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4화
제51장. 흡정묵질(吸精墨蛭)
강가의 바람은 제법 따스했다. 계절은 이미 가을을 지나 초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원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한기(寒氣)가 느껴지는데, 이곳은 이상하리만치 기후가 온화하면서도 공기가 따뜻해서 마치 초여름을 연상케 했다. 응계성은 신기한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희한하군. 무슨 날씨가 이렇지?”
옆에 있던 상원건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예로부터 사천(四川) 땅을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진령(秦嶺)이 북쪽의 차가운바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사천 땅의 기후는 중원보다 훨씬 따뜻하지. 나는 예전에 한 겨울에 이곳을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마치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에 초목이 한창 피어 오로고 있었다네.”
아닌게아니라 이 일대는 상원건의 말마따나 푸른 신록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어서 응계성은 물론이고 낙일방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정신없이 부변의 풍광(風光)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원에서 겨우 산(山)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사천의 경치는 독특한 데가 있었다. 기후뿐 아니라 공기도 틀렸고, 경치도 낯설고 이국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중원과는 달랐다. 응계성과 낙일방 등이 단하의 강변에서 진산월과 헤어져 무림맹의 이동 경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한 지 이미 열흘이 넘었다. 이곳은 장강(長江)의 지류인 파하(巴河) 강변이었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은양(恩陽)으로, 이곳에서 파하를 넘어 반나절만 더 가면 되는 거리였다. 은양은 무림맹 관서지단의 최후 집결지로, 무림맹에서 서장무림가의 격전지로 점찍어 놓은 검각(劍閣)과는 불과 이백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은양이 가까워 오면 올수록 중인들의 마음도 점차로 긴장되었고, 곳곳에서 무림인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고 있었다. 응계성은 주위를 둘러보다 아무 말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낙일방의 어깨를 툭 쳤다.
“넋 나간 놈처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게냐?”
평상시라면 응계성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화들짝 놀랐을 낙일방이 지금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만 내저었다.
“그냥요.”
“그냥이라니?”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요.”
응계성의 태도도 조금은 이상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낙일방의 이런 맥빠진 대답을 듣고 벌컥 화를 내거나 뒤통수라도 후려쳤을 텐데 이번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낙일방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야 응계서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나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장문사형잉 생각나서 그러느냐?”
낙일방의 얼굴에는 시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장문사형도 보고 싶고… 사저도 걱정되고… “
낙일방의 눈에서는 금시라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응계성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그는 이내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낙일방의 등을 오른 손바닥으로 세차게 때렸다.
“뭐야? 겨우 그런 일 때문에 그렇게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어/”
쫙!
“아이고…”
낙일방은 등짝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에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응계성은 다시 커다란 손바닥을 쳐들었다.
“이놈아, 장문사형이 세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느냐? 장문사형의 수단이 얼마나 좋은지는 네놈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니냐? 아마 사저를 찾아서 우리보다 먼저 집결지에 가 있을 것이다.”
낙일방은 그가 다시 등을 후려칠까 봐 재빨리 옆으로 피하면서도 귀가 솔깃한 듯 급히 물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겠죠? 분명히 그럴 거예요…”
낙일방은 몇 번이나 똑 같은 말을 중얼거리더니 이내 준수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게 틀림없어요. 이제 보니 응 사형도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군요.”
응계성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뭐라고?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나를 애 취급하고 있네. 며칠 손을 안 봐줬더니 네놈의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구나. 이리 와라, 손 좀 봐주게.”
낙일방은 어마, 뜨거라 하고 양팔을 휘저으며 저만치 앞으로 뛰어갔다.
“아니에요. 응 사형은 정상이에요. 내가 잘못 봤어요.”
“이리 안 와?”
응계성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그 뒤를 따라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상원건은 한편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낙일방은 물론이고 겉으로는 한없이 거칠기만 한 응계성도 진산월과 헤어진 후로는 불안하고 걱정에 찬 모습들이었다. 사실 이제 갓 약관에 불과한 그들이 강호에 처음으로 출도하여 지금까지 적지 않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용케도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진산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산월이 그들의 뒤에서 믿음직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곤경에 처해 있어도 그들은 크게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늘 그들의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진산월이 그들 곁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야말로 아무런 보호자도 없이 난생처음으로 바닷가에 나온 어린아이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불안한 마음이야 상원건도 그들에 못지않았다. 진산월이 있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그가 옆에 없자 상원건도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위태로운 느낌이 들었다. 검각이 가까워 올수록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나도 이제 늙었나? 큰 싸움을 앞에 두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지다니 말이야.’
상원건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들에게서 이 장여 떨어진 곳에 푸른 강물을 멍하니 지켜보고 서 있는 동중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사람도 이상하군. 봉황금시는 이미 사라져 버렸는데, 저자는 무엇 때문에 종남파를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동중산도 요즘 들어 부쩍 수심(愁心)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았다. 동중산은 비천호리라는 별호답게 무공은 비록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약삭빠르고 잔꾀가 많아서 누구나가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손익(損益) 계산이 빨라서 절대로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강호의 소문대로라면 동중산은 봉황금시가 모용봉의 손에 넘어간 순간 종남파를 떠났어야 옳았다. 상원건도 동중산이 진산월의 눈치를 보다 진산월과 헤어진 후에는 슬쩍 모습을 감춰 버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벌써 십여 일이 넘도록 동중산은 그들과 행동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이상한 태도를 취하거나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가끔은 텅 빈 허공을 올려다보거나 지금처럼 먼 산을 쳐다보면서 우두커니 있을 때가 있었다. 상원건은 아마도 그가 이대로 훌쩍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으나, 정확한 그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파하를 넘을 때까지 동중산이 떠나지 않는다면, 동중산은 적어도 검각까지는 자신들과 동행할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들이 잠시 서로 다른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앗?”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놀람에 가득 찬 음성이 들려왔다. 상원건은 그 음성이 낙일방의 것임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원건과 동중산은 무심결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에게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울창한 송림(松林)이 펼쳐져 있었다. 송림 입구로 허겁지겁 달려간 상원건은 그 앞에 낙일방과 응계성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가?”
상원건의 물음에 응계성은 말없이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본 상원건과 동중산의 안색이 모두 크게 변했다. 송림 안에는 반경 이십여 장 정도 되는 제법 널찍한 공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공터의 여기저기에 십여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상원건이 놀란 것은 단순히 시체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체들이 하나같이 너무도 참혹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체들은 대부분이 병장기를 소지한 무림인들이었는데, 마치 흰색 가루를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새하얗게 탈색(脫色)된 채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부릅떠진 동공(瞳孔)은 모두 파열되어 있고, 벌려진 입 밖으로 튀어나온 혓바닥은 거북의 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게다가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전신에 있는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어, 흡사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시체의 나이는 이십대 초반에서 사십대 후반까지 각양각색이었으나 하나같이 표정들이 경악과 공포에 물들어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낙일방은 아직 이토록 많은 시체를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시체들의 괴이한 모습에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되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시체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시체는 이제 겨우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장내의 시체들 중 가장 어려 보였으며, 아직 뽀송뽀송한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앳된 모습이었다. 소년은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입도 딱 벌린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절실해 보여서 낙일방은 왠지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부릅떠진 소년의 눈이라도 감게 해줄 생각으로 허리를 굽혀 소년의 얼굴쪽으로 순을 가져갔다. 그때 우연히 그 광경을 본 상원건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멈추게.”
낙일방은 움찔 놀라 손을 내밀던 자세 그대로 몸을 굳히며 상원건을 쳐다보았다.
“상 대협, 왜 그러십니까?”
상원건은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시체를 만지지 말게.”
“예? 왜요?”
“시체의 사인(死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전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상책일세. 만에 하나, 시체가 전염성 강한 독물(毒物)에 중독되기라도 했다면 뜻밖의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낙일방은 상원건의 말을 듣자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재빨리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계면쩍게 웃었다.
“그렇군요.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강호에서는 매사에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네. 그나저나 시체들의 모습이 정말 끔찍하군.”
상원건은 품속에서 작은 단도를 하나 꺼내 들더니, 단도로 시체의 옷자락을 슬쩍 들춰보았다. 아직 채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않은 탓인지 소년의 가슴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앙상하게 마른 가슴의 피부는 다른 시체들가 마찬가지로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는데, 심장 부위가 이상하게 부풀어 있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상하군. 이게 대체 무슨 흔적이지?’
상원건은 강호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사람이었으나, 이런 모습의 시체는 아직 본 적이 없는지라 내심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체의 심장 부위를 단도 끝으로 살짝 찔러 보았다. 순간, 튀어나온 부위가 갈라지며 코를 찌르는 심한 악취와 함께 무언가 시커먼 물체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앗?”
천하의 상원건도 이때만은 깜짝 놀라서 경호성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시체에서 튀어나온 검은 물체는 상원건의 얼굴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상원건이 황급히 옆으로 몸을 숙이며 그 물체를 피하려 할 때 바로 옆에서 차가운 검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검광은 순식간에 상원건의 얼굴로 쏘아오던 검은 물체를 가르고 지나갔다.
팟!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지독한 피비린내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자신이 앞에서 몇 조각으로 갈라진 채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쳐다본 상원건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발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어른의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한 크기의 거머리였던 것이다.
검을 휘두른 사람은 뜻밖에도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아까부터 긴장한 표정으로 시체를 주시하고 있다가 시체의 가슴 부위에서 검은 물체가 튀어나오자 재빨리 출검(出劍)하여 상원건을 위기에서 구출한 것이다. 상원건은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고맙소.”
동중산은 여전히 수중의 장검을 쥔 채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별말씀을. 혹시나 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상원건은 다시 자신의 발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엄청난 크기의 거머기 사 등분된 채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광경은 구역질이 날 만큼 징그렁누 것이었다. 이토록 큰 거머리가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원건은 하마터면 그 거머리가 자신의 얼굴을 뚫고 들어올 뻔했다고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소?”
“이건 아무래도 흡정묵질(吸精墨蛭)이란 놈 같습니다.”
“흡정묵질?”
“운남(雲南)이 아주 깊은 오지에서만 서식하는 놈으로, 거머리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일종(一種)이라고 합니다. 저도 말로만 들었을 뿐,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상원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머리 중에서 시질(豺蛭)이란 무성누 종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흡정묵질이라니… 그건 금시초문이구려.”
“흡정묵질은 시질보다 열 배나 더 흉폭하고 먹성이 좋은 놈이라고 합니다. 피 뿐만 아니라 생물의 체액(體液)까지도 깡그리 빨아먹어서 그놈에게 걸리면 이렇게 껍데기만 남은 몰골이 된다고 하더군요.”
상원건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의 시신들을 둘러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시신들은 하나같이 몸의 알맹이가 몽땅 어디론가 빠져 나간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그럼 이 시신들이 모두 그 흡정묵질에 당한 것이란 말인가? 정말 끔찍한 일이군. 그런데 운남에서도 오지에서만 서식한다는 놈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혹시 짐작 가는 일이라도 있소?”
동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 점이 이상해서 계속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군요. 흡정묵질은 기후 변화에 특히 민감해서 운남의 습한 밀림(密林) 지역 외에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살기 힘든 놈이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때 조심스럽게 주위의 시신들을 살펴보고 있던 낙일방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아! 여기 좀 보세요.”
상원건은 그가 혹시라도 시체를 잘못 건드려 흡정묵질에 당하지 않았을까 하여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낙일방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자신의 발치 아래에 있는 시신을 가리켰다.
“이 시체는 다른 시체들과 다르군요. 흡정묵질인가 뭔가 하는 것에 당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상원건은 아내 낙일방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아차렸다. 자세히 살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시체는 다른 시체처럼 피부가 새하얗게 변색되지도 않았고, 체액이 모두 빠져 나가지도 않았다. 다만 목 부위에 예리한 흉기에 잘린 듯한 상처가 선명하게 나 있을 뿐이었다. 묵의 대부분이 잘려져 나가서 끝 부분만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시체의 나이는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양쪽 태양혈(太陽穴)이 불룩 솟아 있고 몸매가 다부진 것으로 보아 살았을 때는 상당한 실력을 지닌 고수였음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체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는 파풍도(破風刀)가 굳게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시체의 얼굴을 쳐다본 동중산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굳어졌다. 상원건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물었다.
“아는 사람이오?”
동중산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는 회남(淮南) 일대에서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맹호도(猛虎刀) 악상(樂常)이라는 자입니다. 분명히 무림맹의 화중지단(華中支壇)에 속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시체로 변해 있다니 뜻밖이로군요.”
그 말에 상원건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가 무림맹 소속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일전에 무림맹이 창설될 때 이자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았으니 확실할 겁니다.”
상원건은 뜻밖의 사실에 놀라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른 시체들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곧 그의 발길은 다른 한 구의 시체 앞에 멈춰 섰다. 그 시체는 흡정묵질에 당한 대부분의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전신이 새하얗게 탈색되고 체액이 모두 빨려 나가 피부만 뼈위에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몰골이었다. 상원건의 시선은 그 시체의 허리춤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체의 허리에는 두 자 길이의 은색 막대 세 개가 가리런히 꽂혀 있었다. 상원건이 그 막대를 뽑아 들고 가볍게 흔들자, 세 개로 나뉘어진 막대가 하나로 합치더니 길다란 봉(棒)으로 변했다. 그제서야 낙일방은 그 막대가 하나로 이어진 삼절곤(三節棍) 형태의 병기임을 알아차렸다. 무림에서 삼절곤과 비슷한 모습의 병기들은 많았지만, 이 은색 봉처럼 완벽하게 세 개의 막대로 분리되었다가 합쳐지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상원건이 은색 막대의 접합 부위를 슬쩍 돌리자 막대의 양쪽 끝에서 날카로운 창날이 튀어 나왔다. 상원건은 그 은색 창을 든 채로 동중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은화신창(銀火神槍)이오.”
동중산은 흠칫 놀라더니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이자는 양자산(梁子山)의 살성(殺星)이라는 은창탈혼(銀槍奪魂) 하후령(夏候嶺) 이겠군요.”
“그럴 거요. 처음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체형이나 복장으로 보아 틀림없이 하후령의 시체요.”
“그도 무림맹의 소속입니까?”
상원건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도 화중지단에 속해 있었소.”
동중산은 잠시 침음하다가 주위의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이 시체들은 대부분이 무림맹 화중지단의 고수들일 확률이 높겠군요.”
“내 생각도 그렇소. 단지 흡정묵질에 당한 흔적 때문에 모습이 너무 변해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거요.”
확인해 보니 시체는 모두 열세 구였다. 그중 대략이나마 신원을 알 수 있는 것은 다섯 구였는데, 하나같이 안휘성과 호북성 일대에서 명성이 알려진 고수들이었다.
맹호도 악상의 시체를 제외한 나머지 시체들의 몸 속에는 모두 흡정묵질이 들어 있었다.
운남성의 밀림 속에서만 서식한다는 흡정묵질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아무리 보아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외진 곳에서 무림맹의 고수들이 흡정묵질을 만나 몰살을 당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공교롭다. 그렇다면… 흡정묵질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있단 말인가?’
상원건은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써늘하게 식어 왔다.
흡정묵질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건대, 만약 누군가가 비밀리에 이 흡정묵질을 사용하여 인명을 살상(殺傷)하고자 한다면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상원건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그림자가 어딘가에 숨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난데없이 예리한 파공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쉬쉬쉬!
그 소리는 처음에는 너무도 미약해서 상원건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했다.
하나 이내 점점 더 커지더니 종내에는 귀청이 떨어질 듯한 날카로운 음향으로 변했다.
중인들은 모두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무언가 희끗한 것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압축해서 자신들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중인들 중 가장 반응이 빠른 사람은 동중산이었다.
동중산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으나, 이내 안색이 대변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모두 피하시오. 저건 무형각(無形角)이오!”
무형각이란 말을 듣자 상원건 또한 안색이 시퍼렇게 굳어진 채 사력을 다해 앞으로 몸을 숙였다.
낙일방과 응계성은 무형각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나, 그들의 다급한 표정만 보아도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바닥에 넙죽 몸을 엎드렸다.
쉬아아악!
그 순간, 무언가 차갑고 서늘한 것이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잘려진 머리카락이 허공을 수놓으며 사방으로 휘날렸다.
머리카락이 잘려진 사람은 낙일방이었다.
낙일방은 영문도 모르고 바닥에 엎드리자마자 뒤통수가 시원해지며 머리카락이 한줌이나 잘려 나가자 모골이 송연해져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계속엎드려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빨리 일어나십시오. 무형각이 또 날아올지 모르니…”
그를 일으켜 세운 사람은 동중산이었다.
나이로 보면 낙일방은 동중산의 조카뻘밖에 되지 않았으나, 배분은 한 배(輩)가 높았기에동중산의 호칭은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낙일방은 그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게 뭡니까? 기척도 없이 날아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동중산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무형각은 무색 투명한 특수 유리로 만든 암기(暗器)로, 사람의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기때문에 일단 날아들면 방비하기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그 위력이 너무 악독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강호무림에서는 십팔대금용암기(十八大禁用暗器) 중 하나로 지목하여 사용하는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낙일방은 그의 말이 절대 과언이 아님을 알았다.
조금 전만 해도 동중산이 소리치지 않았다면 그는 영문도 모르고 머리통이 잘려지고말았을 것이다.
마치 목이 잘린 채 바닥에 쓰러진 맹호도 악상처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낙일방의 시선이 절로 맹호도 악상의 시신으로 향했다.
악상의 잘려 나간 목덜미 상처가 유난히 눈에 크게 들어왔다.
무언가 예리한 흉기에 반듯이 잘려 나간 듯한 상처!
낙일방이 눈을 크게 뜨고 악상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자 그를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던동중산의 시선이 낙일방을 따라 움직였다.
악상의 목덜미로 향한 동중산의 눈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다음 순간 크게 부릅떠졌다.
“그러고 보니 저 상처는 무형각에 당한 것 같군요.”
그 말에 상원건과 응계성이 시선 또한 악상의 시신에게로 향했다.
그때 다시 예의 그 괴이한 파공음이 들렸다.
쉬이이익!
마치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와도 같은 그 음향을 듣자 중인들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두리번거렸다.
하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동중산이 붙잡고 있던 낙일방의 팔을 떨치며 바닥을 떼구르르 굴렀다.
파아아!
그와 함게 그의 왼쪽 소맷자락이 잘려 나가며 핏물이 튀었다.
동중산이 떠미는 바람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낙일방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무어라고소리치려다 이 광경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동중산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무형각이 스치고 지나간 동중산의 왼쪽 팔은 마치 예리한 칼날에 베인 듯 손목부터 팔뚝부분까지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그 잘려진 상처에서 흘러 나온 핏물 때문에 동중산의 왼팔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괜찮으세요? 빨리 지혈(止血)부터 하세요.”
낙일방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동중산과 동행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낙일방의 그에 대한 어조는 아랫사람보다는윗사람을 대하는 것에 가까웠다.
동중산은 고통을 억누르며 오른손으로 왼손 팔뚝의 혈맥을 찾아 지혈하려 했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동작이 그대로 멎어졌다.
뚝… 뚝…
팔뚝을 타고 흐르던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자,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던 동중산의 얼굴이 점차로 변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빨리 지혈한 다음에 무형각을 날린 놈을 찾아내서…”
낙일방은 옆에서 계속 그를 재촉하다가 동중산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것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상원건 또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동중산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동중산은 자신의 팔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핏물을 지혈하며 주위의 시신을 가리켰다.
“이 시체들이 어떻게 이런 꼴이 되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동중산이 채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주위에서 역한 비린내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응계성의 놀람에 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헉! 저게 뭐야?”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볼 수 있었다. 근처의 송림 위에서 무언가 시커먼 물체들이 꿈틀리거리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광경을… 그 물체들이 조금 전에 보았던 흡정묵질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창한 송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흡정묵질들이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동중산은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놈들은 평소에는 송림 속에 잠복해 있다가 피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상원건은 무거운 신음성을 흘렸다.
“음… 그렇다면 조금 전에 우리를 공격했던 인물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무형각을 날려 보냈단 말이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바닥의 시신들도 똑 같은 수법에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 중 악상의 시신만 목이 잘려 나간 것으로 보아 악상이 가장 먼저 무형각에 쓰러지고,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온 피 냄새를 맡은 흡정묵질에 나머지 사람들이 당한 것 같군요.”
상원건은 흡정묵질이 누군가의 조종을 받았으리라는 자신의 불안감이 그대로 적중한 듯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송림에서 기어나오는 흡정묵질의 숫자가 훨씬 늘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사방에는 온통 푸른 나무와 수풀들만 우거져 있었는데, 대체 어디에 이토록 많은 수의 흡정묵질이 숨어 있었는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동안에도 흡정묵질은 계속 밀려나와서 언뜻 보기에는 검은 물결이 넘실거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그 검은 물결이 보기만 해도 징그럽기 그지없는 거대한 거머리의 무리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중산의 팔에서 흘러 나오는 피는 이미 멎었지만, 바닥에 고여 있는 핏물에서는 여전히 피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은 흡정묵질은 미친 듯이 흥분하여 마구 꿈틀거리며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네 사람은 서로 모여 선 채로 자신들의 주위를 새카맣게 뒤덮고 있는 흡정묵질의 접근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응계성이 투덜거리며 옆에 있는 낙일방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게 모두 네놈 탓이다. 빨리 책임져라.”
“아이구, 응 사형. 왜 또 날 붙잡고 그러세요?”
“네놈이 쓸데없이 이쪽으로 오지만 않았으면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당하겠느냐? 하고많은 곳 중에 하필이면 이쪽으로 달려와서 이 고생을 시키느냔 말이다.”
응계성이 말도 되지 않는 트집을 잡자 낙일방은 가슴이 답답한 듯 준수한 얼굴이 새빨개졌다.
“응 사형은 정말 사람 열통나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거 같아요. 이런 상황에도 꼭 그런 말을 해서 사람 열 받게 해야 되겠어요?”
응계성이 몇 마디만 더 면박을 줬으면 낙일방은 참지 못하고 흡정묵질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상원건이 때 맞춰 그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보세. 자칫하다가 저놈들이 뛸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니 말일세.”
상원건은 조금 전에 시체 속에서 튀어나온 흡정묵질이 의외로 상당한 거리를 뛰어오르는 것을 직접 보았기에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낙일방은 주위를 둘러보며 울상을 지었다.
“물러날 곳도 별로 없습니다. 뒤쪽에도 저놈들이 밀려옥 있으니 말입니다.”
아닌게아니라 흡정묵질은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어, 그들이 서 있는 반경 사오 장을 제외하고는 온통 흡정묵질로 뒤덮여 있었다. 흡정묵질의 기어오는 속도로 보아 그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상원건은 강호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인물이었으나,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단 몇 방울의 피 냄새 때문에 이토록 많은 흡정묵질이 몰려온다는 것 자체가 그로서는 놀라운 일일 따름이었다.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동안에도 흡정묵질의 무리들은 계속 접근하여 삼 장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어른의 손가락 두 개 굵기의 시커먼 거머리들이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광경은 두렵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때 동중산이 눈을 반짝이며 중인들을 돌아보았다.
“바닥의 시신들을 모아서 벽(壁)을 만듭시다.”
상원건은 죽은 시신들을 이용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 먹고는 자신이 먼저 가까이에 있는 시신 한 구를 앞으로 끌고 왔다.
“좋은 생각이오. 우선 그거라도 해봅시다.”
낙일방과 응계성도 그들을 따라 황급히 주위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수습하여 자신들의 사방으로 나란히 눕혀 놓았다. 십여 구의 시신을 양쪽으로 두세 구씩 늘어놓자 그들 주위에 시체로 이루어진 작은 방벽(防壁)이 만들어진 셈이다. 상원건은 시체들을 늘어놓으면서도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걸로 저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겠소?”
동중산은 재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흡정묵질은 이미 피가 빠져 나간 시신은 뚫고 들어오지 않을 테니 잠시간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이들을 조종하는 자를 제거하는 길 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아야 손을 쓸게 아니겠소?”
동중산은 날카로운 눈으로 근처의 송림들을 빠르게 훑더니 그중 한 방향을 향해 슬쩍 턱짓을 했다.
“처음에 날아온 무형각은 몰라도, 두 번째의 무형각이 날아온 위치는 저쪽의 송림 부근이었습니다. 그자가 일부러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면 아마 그쪽에 있을 겁니다.”
동중산이 가리킨 곳은 세 개의 커다란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 곳으로, 다른 곳보다 유난히 수풀이 우거지고 그늘이 져서 사람이 숨어 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상원건은 자신이 부상당한 그 위급한 순간에도 상대의 위치를 파악해 낸 동중산의 침착함과 기지(機智)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목이 대단하구려. 그런데 저기까지의 거리는 십오 장도 넘는 것 같은데, 저곳까지 단숨에 날아갈 수는 없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다른 세 사람이 한 사람을 도와 저곳까지 날아가게 하는 겁니다.”
상원건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소. 그럼 당신이 준비하시오. 내가 도와주겠소.”
상원건은 동중산이 비천호리라 불리는 만큼 신법(身法)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보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동중산은 고개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제가 아니라 상 대협이 가셔야 합니다.”
“그건 왜 그렇소?”
동중산의 얼굴에는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사 제가 간다고 해도 제 실력으로는 무형각의 주인을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상원건은 미처 그 점을 생각지 못했는지라 내심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이자는 정말 생각이 치밀하군. 이자의 별호에 ‘호리’ 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구나.’
상원건은 동중산의 말대로 자신이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물었다.
“무형각의 주인이 누구인지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소?”
“저도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형각을 날린 솜씨로 보아 무공이 만만치 않은 자임이 분명하니, 상 대협께선 처음부터 손에 사정을 보지 말고 살수(殺手)를 쓰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알겠소. 그런데 그때까지 별일 없겠소?”
동중산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금 표정이 밝아졌다.
“제 예상대로 흡정묵질이 시신을 뚫고 들어오지는 않고 있군요. 잘하면 이 상태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시신으로 이루어진 벽까지 다가온 흡정묵질의 무리들은 시신 밖에서 꿈틀거린 채 더 이상이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피와 체액이 모두 빨린 시신이 돌아니 나무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하나 그런 상황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삐리리릭!
갑자기 어디선가 고막을 후벼파는 듯한 괴이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시신의 벽에 가로막혀 바글거리고 있던 흡정묵질들의 움직임이 한층 더 격렬해지더니 그들 중 일부가 시신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숨어 있는 인물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흡정묵질을 교묘하게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상원건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이러다가는 반각(半刻)도 더 버티지 못할 거요.”
“상 대협께서 빨리 그자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들이 도와드릴 테니 어서 준비하십시오.”
상원건은 더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신에 공력을 운기(運氣)하여 진기의 흐름을 원활히 했다. 그 후 그는 동중산의 얼굴을 신중한 표정으로 주시했다.
“내가 돌아올 동안 무사할 자신이 있소!”
긴박한 상황임에도 동중산은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비장(秘藏)의 한 수가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당분간은 버틸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원건은 최악의 경우를 버틸 수 있는 한 수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흡정묵질이 시신들을 뚫고 사정권 내로 들어온다면 대체 무슨 수로 그들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 지금 상황에서는 동중산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상원건은 진지한 얼굴로 그의 손을 힘껏 잡았다.
“부탁하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십시오. 저와 응 사숙이 상 대협을 던지면 송림의 왼쪽으로 날아갔다가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오른쪽으로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상원건은 그 이유를 물어보려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이목을 속이라는 말이로군.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낙일방이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럼 나는 무얼 하지요?”
동중산은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 듯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낙 사숙께선 상 대협이 날아가는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장력(掌力)을 날리십시오.”
“예?”
“이왕이면 장력이 바닥을 스치고 지나가게 해서 많은 먼지가 날리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흡정묵질 몇 마리도 함께 날려보낸다면 더욱 바람직하겠죠.”
낙일방은 영문을 몰라 멍청한 얼굴로 동중산을 쳐다보았다. 동중산은 그를 향해 담담한 얼굴로 웃어 주었다.
“제 말대로 하십시오. 이유는 나중에 자연히 아시게 될 겁니다.”
이어 그는 상원건을 돌아보았다.
“준비되셨습니까?”
상원건이 그렇다고 하자 동중산은 응계성으로 하여금 상원건이 오른쪽 손을 잡게 하고 자신은 왼쪽 손을 잡은 다음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셋을 세면 동시에 던지겠습니다. 낙 사숙께선 잊지 말고 있는 힘껏 장력을 날리시기 바랍니다. 하나, 둘, 셋!”
셋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응계성과 동중산은 전력을 다해 상원건을 좌측의 송림으로 집어던졌다. 그와 함께 낙일방 또한 상원건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쌍장(雙掌)을 질풍처럼 내갈겼다.
휘아아앙!
동중산의 말대로 낙일방은 장력이 바닥을 스치도록 했기 때문에 뽑혀진 풀들과 흙먼지가 자욱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그 덕분에 상원건의 날아가는 모습은 먼지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서야 중인들은 왜 동중산이 낙일방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상원건의 몸은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십여 장의 허공을 날아 송림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