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2화
제58장. 이년지약(二年之約)
하늘에는 일점편월(一點片月)이 떠 있었다. 굽이치는 강물 위에 떠 있는 한 점의 조각달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서 있는 진산월의 마음도 흔들리는 강물을 따라 일렁거리고 있었다.
철썩……
세찬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당가타의 물살은 앞으로 닥칠 거센 운명(運命)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진산월은 하얗게 포말을 그리며 부서지는 당가타의 격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뒤로 하나의 긴 그림자와 함께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세요.”
진산월이 돌아보니 엄쌍쌍이 서 있었다. 그는 묵묵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걷는 것이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진산월은 혼자의 힘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당한 부상을 생각한다면 불과 보름 만에 혼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엄쌍쌍은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산월의 걸음은 느렸으며, 엄쌍쌍도 그다지 발길을 재촉하지 않아서 두 사람이 전진하는 속도는 완만하기 그지없었다. 엄쌍쌍은 강변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다가 그가 아무런 말도 없자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달빛은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陰影)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에 이리저리 나 있는 흉터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엄쌍쌍은 그가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결 침착하고 장중(莊重)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차가워졌다는 느낌도 들었다. 두 사람은 강변을 따라 반리(半里) 정도 걸어갔다. 강변이 점점 좁아지며 멀지 않은 곳에 울창한 송림(松林)이 나타났다.
송림 앞에는 한 대의 커다란 사두마차(四頭馬車)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는 외양이 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으나, 사방에 짙은 주렴이 쳐 있어서 겉에서 보아서는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었다. 마부석에는 진산월이 일전에 만난 적이 있던 쌍둥이 남상중년인 중의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남삼중년인은 엄쌍쌍만을 힐끔 쳐다보았을 뿐, 진산월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이 의식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진산월을 아예 무시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썩 기분 좋은 모습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엄쌍쌍은 마차를 향해 손짓을 했다.
“들어가 보세요.”
진산월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가 주렴을 살짝 걷었다. 실내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안을 확인하기도 전에 먼저 은은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향기가 흘러나왔다. 그 향기를 맡자 진산월의 얼굴에 한 줄기 아련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임영옥의 향기였다. 그녀가 좋아하고, 그녀만이 사용하는 사라옥정향(沙羅玉丁香)의 내음인 것이다. 진산월은 잠시 그 자리에 못박인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낱 내음이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뒤흔들고 그리움을 샘솟게 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진산월이었다.
지금 그의 심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옳을까?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헤어짐 후의 재회(再會)였지만, 막상 그녀를 만날 순간이 되자 진산월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토록 만나기를 갈망해 왔던 그녀였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발을 돌려 되돌아가고 싶었다.
하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도 진산월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흐음……”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신음성을 흘리던 진산월은 이윽고 주렴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 안은 어두컴컴했다. 하나 진산월은 이내 마차 안에 하나의 작은 침상이 놓여져 있음을 발견했다. 침상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그 인영은 비단금침을 턱밑까지 덮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진산월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 인영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마차의 한쪽 구석에 우뚝 선 채로 침상 위의 인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침상 위에서 간혹 나직한 숨결이 흘러 나올 뿐,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진산월은 어둠 속에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인영을 깨우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침상 위의 인영이 몸을 뒤척이더니 굳게 감겼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그 눈은 이내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몇 번 깜박이더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영롱한 빛을 반짝거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선 채로, 그녀는 누운 채로……
한참 후에야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많이 여위었군, 사매.”
그 음성을 듣자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하나 그녀는 이내 눈가를 손으로 살짝 훔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언제 왔어요?”
나직하게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늑하고 포근하게 들렸다. 진산월도 그녀처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사형을 만나는 꿈을 꾸고 있었어요.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기 싫었는데, 사형이 온 줄 알았다면 더 빨리 깰 걸 그랬어요.”
“아니야. 난 방금 왔어. 정말이야.”
임영옥은 한동안 어둠 속에 서 있는 진산월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가까이 오세요. 사형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게……”
“난 여기가 더 좋아. 여기서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니 사매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오는걸.”
“가까이 오세요……”
진산월은 더 이상 거부하지 않고 침상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임영옥은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파리하고 창백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은 진산월의 턱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내 왼쪽 뺨에 난 움푹 파인 상처에 가서 머물렀다. 아직 채 흉터가 가시지 않은 진산월의 얼굴은 짙은 어둠과 뒤섞여 차가워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따스하고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임영옥은 그의 왼쪽 뺨 상처에서 그의 눈으로 시선을 옮기며 소곤거리듯 말했다.
“이 흉터는 없어지지 않겠군요.”
“상관없어. 그전에도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는걸.”
“그래도 호감 가는 얼굴이었어요.”
“지금은 안 그런가?”
임영옥은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이내 조그만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형의 얼굴이 어떻게 바뀌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똑같게 느껴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임영옥은 갑자기 진산월을 불렀다.
“사형……”
“왜?”
진산월이 그녀를 쳐다볼 때 임영옥의 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기이한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형도 그럴 거죠? 내가 어떻게 바뀌어도 사형은 나를 예전과 똑같이 대해 줄 거죠?”
그녀의 나직한 음성 속에 담겨 있는 뜨거운 열기를 진산월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게 있어 사매는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야. 늘 최고의 여인(女人)이지.”
임영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주잡은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예전부터 진산월은 그녀가 이렇게 손등을 어루만져 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때마다 마음이 포근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컴컴한 어둠에 잠긴 좁은 마차 속에서 그녀에게 손등이 어루만져지자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말못할 슬픔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슬픔은 전염되는 것인가? 진산월의 손등을 쓰다듬던 임영옥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녀의 얼굴에도 한 줄기 처연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침상에 누운 채로 그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내게도 남자는 오직 사형뿐이에요……”
진산월은 웃었다.
“나도 알아.”
물론 알고 있다. 알고 말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의 슬픔이 더욱 커진 것인지 모른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 더욱더 필사적으로 웃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하의 물 속에서 목극등과 대머리 중년인의 암습을 받았을 때 그녀는 충분히 그들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는 물 속에 그들 말고도 다른 인물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자는 목극등과 대머리 중년인의 등 뒤에서 사오 장 정도 떨어진 물 속에 혼자 우두커니 선 채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 속에서도 그녀는 그의 강력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무공이 도저히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가공한 것임을 깨달았고, 결국 물 밖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죽림까지 따라온 목극등과 대머리 중년인은 그녀에게 구음향을 사용했고, 결국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음기 때문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그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물 속에 나타났던 정체 모를 신비의 인물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단 일수 만에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는 너무도 수월하게 그녀를 수중에 넣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다시 제삼자에게 건네지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이 모든 일들이 신목령의 고수인 운자추의 짓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진산월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물 속에서부터 그녀를 따라왔던 신비의 인물은 신목령주의 최측근 고수인 혈수존자 오욕백이었다. 오욕백에게서 그녀를 건네받은 사람은 신목칠호인 심옥당이었는데, 그는 쾌의당의 고수인 무영귀 허무극에게 팔을 잘리고 도망치고 말았고, 다시 천봉팔선자가 허무극에게서 그녀를 구해 내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말을 하고 난 임영옥은 왠일인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진산월은 묵묵히 임영옥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렴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월광(月光)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하고 핼쑥해 보였다.
진산월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임영옥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꼬옥 감싸안았다. 마치 그 손을 놓치면 그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다음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구음향에 중독된 후 제 몸에는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어요. 하루에 두 번씩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 몸 속에서 음기가 솟구친다는 거죠……”
진산월은 말없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번 음기가 솟구치면 그 시기는 대략 반시진(半時辰) 정도 계속되는데, 그때는 전신의 기력이 모두 사라져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게 된다.
게다가 정신도 혼미해져서 자신이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자각(自覺)할 수 없다.
처음 음기가 솟구친 것은 구음향에 중독된 지 두 시진(時辰)이 지난 후였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오한(惡寒)이 일어나며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몹시 당황했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또 다른 음독(陰毒)에 중독된 줄로 알았다. 그녀는 전신을 얼려 버리는 것 같은 오한에 몸을 떨다가 결국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한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생소한 남자의 얼굴에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이내 또 다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옷이 모두 벗겨진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던 것이다. 단지 하나의 얇은 이불만이 그녀의 알몸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젊은 남자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해하시오, 임 소저. 소저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옷을 벗겨야만 했소.”
임영옥은 너무도 놀라고 당황스러워 일시지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젊은 남자는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저의 몸은 아직도 완쾌되지 않았소. 다행히 위급한 순간은 넘어갔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음기의 분출을 억제하지 않으면 영원히 무공을 사용할 수 없을 거요.”
그녀는 그때까지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젊은 남자는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와 침착한 태도는 예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고상한 품위를 담고 있어 그녀는 점차 들끓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젊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 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젊은 남자는 막 문을 나서려다 그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내 이름은 모용봉이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짤막하게 덧붙였다.
“강호에서는 나를 모용 공자라고 부르기도 하오.”
그것이 그녀와 모용봉의 첫 만남이었다.
모용봉은 그후로 하루에 두 번씩 그녀를 찾아왔다. 매일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 그녀의 몸 속에서 솟구치는 음기를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오 일째 되는 날 밤, 그녀를 치료하고 난 후에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이런 식의 조치는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에 불과하다는 걸 소저도 알고 있을 거요.”
임영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봉은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특유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저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소. 그것은 본 보(本堡)의 비전(秘傳)인 천양신공에 입문(入門)하는 길뿐이오.”
“…”
“하지만 본 보의 천양신공은 결코 아무에게나 전수해 주지 않소. 최고의 재질을 지닌 자이어야 하고, 본 보의 최고어른 세 분의 승낙을 받아야 하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모용세가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오.”
임영옥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용봉은 다시 유심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방안의 공기가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낮게 가라앉은 다음에야 모용봉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저는 여인의 몸으로는 최고의 체질이라고 할 수 있는 태음신맥의 소유자이니 첫 번째 조건은 충족하고도 남음이 있소. 또한 나는 본 보의 어른들이 소저를 받아들이게끔 설득할 자신도 있소. 하지만 세 번째 조건만큼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소. 그건 오직 소저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요.”
흔들리는 촛불이 임영옥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얼굴 윤곽은 평상시보다 한층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롱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 눈빛에 취했는지 모용봉의 눈가에도 한 줄기 기이한 빛이 번쩍거리며 지나갔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 임영옥이었다. 임영옥은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형을 만나고 싶어요.”
모용봉은 그녀의 말이 뜻밖인 듯 눈썹을 슬쩍 꿈틀거렸다.
“진 장문인을 만나고 싶단 말이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봉은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눈은 마치 얼음으로 된 장막을 씌운 듯 전혀 아무런 감정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모용봉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를 만나게 해주겠소.”
“고마워요.”
“다만……”
모용봉의 얼굴에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그의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이번에 그를 만나게 되면 소저는 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하오. 그리고 일단 결정을 하게 되면 여하한 일로도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명심하기 바라오.”
처음으로 임영옥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임영옥의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다. 피부는 여염집 여자들처럼 희고 곱지는 않았지만, 햇볕에 적당히 그을려서 보기 좋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코는 여인답지 않게 콧날이 오뚝 서 있었고, 그 밑의 입술은 윗입술에 비해서 아랫입술이 도톰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색감(色感)을 느끼게 했다.
하나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녀의 두 눈이었다. 흔히 ‘명모호치(明眸皓齒)’ 라 하여 맑은 눈동자와 흰 이는 미인의 기본 조건이라 하였는데, 그녀의 눈이야말로 ‘명모’ 라는 두 글자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눈꼬리가 처지거나 올라가지 않았고, 눈동자는 안정되어 있었으며, 흰자위와 검은 동자의 경계가 분명하였다. 그녀의 맑게 빛나고 있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육체는 물론 영혼마저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그러한 눈으로 모용봉을 응시하고 있었다.
천하의 모용봉도 이때만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모용봉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약간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천장을 응시하는 그의 가슴은 필생(必生)의 숙적(宿敵)과 일전을 겨룬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는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이미 결정은 내렸어요. 나는 단지 사형에게 다짐받고 싶은 게 있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진산월의 마음속 슬픔은 점점 더 커져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혼자 마음속으로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조그만 꿈이 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최소한 그녀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 없었다.
말을 마친 임영옥은 진산월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얼굴은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지…… 진산월은 차마 그녀의 눈빛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손을 꼬옥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걱정 마.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그동안 진산월은 몇 번이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하나 지금 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본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임영옥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형에게 한 가지 확인받고 싶은 게 있어요.”
“내게 확인받고 싶은 게 있다고?”
진산월이 되묻자 임영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지, 사매?”
임영옥은 물끄러미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이윽고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사형은 짐작하겠죠? 나는 천양신공을 익히기로 했어요.”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잘했어.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 나는 그를 따라 구궁보로 들어갈 거예요. 일단 들어가면 나는 밖으로 나올 수 없어요. 나 혼자 힘으로는.”
이번에는 진산월이 입을 다물고 임영옥을 바라보았다. 임영옥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뜨거운 열기가 담겨 있었다.
“사형은 나를 데리러 와 줄 거죠? 종남산으로 데려다 줄 거죠?”
진산월은 그녀의 발그레한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싸 안으며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다음 나직하면서도 믿음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이지. 이 년(二年)만 기다려. 이 년 안에 반드시 사매를 데리러 구궁보를 찾아갈 거야.”
“이 년……”
그녀는 입 속으로 그 말을 뇌까리더니 두 눈을 사르르 감았다. 진산월은 살포시 내려감은 그녀의 길다란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진산월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썹 위에 가볍게 숨을 불어넣자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더욱 짙어졌다.
진산월은 그녀의 오뚝한 콧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가 콧등에 댄 입을 떼려 할 때, 그녀는 입술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진산월도 피하지 않았다. 입술과 입술이 마주치고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한참 후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진산월의 품속에 머리를 기댄 채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요.”
진산월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 내음을 맡으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가슴에 파묻히듯 몸을 기댄 채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무언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졌다.
“음기를 치료할 때는 몸에 어떠한 옷도 걸쳐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십 일 동안 나는 줄곧 그의 앞에서 알몸이 되어야만 했어요.”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의 품속에 있어서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는 보기 드문 성인군자(聖人君子)임에 틀림없어요. 단 한번도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로서는 정말 참기 힘든 시간이었어요……”
“…!”
“체내에서 음기가 솟구칠 때는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이상한 욕정(欲情) 같은 것이 솟구쳐 올라와요. 음기가 강해질수록 욕정도 점점 강해지는 것 같아요. 그의 말로는 그러한 욕정은 내가 천양신공을 팔 성(八成) 이상 익혀서 몸 속의 음기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없어지지 않을 거라더군요. 내가 과연 그때까지 솟구치는 욕정을 참을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진산월은 두툼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품속에 있던 임영옥이 천천히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처연한 빛이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생겼어요.”
“…”
“이 년이라면 참을 수 있어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내 자신을 지켜 나가겠어요. 하루하루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참아 나가겠어요. 그러니 사형도 잊지 말고 꼭 나를 데리러 와 줘요.”
진산월은 그녀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마음속에 수만 가지 슬픔과 괴로움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로서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해 주었다.
“반드시 그렇게 할 게.”
이 년의 약속! 그것은 두 사람의 작고 소박한 행복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그 약속은 과연 지켜질 수 있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