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8화 (5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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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5권 촉로지난(蜀路之難)편 : 8화


제47장. 간어제초(間於霽楚)

상대의 검을 단 이초도 받아내지 못하고 바닥을 굴러야만 했던 진산월의 심정이 어떤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것은 열 번이라도 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패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임영옥의 행방을 알기 전에는 허무극의 손에 쓰러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휘이이…

마치 휘파람 소리같은 음향과 함께 허무극의 철검이 다시 날아들었다. 허무극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려고 작심했는지 검초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흉흉해졌다. 허무극의 검은 수평(水平)으로 들어오다 진산월의 코앞에서 다섯 개로 갈라졌는데, 그 변초가 어찌나 빨랐던지 진산월의 눈에는 다섯 줄기의 낙뢰(落雷)가 신의 몸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그중 자신의 왼쪽 옆구리와 가슴팍을 노리고 들어오는 두 개의 검광은 몸을 비틀어 피하고, 나머지 세 개의 검광만을 막기로 결정했다. 그의 신형이 옆으로 회전하며 양 손에 들린 검이 마치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세차게 떨렸다.

우우웅…

벌 떼가 우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검에서 여덟 개의 검영(劍影)이 우수수 흘러나와 허무극의 검광을 막아갔다. 허무극의 입꼬리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비웃음이 담긴 미소였다.

다음 순간, 직선으로 날아오던 다섯 개의 검광이 괴이한 호선(弧線)을 그리며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쏘아져왔다.

까깡!

그중 하나의 검광이 진산월이 만들어낸 검영과 부딪치며 귀청이 떨어질 듯한 격철음이 터져나왔다. 검광과 부딪치자 진산월은 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반걸음 물러났다. 하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두 번째 검광이 다시 또 그의 검을 강타했다.

까앙!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진산월은 이번에도 두 번째 검광을 막아낼 수 있었으나, 그 바람에 팔이 저려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만큼 허무극이 내찌른 검광에 실린 역도(力道)는 막강한 것이었다. 원래 진산월의 의도대로라면 두 개의 검광을 피하고 두 개의 검광을 막았으니 이제 하나의 검광만 더 막으면 되었다.

하나 검광이 당초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에 진산월은 고스란히 나머지 세 개의 검광에 전신이 노출되고 말았다. 진산월이 두 번의 거듭된 격돌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에 세 개의 검광이 그의 가슴팍과 목덜미, 양미간을 노리고 동시에 날아들었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세 개의 검광 중 어느 하나에 격중되더라도 진산월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진산월은 양 손으로 힘주어 장검을 움켜쥐고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세 개의 검광을 피하거나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허무극을 향해 질풍같은 일검(一劍)을 찔러댔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한 필사(必死)의 반격이었다. 이 일검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 진산월의 모든 힘과 역량이 깃들어 있어 가히 놀라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산월로서는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비장(秘藏)의 일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무극은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그가 계속 검을 내찌르면 진산월의 몸에 세 개의 구멍을 뚫을 수 있겠지만, 그 자신도 진산월의 일검에 자칫 치명상을 입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사 치명상을 입지 않는다 할지라도 진산월같은 하수(下手)에게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은 허무극으로서는 모욕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이곳에는 여러 사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허무극은 내뻗었던 검을 거두며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허무극이 옆으로 반걸음 이동하며 진산월의 살인적인 일검(一劍)을 피하는 순간, 곧장 찔러왔던 진산월의 검끝이 파동치듯 흔들리며 돌연 수십 개의 검영(劍影)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유운검법 중의 운무중첩(雲霧重疊)이라는 검초로,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유운검법 중에서도 가장 변초가 무궁무진한 초식이었다. 진산월은 애초부터 허무극이 자신의 공격을 피할 것을 예상하고 이 한 수(手)를 준비했던 것이다.

천하의 허무극도 이때만은 낭패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수들간의 대결에서는 조그만 기회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허무극은 진산월을 쓰러뜨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면서도 자신이 부상당할 것을 꺼려해서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진산월 정도는 언제라도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진산월에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주고 만 것이다.

허무극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전력을 다해 철검을 빗발처럼 그어댔다.

차차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대웅전 안을 온통 무시무시하게 뒤흔들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튕겨졌고, 격돌 때 뿜어나온 세찬 검기의 여파로 대웅전을 밝히고 있던 촛불 몇 개가 꺼져버렸다.

허무극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난 상태였는데, 그의 오른쪽 소맷자락은 갈가리 찢겨져 팔뚝까지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옆구리도 두 치쯤 잘려나갔는데, 그 사이로 실낱같은 몇 줄기의 상처가 내보였다.

허무극으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당하는 낭패스런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진산월의 상태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는 상대의 허를 찔러 예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거듭된 격돌로 오른손 아귀가 완전히 찢어져 더 이상 검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왼손만으로 간신히 검을 쥔 채 서 있는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완벽하게 유리한 상태였는데도, 상대를 쓰러뜨리기는커녕 치명상도 입히지 못했던 것이다.

‘오른손만 다치지 않았어도…’

진산월은 새삼 오른손의 부상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이제 허무극이 다시 공격해 온다면 지금의 그로서는 도저히 대항해 볼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허무극이 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허무극의 두 눈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영락없이 상처 입은 한 마리 야수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지금 허무극의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눈치가 빠르지 않은 사람이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진산월은 상대가 살기를 뿌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른손의 손바닥은 완전히 찢어져 시뻘건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핏물이 뚝뚝 떨어져 발 아래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왼손으로 간신히 검을 잡고 있기는 했으나, 검은 이미 광채를 잃어버린 후였다.
물론 왼손이라고 검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한 번도 본격적으로 좌수검(左手劍)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허무극의 일검을 받아낸다는 것은 꿈도 꾸지 일이었다.

허무극의 입에서 뼈골이 시릴 듯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를 쉽게 죽이지는 않겠다. 살 조각 하나하나를 발라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인간의 입으로 내뱉은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혹무비한 것이었다. 진산월이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할 수 있다면 해보시오.”

허무극은 천천히 철검을 들어올렸다.

“듣던 대로 배짱 하나는 좋은 놈이군. 하나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자.”

그의 철검에서 싸늘한 검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처럼 진산월의 몸을 감아가기 시작했다. 일단 그 검기에 몸이 휩쓸리게 되면 그의 몸은 종잇장처럼 찢겨지고 말 것이다. 허무극은 자신이 말한 대로 실행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진산월의 전신에 싸늘한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몸에 이토록 가까이 검기가 와 닿은 적은 없었다. 실제로 피부에 닿는 검기의 느낌은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차갑고 섬뜩한 것이었다. 그 차가운 검기의 느낌 속에서 진산월은 문득 아련한 옛날이 떠올랐다.

팔 년 전, 하남성의 이름 모를 거리를 헤매던 당시가 생각났다.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그는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눈 내리는 거리의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그때의 땅바닥은 왜 그렇게 차가웠던지…
그리고 들려오는 음성 하나.

“네 놈은 삼십 년 전의 나 같구나…”

벌써 오래전 일인데도 당시의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상대의 살의(殺意)에 찬 검기에 완전히 노출된 지금, 왜 갑자기 이런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진산월도 알지 못했다.
다만, ‘이제는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자 지나간 시절 중 가장 소중했던 한 부분이 아련히 그리워졌을 뿐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아직은 죽을 운명(運命)에 있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러했다.
허무극이 들어올렸던 철검을 휘둘러 진산월의 가슴팍을 갈가리 찢어놓으려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하나의 물체가 섬전 같은 기세로 허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던 것이다.

쐐액!

그 물건의 날아오는 기세는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았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막강한 경력이 담겨 있어 금석(金石)이라도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기세가 어찌나 놀랍던지 막 진산월을 베어가던 허무극은 몸을 움찔하며 뒤로 훌쩍 물러나 버렸다.
물체는 허무극이 떠난 공간을 회오리치듯 휩쓸고 지나가더니 다시 허공에서 선회하여 돌아온 곳으로 날아갔다. 이 한 수의 회선비기(廻旋秘技)는 중인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물론 허무극, 본인이었다.
물체가 다시 돌아가는 순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사람도 오직 그뿐이었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여인의 머리에 꽂는 장신구(裝身具)였던 것이다.
노리개에 불과한 한낱 장신구를 던져 이와 같은 위세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허무극이 직접 보지 않았다면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허무극의 시선이 장신구가 되돌아간 방향으로 향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대웅전의 입구에 한 사람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짙은 청의를 입은 여인이었다.
여인답지 않게 유난히 큰 키와 가무잡잡한 피부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미모였으나, 눈매가 날카롭고 인상이 차가워서 마치 얼음으로 만든 미녀상(美女像)을 보는 것 같았다.
중인들을 경악케 했던 장신구는 뱅어같이 고운 그녀의 손안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청의 여인은 천천히 장신구를 자신의 풍성하게 틀어 올린 머리 위에 꽂았다. 여유만만하면서도 도도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허무극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의 전신을 쓸어보다가 무어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나 그보다 먼저 금불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합장을 하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여시주는 혹시 천봉궁에서 나오지 않으셨소?”

청의 여인의 음성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것이었다.

“과연 쾌의당 사람들은 개처럼 영민하군.”

자신보다 훨씬 나이 어린 여인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아무리 마음이 느긋한 사람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금불의 표정도 썩 밝지는 않았다. 하나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괴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취봉(翠鳳)의 입이 제일 매섭다고 하더니 과연 소문대로군. 여시주가 불쑥 이곳에 찾아와 본당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은 단순히 본당에 시비를 걸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

청의 여인은 다름 아닌 취봉 두청청이었다.
진산월은 일전에 하남성의 주루 근처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하나 그녀는 진산월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금불과 다른 쾌의당 고수들만을 한 차례 쓸어보더니 예의 싸늘한 음성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걸 제일 싫어해요. 그러니 용건만 말하죠. 해독약(解毒藥)을 내놓으세요.”

뜻밖의 말에 중인들 중 일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금불도 짐짓 눈을 크게 치켜뜨며 물었다.

“해독약이라니… 누가 중독되기라도 했단 말이오?”

가뜩이나 차갑던 두청청의 얼굴에 다시 한 겹의 얼음막이 씌워진 것 같았다.

“당신이 쾌의당 하북지부에 있는 열 명의 집법(執法) 중 하나라고 내 앞에서 함부로 허튼 수작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당신이 순순히 해독약을 내놓지 않겠다면 커다란 후회를 하도록 만들어 주겠어요.”

노골적이고 명백한 위협이었다. 아마 금불로서는 생애 처음으로 남에게서 받아보는 위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금불의 얼굴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쓴웃음이 떠올랐다.

두청청의 뒤에 천봉궁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금불은 체면도 잊어버리고 그녀에게 손을 썼을지 몰랐다. 다행히 금불은 그녀가 천봉궁의 인물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고, 자신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지 않았다.

금불은 턱밑에 나 있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허허… 여시주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노납도 사실대로 말해주겠소. 해독약은 물론 가지고 있소.”

두청청은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내놓으세요.”

금불의 나이와 신분으로 일개 아녀자에게 이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금불은 이미 냉정을 되찾았는지 그녀가 아무리 방약무인한 자세로 자신을 대해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놓는 건 어렵지 않지. 하지만 그 전에 여시주에게 먼저 물어볼 말이 있소.”

“난 당신과 할 이야기가 없어요. 당신은 그저 해독약만 내놓으면 되는 거에요.”

금불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헛…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무조건 해독약만 내놓으라고 하니 정말 답답하구료. 여시주는 남의 사람을 제멋대로 빼앗아 가놓고 이제는 그 사람을 구할 해독약까지 달라고 하다니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소?”

두청청의 음성이 한층 더 냉랭해졌다.

“함부로 여자를 납치해 독약까지 먹인 당신들의 행실은 너무나 고약했어요. 평상시라면 절대로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런데 오히려 나를 추궁하려 하다니 당신들이야말로 너무나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족속들이군요.”

그녀의 준엄한 추궁에 금불은 내심 찔끔했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여시주의 말이 더 고약하구료. 느닷없이 본 당의 행사(行事)에 끼어들어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욕까지 하다니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소?”

두청청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두 눈에서 서릿발 같은 한광(寒光)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금불의 말에 심기가 크게 상한 모양이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당신들이 쉽게 해독약을 내놓으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지.”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돌연 신형을 움직여 금불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금불은 설마 그녀가 이토록 성급하게 행동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는지 일순 당황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두 눈에 악독한 빛을 떠올렸다.

‘이 계집이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구나. 혼자로는 우리를 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금불은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청청이 혹시 다른 천봉궁의 고수들과 함께 왔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하나 주위에는 별다른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두청청은 어느새 그의 지척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두청청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이 허무극임을 알아보고는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이 해독약을 가지고 있나요?”

허무극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두청청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하수(下手)들만 상대하다 보니 심심했던 모양이군요.”

허무극의 눈빛은 스산한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미친 년. 천봉궁의 위세를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어디 네 년의 무공이 소문처럼 그렇게 대단한지 한 번 구경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무극의 신형은 그녀에게로 곧장 날아들었다.

원래 허무극은 그녀의 공격에 물러난 후 처음의 놀라움이 가시자 이내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다 그녀가 자신은 아예 무시한 채 금불에게만 신경을 쓰자 더 이상 솟구치는 노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덤벼든 것이다.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두청청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천봉팔선자의 최고수는 일곱 째인 혈봉(血鳳) 곡유유(谷幽幽)였다. 그녀는 첫째인 백봉 정소소보다 더욱 내공이 고강하다고 하며, 성질이 불 같이 급하고 거칠어서 눈 밖에 난 사람은 결코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다.

곡유유와 정소소를 제외하고는 두청청의 무공이 가장 뛰어났다. 특히 두청청은 각종 암기술(暗器術)에 능통하고, 그중에서도 수리검(袖裡劍)을 잘 쓰기로 유명했다. 그녀의 수리검을 던지는 솜씨는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할 만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곧잘 천수관음(千手觀音)에 비교하기도 했다.

천수관음은 백 년 내 여자들 중에서 최고의 고수 중 하나로 인정받는 절대고수이니, 이것만 보아도 두청청의 암기술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여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허무극도 비록 분노에 휩싸여 그녀에게 덤벼들기는 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의 수리검에 대한 일말의 거리낌이 있었다. 조금 전에 두청청은 단지 머리에 꽂은 장신구만으로도 허무극을 놀라 물러나게 했다.

만일 그녀가 수리검을 사용한다면 어떠한 위력을 보일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 아니겠는가?

허무극은 진산월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처음부터 철검으로 절초를 펼쳐 그녀의 상반신을 무섭게 몰아쳐갔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귀영십팔검(鬼影十八劍)이라는 것으로, 빠르면서도 변화무쌍한 위력을 지니고 있어 제대로 막아내는 사람이 드물었다.

진산월조차도 이 귀영십팔검을 삼 초도 견뎌내지 못하고 손아귀가 찢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쉬쉬쉭!

마치 독사의 혓바닥에서 나는 듯한 음향과 함께 대여섯 줄기의 시퍼런 검기가 두청청의 전신을 향해 짓쳐 들었다. 금시라도 그녀의 몸을 난도질할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두청청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그의 검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형은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면서도 매끄러웠다.

허무극은 무영귀라는 별호처럼 신법에 관한 한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그녀의 신법도 그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허무극이 발출한 여섯 줄기의 검기는 그녀의 몸을 스치지도 못하고 텅 빈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허무극은 다시 일 장여를 훌쩍 뛰어오르며 철검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그가 메뚜기처럼 뛰어오르며 내뻗은 일검은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것 같았지만, 그 일검을 본 두청청의 안색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약간 경직되었다. 검끝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어 도무지 어느 쪽으로 검이 변할지 짐작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슬쩍 옆으로 한 걸음 이동했다. 옆으로 한 걸음이라고는 하지만, 어찌나 빨리 움직였던지 중인들이 보기에는 그녀의 몸이 한 차례 흔들린 것 같았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어느 새 허무극의 검끝에서 벗어나 그의 등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진산월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에 허무극이 사용한 것은 삼지생화라는 초식으로, 진산월은 이 일식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바닥을 굴러서야 겨우 위급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청청은 단지 어깨를 흔드는 간단한 동작 만으로 그 무시무시한 초식을 빠져나와 오히려 유리한 위치를 선점(先占)하고 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하나 허무극도 녹록치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시야에서 그녀의 모습이 느닷없이 사라져 버리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번개같이 몸을 선회시키며 철검을 옆으로 그어댔다. 그야말로 풍부한 강호 경험이 없으면 펼칠 수 없는 날카로운 일검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등뒤에 있던 그녀의 모습은 다시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허무극은 자신의 철검이 다시 허공을 가르는 것을 느끼고는 이를 부드득 갈아 붙였다.

“이런 여우같은 년!”

그는 다시 몸을 돌리며 미친 듯이 검을 흔들었다.

쏴쏴쏴!

마치 폭우가 퍼붓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녹슨 철검이 수십 개의 검영을 그리며 사방을 폭풍처럼 휩쓸어갔다. 그녀가 어느 쪽으로 피해도 이번에는 검세(劍勢) 속을 완전히 빠져나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의 공격은 허무극이 분기탱천하여 전력을 다한 것이라 그 위력이나 속도가 그야말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살인적인 것이었다. 오죽 했으면 구경하고 있던 금불이 황급히 멀찌감치 뒤로 물러섰겠는가?

그런데 없었다. 허무극이 휘두른 검기가 사방의 허공을 갈가리 찢어놓을 듯 세차게 휩쓸고 지나갔는데도 두청청의 옷자락 하나 베어지지 않았다. 아니, 아예 그녀의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허무극은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표정이 일변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나 하듯 금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위를 조심하게!”

과연 그녀는 허무극의 머리 위에 있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수로 허무극의 무시무시한 검법을 뚫고 그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는지는 누구도 제대로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 금불은 그때 두청청의 손에서 무언가 새하얀 것이 반짝거리는 광경을 보았다. 그와 함께 눈부신 백선(白線) 한 가닥이 허무극에게로 쏘아져갔다. 허무극은 금불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이미 사태를 직감하고 전력을 다해 몸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하나 채 몸을 일 장도 움직이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윽!’

허무극은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목구멍 속으로 눌러 삼키며 재빨리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켜 공중제비로 이 장 밖에 내려섰다.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니 두 치 길이의 단검(短劍) 하나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단검의 손잡이 부근에는 비취 색의 수실이 매달려 있었고, 검신이 손가락 하나의 폭 밖에는 되지 않아 마치 어린 아이의 장난감을 연상케 했다. 하나 그 단검이 날아드는 순간을 생각해 본다면 어느 누구도 가슴 속에 전율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허무극은 이를 악물고 단검을 잡더니 어깨에서 세차게 잡아 뽑았다.

팟!

시뻘건 선혈이 뿜어나왔으나, 허무극은 지혈(止血)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단검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전면을 노려보았다. 두청청은 어느 새 그의 앞에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틀어올린 머리도 그대로 였고, 얼굴에 떠올라 있는 도도하면서도 차가운 표정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청의는 그리 풍성하다고 할 수 없어 굴곡있는 그녀의 몸매가 완연히 드러나 보였다. 소매가 조금 넓다는 것외에는 전형적인 여인의 의상이었는데, 그 넓은 소매 속에 공포의 수리검이 숨어 있음이 분명했다.

허무극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흐으… 흐으…”

그것은 영락없이 상처난 맹수의 신음소리 같았다. 어깨의 상처 보다는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더욱 그를 불타오르게 했다. 두청청은 냉정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넓은 소맷자락 속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손에서 언제 다시 빛살같은 광채가 뿜어져 나올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금불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의 상태라면 냉정을 잃은 허무극은 절대로 두청청의 수리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허무극이 순순히 물러날 리도 없고…’

금불의 시선이 우연인지 슬쩍 남포 중년인과 화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그의 속셈은 간단했다. 단숨에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제압하여 상황을 종결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천봉궁의 개입을 꺼려할 필요도 없고, 청부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 그의 계획은 실행도 되기 전에 깨어지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장내에 세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나타난 인영들을 본 금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각기 황의와 남의, 녹의를 입은 세 명의 여인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어린 사람은 녹의를 입은 여인이었는데, 이제 겨우 십칠팔 세 밖에 되어 보이지 않아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까웠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황의 여인이었는데, 유난히 커다란 눈에 총기가 가득 담겨 있어 한 눈에 보아도 재지(才智)가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들의 미모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는 범상치 않았다.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금불은 그녀들이 두청청과 같은 천봉팔선자 중의 세 명임을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후미진 동광사의 대웅전 안에 천하에서 명성이 높은 천봉팔선자 중의 네 사람이나 모습이 드러낸 것이다.
두청청의 뒤로 은밀하게 움직이던 남포 중년인은 걸음을 멈추었고, 청운을 향해 다가가던 화의 청년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버렸다.
다만 허무극 만은 두청청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계속 다가서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그녀 만이 들어올 뿐, 다른 어느 것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금불이 헛기침을 하며 그를 제지하려 했다.

“험! 자네는…”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나를 막는 자는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어.”

허무극의 입에서 살기에 젖은 음성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금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허무극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아울러 철검을 움켜쥔 그의 오른 손에 툭툭 힘줄이 불거져 나온 것도 발견했다.
그 음성과 눈빛, 자세를 보는 순간 금불은 그를 타이르려는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지금의 허무극은 단지 복수에 불타는 한 마리 야수에 지나지 않았다.
금불은 내심 탄식이 흘러나왔다.

‘좋지 않군. 정말 좋지 않아…’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두청청의 수리검을 피하지 못한 허무극이 이제 분노로 이성(理性)마저 흔들렸으니 무슨 수로 그녀를 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금불의 눈에는 금시라도 두청청의 오른 소매가 흔들리며 그 안에서 튀어나온 수리검이 허무극의 미간을 관통하는 광경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때 나중에 나타난 세 명의 여인 중 황의를 입은 여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쯤에서 그만두는게 좋겠군요.”

그녀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그 음성을 듣자 허무극은 마치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어깨를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 음성 속에 기이한 신기(神氣)가 담겨 있어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던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황의 여인이 말을 하면서 옥녀음(玉女音)이라는 음공(音功)의 일종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허무극은 마치 여신(女神)의 지시를 받은 시종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시뻘겋게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황의 여인은 그의 무서운 시선을 받고도 평온하면서도 침착한 모습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피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 쓸데없는 피를 뿌리는 걸 막기 위해서예요.”

허무극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만 있었다.
그런데 의외에도 그때 두청청이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삼매(三妹). 너는 또 쓸데없이 나서는구나.”

황의 여인은 그녀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언뜻 드러나는 새하얀 이빨이 보는 이의 시선을 강하게 끌고 있었다.

“언니. 공주님께서는 언니가 이럴 줄 알고 저를 보내신 거예요. 우리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니 물건만 받고 돌아오라는 공주님의 당부가 계셨어요.”

두청청은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으나 이내 금불을 향해 턱짓을 했다.

“저 자가 순순히 해독약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황의 여인의 시선이 금불에게로 향했다.
금불을 본 황의 여인은 다시 곱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께선 혹시 해심산의 금불대사가 아니신지요?”

금불은 나직히 불호(佛號)를 외우며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여시주는 과연 소문처럼 안목이 대단하구료. 노납이 금불이오.”

황의 여인의 눈빛이 유난히 영롱하게 반짝였다.

“대사께선 저를 아시나요?”

“천봉팔선자 중에서 가장 영특하고 재지가 뛰어난 여인이 영봉(靈鳳) 금소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황의 여인은 입가를 가리며 조용히 웃었다.

“호호… 과연 대사의 입은 날카로우시군요. 제가 금교교이고, 이쪽이 제 동생들인 엄쌍쌍과 루산산입니다.”

황의 여인은 영봉 금교교였고, 남의 여인은 남봉 엄쌍쌍, 그리고 녹의 소녀가 바로 옥봉 루산산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진산월이 만난 적이 있는 여인들이었다.
자신의 짐작이 맞자 금불은 내심 마음이 어두워졌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여시주들의 영명(英名)은 익히 들었소. 이렇듯 직접 만나고 보니 과연 강호의 소문이 헛된 것이 아님을 알겠구료.”

“호호… 과찬이십니다. 그보다 대사께선 저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말씀하시오.”

“저의 일행 한 사람이 흉적(凶賊)의 암산을 받아 중독되었는데, 듣자하니 대사께서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약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해독약을 건네주실 수 있으신지요.”

금불은 내심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은 교묘하기 짝이 없어 시인도 부인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계집의 두뇌가 재빠르고 입이 날카로워서 사람들이 모두 상대하기 꺼려한다고 하더니 거짓이 아니었군.’

금불은 속으로는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얼굴에는 온화한 표정을 떠올렸다.

“어허. 그런 변고가 있었구료. 여시주의 일행이 당했다는 독이 무엇이오?”

“구음향(九陰香)이라고 합니다. 전문적으로 여인만을 상하게 하는 몹쓸 물건인데, 어떤 사악한 자가 함부로 사용했는지 모르겠군요.”

금교교의 말마따나 구음향은 남자에게는 별다른 해를 끼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하나 여인이 이 구음향을 맡게 되면 전신의 기력이 모두 흩어져서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만다.
게다가 공력을 흩어지게 하는 효능까지 있어, 구음향을 오래 맡게 되면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래서 음약(淫藥)은 아니지만, 강호의 여고수들은 음약에 못지 않게 두려워하는 맹독(猛毒)의 일종이었다.
금교교는 금불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구음향은 불문(佛門)의 기보 중 하나인 구양신주(九陽神珠)와 상극되는 것으로, 구양신주는 대사께서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구양신주를 잠시만 빌려주시면 구음향의 독기를 해독한 후 곧바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속사정을 다 알면서도 이렇게 말을 하는데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금불도 더 이상은 시치미를 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강호에서 영봉의 세치 혀는 검보다 날카롭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료. 노납이 다행히 구양신주의 가루를 조금 가지고 있으니 이것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소.”

금불은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하나의 작은 봉지를 꺼냈다.
그는 순순히 그 봉지를 금교교에게 넘겨 주었다.
금교교는 그에게서 봉지를 받아 들고는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대사께서 이렇게 선뜻 공덕(功德)을 베푸시니 대사의 불심(佛心)이 얼마나 깊은지 알겠군요.
더구나 구양신주의 가루를 미리 준비하신 대사의 혜안(慧眼)에 감탄과 찬사의 말씀을 보냅니다.”

금불은 쓴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금교교의 말은 겉으로는 번지르르 했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풍자와 의혹의 빛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가루는 구양신주를 갈아 만든 것이 분명하니 여시주는 걱정하지 마시오. 원래 구양신주는 워낙 귀한 물건인데다, 몸에 지니고 있기에는 양기(陽氣)가 너무 강해서 노납은 약간의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다녔던 거요.”

금교교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대사께서 친히 주신 것인데 제가 걱정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대사의 영명함에 탄복하여 드린 말씀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은밀히 수중에 들고 있는 봉지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구양신주은 천하에서 몇 손가락안에 드는 양강지보(陽剛至寶)라 만지기만 해도 열기가 느껴진다고 했으니 이게 틀림없겠군.’

그제서야 금교교는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그럼 저희는 대사의 말씀만을 믿고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금불의 속에서는 아마 부글부글 화가 끓어 올랐을테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의 표정만큼은 여전히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아미타불. 멀리 배웅하지 않겠소.”

금교교는 다시 한 번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몸을 돌려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한쪽 손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머리카락은 반쯤 헝클어진 상태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몹시도 낭패스런 모습이었으나, 그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금교교는 이내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진장문인께서는 사매를 찾고 계시겠지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저희와 함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만날 수 없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불쑥 물었다.

“그녀는 어떻소?”

“중독이 심합니다. 다행히 적절하게 손을 써서 위급한 상황은 넘겼지만, 아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녀를 만나고 싶소.”

“지금은 안됩니다. 그녀를 완쾌시킨 후 다시 진장문인에게 연락을 하겠어요. 그동안 그녀를 우리에게 맡겨 주세요.”

진산월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머리 속으로는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임영옥은 어떻게 그들의 손에 구출된 것일까? 그녀들은 왜 임영옥을 선뜻 돌려주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임영옥의 상태는 과연 그녀의 말처럼 위중한 것일까? 대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임영옥에 대한 걱정과 숱한 의혹 때문에 진산월의 마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했다. 하나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뒤늦게나마 사매를 구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오.”

금교교는 진산월이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다가 그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인사를 하자 오히려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었다.

‘이 자는 정말 종잡기 힘든 사람이구나. 그녀와 각별한 사이라서 틀림없이 마음이 몹시 조급해 있을텐데…’

그녀는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한동안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은 강호인(江湖人)의 본분이니 진장문인은 너무 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몸이 완쾌되면 그녀는 제 발로 진장문인을 찾아올 거에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알았소.”

진산월이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조금 뜻밖이라는 듯 눈을 살짝 치켜 떴으나 이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운자추와 청운이 싸우던 곳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그곳에는 운자추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청운 혼자 서 있었다. 금교교와 시선이 마주치자 청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운공자는 무공 만큼이나 눈치도 비상한 것이 틀림없소. 소저들이 나타난 것을 안 순간, 그는 나와 싸우던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지고 말았소.”

금교교는 운자추의 그런 행동을 이미 예측했는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언제고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커다란 화(禍)를 당하고 말거에요. 그런데 도사께선 혹시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청운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몸을 움찔하더니 갑자기 표정이 일변해다. 그는 재빨리 도호를 외우며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량수불. 소저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깜박 잊을 뻔 했루료. 빈도는 이곳에 더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이만 가보겠소이다. 오늘 소저들이 도와주신 은공은 잊지 않겠소. 그럼…”

이어 휑하니 몸을 돌리더니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대웅전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황급히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무언가에 쫒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금교교는 속으로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다급하기도 하겠지. 자신을 도우러 오기로 한 두 명의 사형제의 모습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들이 도중에 쾌의당의 유인에 빠져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그녀의 짐작대로 금불을 비롯한 쾌의당의 인물들은 어느 사이엔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들로서는 비밀거점인 이곳이 발각된 이상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두청청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평소에도 차가웠던 두청청의 얼굴은 냉랭하게 굳어 있어 흡사 얼음으로 만든 사람 같았다.

“네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자에게 단단히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금교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원래 상처 입은 맹수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에요. 더 늦기 전에 우리도 이만 가지요.”

두청청은 그녀를 한 차례 쏘아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녀의 신법은 과연 놀라워, 장내에 청영(靑影)이 어른거렸다 싶은 순간 그녀의 모습은 어느 새 보이지 않았다. 금교교는 진산월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보내고는 이내 몸을 날려 대웅전을 빠져 나갔고, 루산산도 진산월을 향해 혀를 낼름 거리며 짖궃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엄쌍쌍은 웬일인지 선뜻 떠나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진산월을 쳐다보았을 때 금교교의 음성이 들려왔다.

“육매(六妹). 어서 가자.”

엄쌍쌍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진산월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자신도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삽시간에 그녀들의 모습은 차례로 대웅전을 벗어났고, 진산월만이 텅 빈 대웅전의 한 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귓전으로 대웅전을 벗어나기 직전에 엄쌍쌍이 보내준 전음성 한 가닥이 들려왔다.

“그녀를 잊으세요. 그녀는 구궁보(九宮堡)의 사람이 되었어요.”

느닷없이 들려온 두 마디의 음성은 그의 뇌리와 심장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 말에 포함된 의미가 주는 충격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진산월은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멀리 먼동이 터오르는 것도 모르는 채 진산월은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있었다.

쪼로롱!

어디선가 울어대는 밤잠이 없는 새 한 마리의 울음소리가 멍하니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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