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10화 (7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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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10화 (7권 끝)


제66장. 검정중원(劍定中原)

<내가 누운 침상을 뒤집어 보아라.>
진산월은 정립병이 남긴 <혈선비록>의 제일 마지막에 적혀 있는 말대로 돌침상을 들어올렸다.
쿠우웅!
무게가 거의 오백 근은 나갈 듯한 돌침상이었으나, 이미 임독양맥이 타통된 진산월은 어렵지 않게 돌침상을 뒤집을 수 있었다. 돌침상 밑은 평평한 석판(石板)이었다. 진산월은 석판 위에 무언가 점(點)과 선(線)이 종횡으로 교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좀더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의 자세와 발 동작을 그린 그림이었다. 검봉(劍鋒)으로 그린 듯 그림은 석판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한 그림의 숫자는 모두 백이십여 개나 되었다.

‘이게 모두 초식 하나를 연구한 도해(圖解)란 말인가?’
진산월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원래 아무리 복잡한 초식이라도 하나의 변화는 기껏 스무 개를 넘지 못했다. 그 이상 변하를 주게 되면 초식이 펼쳐지는 시간이 길어져서 결국 두 개의 초식으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초식을 연구한 도해는 십여 개 남짓에 불과할 뿐이었다. 게다가 웬만한 초식은 굳이 도해로 풀어낼 필요 없이 구결만으로도 연마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곽일산과 정립병이 연구한 이 초식은 도해만도 백이십 개가 넘었다. 그것도 아직 미완(未完)이었으니 앞으로 몇 개의 도해가 더 필요한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새삼 이번 일이 결코 수월치 않음을 절실히 느꼈다. 하나 한편으로는 검에 관한 한 무림사상 보기 드문 기재들이었던 곽일산과 정립병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검초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호기심도 강하게 일었다. 자기의 능력으로 그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진산월은 설레는 마음으로 석판 위에 그려진 도해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석판의 도해는 모두 정립병이 그린 것이었다. 정립병은 곽일산이 남겨 놓은 유운검결을 연구하여 거기에 자신의 심득(心得)을 담아 하나하나씩 도해로 그려 넣은 것다. 그 백이십 개의 도해는 결국 정립병과 곽일산, 두 절대고수의 평생의 심혈(心血)이 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이 이 도해의 비밀을 풀고 사백 년이나 이어 내려온 사문(師門)의 유업(遺業)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것이다.

진산월이 석실에 들어온 지도 몇 달이 흘렀다. 그동안 진산월은 도해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전심전력으로 유운검법을 익히는 데 주력했다. 곽일산이 남긴 유운검법은 모두 십팔 초였다. 그 검초는 이미 사부인 임장홍에게 배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유운검결에 적힌 검초들은 진산월 자신이 배운 것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검초 하나하나의 변화가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했으며, 검초의 형태 또한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곽일산이 제자들 앞에서 유운검법을 시전한 이후, 이곳 석실에서 검초를 연마하면서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했기 때문이었다. 도해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이 새로운 유운검법을 완벽하게 익혀야만 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이 유운검법을 하나로 관통하는 미완(未完)의 검초에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진산월은 자신의 유운검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공력을 끌어올려 검법을 펼치면 석실이 무너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용영검에 진기를 주입시키지 않고 동작과 자세만 반복해서 연마했던 것이다. 몇 달 동안의 고련(苦練) 끝에 진산월이 생각하기에도 동작자체는 상당히 매끄러워져 있었다. 자세와 자세를 아무리 변화시켜도 부드럽게 연결이 되었다. 하나 각각의 검초에 실린 변화를 모두 이해하려면 아직도 많은 부분이 부족했다. 십팔 초 유운검법의 동작과 자세를 완벽하게 익혔다고 생각하자 진산월은 이번에는 검초 하나하나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그것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심력(心力)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유운검법 중의 유운비격(流雲飛擊)이나 운무중첩(雲霧重疊) 같은 초식은 진산월이 평소에도 즐겨 사용하는 초식들이었다. 하나 곽일산의 유운검결에 적혀 있는 초식은 그 변화나 효용이 전혀 달랐다. 진산월은 마치 유운검법을 새로 익히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그 변화라는 것이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할 수도 있고, 단순화시킬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 검초가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변화를 훤히 꿰뚫고 있어야만 했다.

진산월은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석실의 구석에 있는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빛을 보고 날짜가 지나가는 것을 기록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도 잊고 그저 유운검법을 익히는 데만 신경을 기울였다. 머리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지 오래였고, 수염은 한 번도 깎지 못해서 얼굴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지저분한 데다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해져서 누더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배가 고프면 석실의 한쪽 구석에 있는 벽곡단을 먹었고, 목이 마르면 석실 바닥을 흐르는 지하수를 마셨다. 벽곡단은 커다란 항아리로 세 개나 가득 채워져 있어서 앞으로도 얼마든지 음식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석실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온통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시작해서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저녁에 그는 자신이 유운검법의 모든 변화를 터득했음을 알게 되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유운검법의 변화들이 일목요연하게 떠올랐다.
손을 내밀어 무의식적으로 검을 휘두르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검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진산월은 황급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자칫했으면 검기가 석실의 벽에 부딪힐 뻔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때가 꼬질꼬질한 양손은 예전과는 달리 비쩍 마르고 푸른 힘줄이 여기저기 돋아 있었다.
손 자체도 조금 커진 것 같았다.
손바닥에는 몇 번이나 물집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허물이 여러 차례 벗겨져 단단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자니 마치 남의 손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요리를 하고 음식을 만들던 손 같지가 않았다.
진산월은 한동안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보고 있다가 문득 걸음을 옮겨 돌침상이 있던 석판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야 비로소 도해를 볼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도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도해의 동작들은 모두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그 동작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백이십 개가 넘는 동작들 중 조금이라도 연결되는 동작은 열 개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여기서 왜 이런 동작이 나와야 하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로 엉뚱한 것들이었다.
그 도해는 곽일산이 남겨놓은 미완성의 검결을 토대로 해서 정립병이 자신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다.
정립병은 이 도해 자체도 미완성이며, 여기에 다시 적지 않은 도해를 추가해야만 비로소 도해가 완성된다고 했다.
도해가 완성되었다 해도 그것으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완성된 도해를 바탕으로 검결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산월은 곽일산이 남긴 검결을 읽어보았으나 전혀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구름, 변하다. 그 흐름은 물과 같고, 형태는 안개와 같으며, 기세는 바람과 같다. 구름, 계속 변하다. 그 기상은 봉우리 같고, 그 빠름은 뇌전과 같으며, 그 도도함은 바다와 같다. 구름, 변하지 않는다…… >

이건 무슨 무공구결이 아니라 시구를 읽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썩 운치가 있지도 않으며 절묘한 대구(對句)나 비유를 담고 있지도 않았다.
이런 난해한 검결을 토대로 백이십 가지의 도해를 만들어낸 정립병의 능력은 가히 초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검결은 진산월이 보기에도 미완(未完)이었다.
마지막에 무언가 글이 덧붙여져야 옳을 것 같았다.
곽일산은 끝내 그 뒤를 덧붙이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고 만 것이다.
진산월은 그 검결을 몇 번이고 암송하다가 이번에는 도해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백이십 가지의 도해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자세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각각의 도해마다 이상한 선과 점들이 그어져 있었다.
처음에 진산월은 그것이 석벽이 갈라져서 생긴 흠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그 선과 점들은 전혀 도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여기저기에 종횡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진산월이 그 선들 중 하나를 따라 손가락을 이동시켜 보니 놀랍게도 그 선은 모두 이어져 있었다.
단 하나의 선이 백이십 개의 도해에 있는 자세들을 모두 잇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 백이십 개의 도해에 그려진 자세들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이며, 순식간에 연결하여 펼쳐야 하는 것이다.
하나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게다가 도해와 도해 사이에 장난처럼 찍혀 있는 저 점들은 대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진산월은 공연히 머리만 어지러워져서 도해에서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그날 밤은 평상시보다 조금 일찍 수면을 취했다.

다음 날, 그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태을신공을 운용했다.
그리고 태진강기의 구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검법을 연마하기 전에 두 가지 신공을 익히는 것은 진산월이 요즘 들어 시도하기 시작한 새로운 방법이었다.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일단은 태을신공에 태진강기의 강맹함을 융합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한 시진쯤 운공을 계속하자 몸과 마음이 솜털처럼 가벼워졌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운공을 마치고 도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한 가지 한 가지의 도해에 있는 자세를 완벽하게 이해하려 애썼다.
그 자세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 했으며, 그 자세에서 연결을 취할 수 있는 다른 자세를 찾으려 했다.
하나 그러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도해를 연결하는 선은 분명 순서가 있었다.
그 선이 연결한 순서를 무시했다가는 아무리 도해의 자세를 연구해도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나 선이 연결된 순서대로 하자니 도저히 자세가 이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오른쪽 다리를 들고 왼쪽 팔은 하늘을 가리킨 자세로 서 있다가 왼팔을 바닥에 짚고 두 다리를 허공으로 차 올리는 자세로 어떻게 전환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허공에 비스듬히 몸을 뉘어 양팔을 벌리는 자세를 취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정립병이 이런 도해를 그려서 선으로 연결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도해를 들여다 보아도 헛수고일 뿐이었다.

실마리를 잡은 것은 도해를 연구한 지 열흘쯤 되는 날이었다.
그날도 진산월은 태을신공과 태진강기를 연마한 후 습관처럼 유운검법 십팔 초를 펼쳤다.
그러다 그날 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종남파를 떠난 후로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천하삼십육검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천하성진(天河星震)에서 천하도사(天河倒瀉), 천하도괘(天河道掛)로 이어지는 천하삼십육검의 전반부를 시전하던 진산월은 문득 천하도괘의 초식에 도해의 한 부분과 유사한 동작이 있음을 깨달았다.
오른 다리를 들고 왼팔로 하늘을 가리키는 동작이 똑 같은 것이다.
물론 천하도괘는 이런 자세에서 검을 든 오른팔로 상대의 중단(中段)을 겨누어야만 한다.

하나 천하도괘의 한 부분에 도해와 같은 동작이 있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진산월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 도해를 들여다보았다. 과연 도해 중 몇몇 개는 천하삼십육검의 일부 초식을 펼칠 때 취할 수 있는 자세들이었다. 그것은 모두 일곱 개나 되었다. 다시 정신을 집중하자 도해 중 다섯 개는 삼재검법(三才劍法)의 초식들과 비슷한 것이 있었고, 세 개는 육합검법(六合劍法)과 유사했다.

‘그렇다면 이 도해들은 천하에 산재한 수많은 검법들 중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진산월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도해를 분석한 결과 그중 서른다섯 개의 도해가 어느 검법에서 나온 것인지 알아냈다. 나머지 도해들도 진산월이 알지 못하는 검법의 변화 중 일부분이리라.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것들 중 유운검법에서 파생된 도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도해들은 유운검결을 나타낸 것이니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유운검법에서 가장 많이 응용을 해야 할 텐데 정작 유운검법 십팔 초에서는 단 하나의 도해도 나오지 않았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어쨌든 도해들이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여타 검법의 변화 중 일부라는 것을 파악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보아하니 정립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초식들 중 유운검결에 적합한 초식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그것은 정립병이 매종도를 꺾기 위해서 십여 년 간이나 강호의 뭇 고수들과 비무행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쌓은 풍부한 실전 경험과 각종 유파(流派)의 무공에 대한 안목이 그런 일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일단 실마리를 찾은 이상 도해를 분석하는 일은 한층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진산월은 도해에 있는 대부분의 자세들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었다. 하나 아직도 그 자세들을 어떻게 연환(連環)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자세들만으로 어떻게 유운검결의 검식을 펼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진산월의 일과도 언제나 똑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태을신공과 태진강기를 한 시진 동안 연마하고, 이어서 유운검법과 천하삼십육검을 익힌다. 벽곡단을 먹은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도해를 연구한다. 간혹 그것이 지루하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는 정립병이 남긴 혈선비록에 수록된 구종비기를 익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지 진산월은 차츰 도해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도해는 백여 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도해였다. 다만 단순한 도해가 아니라 그것은 인체(人體)의 도해였다. 각 도해는 인체에 있는 혈도(穴道)를 나타내며, 선은 혈도와 혈도를 잇는 경맥(經脈)의 흐름을 가리켰다. 그리고 도해 사이에 찍혀 있는 점들은 호흡의 맺고 끊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것을 깨닫는 데만도 오랜 시일이 소요되었다.

진산월은 또한 유운검결의 의미도 상당수 파악하고 있었다. 구름이란 곧 검(劍)을 말한다. 검의 끝은 계속 변해야 한다. 쉬지 않고 변하는 가운데 검은 흐르는 물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개는 소리 없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다. 검 또한 그처럼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며 때로는 미풍처럼 부드럽게, 때로는 태풍처럼 사납게 몰아쳐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진산월은 유운검결의 전반부를 깨우치게 되었다. 하나 아직도 후반부의 검결은 그에게는 의혹투성이였으며, 더구나 그 검결의 마지막을 덧붙이는 일은 요원(遙遠)한 것이었다. 유운검법은 이미 완벽하게 터득한 상태였다. 정립병이 남긴 도해의 의미도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운검법 십팔 초를 하나로 관통하여 유운검결을 완성시키는 일은 별다른 진도가 없었다. 한순간이나마 진산월은 자신도 곽일산이나 정립병처럼 유운검결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 석실에서 뼈를 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석실을 뛰쳐나가 종남파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과 씨름해야만 했다. 하나 이대로 돌아섰다가는 사문의 숙원(宿願)을 풀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영원한 짐을 지우게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끝끝내 눌러 참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군림천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완성된 유운검결의 검초가 반드시 필요했다. 진산월은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하루하루 검초를 연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비가 내리고, 낙엽이 지고, 다시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계속 흘러갔다. 하나 중봉의 산봉우리 아래에 위치한 작은 석실 안에서만은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었다. 정지(靜止)된 시간. 정지된 흐름. 정지된 구름……

손은 창백했다. 창백한 손에 쥐어져 있는 검에서 흘러 나오는 검광도 창백했다. 그 창백한 검광에 비춰진 얼굴은 더욱 창백했다. 손이 움직였다. 그에 따라 흐릿한 검광이 안개처럼 석실 안을 휘감았다. 때로는 안개처럼, 때로는 바람처럼…… 갑자기 검광이 전혀 다른 빛깔로 바뀌었다. 검광은 더 이상 창백하지 않았다. 눈부시게 번뜩이는 검광은 대지(大地)를 비추는 햇살 같았다. 그 햇살은 산을 비추고, 바다를 비추었다. 천변만화를 이루며 계속 바뀌던 검광이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의 일이어서 마치 애초부터 검광이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직하면서도 담담한 음성이 들여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구름, 변하다.
그 흐름은 물과 같고, 형태는 안개와 같으며, 기세는 바람과 같다.
구름, 계속 변하다.
그 기상은 봉우리 같고, 그 빠름은 뇌전과 같으며, 그 도도함은 바다와 같다.
구름, 변하지 않는다.
내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는다……”

진산월은 검을 거둔 채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을 완성한 지금 별다른 감회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유운검결의 진리(眞理)를 알아냈다. 모든 변화는 결국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일단 마음이 움직이면 구름은 천변만화를 일으켜 세상을 뒤덮지만, 마음이 가라앉으면 구름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아예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되는 것이다. 마음이 일면 구름이 일어나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구름도 사라진다…… 그것이야말로 유운검결 십팔 초를 관통할 수 있는 궁극의 요결(要訣)이었던 것이었다. 진산월의 머리 속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곽일산과 정립병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향해 환한 웃음을 보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념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 유운검법 십팔 초를 단숨에 관통할 수 있다면, 능히 검으로 중원을 평정할 수 있다!

곽일산의 자신에 찬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손에 들고 있는 유운검결의 미완성 비급을 내려보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검정중원(劍定中原)이다.”

검정중원!

항차 중원무림을 경악에 떨게 하고 검을 찬 모든 무사들에게 꿈과 동경을 심어 준 무적(無敵)의 검초(劍招)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것은 진산월이 중봉의 석실에 들어온 지 정확히 삼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 진산월의 나이는 스물다섯, 임영옥과의 약속 기한은 일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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