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6화
제62장. 설중기연(雪中奇緣)
찾는 자료는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 종남연기(終南年紀) >
진산월은 어른의 팔뚝 굵기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빠르게 넘기다 한군데서 멈췄다.
< 대종남(大終南) 십이대(十二代) 인물 연기.
기일(基一), 우일기.
섬서성 함양(咸陽) 태생.
십이 세에 입문.
사부는 유백석.
천하삼십육검과 옥뢰신장(玉雷神掌)에 능통.
선덕 오년(善德五年)에 십이대 장문인이 됨.
친우는 소림의 혜정(惠靜), 무당의 청풍(淸風), 금릉(金陵)의 남궁당도(南宮唐島)가
있다……
기이(基二), 조철한(曹鐵瀚).
하북성 형태(邢台) 태생.
십삼 세에 입문.
사부는 이추생(易秋生) – 후략(後略). >
< 종남연기>는 종남파의 역사와 문하제자들에 대해 기록한 책이었다.
그 내용은 아주 상세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종남파에 정식으로 입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적혀 있었다.
진산월은 십이대 제자의 연보를 훑다가 이내 한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기삼십삼(基三十三), 매종도. 산동성 제남 태생. 칠 세에 입문. 사부는 유백석. 천하삼십육검과 낙뢰구검(落雷九劍), 육합귀진신공에 두루 능함. 친우는 곤륜(崑崙) 종리표(鍾里飄), 화음(華陰) 용태린(龍太麟)…… >
진산월의 눈 안에 ‘화음’ 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화음현(華陰縣)은 화산(華山)의 지척에 있는 곳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종남연기>를 덮었다.
“아무래도 화산에 갔다와야 할 것 같군.”
“내일부터 당분간 자리를 비워야겠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진산월이 사형제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말하자 모든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방취아는 걱정에 가득 찬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장문사형, 어디를 가시려고요?”
“별일 아니니 걱정 마라. 멀리 않은 곳이니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방취아는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표정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방취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진산월의 출행(出行)에 무언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는 모습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상이 떠난 지금 진산월마저 자리에 없다면 누가 종남파를 이끌어 가겠는가?
평소에는 누구보다 쾌활하고 낙천적이었던 낙일방도 표정이 침통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이 옆에 없다는 생각만 해도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지고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래도 낙일방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돌아오시면 제게 장괘장권구식을 다시 한 번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자세도 좀 봐주시구요.”
“그러지.”
“이제부터 권격(拳擊)을 본격적으로 연마해 볼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제게는 검보다는 그게 더 어울릴 것 같거든요.”
“잘 생각했다.”
낙일방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계면쩍게 웃었다.
“다음에 또 중원에 나갈 일이 있으면 그때는 이번처럼 사형들한테 짐만 되는 일이 없도록 할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도 부지런히 무공을 수련해야지요.”
진산월은 대견스러운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너는 권법에는 재질이 있으니 게을리하지만 않는다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게다.”
방취아가 자신도 질 수 없다는 듯 재잘거렸다.
“전 신법에 더 주력하겠어요. 이백 년 전에 여인의 몸으로 천하를 누볐던 비선 조심향 사조처럼 되는 게 제 꿈이거든요.”
낙일방이 킬킬거렸다.
“사매는 도망치는 데 천부적인 재질이 있으니 노력하면 꼭 그렇게 될 거야. 열심히 해봐.”
방취아가 쌍심지를 곤두세웠다.
“뭐라고요? 내가 정말 화가 나서 덤비면 낙 사형은 내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그 잘난 얼굴이 퉁퉁 부어서 쓰러지고 말 거예요.”
낙일방은 ‘설마 그럴 리가……’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방취아의 몸은 정말 빨라서 그녀가 진짜로 정색을 하고 덤비면 당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에 맞아 보았자 별로 아프지도 않겠지만, 지법(指法)만큼은 상당히 날카로워서 자칫하다간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진산월은 다시 응계성을 돌아보았다.
“계성, 너는 부서진 산문(山門)을 보수해라. 명색이 문파의 얼굴과도 같은 곳인데 그렇게 망가져 있으니 보기에 좋지 않더구나.”
응계성은 못마땅한 얼굴로 소지산을 가리켰다.
“그런 일은 지산이 더 잘하지 않겠습니까?”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산은 따로 할 일이 있다. 오늘 산 아래 내려가서 목수(木手)를 불러 산문을 손질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려간 김에 조암령의 주루들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도 보고 오도록.”
응계성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되도록이면 하루라도 빨리 돌아오세요. 문파 꼴이 이런데 장문인이 오래 자리를 비워 놓고 있으면 분위기가 더 흉흉해지니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이어 진산월의 시선은 소지산에게로 향했다.
“지산, 너는 중산에게 본 파의 기초적인 무공을 가르쳐 주도록 해라. 명색이 종남파의 제자이면서 본 파의 무공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니 말이다.”
소지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파의 장문인을 대하는 태도로는 형편없는 것이었으나 진산월은 별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우선은 유운검법의 전반부와 유운비수를 가르쳐 주어라. 중산은 몸이 빠르니 그 무공을 익히면 빠른 시일 내에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요.”
진산월은 마지막으로 동중산을 불렀다.
“중산.”
“예.”
“원래는 내가 직접 너를 가르치려 했다만 일이 생겨서 우선 지산에게 너를 맡겼다. 지산은 과묵하고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니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해라.”
동중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본 파의 무공 중 상당수는 실전되어 네가 기대한 만큼의 놀라운 절학(絶學)은 없을 것이다. 하나 너의 풍부한 강호 경험을 살린다면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동중산은 진산월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너무 뛰어난 절학은 오히려 저같이 몸이 굳은 나이에는 익히기 어렵습니다. 장문인께서 지시하신 대로 제게 적합한 무공만을 집중적으로 습득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산월은 사실 동중산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동중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의 앞가림은 스스로 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아직 나이 어리고 주변의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낙일방과 방취아가 염려되었다. 진산월도 자리를 비우는 마당에 그들이 실의(失意)에 빠져 방황이라도 하게 된다면 기강을 바로 세우기가 상당히 힘들어질 것이다. 밤이 깊어져 하나둘씩 자기의 숙소로 돌아갈 때 진산월은 소지산을 은밀히 불렀다.
“잠깐 나와 이야기 좀 하자.”
소지산은 나가려다 말고 진산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앉아라.”
소지산이 자리에 앉자 진산월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소지산은 항상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고, 입고 있는 의복도 추레하기 그지없었으나 외모는 그래도 단정한 편이었다.
단지 눈이 작고 가늘어서 산발한 머리카락에 가려 있으면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자신의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그의 이런 성격은 무공에도 잘 나타나 있어, 그가 펼치는 무공들은 하나같이 일체의 허식(虛飾)을 배제한 지극히 실용적이고 간결한 초식들뿐이었다.
임장홍은 살아생전에 소지산이 남과 비무(比武)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쉰 적이 있었다.
“저 녀석은 적어도 남과 싸우면서 손해는 안 보겠군. 하지만 저래서야 어디 삭막해서 싸울 맛이 나겠나?”
확실히 소지산의 무공은 어딘지 모르게 명문정파다운 멋이 없었고,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다행히 소지산은 누가 뭐라고 비평을 하든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진산월은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소지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이 부담스러워서라도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할 텐데 소지산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진산월이 먼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진산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에게만 솔직히 말하겠다. 사실 이번에 가는 길이 그리 먼 곳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의외로 시간이 걸릴지도 모는 일이다.”
“…!”
“그래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당분간 네가 본 파를 이끌어 주어야 한다.”
소지산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잠긴 듯 보였던 작은 눈에서 안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진산월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지금 잠시나마 종남파를 그에게 맡기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에 포함된 막중한 의무와 책임감을 소지산이 모를 리 없었다.
진산월이 낙일방 등을 데리고 소림사로 강호행을 떠날 때만 해도 종남파에는 매상이 있었다.
때문에 소지산은 매상을 보조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나 이제 매상마저 떠난 지금, 한 문파를 책임지는 일은 전적으로 그가 해내야만 했다.
진산월 또한 소지산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워 주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하나 소지산 외에 달리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기겠는가?
그런 점에서 진산월은 내심 소지산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진산월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지만, 일방과 취아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걱정이 된다. 내가 없더라도 그들이 혹시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기 바란다.”
소지산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중산은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잔꾀가 많아서 유용한 사람이다. 만일 어려운 일이 닥치면 주저하지 말고 그에게 조언을 구하도록 해라.”
“예.”
진산월은 응계성에 대해서는 굳이 소지산에게 말하지 않았다. 응계성이 소지산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소지산이 응계성을 잘 처리해 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지산은 그런 면에서는 의외로 세심한 점이 있었다. 진산월은 다시 소지산의 얼굴을 빤히 주시하더니 돌연 불쑥 물었다.
“만약 문파에 외적(外敵)이 침입하거나 생사존망(生死存亡)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소지산은 뜻밖의 물음에 놀란 듯 지금까지 무표정했던 얼굴에 한 줄기 당혹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진산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임시라 할지라도 내가 없는 동안 네가 문파의 주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강적이 쳐들어왔을 때 너는 끝까지 문파를 사수(死守)하겠느냐, 아니면 후일을 기약하고 물러서서 문파를 상대에게 넘겨주겠느냐?”
소지산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정말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소지산이 아닌 누구라 할지라도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파를 지키자니 결국은 몰살(沒殺)을 당하게 될 테고, 그렇다고 문파를 버리고 도망친다는 것은 사문(師門)에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아예 문파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진산월은 그 점에 대한 명확한 결정을 내려 주었다.
“문파를 보중하거나 제자를 살려야 하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면, 제자를 살려라.”
소지산은 번쩍 고개를 쳐들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문파를 버리란 말씀이십니까?”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
“명심해라. 무너진 문파는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사람은 죽으면 결코 되살아니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문파는 얼마든지 재건(再建)할 수 있다.”
소지산의 어깨가 한차례 가늘게 떨렸다. 항상 표정의 변화가 없고 입이 무거워서 돌부처라 불리는 소지산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격동된 모습이었다. 소지산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자 한자 분명한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너를 믿는다.”
후일을 생각한다면 이때 진산월은 무언가 예감을 느꼈던 것 같았다. 진산월 자신도 이 당시에는 며칠 간 문파를 비울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 어디에서는 머지 않아 다가올 거대한 그림자를 감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하나 그런 진산월조차도 자신이 다시 소지산을 만나기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섬서성의 겨울은 차가운 한풍(寒風)과 매서운 눈보라가 수시로 휘몰아치는 혹독한 계절이었다. 오늘은 유달리 바람이 매서웠다. 그래서 한낮인데도 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간혹 보이는 사람도 하나같이 두툼한 털옷을 목까지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황급히 사라지기 일쑤였다. 진산월은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하고 생각했다. 화음현은 종남파의 오랜 숙적(宿敵)인 화산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비록 털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피풍의(避風衣)로 온몸을 둘렀다고는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종남파의 장문인이 화산파의 본거지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 알려지면 한바탕 소동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추위는 진산월의 행동을 도와주는 바람막이가 되었다. 진산월이 화음현으로 온 것은 물론 매종도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짐작대로 매종도가 화산에 몸을 숨겼다면 아무래도 화음현에 있는 자신의 친우를 찾아갔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세인들의 이목을 꺼려 자주 찾지는 않았겠지만, 이왕이면 화음현으로 오기 쉬운 장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진산월은 역(逆)으로 화음현 쪽에서 화산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다.
화산파는 화산의 서쪽에 있는 연화봉(蓮花峯)에 있고, 화음현은 그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언뜻 가까운 것 같았으나 그 중간에는 제법 커다란 봉우리가 여러 개 가로놓여 있어서 직접 지나가는 길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화산파의 고수들은 화음현의 남쪽에 나 있는 관도(官道)를 따라 조금 돌아서 옥천원(玉泉院)과 오리관(五里關)을 통해 화산을 오르는 길을 주로 이용했다.
매종도가 그쪽으로 갔을 리는 없으니 진산월은 화음현의 북쪽을 통해 화산으로 오르는 길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매종도가 화산에 은거를 한다고 해도 화산파의 고수들과 만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산파와 종남파는 껄끄러운 관계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아마도 두 문파가 지리적으로 붙어 있는 데다, 문파의 기풍이나 무공의 연원이 서로 유사한 데가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예로부터 고도(古都)이며 관중(關中)의 중심인 서안(西安) 지역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일이 잦다 보니 어느사이엔가 두 문파는 서로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진산월은 만약 매종도가 화산에 은거할 계획이었다면 화음현에서 멀지 않고 화산파가 있는 연화봉과도 거리가 떨어진 화산의 북동쪽 계곡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화산의 제일봉인 선인봉(仙人峯)이 위치해 있고 계곡이 깊고 천길 낭떠리지가 도처에 있어 화산에서도 가장 험준한 지역이었다. 화산의 다른 지역처럼 볼 만한 명승지가 있지도 않았고, 도관(道觀)이나 암자도 별로 없었다. 그야말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진산월은 화음현에서도 가장 외진 곳의 어느 허름한 객잔에 여장(旅裝)을 풀었다. 여장이라고 해야 두툼한 솜옷 몇 벌과 매서운 한풍을 막을 수 있는 기름 먹인 피풍의 몇 개,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털모자와 눈길을 헤치기 위한 지팡이가 전부였다. 종남산을 나올 때 준비를 많이 해오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쓸데없이 이것저것을 챙김으로써 종남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불안케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가급적 그들에게 근처의 멀지 않은 곳에 잠시 일상적인 일로 다녀오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 일단 화음현까지 온 이상 보다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 화산의 겨울은 종남산보다 더욱 혹독하다고 알려져 있엇다. 게다가 북동쪽 계곡은 노련한 사냥꾼들도 가기를 꺼려하는 험준한 지역이었다. 진산월은 객잔에서 가까운 잡화점에 가서 겨울 산행(山行)에 꼭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했다. 가죽신발도 넉넉히 챙겼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튼튼한 밧줄과 임시로 머무를 수 있는 조그만 천막, 추위를 녹일 술과 건량(乾糧)도 빠짐없이 준비했다. 그런 다음 사흘 정도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체력을 비축했다. 일단 산에 들어가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객잔에 머무른 지 사흘째 되는 날, 지독하던 한파(寒波)가 한풀 꺾이며 모처럼 맑은 햇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산월은 아침 일찍 행낭을 꾸려 객잔을 벗어났다. 물론 떠나기 전에 타고 온 말은 점소이에게 넉넉히 돈을 주어 한 달 정도는 먹이를 주고 보살펴 주도록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음현에서 화산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진산월은 그중에서도 사람의 발길이 가장 드문 북동쪽 길을 선택했다. 한 시진쯤 걷자 멀리 보였던 화산의 웅장한 모습이 코앞에 나타났다.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 보이는 화산의 산세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위엄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종남의 산세가 보는 사람을 포근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과는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진산월은 새삼 화산의 산세가 종남산에 비해 한층 험하고 기기묘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산에 유달리 절경(絶景)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화산에 가까워 올수록 기온이 점차 떨어지더니 화산의 경내에 들어섰을 때에는 다시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쾌청하고 맑았건만 코와 입에서는 새하얀 김이 뿜어 나왔고,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칼날처럼 예리하고 매서워졌다. 진산월은 험준한 화산의 봉우리를 잠시 둘러보았다.
하얀 눈에 덮인 채 병풍처럼 끝없이 늘어서 있는 화산의 위용은 보는 이를 왜소하게 만들기에 족한 것이었다. 저 겹겹이 쳐 있는 봉우리와 계곡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한 사람의 행적을 찾기 위해 막연히 뒤지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한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더구나 그 사람은 이미 이백 년 전의 인물이 아닌가? 설사 그가 이 화산의 어느 구석에 은거했다 할지라도 지금은 백골(白骨)조차 제대로 남아 있을지 의문이었다.
진산월은 다시 한 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하나 그렇다고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 일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구원의 등불인 셈이다. 진산월은 하나씩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우선은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오르는 것에 신경을 집중시키기로 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봉우리를 절반도 채 오르기 전에 눈 덮인 길이 나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주위는 온통 눈밭으로 변해 있었다. 진산월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길을 올라갔다. 첫 번째 봉우리를 올라간 것은 산에 들어선 지 두 시진 만의 일이었다. 그곳에서부터 본격적인 탐색이 시작되었다. 첫날과 둘째 날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몸은 여기저기 불협화음으 일으켜 냈고, 날씨는 점차로 차가워져서 눈이 오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주위가 대부분 얼어 있어서 미끄러지기 십상이라는 것이 제일 불안했다. 가파른 벼랑이나 커다란 바위 위를 지나갈 때면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도와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뜻밖의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녁 때가 되면 동굴 속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상당히 춥긴 했으나 그래도 몇 차례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고 나면 충분히 견딜만 했다. 내공이 높아진 것이 이럴 때는 무척 도움이 되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진산월은 처음으로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눈 위에 선명히 찍힌 발자국들이 보였던 것이다. 진산월은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것이 사냥꾼의 것이라고 추측했다. 발자국의 깊이가 일정치 않은 것으로 보아 무공을 익힌 사람은 아니었고, 발자국이 머물러 있는 곳이 대부분 덫을 설치해 놓은 장소인 것으로 보아 그의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다.
발자국은 북서쪽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진산월은 발자국을 따라갈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공연히 사람의 눈에 뜨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화산의 구석진 곳을 돌아다니는 일개 사냥꾼이 종남파의 장문인 얼굴을 알아볼 리 없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상책(上策)이었다.
덕분에 사냥꾼의 발자국을 피해 상당히 먼길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하나 진산월은 자신의 발자국도 걸어온 길을 따라 남게 된다는 것을 깜박 잊고 말았다.
사냥꾼의 발자국이 나 있지 않은 곳으로 다니려니 아무래도 험난하고 가파른 능선만을 지나가야만 했다.
날이 점차로 추워져서 이제는 털옷고 피풍의만으로 추위를 막기가 힘들어졌다.
진산월은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한차례 운기행공을 하여 추위를 몰아내야만 했다.
이럴 때 새삼 태을신공을 익혀 둔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태을신공은 현청건강기와 같이 날카롭고 매서운 위력은 없었으나, 몸을 보호하고 심신(心身)을 가라앉히는 것에는 아주 특별한 효능이 있었다.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으나 차라리 심법(心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몰랐다.
요즘 들어와서 부적 진산월은 자신의 태을신공이 가파르게 상승되고 있음을 느꼈다.
몸이 회복된 이후 운기행공을 할 때마다 태을신공의 경지가 새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일단 태을신공을 운공하면 머리 속이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맑아지고, 전신에 따뜻한 기운이 넘쳐 아무리 힘을 써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진산월의 내공이 급속도로 증가한 탓도 있었지만, 종남파에 입문한 후 다른 내공을 익히지 않고 꾸준히 태을신공 한 가지만을 연마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몸 속을 흐르는 진기(眞氣)가 순일(純一)해져서 한층 수월하게 단련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몇 년만 꾸준히 수련하다면 태을신공을 궁극까지 연마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다른 문파의 여타 신공들처럼 천하(天下)를 진동시키는 경인(驚人)할 위력은 없으니 절정에 도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종남오선이 실종된 이후 종남파에 남아 있는 무공들은 대개 태을신공처럼 별다른 위력을 지니지 못한 것들뿐이었다.
정말 무섭고 천하를 울릴 만한 절학들은 모두 그들과 함께 실종되어 버렸다.
그것은 종남파로써는 정말 너무도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이 종남파를 떠나기 전에 조금나 더 신중했더라면……
진산월은 잠시 착잡한 생각이 들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하나 이내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추슬렸다.
종남파의 과거는 어차피 지나간 일이었다.
지금 아무리 그것을 후회하고 가슴 아파해도 과거의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현재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흔적을 쫓아 단절(斷切)되었던 과거와의 끈을 다시 찾는 것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진산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산길을 오르기 데 신경을 기울였다.
그는 동굴이나 벼랑보다는 계곡에 더 관심을 집중시켰다.
매종도의 평소 성품으로 보아 아무리 상심(傷心)에 잠겨 은거했다고 해도 이끼가 끼고 눅눅한 동굴 같은 곳에 머무를 리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인적이 없으면서도 햇볕이 잘 들고, 마음껏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으며, 경치가 뛰어난 작고 은밀한 계곡에 몸을 숨겼을 것이다.
그것이 고학(孤鶴)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태을검선 매종도의 방식일 것이다.
그래서 진산월도 그런 계곡을 찾는 데 주력했다.
하나 그런 계곡이 쉽게 눈에 뜨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진산월은 화산의 지리에 너무 어두워서 지도를 보지 않으면 어디가 어디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분간이 잘되었던 봉우리들도 막상 산속으로 들어오니 구별이 거의 되지 않아서 그냥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지금도 진산월은 자신이 있는 곳이 선인봉인지 북봉(北峯)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어느 이름 모를 봉우리인지도 몰랐다.
저녁때가 되자 걱정하던 대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주위는 온통 눈보라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진산월은 잠시 몸을 피할 곳을 찾다가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고 그 바위 밑으로 다가갔다.
바위 밑에는 사람 두세 명이 누울 만한 공간이 있어서 내리는 눈은 그럭저럭 피할 수 있었다.
하나 뼛골이 시릴 만큼 차가운 추위는 막아 주지 못했다.
진산월은 바닥이 젖지 않은 곳을 골라 정좌(正坐)한 다음 운기행공을 했다.
몇 차례 진기를 순환시키자 전신에 더운 김이 피어오르며 한결 추위가 가셨다.
진산월은 건량을 꺼내 잘게 찢어 먹었다.
가끔 술도 한 모금씩 했다.
건량은 충분했지만 술은 단 두 병만 있기 때문에 아껴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해가 떨어지자 기온은 급강하하여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몸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추위를 잊기 위해 다시 운공을 해야만 했다.
눈은 근 오일 동안 계속 내렸다.
그동안 진산월은 바위 밑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배가 고프면 건량을 먹고, 목이 마르면 근처에 쌓여 있는 눈을 먹었으며, 그외의 시간은 운공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진산월은 아침부터 운공에 들어갔다.
평소에는 진기를 일주천(一週天)한 다음 태을신공의 구결을 암송하면 일각(一刻)이면 충분했는데, 그날따라 진기의 흐름이 원활해지면서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때 갑자기 영대(靈臺)가 은은히 진동하면서 전신에서 기이한 열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계속적으로 태을신공의 구결을 암송하다가 천지(天地)가 자신이 되고 자신이 천지가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망각하고 오직 천지와 자신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허공을 이리저리 유영(遊泳)하는 것 같았다.
태을신공의 구결 하나하나가 뇌리에 너무도 선명히 떠올랐다.
그동안 막연히 외우고만 있던 구결 속의 의미들이 하나둘씩 개우쳐지더니 종내에는 모든 구결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순간, 단전(丹田)에서 한 줄기 힘이 솟구쳐 올라 경략(經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뜻밖의 일에 놀랐을 텐데 지금은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단전에서 솟구친 힘은 부드러우면서도 끊임이 없었다.
그 힘은 임맥(任脈)을 따라 계속 올라가더니 결국 하나의 관문(關門)과 마주쳤다.
그 힘이 부드럽게 관문을 밀었으나, 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진산월은 좀더 힘을 주어 보았다.
관자놀이 부근에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그것이 자신이 실제로 느끼는 통증인지 아니면 그냥 막연히 통증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진산월은 전신에 퍼져 있는 기운을 단전으로 모았다가 일시에 쏟아내었다.
쿠르르……
소리가 들릴 리 없을 텐데도 그는 거대한 강물이 요동을 치며 지나가는 굉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강물은 그의 전신을 휘돌아 순식간에 임맥을 타고 흘러 관문으로 부딪쳐 갔다.
콰앙!
마치 뇌성벽력이 귓전에 울리는 충격이 느껴졌다.
그토록 단단하게 막혀 있던 관문이 뚫리며 조금 전만 해도 격랑을 치던 거대한 힘은 다시 처음의 잔잔한 흐름이 되어 그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진산월은 그 흐름에 몸을 맡기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서는 한 줄기 기이한 신광(神光)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세찬 격동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돌파했다……’
조금 전에 그는 그야말로 좀처럼 보기 힘든 기연(奇緣)을 얻게 되었다.
추위를 피하느라 며칠 동안의 거듭된 연공을 한 끝에 그의 태을신공은 마침내 정점(頂點)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을신공이 절정에 이른 순간, 그의 단전에서 갑자기 한 줄기 강력한 힘이 솟구쳐 올랐다.
그 힘은 거대한 노도가 되어 그의 경맥 속을 치달려 가더니 끝내 임독양맥(任督兩脈)을 타통해 버린 것이다.
원래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는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이 서로 통해 있었다.
그러다 점차로 성장해 가면서 나쁜 기운이 몸에 쌓여 임맥과 독맥이 막히게 되는 것이다.
일단 막힌 임독양맥은 인력(人力)으로 뚫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을 뚫기가 생사지경(生死之境)에 처하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고 하여 생사현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나 일단 임독양맥을 뚫게 되면 그 효능은 가히 무궁무진한 것이었다.
더구나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임장홍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만년삼정을 얻어 그 힘으로 진산월의 임독양맥을 타통시키려 했겠는가?
그런데 만년삼정은 엉뚱한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영원히 뚫지 못할 줄 알았던 임독양맥은 너무도 뜻밖의 순간에 뚫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앙천지독과 부시독으로 벌모세수된 진산월의 몸과, 무림제일신의 노방이 그의 몸에 투입한 각종 약물(藥物)의 효능, 그리고 눈 덮인 설산(雪山)에서 오직 일심전력으로 운공에 몰입하여 완성된 태을신공이 결합하여 일구어 낸 절세의 기연이었다.
진산월은 쉽게 감상(感傷)에 빠지거나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한 줄기 감회가 솟구침을 어쩔 수 없었다.
사부가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사부님이 지하에서나마 돌보아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진산월은 새삼 임장홍이 그리워졌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이 앉은 반경 삼 장 이내에는 눈 한점 볼 수 없이 깨끗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온 기운에 눈이 모두 녹아 버린 것이다.
만약 진산월이 익힌 내공이 양강(陽剛)의 것이었다면 단순히 눈이 녹은 것에 그치지 않고 주위가 온통 불에 탄 듯이 검게 그을렸을 것이다.
반대로 음유(陰柔)한 내공이었다면 오히려 더욱 꽁꽁 얼어붙었을지도 몰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익힌 태을신공은 양강도 음유도 아닌 것이었기에 단순히 눈이 녹은 정도로만 그치고 말았다.
몸을 일으키자 전신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뿐만 아니라 전신의 모공(毛孔)이 모두 열려서 보지 않아도 주위의 기척을 훤하게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전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던 아주 미세한 사물까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토록 매서웠던 추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신기한 생각이 들어 근처의 바위에 붙어 있는 고드름을 만져 보았다.
시원한 감각은 있지만 예전같이 손이 시린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한서불침지신(寒暑不侵之身)의 경지인가?’
진산월은 새삼 자신이 임독양맥을 타통하여 무공의 새로운 경지에 올라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빙산(氷山)의 일각(一角)에 불과했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이상 그는 아무리 내공을 써도 마르지 않을 것이며, 오감(五感)이 극대화되어 불문(佛門)에서 말하는 천이통(天耳通)이나 천안통(天眼通) 같은 절학을 익히지 않아도 상상을 초월하는 청력과 시력을 얻게 되었다.
앞으로 그가 임독양맥이 타통된 효과를 어떻게 극대화하여 자신의 무공을 발전시킬지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피나는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