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살아 있는 커다란 뱀이 용트림을 하면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식의 변화는 진산월이 난생 처음 보는 것이어서 도저히 마의 사나이의 주먹이 자신의 어느 부분을 노리고 날아드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단순히 내뻗는 주먹으로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처음 깨달은 듯한 느낌이었다.
진산월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시 뒤로 물러나는 일 뿐이었다.
하나 그것도 그리 여의치 않았다.
그의 물러나는 속도보다 마의 사나이의 다가서는 속도가 훨씬 빨라서 미처 두 걸음 물러서기도 전에 마의 사나이의 주먹은 이미 그의 턱밑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진산월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팟!

번개같은 섬광(閃光)과 함께 검기가 피어오르자 그제 서야 진산월의 턱을 향해 날아오던 마의 사나이의 주먹이 거두어졌다.
주먹을 내뻗었다가 다시 거두어 들이는 동작이 그야말로 신묘하기 그지 없었다.

“흐흐… 이제야 검을 뽑았구나. 어디 몇 초나 견딜 수 있는지 한 번 보자.”

마의 사나이는 음산하게 웃으며 훌쩍 뒤로 물러났다가 재차 달려들었다.
그의 동작은 그야말로 하나의 허깨비를 보는 것처럼 영활하면서도 신속했다.
진산월은 공력을 잔뜩 끌어올린 채 눈을 부릅 떴지만, 이번에도 마의 사나이의 동작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마의 사나이가 조금 전처럼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오른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만이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아주 미약한 느낌이었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몸을 선회 시키며 검을 좌에서 우로 비스듬히 그어댔다.
한 줄기 검영(劍影)이 마의 사나이의 미간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마의 사나이는 맹렬한 속도로 진산월의 오른쪽으로 돌진해 들어오면서 슬쩍 어깨를 움직여 진산월이 펼쳐낸 검영을 피했다.
한데 그가 검영을 피함과 동시에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허공을 스치고 지나간 줄 알았던 검그림자 속에서 돌연 하나의 검날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헛!”

마의 사나이도 이때만큼은 찔끔했던지 짤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팟!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가며 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져 허공에 뿌려졌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조금 전에 진산월이 펼친 것은 유운검법중의 추운축전(追雲逐電) 일식이었다.
추운축전은 유운검법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매서운 초식으로, 얼핏 보기에는 검이 별다른 변화없이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겉으로 보이는 검영(劍影)은 허깨비이고 그 뒤에 진검(眞劍)이 숨어 있는 무서운 살수(殺手)였다.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속에 숨어 뒤를 쫓는 뇌전과 같다고 하여 추운축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마의 사나이는 진산월의 무공을 경시했다가 뜻밖의 낭패를 보게 되자 분기탱천 했는지 눈빛이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좋아. 앞으로 내 손아래 이 초를 더 버티면 종남파의 무공이 쓸만하다고 인정해 주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은 홀연히 진산월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진산월은 얼마 전에 마의 사나이의 가공할 신법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절로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공을 겨루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보법(步法)이었다.
신속하고 정확한 몸놀림과 민첩한 움직임이 있어야만 상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산월의 보법은 그다지 훌륭하다고 할 수 없었다.
체구가 커서인지 아니면 성격이 너무 느긋해서인지 그는 민첩한 움직임보다는 순간순간의 임기응변에 의한 대응을 더 즐겨 사용하는 편이었다.
하나 마의 사나이와 같은 일류고수와 겨루게 되자 보법의 부족함이 새삼 뼈저리게 느껴졌다.
지금도 마의 사나이는 마치 한 줄기 유령처럼 진산월의 몸 주위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이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진산월은 마치 수십 명에게 에워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산월은 알지 못했지만, 마의 사나이가 펼치고 있는 보법은 산형무궁보(散形無窮步)라는 것으로, 강호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절정의 무공이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진산월의 주위를 휘돌던 마의 사나이의 공세가 시작된 것은 진산월이 무의식 중에 눈을 깜박 거렸을 때였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진산월이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양쪽 옆구리 부근으로 차가운 기운이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옆구리 부근이라고는 했지만, 상대가 무슨 수법으로 정확히 어느 지점을 공격해 오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무작정 몸을 피한다는 것도 힘들었고, 그렇다고 반격을 가하자니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산월은 가장 기초적인 대응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회선표 신법으로 몸을 선회시키며 수중의 검을 천전만권의 식으로 휘둘렀다.

천전만권은 원래 장괘장권구식 중의 한 초식으로 맨손으로 사용하는 무공이었으나, 지금 진산월이 검법으로 펼치자 또다른 위력이 있었다. 특히 이 초식은 회선표와 함께 시전하면 특유의 변화가 더욱 복잡해지고 위력이 배가 되어 사방의 적을 공격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적합한 초식이 되는 것이다. 삽시간에 진산월의 몸 주위는 엄중한 검광에 가려져 버렸다. 마의 사나이가 진산월의 어느 부위를 공격하던 검광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소한 진산월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마의 사나이의 손은 너무도 유연하게 진산월이 펼쳐낸 천전만권의 초식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쑤욱!

진산월은 맹렬하게 몸을 회전시키며 천전만권의 변화를 그려내다가 갑자기 자신이 펼쳐낸 검광의 일부가 허물어지며 하나의 손이 불쑥 나타나자 움찔 놀랐다. 그 손이 움직이는 속도는 마치 밤하늘을 가르는 한 줄기 유성(流星)과도 같았다. 진산월은 선회하던 몸을 옆으로 이동시켰으나, 손이 다가오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 도저히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휘두르던 장검을 거두어 자신의 얼굴을 막는 것 뿐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진산월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산월의 관자놀이를 향해 무섭게 날아들던 손이 관자놀이 대신에 진산월의 검신(劍身)을 후려치고 말았다.

땅!

손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귀청 따가운 음향이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진산월은 검을 든 오른 손에 막대한 충격을 느끼고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검신을 후려친 힘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하마터면 수중에서 검을 놓칠 뻔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일전에 다친 상처가 다시 터지며 손아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애송이. 이제 마지막이다!”

진산월의 귓전으로 마의 사나이의 냉혹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진산월은 손아귀가 찢어진 고통을 억누르며 왼손을 움직여 양 손으로 장검을 힘주어 잡았다. 오른손만으로는 통증 때문에 제대로 검법을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산월은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무거운 표정으로 검을 머리 위로 쳐든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커다란 체구의 그가 마치 도끼를 든 것처럼 양 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서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우스꽝스럽고 어설퍼 보였다. 마의 사나이의 모습은 이번에도 역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무언가 희끗한 것이 무서운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진산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무덤 위를 방황하는 유령(幽靈)이 무색할 움직임이었다.

휘이이…

귀신의 호곡성을 연상케하는 음향과 함께 희뿌연 그림자 속에서 하나의 손이 툭 튀어나왔다.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유난히 창백한 손이었다. 진산월은 여전히 양 손으로 검을 높이 쳐든 채 손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광경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손이 거의 지척에까지 다가온 순간, 쳐들었던 검을 세차게 아래로 내려 그었다.

그것은 영락없이 나무를 베기 위한 초부(樵夫)의 도끼질과 다름이 없었다. 하나 그 위세는 정녕 예상 밖이었다.

쾌액!

마치 주위의 공기가 단 한 번의 칼질로 두 동강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예리한 검기가 파동 치듯 일어나 손그림자를 향해 휘몰아쳐 갔다. 그것은 지금까지 진산월이 보여주었던 다소 느슨하고 수세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매섭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막 진산월의 미간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던 손그림자의 형상이 깨어진 것은 바로 그 다음순간이었다.

파아아…

세찬 경기가 사방을 마구 휩쓸고 지나가며 누군가의 짤막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진산월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있었다. 양 손으로 움켜잡은 장검을 아래로 내린 자세에서 잠시 몸을 휘청거렸으나, 그는 곧 신형을 안정시키고 앞을 쳐다보았다. 그의 앞에는 조금 전만해도 신형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던 마의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마의 사나이의 얼굴에는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이상야릇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의 사나이는 괴이한 광망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한참동안이나 진산월을 쏘아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네가 펼친 초식이 무엇이냐?”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마의 사나이는 다시 물었다.

“그것도 종남파의 무공이냐?”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가뜩이나 헝클어져 있던 마의 사나이의 머리카락은 조금 전의 강력한 경기에 휩쓸려 그야말로 봉두난발(蓬頭難髮)이었고, 입고 있던 마의의 가슴팍 부근은 예리한 검기에 잘려 맨가슴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마의 사나이는 자신의 베어진 옷자락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어깨를 흔들면서 웃었다.

“흐흐흐… 흐하하!”

한참이나 정신없이 웃어젖히던 마의 사나이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뚝 그치더니 이내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난 오 년 동안 내 유령귀수(幽靈鬼手)를 뚫고 옷에 검자국을 낸 것은 네가 처음이다. 그런 점에서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마의 사나이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녹슨 장검의 손잡이 부근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너는 운(運)이 나빴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요행을 바랄 수도 있었겠지만, 나를 만난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 검은 한 번 뽑히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말기 때문이다.”

마의 사나이의 음성은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때문인지 오히려 더욱 듣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나 자랑이 아닌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의 사나이의 특이한 장공(掌功)과 괴이무쌍한 보법을 보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강호에서 보법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은 적지 않게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상당수는 뛰어난 장공(掌功)과 수공(手功)의 고수들이었다. 하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었으면서도 검술을 자신의 주특기로 삼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무영귀(無影鬼) 허무극(許無極)은 강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의 별호에 들어간 ‘무영’ 이란 단어는 물론 그의 몸놀림이 그만큼 빠르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하나 그의 이름에 ‘귀’ 자가 붙은 것은 그가 일단 검을 쓰면 상대를 쓰러뜨리기 전에는 절대로 그냥 물러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알려지기로는 그가 사용하는 장검은 조잡하게 제련된 평범한 철검(鐵劍)으로, 겉에 붙어 있는 녹은 검 자체가 부식되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검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좋은 장검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 법인데, 허무극은 왜 일부러 이런 장검을 사용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지만, 적지 않은 고수들은 허무극이 굳이 좋은 장검을 얻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만큼 허무극이 자신의 검법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허무극 본인 외에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때문에 허무극의 검에 격중된 사람은 검상(劍傷) 외에도 부식된 녹으로 인한 파상풍(破傷風)으로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허무극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녹슨 장검은 어떠한 신검(神劍)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한 살인흉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침내 허무극이 장검을 뽑아 들었다. 장검을 손에 든 허무극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전과 달라 보였다. 조금 전의 허무극이 조급하고 쉽게 화를 내며 남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였다면, 검을 손에 쥔 허무극은 극도로 냉정하고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치밀함이 엿보였다. 거칠 것 없는 무뢰한에서 전형적인 일류검객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런 허무극을 보는 진산월의 마음은 미묘한 떨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실 진산월은 조금 전 허무극의 유령귀수를 물리칠 때 자신이 사용했던 초식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시전한 초식의 명칭도 모른다는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당시 진산월은 자신이 익힌 어떠한 무공으로도 허무극의 유령귀수를 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급한 김에 즉흥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초식들을 융합시켜 사용했던 것이다. 그 일식에는 유운검법 중의 유운비격(流雲飛擊)과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수조(天河垂釣), 장괘장권구식 중의 낙성연적(落星然迹)의 변화가 모두 내포되어 있었다. 진산월도 자신이 어떻게 순간적으로 그러한 변화들을 뭉뚱그려 한 순간에 그려낼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무섭게 다가오는 유령귀수를 막지 못할 것 같은 절박함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지금 허무극은 처음과는 판이한 기세로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의 전신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가공할 기운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검을 일정 수준 이상 연마한 검객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무형지기(無形之氣)였다. 지금의 진산월로서는 그러한 무형지기를 발출할 수도 없거니와, 무형지기를 발출하는 고수와 검을 겨루어 본 적도 없었다. 허무극의 말이 맞았다. 유령귀수는 운이 좋게도 막을 수 있었지만, 이제 직접 검으로 겨루게 된 이상 진산월은 도저히 허무극의 검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저 녹이 잔뜩 슬은 철검 아래 피를 뿌리며 쓰러지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진산월은 금시라도 자신의 몸이 허무극의 철검에 갈가리 찢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서 몸에 전율이 일어났으나, 마음은 이상하게도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게 되었다. 그렇다고 진산월이 벌써부터 자포자기한 것은 아니었다. 진산월은 목에 칼이 들어와 자신의 숨통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원래부터 쉽게 두려움을 느끼는 성격도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혈혈단신의 천애고아(天涯孤兒)로 떠돌며 모진 고생을 한 탓인지는 모르나, 그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의기소침하기 보다는 더욱 용기를 내는 편이었다. 지금도 그는 허무극이 전신에 맹렬한 기세를 일으키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양손으로 움켜쥔 검을 들어 주저 없이 허무극을 향해 검봉(劍鋒)을 겨누고 있었다. 찢겨진 오른 손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은 이미 그의 손바닥을 적시고 팔뚝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봉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덤빌테면 덤벼보라는 무언(無言)의 패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허무극도 그것을 느꼈는지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허무극은 장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자세를 유지하면서 진산월의 앞으로 조금씩 걸음을 빨리했다. 그와 함께 그의 검에서 서릿발같은 검기(劍氣)가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허무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수중의 장검을 옆으로 그어댔다. 너무도 단순한 일식(一式)!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냥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런데 진산월은 그 일검을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일 장 가까이나 뒤로 훌쩍 물러나는 것이었다. 원래 고수들의 겨룸에서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상대에게 스스로 약세를 보이는 일이라서 기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진산월은 처음부터 상대의 평범해 보이는 일검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형편없는 겁쟁이라고 비웃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장내의 아무도 진산월을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쫘악!
갑자기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조금 전에 진산월이 서 있던 공간을 시퍼런 검기가 갈가리 찢고 지나감을 보았던 것이다. 단순히 검을 옆으로 휘두르는 일식에 이토록 무시무시한 위세가 있을 줄은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나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허무극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 오르더니 진산월이 물러선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그에게 접근하며 질풍노도같은 일검을 내찌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옆으로 휘두르더니 이번에는 앞으로 찔러오는 공격이었다.
쐐액!
귀청을 찌를 듯한 괴이한 음향이 터지며 허무극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검기가 서릿발같은 기세로 진산월의 앞가슴을 향해 쏘아져왔다. 이번의 공격은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산월도 이번에는 그냥 뒤로 물러나지만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앞으로 성큼 크게 한 발을 내딛으며 양손으로 움켜잡은 장검을 마주 찔러왔다. 그야말로 정면으로 격돌하자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나 얼핏 보기에는 무모해 보이는 이 동작은 종남파의 절학인 천하삼십육검 중에서도 강맹하기로 이름난 천하도도(天河濤濤)라는 초식이었다. 검신(劍身)에 전신의 경력을 주입하여 앞로 힘차게 내뻗는 이 초식은 마치 거대한 강물이 흘러가는 듯한 패도(覇道)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사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이었다.
츠츠측!
허무극의 검기와 진산월이 내뻗은 장검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마치 뜨겁게 달군 쇠몽둥이에 찬 물을 끼얹은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격돌하는 순간, 진산월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단순히 앞으로 찔러오는 것으로만 알았던 상대의 검이 막 검과 검이 부딪히는 순간에 세 줄기로 갈라져 자신의 양 미간과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중 양 미간을 향해 날아온 이검(二劍)은 용케도 천하도도의 초식 변화로 막을 수가 있었다. 방금 전의 음향은 그 와중에 발생한 것이었다. 하나 목덜미를 찔러 들어오는 일검은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허무극이 펼친 삼지생화(三枝生花) 수법의 정수는 바로 인후혈(咽喉穴)을 노린 이 일검이라는 것을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으나, 그 깨달음은 너무도 늦은 것이었다. 진산월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대한 몸을 뒤로 젖혀 목덜미에 혈화(血花)가 피어오르는 것을 피하는 일 뿐이었다.
파앗!
힘껏 뒤로 젖힌 진산월의 콧등 위를 아슬아슬하게 철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녹슨 철검이 자신의 코 위를 실낱같은 차이로 지나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만 했다. 하나 몸을 다시 일으킬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막 그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던 철검이 갑자기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그대로 그의 가슴을 향해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산월의 뇌리 속에도 이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초식들이 두 세 가지 빠르게 떠올랐다. 하나 전혀 엉뚱하게도 진산월은 그중 어느 초식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등이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진산월은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다. 진산월은 이장 가까이 구른 다음에야 바닥에서 일어났다.

앞을 보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허무극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허무극 뿐 아니라 이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뜬 채 진산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는 것은 강호인들에게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나려타곤(懶驢打滾)은 강호의 하급 무사들 조차도 창피하다고 펼치지 않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일파의 장문인 신분인 진산월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펼쳐 상대의 일검을 벗어난 것이다.

허무극의 입가에 짙은 비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과연 절묘하군. 종남파 무공의 진수(眞髓)를 본 것 같구나.”

진산월은 바닥을 구르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조금 전에 그가 굳이 반격을 가하지 않고 나려타곤의 수법을 쓴 것은 그 자세에서는 아무리 좋은 초식을 사용해도 뒤이어 닥칠 허무극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워낙 불리한 위치인데다 허무극의 초식이 발출하는 것을 볼 수 없는 자세여서 수비하기가 극도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무리하게 반격을 했다가는 크나큰 낭패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 진산월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바닥으로 몸을 굴려 불리한 위치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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