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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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4화


제60장. 종남변고(終南變故)

멀리 종남산이 보였다.

“아!”

낙일방은 감격에 겨운 탄성을 토해냈다.

비록 짤막한 외침이었으나, 그 음성 속에 담긴 뜨거운 의미를 모두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왔다.

종남산을 떠나온 지 정확히 두 달하고도 삼 일 만의 일이었다.

그다지 긴 세월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동안 진산월 일행이 겪은 일들은 그들의 지난 평생 벌어진 일보다 훨씬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낙일방은 야릇한 감회에 젖어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응계성의 굳은 얼굴에도 잠시 아련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산월은 더 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중원은 완연한 겨울이어서 종남산의 산보우리마다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유난히 계곡이 깊고 크고 작은 구릉이 많은 종남산은 멀리서 보면 머리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연상케 했다.

중인들은 한동안 종남산이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서서 서로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 상념을 깬 것은 상원건이었다.

“이제 나는 여기에서 헤어져야겠네.”

뜻밖의 말에 모두들 놀라 상원건을 쳐다보았다.

“상 대협, 여기까지 오셨는데 당연히 본 파에 들르셔야지요.”

그동안 상원건과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냈던 낙일방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으나, 상원건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딸아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네. 이쯤에서 헤어져 딸아이가 있는 낙양으로 가 볼까 하네.”

낙일방은 그를 말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으나, 딸을 보고 싶다는 말에 차마 더 이상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만 해도 종남파 사람들로서는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딸인 상소홍과 헤어져 사천성까지 같이 가 준 것만으로도 상원건은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상황이 모두 종료된 다음에도 종남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마차를 끌면서 험한 길을 달려왔던 것이다.

그에 대해 종남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낙일방은 서운한 마음에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고, 대신 마차에서 내려온 진산월이 그에게 다가왔다.

“상 대협,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언제까지고 상 대협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만 기억해 두십시오.”

상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기억하고 있겠소.”

상원건도 진산월을 비롯한 종남파의 고수들이 남과 같지 않았다.

그들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엄밀히 따지면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으나 두 달 동안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다른 어떤 사이보다 더욱 친한 관계가 되었던 것이다.

상원건은 응계성, 동중산과 간단하게 인사말을 주고받은 다음 낙일방을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낙일방은 준수한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채 아무 말도 않고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심정을 상원건이 어찌 모르겠는가?

상원건도 아들처럼 아끼며 지냈던 그와의 이별이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낙일방이 느끼는 아쉬움보다 더욱 진한 감정이 가슴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나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낙일방에게 다가오며 그의 어깨를 두르렸다.

“낙양에 가서 딸아이와 정 소협을 만나게 되면 바로 그들과 함께 종남산으로 오겠네. 그러니 길어야 한 달이면 보기 싫어도 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있을걸세.”

그가 짐짓 쾌활하게 말하자 그제서야 낙일방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정말 본 파에 꼭 들르실 거죠?”

“물론이지. 자네가 그렇게 입버릇처럼 칭찬하는 진 장문인의 음식 솜씨를 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올걸세.”

“그래요, 꼭 오세요. 장문사형도 아마 기꺼이 상 대협을 위해서 요리를 해주실 거예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응계성이 그의 머리를 툭 쳤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장문사형의 신분으로 남을 위해 요리를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낙일방은 눈살을 찡그리며 뒤통수를 어루만지면서도 진산월의 눈치를 살폈다.

“상 대협이 어디 남인가요?”

진산월이 빙긋 미소지었다.

“물론이지. 상 대협이 본 파에 오신다면 당연히 대접해 드려야지.”

그제서야 낙일방은 헤헤거리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천진스러워 보여서 응계성도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녀석은 자기가 먹고 싶으니까 애꿎은 상 대협 핑계를 대었던 거로군.”

상원건도 따라서 웃었지만 마음은 이미 딸이 있는 낙양의 석가장으로 가 있는지라 절로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포권을 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조만간 다시 봅시다.”

“예, 정 사형에게도 빨리 돌아오라고 전해 주세요.”

“알았네.”

상원건은 다시 한 번 중인들을 돌아보고는 이내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두두두… 그는 한 줄기 흙먼지를 남기며 중인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중인들은 그의 몸이 가느다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박인 듯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누구의 입에서인지 나직한 한숨이 흘러 나왔다. 비록 짧은 동안의 동행이었지만, 상원건은 은연중 종남파의 고수들에게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 왔다. 뚜렷한 선배고수들이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풍부한 강호 경험과 상세한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착하고 차분한 성품을 지닌 상원건에게 사람들은 음(陰)으로 양(陽)으로 의지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렇듯 훌쩍 떠나 버리자 모두들 마음속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진산월 또한 그런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언제까지 이렇게 맥없이 있을 수는 없기에 그는 어깨가 축 늘어진 낙일방과 응계성 등을 다독거렸다.

“상 대협은 허언(虛言)을 하지 않는 분이니 조만간 본 파에 들르실 것이다. 그보다 빨리 본 파로 가자꾸나. 어쩌면 취아가 저녁밥을 해놓고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종남파에 대한 말이 나오자 침울해 있던 낙일방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그래요, 저도 방 사매가 보고 싶어요.”

응계성이 짐짓 눈을 부라렸다.

“그래? 방 사매가 그 말을 들으면 좋아하겠구나? 네놈이 언제부터 그렇게 방 사매를 좋아했지?”

“방 사매뿐 아니라 소 사형과 매 사형도 모두 보고 싶어요. 응 사형은 그들이 보고 싶지 않나요?”

“그야……”

“그럼 어서 가자구요. 그들이 우리를 기다리다 목이 길게 빠져 있을지 모른다구요.”

응계성의 얼굴에 심술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면 쪽박을 차고 산문(山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지도 모르지.”

낙일방은 어이가 없는지 오히려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 또 응 사형의 비관병(悲觀病)이 도졌군요. 싸움 잘하는 매 사형과 돌부처같이 침착한 소 사형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아무튼 어서 가자구요.”

낙일방은 종남파가 지척에 있다고 생각하자 절로 마음이 다급해졌는지 일행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응계성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이었으므로 이번에는 심술을 부리지 않고 그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종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눈이 와서 몹시 미끄러웠으나 일행들의 발길을 늦추지는 못했다. 모두들 사형제들을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마음속의 흥분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들이었다. 오직 진산월만이 담담한 표정이었을 뿐, 낙일방은 물론이고 응계성마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동중산 또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종남파를 직접 찾아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얼마쯤의 흥분과 설레는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네 사람은 곧 종남파의 산문(山門)이 보이는 커다란 구릉에 도착하게 되었다. 멀리 산문이 보이자 낙일방이 반색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먼저 가서 장문사형이 오신다고 전할게요.”

낙일방은 진산월의 승낙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쏜살같이 산 위로 달려갔다.

“저 녀석이……”

응계성 또한 낙일방의 뒤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체면을 생각해서 꾹 눌러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비호처럼 산문을 향해 달려가던 낙일방의 몸이 갑자기 화살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아!”

그의 입에서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 나왔다. 얼마 전에 탄성을 토해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음성이었다. 응계성이 깜짝 놀라 황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하나 응계성 또한 무엇을 보았는지 안색이 변하며 몸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뒤이어 달려온 진산월과 동중산 또한 그 자리에 못박인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산문은 박살나 있었다. 부서진 현판과 조각난 나무 파편들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모습이 그렇게 황량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한참 후에야 낙일방의 입에서 짓눌린 듯한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 말을 신호로 하듯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인들은 일제히 산 위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산문에서 종남파가 자리한 곳까지는 불과 일 리(一里)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하나 산 위를 달려가는 중인들에게는 그 길이 더 할 수 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종남파는 멀쩡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상시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허겁지겁 산으로 올라온 낙일방은 종남파의 건물이 예전과 그대로인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올라오는 동안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매 사형! 소 사형! 방 사매!”

낙일방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낙일방은 다시 불길한 생각이 들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무도 없어요? 우리가 돌아왔다구요!”

낙일방이 건물의 구석구석을 뒤지며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직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장문사형…!”

울음소리와 함께 구석진 곳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와 낙일방의 뒤를 따라 건물로 들어서고 있는 진산월에게로 달려들었다. 응계성이 깜짝 놀라서 진산월의 앞을 막아서려 할 때 진산월이 앞으로 나서며 양팔을 벌렸다.

“아아…!”

진산월의 품속에 뛰어들며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방취아가 아닌가? 진산월의 앞가슴 옷자락은 순식간에 그녀가 흘린 눈물로 흠뻑 젖어 버렸다. 뜻밖의 사태에 아연(啞然)한 낙일방과 응계성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진산월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그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정신없이 흐느끼던 방취아의 어깨 떨림이 점차로 멈춰지며 울음소리도 그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취아야, 고생이 많았구나.”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동중산은 진산월의 침착한 대응에 절로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두서없이 물어보았을 텐데 진산월은 먼저 그녀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침착함은 강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취아는 진산월의 부드러우면서도 듬직한 음성을 듣자 한결 마음이 가라앉는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매 사형이……”

낙일방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끼여들었다.

“매 사형이 어떻게 되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응계성이 옆에서 눈치를 주었으나, 낙일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봇물 터진 것처럼 말을 쏟아 부었다.

“가만 있어봐요, 응 사형. 응 사형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잖아요. 방 사매, 빨리 말 좀 해줘. 이러다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방취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가운데에도 낙일방의 이런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성질 급하고 덜렁대는 건 여전하군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보채지 말아요. 내가 차근차근 모두 말해 줄 테니……”

낙일방이 다시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하자 응계성이 그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겨 버렸다.

“이놈아!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어. 너 때문에 방 사매가 할 말도 못하고 있잖아.”

“아이쿠!”

낙일방은 우거지상을 쓰며 머리통을 부여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방취아는 표정이 한결 풀어져서 다시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들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자 새삼 사형들이 무사히 종남파로 돌아왔음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그런데 사저와 정 사형이 안 보이네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통을 쓰다듬고 있던 낙일방이 간신히 다시 일어서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방 사매, 그 이야기는 내가 천천히 해줄 테니 제발 어찌된 영문인지부터 알려줘. 누구 답답해서 죽는 꼴을 보려고 해?”

“알았어요. 사실은……”

방취아는 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두(杜) 사형(師兄)이 본 파에 찾아왔어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낙일방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두 사형? 두기춘 사형 말이야?”

“그래요.”

응계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형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사형이야? 그 못된 녀석이 무슨 낯짝이 있다고 제 발로 여기를 찾아왔단 말이냐?”

방취아는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쳤다.

“자꾸 이렇게 내 말을 막으면 어떡해요? 그리고 그런 건 두 사형한테 따져야지, 왜 애꿎은 나에게 화풀이하는 거예요?”

응계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두기춘은 진산월의 사제 중 하나로, 서열은 정해와 낙일방의 중간이었다. 그는 준수한 용모에 무공에 대한 재질도 상당히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임장홍이 진산월에게 남겨 준 만년삼정을 가지고 도망쳐 사람들을 경악과 분노에 떨게 했다. 그가 한 짓은 종남파 문인(門人)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응계성은 예전부터 얼굴이 번지르르하고 약삭빠른 두기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두기춘이 만년삼정을 가지고 도망친 장소만 알았다면 제일 먼저 응계성이 달려가서 그를 잡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꼬리를 감추고 숨어 있어야 할 두기춘이 스스로 종남파에 찾아왔다니 응계성이 분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낙일방은 그런 응계성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발작할 것을 두려워해 황급히 방취아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매 사형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매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응계성도 솔깃하는 표정이었다. 방취아의 얼굴에 한 줄기 침통한 표정이 떠올랐다.

“낙 사형 말대로 두 사형이 찾아온 것을 알자 매 사형은 살기 등등해져서 그를 당장 죽이겠다고 했어요. 더구나 그때 두 사형에게는 몇 명의 일행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자 매 사형은 더욱 화가 나서 머리끝까지 살기(殺氣)가 솟구쳤어요.”

“그들이 누군데?”

웬일인지 방취아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진산월의 눈치를 살폈다. 낙일방이 답답한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들이 누구냐니까?”

방취아는 그녀답지 않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화산파(華山派)의 고수들이에요.”

낙일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 화산파? 두 사형이 화산파의 고수들과 함께 찾아왔다고?”

방취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낙일방은 너무도 놀라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응계성이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소리쳤다.

“그래, 좋다! 그놈이 본 파의 보물을 훔쳐간 것도 모자라서 본 파를 등지고 화산파에 빌붙었단 말이지? 과연 그놈다운 짓이다. 그래서? 틀림없이 매 사형이 그놈을 찢어 죽였겠지?”

방취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예요.”

응계성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대라니? 매 사형이 그놈을 그대로 놔두었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 매 사형이 두 사…… 아니, 두기춘에게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당해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어요.”

이번에는 응계성이 입을 다물었다. 하나 이내 그는 도리질을 하며 방취아를 노려보았다.

“그럴 리 없다. 그놈의 무공이 어떤지는 내가 더 잘 안다. 그놈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매 사형을 당할 수 없어. 아니면 화산파의 놈들이 떼거리로 매 사형에게 덤볐단 말이냐?”

“싸운 건 매 사형과 두기춘뿐이에요. 화산파의 고수들은 그들이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어요.”

응계성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매 사형이 두기춘, 그 망할 녀석을 당해내지 못했단 말이냐?”

방취아는 힘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당해내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상대도 되지 않았어요. 두기춘은…… 그 사이에 정말 무섭도록 무공이 늘었어요.”

한동안 응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거니 방취아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말이 거짓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응계성뿐 아니라 낙일방 또한 경악과 불신(不信)에 가득 차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낙일방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장문사형, 정말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의외로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예?”

“두기춘이 만년삼정을 복용했다면 임독양맥을 타통했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화산파의 무공을 배웠다면 짧은 순간에 절정고수가 될 수도 있지.”

진산월의 말에 낙일방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불과 두 달 사이에 매 사형을 이길 정도가 될까요?”

낙일방의 뇌리에 매상의 모습은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불패(不敗)의 투사(鬪士)였다. 아무리 임독양맥이 타통되었다고 해도 두기춘이 매상을 이긴다는 것은 낙일방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진산월은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화산파는 다른 문파에서 배척된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두기춘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가 임독양맥이 타통된 것을 알고 정예고수로 키우기 위한 포석(布石)을 한 것 같다. 매상이 그걸 모르고 예전의 두기춘인 줄로만 알고 방심하고 있었다면 아무리 싸움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당해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낙일방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럼 정말로 매 사형이 당했단 말이군요. 매 사형은 누구에게도 쓰러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진산월은 그보다는 다른 게 더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방취아에게 물었다.

“매상의 상태는 어떻느냐? 부상이 심하느냐?”

“오른쪽 옆구리의 갈비뼈가 상하고 왼쪽 팔에 검상(劍傷)을 입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두기춘에게 당한 것이 너무 분했는지 그 뒤로 방안에서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진산월이 걱정했던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매상은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매상이 평소에 하찮게 생각했던 사문의 배반자 두기춘에게 당했다는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매상 자신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진산월은 매상이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염려되었다.

“자기 방에 있어요.”

진산월은 방취아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몸을 날렸다. 낙일방이 따라가려 하자, 응계성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넌 여기 남아 있어.”

낙일방을 제지시킨 다음 응계성은 방취아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지산은? 매 사형이 그렇게 당했는데 그는 뭘 하고 있었지?”

응계성은 소지산보다 서열이 낮았으나, 나이는 똑같았다. 종남파에 입문한 것은 소지산이 석 달 빨랐으나, 무공의 진도는 오히려 응계성이 앞서는 감이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성격도 판이해서 그야말로 물과 불같이 어울리는 점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응계성은 소지산에게 이상하리만치 경쟁심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방취아는 머뭇거리다가 응계성의 독촉 어린 시선을 받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가만히 쳐다보기만 있었어요.”

응계성의 관자놀이에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매 사형이 쓰러졌는데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방취아는 그가 성질을 폭발할 것이 두려운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매 사형이 두기춘의 검에 옆구리를 잘리고 바닥에 쓰러지자 그제서야 한마디 하더군요. ‘이제 그만하지’, 그러자 웬일인지 두기춘이 검을 거두고 물러나더군요. 그러지 않았다면 매 사형은 정말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몰라요.”

응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하나 방취아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왜냐하면 그때 응계성이 움켜쥔 손에서 우두둑하는 뼈마디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몇 마디를 덧붙여야만 했다.

“응 사형도 알다시피 소 사형의 실력은 매 사형보다 훨씬 못하잖아요. 아마 소 사형이 덤볐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대신 두기춘이 소 사형의 말을 듣고 물러났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다행스럽긴 뭐가 다행스러워?”

응계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전부터 두기춘, 그 망할 놈이 다른 사람보다도 소지산과 친한 사이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래서 매 사형을 쓰러뜨려 놓고는 지산의 체면을 살려 준답시고 두기춘이 스스로 물러났단 말이지? 빌어먹을! 망할! 그게 지금 나보고 참으라고 하는 소리야?”

방취아는 찔끔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지산과 두기춘이 예전에 친한 사이였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흉금(胸襟)을 털어놓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고, 다른 사형제들에 비해 조금 더 가까웠을 뿐이다.

소지산은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사형제들 중의 누구와도 말 몇 마디 나누지 않았고, 두기춘 또한 좀처럼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 다들 꺼려하는 구석이 있었다.

당연히 두 사람은 다른 사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두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소지산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모르지만, 두기춘은 그래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소지산을 무척 고마워해서 종남파를 등지기 전만 해도 곧잘 소지산의 방에 놀러가고는 했었다.

이제 두기춘이 종남파의 숙적(宿敵)인 화산파에 몸을 담게 된 이상,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낙일방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방취아를 쳐다보았다.

“참, 올라올 때 보니까 산문이 박살났던데 그것도 두기춘이 한 짓이야?”

“아니에요. 아무리 두기춘이 본 파를 등졌다고 해도 그런 짓까지 하겠어요?”

“그럼 누가?”

“두기춘과 화산파의 고수들이 돌아간 다음 정신을 차린 매 사형이 참지 못하고 그들을 쫓아간다며 뛰어나갔어요. 소 사형이 산문 앞에서 간신히 매 사형을 붙잡았는데, 그때 매 사형이 화가 나서 마구 날뛰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낙일방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만에 하나 산문을 부순 것이 화산파의 고수들이었다면 상황이 무척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문파의 제자들이 산문을 부순다는 것은 일종의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만약 화산파와 싸움이 붙는다면 문하제자가 몇 명 남아 있지도 못하는 종남파의 처지로써 그들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그나마 남은 고수들 중 제일 강한 임영옥과 매상이 모두 싸울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낙일방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이번에는 방취아가 물었다.

“그런데 사저와 정 사형은 어디 갔어요? 왜 통 모습이 안 보여요?”

낙일방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 나왔다.

방취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말도 안 하고 한숨부터 내쉬고 그래요? 사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낙일방은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응계성을 돌아보았으나, 응계성은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낙일방은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어야만 했다.

“그게 말이지……”


초생달은 여인의 눈썹과 비교된다.

가느다란 듯하면서도 곱게 휘어진 그 모습이 마치 여인의 그린 듯한 눈썹과 흡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달도 그랬다. 진산월은 흐릿한 월광(月光)을 내뿜으며 어둠의 한편에 걸려 있는 초생달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희미한 초생달이 그에게 한 여인의 눈썹을 생각나게 했다.

“흐음……”

한동안 멍하니 초생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참고 참았다가 새어 나오는 무거운 한숨이었다. 지금 진산월의 심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지난 몇 달 간 그에게 닥친 일들은 그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힘겨운 시련이었다. 그는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아련한 달빛을 받자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그는 매상을 찾아갔으나, 매상을 만날 수 없었다. 매상의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는 문을 몇 번 두드리며 자신이 온 것을 알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결국 진산월은 굳게 닫힌 방문 앞을 반시진 가까이나 서성거린 후에 쓸쓸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매상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강한 쇠일수록 커다란 충격을 만나면 쉽게 부러지는 법이었다. 하나 그 부러짐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전보다 더욱 단단해질 수도 있는 법이다. 진산월은 매상을 위해서도, 또 종남파를 위해서도 매상이 지금의 좌절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정말 간절히 바랐다. 초생달을 닮은 눈썹을 가진 여인은 가급적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는 아직 이 년의 시간이 있다. 그 생각을 하자 진산월은 문득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그는 비록 술꾼은 아니었지만, 평소에도 술을 즐겨 마셨으며 남들이 술을 권해도 사양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혼자 술을 마신 적은 극히 드물었다. 혼자 마시는 술은 종종 사람을 처량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마시고 싶어졌다. 하늘에 걸려 있는 아스라한 달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깨우지 않고 혼자 주방에 가서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몇 병의 술과 함께 방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방문을 열자, 조금 전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방에 한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진산월은 그 사람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안의 탁자로 가서 술병과 안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달빛을 올려다보며 마시는 술은 과연 맛이 있었다. 진산월은 술 한 잔을 느릿느릿 비운 다음 방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 사람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환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진산월이 말없이 술잔을 내민 자세로 있자, 그 사람은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의 앞에 마주앉아서 술잔을 잡았다. 진산월이 술을 따르자 그 사람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그가 술을 따르고 진산월이 마셨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은 권커니 작커니 하며 몇 병의 술을 모두 마셨다. 그동안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술만 마실 뿐이었다. 순식간에 서너 병의 술이 그들 뱃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몇 점의 안주를 집어먹은 다음에야 진산월은 빈 술병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술이 모두 떨어졌군. 조금 더 할까?”

그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걸로 충분해.”

진산월은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네 주량(酒量)이 나보다 떨어지는 줄을 이제 알겠군. 아니면 그동안 내가 주량이 늘어난 건가?”

“그럴지도.”

그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도 더 이상 할말이 없는지 그에게서 창문 밖의 초생달로 시선을 돌렸다. 방안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진산월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마신 술은 여아홍(女兒紅)으로, 맛이 달콤하면서도 상당히 세어서 혼자 마시고 취하기에는 아주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 술은 임영옥이 제일 좋아하는 술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초생달을 올려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달을 보니 몇 전의 일이 생각나는군……”

그 사람은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도 상당히 취했는지 조금 전만 해도 번쩍거리던 눈빛이 흐릿해져 있었다.

“그날도 이 방에 앉아서 저렇게 가늘어진 달을 쳐다보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거야. 그러면서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지.”

“…!”

“대체 어떤 분들이었는지, 왜 나를 고아로 떠돌게 내버려두었는지 궁금했지. 물론 얼마쯤 원망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분들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혼자 속으로 위안했어. 그런데 일단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점점 더 그리움이 가슴에 차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결국 참다못해서 사부님께 고향에 갔다오겠다고 말했지.”

그 사람은 피식 웃었다.

“나도 기억이 나는군. 오 년 전인가? 한 달 정도 나갔다가 왔지?”

진산월도 따라 웃었다.

“그래, 용케도 기억하고 있군.”

“잊을 리 없지. 네가 없는 한 달 동안 내가 대사형 노릇을 하면서 지냈거든.”

“그랬군.”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부모님을 만났나? 아니, 그보다 고아라면서 고향이 어딘지는 알고 있었나?”

진산월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 리가 없지. 다만 아주 어렸을 적에 보계(寶鷄) 근처에서 살았던 기억이 희미하게 있어서 무작정 보계로 간 거야. 기억을 더듬어서 그 근방을 보름 정도 뒤졌더니 용케도 나를 알고 있는 노인을 만날 수 있었지.”

“운(運)이 좋았군.”

“정말 운이 좋았지. 그 노인에게서 내 이름의 유래도 전해 들었네. 내가 처음 발견된 곳이 달이 훤히 밝은 어느 날의 산기슭이었다네. 그래서 산월(山月)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하더군.”

그 사람은 처음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굉장한 내력이로군 그래. 그럼 그 노인이 자네를 키운 건가?’

진산월은 여전히 웃었으나, 그 미소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날 키운 사람은 그 노인의 친구였네. 태어난 지 몇 달 안된 나를 발견하고 삼 년 정도 키웠는데, 그분이 병사(病死)하는 바람에 나 혼자 남게 되었던 거라네. 그 뒤로 가뭄이 심해서 그 노인은 고향을 떠났다가 오 년 후에 돌아왔는데, 그때는 이미 내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하더군.”

“그럼 그때부터 혼자 고아(孤兒)로 떠돌게 된 건가?”

“그랬나 봐. 그 이전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다섯 살 때인가 구걸하다 개한테 물려서 한 달 정도 몹시 앓은 게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의 일이거든.”

“부모가 누구인지는 알았나?”

“그 노인에게서 들었지. 내가 버려진 산기슭 부근에 화전민(火田民)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 날 비적(匪賊) 떼에게 몽땅 몰살당했다고 하더군. 내 부모님도 그때 돌아가셨던 것 같네.”

“그랬군……”

그 사람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진산월의 얼굴에도 한순간이나마 착잡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진산월은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결국 천지간(天地間)에 나 혼자 남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사정을 알 수 있어서 기뻤네. 난 버려진 게 아니었던 거야. 버려진 아이라는 낙인(烙印)을 가슴에 찍고 평생을 살아갈 뻔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지. 가슴 한구석은 아프고 시렸지만, 마음만은 몹시 개운했네.”

“…”

진산월은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너는 어때? 너도 고아잖아.”

그 사람의 시선도 어느새 초생달에 가 있었다.
희미한 월광 아래 비친 그의 얼굴은 흉터투성이였다.
평상시에는 매섭고 날카로운 인상이었으나, 달빛 아래 비친 그의 모습은 왠지 고독하고 쓸쓸해 보였다.

“난 너하고는 달라. 열네 살 때까지는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 생활했지.”

이번에는 진산월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더군.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나보고 ‘제 어미를 죽이고 나온 살무사 같은 놈’이라며 욕을 하셨지. 그럴 때마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참을 만은 했어.”

멍하니 초생달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는 어떤 아련함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옆집 사는 사람이 내게 와서 그러더군. 시장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네 아버지가 심하게 다친 것 같으니 어서 가 보라고.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아버지는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지.”

“…!”

“아버지를 죽인 자는 뒷골목의 불량배였어. 그냥 술 먹고 시비가 붙자 홧김에 휘두른 거야. 그것뿐이야. 흔하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지.”

“…!”

“하지만 아버지의 유혈 낭자한 시체를 보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게 치밀어 오르더군. 지독한 노름꾼에 술주정뱅이였고 그다지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시체를 보자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길로 대장간에서 칼을 하나 사서는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지. 아버지를 죽인 불량배를 찾아서 말이야.”

진산월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량배를 찾았나?”

그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이미 살인을 저지르자마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네. 그 뒤로 두 번 다시 마을에서 그놈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사흘 동안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다 다른 불량배들에게 흠씬하게 두들겨 맞았지. 그때 나를 구해 준 사람이 바로 사부님이야.”

그 뒤의 일은 진산월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임장홍을 따라 종남산으로 와서 종남파의 제자가 되었다.
나이는 진산월과 동갑이었으나, 진산월보다 입문이 한 해 늦어서 종남파의 서열은 두 번째였다.
사람들은 그를 투검자라고 불렀고, 그의 본명은 매상이었다.
매상의 얼굴에는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씁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중에 당시의 불량배들을 찾아가서 혼쭐을 내 주었지만, 그래도 끝끝내 아버지를 죽인 놈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네. 아마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하겠지. 그래서인지 가끔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네. 웃긴 일이지. 나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사람인데,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진산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고아가 된 자신이 더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고 몇 년 전까지 함께 살았던 매상이 더 행복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 불행한 삶이었을지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행복했든 그렇지 않았든 중요한 것은 지내온 삶이 아니라 앞으로 남겨진 삶이라는 것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똑 같은 밤, 똑 같은 달빛 아래인데 어둠이 더 깊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돌연 매상이 진산월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참을 응시하고 있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너는…… 좀 변한 것 같아.”

진산월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그래. 어딘지 모르게 예전과는 틀려. 처음에는 얼굴에 흉터가 생겨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야. 전보다 더 듬직해지고 과묵해졌군. 이제 는 몸 전체에서 장문인다운 위엄이 흘러 나오는 것 같아.”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위엄이라니…… 내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넌 확실히 변했어.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산월은 아무 말 없이 계속 웃기만 했다.
매상은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돌연 지금까지와는 다른 음성으로 물었다.

“넌 계속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지? 군림천하를 향해서……”

“물론이지.”

“그럼 정말 이런 자들을 이끌고 군림천하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겁 많은 정해, 성질 급한 낙일방, 게다가 느림보 소지산과 술주정뱅이 취아, 불평만 많은 응계성… 정말 다른 문파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을 문제아들뿐이란 말이야.”

진산월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하나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해야겠지.”

매상의 흉터투성이 얼굴 사이에 박인 두 눈이 이글거리는 안광이 번뜩였다.

“나는 네가 아니란 말이야. 두기춘 같은 놈에게 두들겨 맞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이건 자존심 이전의 문제야. 난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아.”

그 말을 할 때의 매상의 얼굴에 떠오른 절실한 표정을 진산월은 잊을 수가 없었다.
매상은 잠깐 머뭇거리다 다시 말했다.

“그래서…… 떠나야겠어.”

진산월은 말없이 매상의 얼굴을 응시했다.
매상은 이를 악물며 한자 한자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번 일로 절실히 깨달았어. 종남의 무공으로는 도저히 화산파의 검법을 깨드릴 수가 없다는 걸. 두기춘, 그 녀석을 응징하기 위해서도 화산파를 능가하는 검법을 익혀야 해. 너는 이해해 주겠지?”

진산월은 매상의 굳어진 얼굴과 번뜩이는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가기로 결정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나?”

매상은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글쎄…… 그냥 떠나도 되었지만…… 너한테만은 말하고 싶었어. 너라면 이해해 줄지 알았지.”

진산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부담스러운지 매상은 앉은 자세를 두 번이나 바꾸었다.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어디로 떠나려나?”

“무당파(武當派).”

진산월은 피식 웃었다.

“너한테 말코도사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걸.”

매상도 따라 웃었으나, 그 미소는 이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겠지. 다행히 그쪽에서 요즘 속가제자를 모집하는 모양이야.”

“그들이 속가제자에게 진전(眞傳)을 가르쳐 줄까?”

“배워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의 최고수법을 배우고야 말 거야.”

진산월은 매상의 결연한 표정을 보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행운을 빈다.”

매상은 눈을 번뜩였다.

“그 말밖에 못하나?”

“그럼 무얼 바라지?”

“…!”

“내가 너를 말려 주기라도 바라는 거야?”

“…!”

“내가 말려서 네가 가지 않는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겠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을 거야.”

매상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나?”

“정말 내가 붙잡길 원하나?”

순간적으로 매상은 멈칫거렸다.
하나 이내 그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아니, 난 떠날 거야.”

그는 자신의 결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밤 나는 떠날 거야, 바로 지금.”

진산월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 가게.”

막 몸을 돌리려던 매상은 다시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힘겹게 물었다.

“다시 만나도 날 친구로 받아줄 텐가?”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내 친구가 아니야.”

매상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럼?”

“내 둘째 사제(師弟)지.”

매상의 두 눈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렇군.”

진산월은 다짐을 하듯 힘주어 말했다.

“무슨 일로도 그건 변할 수 없지.”

매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안녕…… 사형(師兄).”

진산월은 방문을 열고 사라지는 그의 등에 대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잘 가게, 사제.”

매상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날 밤 진산월은 밤새도록 혼자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군림천하의 꿈은 갈수록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사부의 유명(遺命)을 이룰 수 없다는 절망감이 깊은 고독과 함께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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