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6권 서장격변(西藏激變)편 : 7화
제54장. 관중인간(棺中人間)
감종간은 정확히 다음날 인시에 왕방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어제는 혼자였으나, 지금은 뒤에 한 대의 마차와 네 명의 인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미명(未明)이었는데도 왕방은 이미 일어나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종간은 그에게 물었다.
“완성했소?”
왕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쪽 벽에 있는 휘장을 걷었다. 휘장 뒤에는 하나의 관(棺)이 놓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 관은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오동나무의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도 은은한 광택과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벌레의 침입을 막고 나무를 썩지 않게 하는 철심목의 수액은 하루 만에 잘 말라 있었고, 나무의 이음새 부분도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관 전체의 모양과 형태가 하나의 조각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감종간은 관의 뚜껑을 열어 그 안을 샅샅이 조사했다. 왕방은 한쪽에 서서 감종간이 작은 침으로 관에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없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감종간은 무려 반 시진이나 걸려서야 점검을 마치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만들어졌군.”
감종간은 수고했다는 말도 없이 인부들에게 관을 마차로 운반하게 했다. 관이 운반된 다음 감종간은 잠깐 왕방을 쳐다보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하더니 휑하니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짧은 순간에 왕방은 자신이 지옥길의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감종간은 그를 살인멸구(殺人滅口)하려다 그를 죽이는 것이 자칫 사람들의 주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고 마지막 순간에 손을 눌러 참은 것이다. 왕방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 감종간과 관을 실은 마차는 그의 시야에서 점차로 멀어져 갔다.
관을 실은 마차는 대죽의 끝에 있는 객잔에서 잠시 멈춰 섰다. 관은 다시 인부들에 의해 객잔의 후원으로 이동되었다. 후원에는 이미 방부 처리된 상관욱의 시체가 기다리고 있다가 관 안에 조심스럽게 담겨졌다. 감종간은 상관욱의 시체를 넣은 다음 관 뚜껑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닫았다. 그리고는 초를 녹여 관 뚜껑을 철저하게 밀봉하기 시작했다. 모든 작업을 그 자신이 직접 했으며, 군데군데 자신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해놓았다. 어떤 식으로든 관 뚜껑이 조금이라도 열린다면 그가 남겨놓은 표식이 훼손되지 않을 수 없게 된 후에야 그는 만족한 듯 손을 멈추었다. 관을 다시 마차에 실은 다음 그는 인부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객잔에서 미리 준비한 약간의 식량과 물을 챙겼다. 그리고는 자신이 마부석에 앉아서 마차를 몰고 길을 떠났다. 마차가 객잔을 떠난 직후, 객잔의 가장 구석에 있는 쪽방에서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다름 아닌 진산월과 이정문, 육난음이었다.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이었는데 비해, 이정문은 무언가 심사숙고하는 모습이었고, 육난음은 그저 신기한 얼굴이었다.
“단목초의 대제자라고 하기에 어떤 대단한 인물인가 했더니 생긴 건 정말 볼품이 없군요. 농사꾼이라 해도 믿겠어요.”
육난음이 다소 실망한 듯이 말하자 이정문은 정색을 했다.
“감종간은 확실히 상관욱보다 임기응변이 떨어지고, 위태심보다 재지(才智)가 뒤지며, 백석기보다 추진력이 부족하지. 하지만 그는 그들 세 사람을 합친 것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인물이야. 외모만 보고 그를 판단했다가는 큰 낭패를 면치 못할걸.”
“그래요?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은 구석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군요.”
“단목초는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생기면 꼭 감종간을 부르지. 바로 옆에 상관욱이나 위태심이 있어도 그가 제일 먼저 찾는 것은 늘 감종간이란 말이야. 이게 무얼 뜻하는지 알아?”
“몰라요. 말해 줘요.”
“그건 감종간이 아직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단 한 번도 실패하거나 실수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단목초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이지.”
육난음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다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죠. 더구나 단목초 같은 사람에게 말이죠. 비록 외모는 보잘 것 없어도 그는 조심해야 할 인물이로군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난 오히려 그가 상관욱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생각해.”
“그건 왜 그렇죠?”
이정문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관욱은 엄밀히 말하면 나와 비슷한 부류의 인물이야. 끝없이 사람을 부리고 정보를 수집하고 머리를 쓰지.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 하지만 감종간은 달라. 그는 나와는 일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습관이 전혀 틀려서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그래서 상대하기 어려운 거야.”
육난음은 기대와 믿음이 충만한 눈으로 이정문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당신은 충분히 그를 감당할 수 있겠죠?”
이번에 이정문은 상당히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비록 그가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나, 육난음은 이정문이 사태를 결코 낙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위기가 잠시 무거워질 때 진산월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는 언제쯤 출발하게 되는 거요?”
이정문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한 시진 후에 마차를 따라갈 거요.”
“특별히 마차를 뒤따르는 자들도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마차를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소?”
“감종간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어서 발각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마차 뒤를 미행할 수는 없소. 대신 관에 약간의 수작을 부려 놓았지.”
이정문은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이 안에 담긴 것은 특수하게 제조된 천리향(千里香)이오. 사람의 코로는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물 속에 들어가도 향이 사라지지 않소.”
“그것을 관에 발라 놓았단 말이오?”
“왕방에게 관에 옻칠을 할 때 이것을 한 방울 넣으라고 말했소. 관이 불에 타서 완전히 재가 되지 않는 한 천리향의 냄새를 지울 수는 없소.”
진산월은 새삼 이정문의 치밀함에 감탄하면서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냄새를 맡지 못한다면 다른 동물이라도 사용한다는 거요?”
이정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 시진 후에 누군가가 우리에게 한 마리 영물(靈物)을 가지고 올 거요. 그 영물의 뒤를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관을 추적할 수 있을 거요.”
“그 영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설비초(雪飛貂)라는 이름의 작은 담비요.”
진산월은 설비초라는 이름에 흠칫 놀랐다.
“그럼 그 영물을 가지고 올 사람은 백랑군(白郞君) 송악(宋岳)이겠구려?”
“바로 그렇소.”
백랑군 송악은 강호에서 많은 동물을 키우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각종 동물들을 좋아했는데, 나중에는 아예 동물들과 함께 살다시피 했다. 그는 재주가 많고 위인됨이 호탕해서 각처에 친구들이 많았다. 그의 집에는 친구들이 구해 준 진기한 동물들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다섯 가지의 영물들이 그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설비초도 그중 하나였다. 설비초는 온몸이 눈처럼 새하얀 털로 뒤덮여서 붙여진 이름인데, 어찌나 빠르고 민첩한지 하루에 능히 천 리를 간다고 했다. 게다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고 영특하기 그지없어서 가히 영물(靈物) 중의 영물이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이정문의 대비가 철저함을 알자 적지 않게 마음이 놓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제는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마차를 추적하는 일만 남았군. 나는 언제쯤 관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요?”
“사흘 후요.”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육난음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사흘 후예요? 내일 당장 들어가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요?”
이정문은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야. 며칠씩 저 안에 있으면 음식이나 용변 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될 거야. 바꿔치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날에 하는 게 제일 좋아.”
“하지만 감종간이 관을 어디로 운반할지도 모르잖아요.”
“어딘지는 몰라도 며칠이 걸릴지는 알아.”
육난음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아요?”
이정문은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 시큰둥한 음성으로 말했다.
“감종간은 여기서 나흘치의 식량을 사 갔어. 그것은 그의 목적지가 여기에서 사 일(四日) 거리에 있다는 뜻이지.”
육난음은 배시시 웃었다.
“그렇군요. 난 또 당신이 무슨 점쟁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뭐든지 막상 알고 보면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지. 하지만 그 대단치 않아 보이는 걸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싸움에서 이기게 되는 거야.”
“알았어요. 당신이 천재(天才)라고 해두죠.”
이정문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원래 천재와 바보는 백지 한 장 차이인 거야.”
그 말에 육난음은 찰랑찰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그럼 내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네요. 당신은 천재이거나 어쩌면 바보일지도 몰라요.”
이정문은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싸움에서 이긴다면 난 천재일 거야. 그렇지 못하다면… 틀림없이 바보겠지.”
그 말이 너무나 무겁게 들려서 육난음은 일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하나 그녀는 이내 배시시 웃으며 이정문의 팔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당신은 틀림없이 천재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당신에게 반할 리 있겠어요?”
이정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가만히 다독거려 주었다. 그때 그녀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틀림없이 두려웠을 것이다. 이정문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지금처럼 자신 없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속마음이야 어쨌든 그녀는 이정문을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시간이 남았으니 우리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좀 먹어요. 아침을 안 먹었더니 배가 고프군요.”
그녀는 두 남자의 팔을 양쪽 손으로 잡으며 자신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감종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마차를 몰았다. 식사는 마차 위에서 준비해 온 건량과 식수로 때웠고, 잠은 마부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새우잠을 잤다. 주루나 객자나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덕분에 대죽을 출발한 지 삼 일 만에 그는 성도(成都)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망강(望江)의 강 언덕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감종간은 강 언덕에서 잠시 성도를 내려보며 무언가 상념에 잠겨 있었다. 평상시라면 여기서 두 시진 거리에 있는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망강을 건너기만 하면 바로 성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차를 몰고 있기 때문에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성도는 사방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북서쪽의 서문대로(西門大路) 외에는 어느 방향으로 들어오든 강을 건너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동풍로(東風路) 쪽에 다리가 있기는 했으나, 이곳에서 그쪽으로 가자면 반나절 가까이를 돌아서 가야 했다. 게다가 그쪽은 우시장(牛市場)이 열리는 곳이라 늘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감종간은 가급적 그쪽으로 마차를 몰고 싶지 않았다. 잠시 우두커니 성도 시내를 내려바보고 있던 감종간은 이내 마차를 몰아 강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덕을 내려갈 때쯤에는 서서히 서쪽 하늘에 노을이 기울기 시작했다. 감종간은 질풍같이 내달리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느릿느릿 마차를 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몹시 태평스럽고도 유유자적해 보였다. 언덕을 모두 내려오자 멀지 않은 곳에 나루터가 보였다. 나루터 옆에는 작은 객잔 하나가 있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나루터와 객잔이 모두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해가 떨어진 다음에는 강을 건너지 않는 것이 통례인지라 배를 몰던 사공들도 대부분 집으로 들어가 버렸고, 늦게 도착한 몇몇 손님들만이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출발하려는 듯 객잔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감조안은 천천히 마차를 객잔으로 몰고 갔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나와 굽실거렸다.
“주무시고 가시겠습니까?”
감종간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식사만 하고 가겠네. 청탕면(靑湯麵)이나 한 그릇 주게.”
점소이는 그가 마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자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으로 드시지요.”
“여기서 먹겠네.”
점소이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이리로 가져오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객잔 안으로 달려간 점소이는 잠시 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왔다. 감종간은 마부석에 앉은 채로 쟁반을 받아서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날이 제법 쌀쌀해져서인지 그는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불며 순식간에 국수를 먹어치웠다. 그릇을 가지러 온 점소이에게 계산을 치르고 난 감종간은 다시 마차를 몰고 나루터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강물 위로 어두뭉이 밀려 들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뒤늦게 들어와 정박하려는 몇 척의 배만이 나름대로 분주할 뿐, 나루터는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감종간은 천천히 마차를 몰고 나루터를 향했다. 이곳의 나루터는 성도로 들어가시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중의 하나라서 강의 크기에 비해 나룻배의 숫자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하나 대부분이 십여 명을 간신히 태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돛단배들이었고, 말이나 마차를 태울 만큼 커다란 배는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감종간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지 태연한 신색으로 나루터를 지나고 있었다. 마침내 나루터의 끝까지 도달했지만 쓸 만한 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나루터가 끝났는데도 감종간은 마차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그가 가려던 곳은 나루터가 아닌 모양이었다. 나루터를 지난 감종간은 강을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하늘에 하나둘씩 별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주위가 칠흑같이 캄캄해졌다. 감종간은 어두운 강변을 따라 계속 마차를 몰아갔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그가 가고 있는 강변이 오른쪽에 하나의 불빛이 나타났다. 그곳은 육지가 아니라 검은 강물이 넘실거리는 강 한복판인데 어떻게 불빛이 나타날 수 있을까? 그 의문은 이내 풀렸다. 불빛이 점차로 가까워지며 어둠 속에서 하나의 커다란 범선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범선의 길이는 오 장이 넘었고, 높이도 이 장에 달해서 이런 작은 강을 다니기에는 지나칠 정로 거대했다. 범선의 앞에는 작은 호롱불 하나가 달랑 매달려 있었고, 그외에는 전혀 불빛이 보이지 않아 언뜻 보기에는 사람이 없는 귀선(鬼船) 같기도 했다. 범선은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오더니 점차로 마차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감종간은 마차를 멈추고 묵묵히 범선이 다가오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범선은 강변에 도착했다. 그러자 칠흑같이 어두운 범선의 구석에서 하나의 인영이 불쑥 나타나더니 주저하지 않고 마차 앞으로 뛰어내렸다. 인영의 신법은 표홀하기 그지없어 전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비록 강변 주위가 모래라고는 해도 이 장이 넘는 배 위에서 밑으로 뛰어내렸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인영은 빠르게 감종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분부대로 배를 대령했습니다.”
때마침 어둠 속에 숨었던 달빛이 드러나며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허리를 숙인 채 감종간을 향해 절을 하는 인영은 뜻밖에도 조금 전의 주루에서 음식을 배달했던 점소이가 아닌가? 그제서야 감종간은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마부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차에 있는 관을 배로 옮겨라.”
“예.”
점소이는 다시 공손하게 절을 하고는 손뼉을 가볍게 쳤다.
딱!
그러자 아무도 없던 배의 갑판 위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순식간에 네 명의 장한이 나타나 마차 앞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의 신형은 하나같이 가볍고 민첩해서 많은 수련을 겪은 인물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감종간은 그들이 마차에서 관을 꺼내 배 위로 나르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네 명의 장한들이 조용하면서도 신속한 동작으로 관을 배로 옮겨 싣자 감종간은 점소이를 돌아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마차는 흔적을 남기지 말고 깨끗이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감종간에게서 고삐를 넘겨받고는 마차를 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감종간은 날카로운 눈으로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신도 훌쩍 배 위로 올라갔다. 그가 배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정박해 있던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어 배는 강을 가로지르지 않고 물길을 거슬러 상류 쪽으로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성도의 주변을 흐르는 강 중 가장 큰 것은 민강(岷江)이었다. 민강은 원래는 하나로 흐르다 중간에 두 개로 갈라져서 한 줄기는 장강(長江)과 합치고, 다른 한 줄기는 수로(水路)를 따라 성도 평원으로 흘러든다. 그 수로가 바로 유명한 도강언(都江堰)이다. 도강언은 사천 지방의 전설적인 태수인 이빙(李氷)과 그의 아들 이랑(李郞)이 건설한 것으로, 장장 이천 리에 이르는 엄청난 길이의 관개수로였다. 민강이 두 개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좁고 위태로운 다리가 있었는데, 길이가 무려 이백 장이나 되는 데 비해 폭은 한 장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다리 밑으로는 요란한 기세로 흙탕물이 흐르고 있어 가히 천험(天險)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 다리는 안란교(安瀾橋)라고 하는 것으로, 이 안란교를 건너면 이빙 부자를 모시는 사당인 이왕묘(二王廟)가 나타난다. 이왕묘는 지은 지 오래된 사당으로, 고색 창연한 건물들이 소박하면서도 장엄하게 서 있어 찾아오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도강언과 이왕묘의 새벽을 깨우고 있을 무렵, 이왕묘의 입구에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은 부부인 듯한 젊은 남녀와 백의를 차려 입은 준수한 중년인이었다. 젊은 남자는 무뚝뚝한 인상에 얼굴도 비쩍 말라서 신경질적으로 생겼고, 여인은 반대로 풍만한 몸매에 연신 눈웃음을 치는 애교 만점의 미녀였다. 그들과 나란히 걷고 있는 백의중년인은 나이가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백의중년인의 품안에는 잡털이 하나도 없는 하얀색이 담비가 안겨져 있었다.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담비는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드물 것이다. 하얀 담비는 붉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연신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백의중년인은 담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세 사람은 마치 유람이라도 하는 듯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이왕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차갑고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푸른 숲 사이로 내비치는 이끼 낀 기와 지붕을 보는 기분이란 생각만 해도 흡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바로 옆에 미모의 여자가 바짝 붙어서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젊은 남자는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안 좋군.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젊은 여자는 뱅어처럼 고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호호… 이곳의 경치는 정말 훌륭한데 당신은 뭐가 또 못마땅해서 그래요?”
젊은 남자는 여전히 퉁퉁 부은 듯한 표정이었다.
“보라구, 아침 이슬 때문에 신발이 모두 젖었잖아. 이래서 아침에 사당 같은 곳은 별로 오고 싶지 않다니까.”
“좋게 생각해요. 대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잖아요. 아침이라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도 않고 호젓하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신발 좀 젖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이익이죠.”
“난 젖는 게 싫어. 몸이 젖으면 기분이 눅눅해지고, 기분이 가라앉으면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단 말이야.”
젊은 여자는 다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당신은 그저 머리 굴리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군요. 가끔은 마음을 터놓고 주위의 경치들을 구경해 봐요. 저기 좀 봐요. 아주 멋있는 정자가 있군요.”
그녀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호들갑을 떨면서 한쪽을 가리켰다. 젊은 남자는 힐끗 그쪽을 보더니 시큰둥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긴 관란정(灌瀾亭)이야.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강언의 경치가 제법 일품이지.”
여자는 고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와 본 적이 있어요?”
“처음이야.”
“그런데 어떻게 척 보고 알아요?”
“책에 다 써 있어.”
그 말에 여자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호호… 이런 엉터리, 난 또 몇 번 와봐서 잘 아는 줄 알았지. 책에서 보는 거랑 실제로 보는 건 너무 다르니 잔말 말고 저곳으로 가 봐요.”
그녀는 젊은 남자의 팔을 잡아끌다시피 하며 정자로 올라갔다. 정자의 한쪽 벽에는 ‘봉정추심(逢正抽心)’ 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무심코 계단을 오르려던 여자는 그 벽을 보자 눈을 반짝 빛냈다.
“저 글자를 보니 예전에 들은 말이 생각이 나는군요. 계단 끝에서 눈을 감고 손을 든 채 저 벽을 향해 걷다가 손바닥이 네 글자 중 ‘심(心)’ 자를 정확하게 가리면 그 사람은 반드시 행복하게 된다고 해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았으니 나도 꼭 해보고 싶군요.”
젊은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미신(迷信)이야. 그런 걸 믿는단 말이야?”
“어때요? 해서 손해날 건 없잖아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눈을 뜨고 걸을걸.”
“당신은 매사에 너무 부정적이에요.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효험이 있을 리 없죠. 난 진짜로 눈을 꼭 감고 걸어 볼 거예요.”
젊은 남자는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마음대로 해.”
그녀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이내 계단 위로 달려가서 두 눈을 감고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런 다음 글자가 쓰여 있는 벽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젊은 남자는 자신의 옆에 있는 백의중년인을 돌아보았다.
“여자들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여기까지 와서 꼭 저런 짓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렇지 않습니까?”
백의중년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그게 여인들의 매력 아니겠나? 나는 육 소저의 저런 행동이 몹시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군.”
“귀엽긴요, 멍청한 거지요.”
“그녀가 멍청한 여자라면 자네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
젊은 남자는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게 그녀가 지금까지 한 행동 중 가장 멍청한 겁니다.”
백의중년인은 그 말에는 더 대꾸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러는 중엗 그의 품에 안긴 담비는 계속 몸을 뒤척였고, 그때마다 백의중년인은 담비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그를 다독거려 주었다. 조금 전만 해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담비는 시선을 우측에 고정시킨 채 낮은 목 울음소리를 냈다. 백의중년인은 담비의 목덜미를 간질이며 천천히 고개를 정자의 우측에 있는 고색 창연한 건물로 향했고, 우연인 듯 젊은 남자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그 건물은 울창한 송림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기와 지붕 끝만이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 상당히 넓은 이왕묘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해서 평상시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젊은 남자는 기지개를 켜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함, 나는 그동안 이 일대나 한바퀴 둘러봐야겠군.”
“나도 같이 가세.”
백의중년인이 그와 보조를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정자의 한쪽에 나 있는 작은 소로(소로)를 지나 우측의 송림 쪽으로 향했다. 한데 그때 갑자기 여인의 환성이 들렸다.
“됐다!”
젊은 남자가 움찔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가 벽 앞에서 깡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을 벽에 댄 채로 활짝 웃어 보였다.
“봐요. 내 손이 정확히 ‘심’ 자를 가렸어요. 이제 난 행복한 여자가 될 거예요.”
젊은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고, 백의중년인은 소리 죽여 웃었다.
“장난하지 말고 이리 와. 가 볼 곳이 있어.”
“알았어요.”
여자는 한달음에 그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다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재미있어요. 여기 오기를 잘했어요.”
“누가 아니래?”
젊은 남자는 그녀의 호들갑이 못마땅한지 얄팍한 입술을 삐죽거렸으나 더 이상 무어라고 하지는 않았다. 여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너무나 행복해 보였던 것이다. 세 사람은 소로를 따라 송림으로 다가갔다. 얼마쯤 가니 소나무 숲 특유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 나오며 유난히 우거진 송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는 아침 햇살이 주위를 온통 환하게 밝히고 있는데도, 이곳은 햇사라이 들어오지 않아 어둠침침했다.
“왠지 으스스하군요. 왜 하필 이런 곳으로 왔을까요?”
여자가 소리를 죽여 말하자 젊은 남자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있다가 꼭 물어보자구.”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송림 속을 걸어갔다. 걸음을 옮길수록 그들의 표정은 무거워졌으며, 조금 전과 같은 유유자적함은 어느사이엔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에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의 얼굴에 어려 있었다.
세 사람은 다름아닌 이정문과 육난음, 그리고 백랑군 송악이었다. 그들은 송악의 영물인 설비초를 따라 이곳까지 추격해 온 것이다. 설비초의 반응으로 보아 감종간이 관을 가지고 사라진 곳은 송림 안에 보이는 고색 창연한 건물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정문의 짐작대로라면 저 건물 안에 서장무림 최고의 두뇌라는 천애치수 단목초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목초가 사천성이 중심인 성도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긴 했으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성도는 사천성의 가장 큰 도시이자 위치적으로도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성도에 있으면 사천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정보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무림맹과 서장무림의 결전장이 검각임을 생각해 본다면, 검각에서 적당한 거리에 있고 사천성의 중심인 성도야말로 단목초가 숨어 있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과 동행하던 진산월의 모습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진산월은 이미 관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가 어떻게 감종간의 눈을 피해 관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는 이정문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관 속에 들어간 진산월조차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야말로 이정문의 가장 큰 비밀이며,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상은 절대로 남에게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관 속은 생각보다 그리 답답하지 않았다. 최고의 솜씨를 지닌 장인(匠人)이 만들어서인지 관의 내부는 겉에서 보기보다 의외로 넓었으며, 두 사람 정도는 충분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지금 관 속에도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물론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산월은 상관욱의 시체 밑바닥에 있는 작은 공간에 누워 있었다. 방부 처리를 한 탓에 상관욱의 시신에서 조금 심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견딜 만한 상황이었다. 진산월은 관 속에 누운 채로 자신이 어떻게 이 안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나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지난밤에 이정문은 갑자기 그에게 어디로 가자고 했고, 진산월은 영문도 모르고 그를 따라 길을 나섰다. 이정문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이름 모를 강변에 정박해 있는 한 척의 조각배였다. 그 배를 타고 반 시진을 노를 저어 간 끝에 그들은 다시 커다란 범선에 도착했다. 범선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진산월은 이정문의 지시대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범선의 지하선실로 숨어들 수 있었다. 이정문이 혼자 조각배를 타고 떠난 후, 진산월은 컴컴한 선실에 숨은 채 거듭 떠오르는 의혹에 빠져들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정문은 자신을 왜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일까? 이 배의 주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몇 가지 의문은 해답을 알았지만, 몇 가지 의문은 여전히 미궁에 싸여 있었다. 잠시 후, 배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배는 곧 출발하게 되었다. 그들이 서장의 인물들임은 그들의 말투로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내 관이 배 안으로 들어왔다. 감종간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관을 배의 가장 구석에 있는 선실로 운반했으며, 선실의 문을 이중삼중(二重三重)으로 잠가 누구도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오지 못하게 했다. 단 한 사람, 진산월만을 제외하고는. 공교롭게도 진산월이 숨어 있던 지하선실이 감종간이 관을 보관해 놓은 장소였던 것이다. 덕분에 진산월은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왕방이 미리 교묘하게 만들어 놓은 장치를 이용해서 진산월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관을 열었다. 왕방이 설치한 장치는 관 뚜껑을 지지하는 옆 테두리 장식에 작고 섬세한 틈을 내어 떠 다른 관 뚜껑 역할을 하는 사각의 틀을 만든 것이었다. 즉, 위로 여는 진짜 관 뚜껑 외에도 옆으로 여는 제이(第二)의 관 뚜껑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어서 감종간 같이 치밀한 사람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말았다. 관을 연 진산월은 상관욱의 시체 밑바닥에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음을 발견했다. 진산월이 그 안으로 들어가서 머리 위에 만들어진 고리를 잡아당기자 열렸던 관이 다시 닫혀 버렸다. 참으로 왕방만이 만들 수 있는 교묘한 장치가 아닐 수 없었다. 관은 워낙 크고 튼튼하게 지어서 겉으로 보아서는 두 사람이 누워 있다는 것을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진산월은 장검을 뽑아 가슴 앞에 댄 채로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특별히 떨리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두려운 건 관에 들어오기 전이지, 관에 들어온 후로는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깨끗하게 해치우자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단지 몇 가지 의문이 계속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일이 진행될 수 있는 것일까? 단순히 운(운)만으로 돌리기에는 미심쩍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나 지금의 그로서는 어느 것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마 모든 일이 끝나면 이정문이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된 것일까?’
진산월은 어떤 불만족가 희미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때 문득 그는 이정문이 했던 말 중 한 가지가 떠올랐다.
- 뭐든지 막상 알고 나면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인다. 그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승자(勝者)가 되는 것이다.
이정문의 말대로 이번 일의 진상(眞相)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 아닐까?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기에 단순한 사실을 의혹투성이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산월의 머리 속응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갑자기 관이 움직였다. 그와 함께 진산월은 관이 옆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관이 이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