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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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7권 검정중원(劍定中原)편 : 8화


제64장. 태을선거(太乙仙居)

자욱한 안개가 사방을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한겨울에 깊은 산중(山中)의 안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으나, 지금 진산월의 앞에 펼쳐진 안개는 평범한 안개가 아니었다.

사냥꾼의 무덤…… 장승표가 알려준 길을 따라 세 개의 봉우리와 두 개의 계곡, 하나의 하천을 넘어 도착한 곳은 깊은 분지(盆地)였다. 분지 주위는 온통 기암괴석뿐이었고, 초목(草木)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분지에 들어서자마자 짙은 안개가 앞을 가리고 있어 괴이스러운 느낌이 더욱 강했다. 이런 지독한 안개는 평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진산월도 이곳의 지형이 움푹 파인 분지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긴 안개로만 생각했다. 하나 벌써 한 시진째 안개 속을 헤매고 나니 눈앞의 안개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안개가 짙어도 임독양맥을 타통한 그의 시력이면 십 장 밖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안력을 돋구어 보아도 이삼 장밖에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 시진 가까이나 걸었음에도 주위의 풍경이 바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진산월은 이 안개가 혹시 인공적인 절진(絶陣)에 의해 형성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토록 깊은 산중에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진법이 펼쳐져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길을 제대로 찾아왔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진산월은 마음속의 흥분을 억누르며 신경을 집중해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머지않은 곳에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희미하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거의 일 장에 달하는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바위를 본 진산월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바위 한쪽에 자신의 표시해 놓은 흔적이 보였다. 이 바위는 그가 반 시진 전에 안개 속을 헤맬 때 보았던 바로 그 바위였던 것이다.

이제 자신이 진법(陣法)에 빠진 것이 분명해졌다. 주위에 초목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 널려진 기암괴석을 이용한 진법일 확률이 높았다.

진산월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기암괴석의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시야에 보이는 돌의 숫자는 모두 열두 개였다. 돌들의 위치를 잘 기억한 다음 눈을 감고 앞으로 백여 걸음을 걸어나갔다.

다시 눈을 뜨고 주위의 바위들을 세어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열두 개였다. 위치 또한 조금 전의 돌들과 거의 비슷했다. 진산월은 세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결과는 똑같았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든 열두 개의 바위가 시야에 보였다.

“열두 개의 돌…… 십이열석진(十二列石陣)? 그렇다고 하기에는 눈앞의 자욱한 안개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닥 십이열석진으로는 이렇게 넓은 지역에 진세를 펼칠 수 없다.”

진산월은 자신이 아는 진법에 대한 지식을 모두 떠올려 보았다. 하나 그중 어느 것도 지금 자신이 갇혀 있는 진법과 비슷한 것이 없었다.

진산월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자신의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산 아래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져온 밧줄이 만져졌다.

진산월은 밧줄을 풀어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돌에 한쪽을 묶었다. 그런 다음 그 옆의 돌까지 밧줄을 연결시켰다. 다시 그 돌에서 다음 돌까지 밧줄을 연결시켰다.

이런 식으로 여섯 개의 돌을 연결하자 밧줄이 모두 바닥이 났다. 진산월은 자신이 가져온 밧줄의 길이가 삼십 장 정도임을 기억해 냈다. 만약 돌과 돌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다면 이 진법의 기본 단위인 열두 개의 돌이 펼쳐진 넓이는 육십 장쯤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열두 개 단위의 돌들이 얼마나 많이 펼쳐져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다시 근처의 돌로 가서 돌마다 일일이 다른 표식을 했다. 돌 하나하나에 <일(一), 이(二), 삼(三)……> 하는 식으로 숫자를 적은 것이다. 주변에 있는 열두 개의 돌에 모두 숫자를 적은 다음 제일 첫 번째 돌에 밧줄을 묶어 두고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눈앞에 새로운 돌들이 나타나면 그때마다 숫자를 이어서 표시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돌의 숫자가 백(百) 단위를 넘어갈 때 진산월의 앞에 다시 하나의 바위가 나타났다. 진산월은 무심코 그 바위에 숫자를 적으려다 눈을 번쩍 떴다.

그 바위에 묶어 놓은 밧줄을 발견한 것이다. 그 밧줄은 자신이 돌의 숫자를 세면서 제일 처음 묶었던 것이었다. 진산월은 다시 한 번 돌의 숫자를 확인했다.

모든 돌의 수는 백여덟 개였다. 열두 개씩의 돌무리가 모두 아홉 개가 있는 것이다.

막상 돌의 숫자를 확인하자 진산월은 다시 한 번 진법을 만든 사람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두 개의 돌무리 하나가 육십 장 넓이라면 이 절진이 펼쳐진 전체의 넓이는 오백 장쯤 되었다.

오백 장이나 되는 넓은 절진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하나하나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 백여덟 개의 기암괴석들을 생각하면 숙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수의 사냥꾼들이 이곳에 들어왔다가 결국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아마도 지체 쓰러질 때까지 이 넓은 석진(石陣) 속을 헤매다가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진산월은 돌무리의 사이사이에 몇 구의 백골(白骨)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공간에 짙은 안개와 비석(碑石)처럼 서 있는 돌무리와 백골들만이 뒹굴고 있는 광경을 보자

‘사냥꾼의 무덤’ 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자신이 측량한 절진의 배치도를 그려보았다. 열두 개의 암석군(巖石群)이 아홉 개의 무리를 이루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돌간의 간격은 대략 사 장 정도이며, 돌 하나의 크기는 일 장이나 되었다. 아홉이라면 가장 먼저 구궁(九宮)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열두 개의 돌무리가 구궁(九宮)의 순(順)으로 연환(連環)되어 있다……’

진산월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으나 이 진(陣)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파해법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구궁의 순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아홉 개가 배치된 거지? 아홉? 삼(三)과 삼(三)을 곱한 건가?’

언뜻 진산월의 뇌리에 불똥 같은 것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래, 아홉이라고 반드시 구궁의 변화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삼재(三才)가 세 번 연환되면 그것도 구변(九變)이니까. 그렇다면 열두 개의 돌무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단 튀어진 불똥은 작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홉이 삼재의 곱이라면 열둘이란 숫자도 다른 무엇의 곱이 아닐까? 삼(三)과 사(四)? 아니면 이(二)와 육(六)? 아니면……’

진산월은 갑자기 자신의 무릎을 쳤다.

‘그래, 곱이 아니라 나누기다. 한쪽이 곱이므로 다른 한쪽은 나누기가 되어야 정상이지. 그렇다면 이십사(二十四)를 둘로 나눈 것일까? 삼십육(三十六)을 셋으로……’

그의 머리 속에서 불꽃이 거대한 폭죽(爆竹)이 되어 터졌다.

‘삼(三)! 핵심은 삼이다. 구가 삼의 곱이므로, 당연히 십이(十二)도 삼으로 나누어져 생긴 숫자다. 그렇다면 삼십육화(三十六化)가 삼으로 나누어져서 십이가 된 것일까? 삼십육화? 삼십육방(三十六方)? 삼재……?’

진산월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한 가지 엄청난 생각이 그의 뇌리를 강타한 것이다.

  • 인체에는 모두 서른여섯 가지의 방위(方位)가 있다. 이 방위를 일순간에 점(點)할 수 있으면 누구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한 번에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서른여섯 방위를 세 개로 나누어 한 번에 열두 방위를 노린다. 각각의 방위를 다시 세 방향으로 쪼갠 다음 그 방향마다 세 가지 변화를 일으켜 공격하는 것이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이 최정화, 천하무궁(天河無窮)인 것이다.

사부인 임장홍에게서 들은 음성이 귓전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이다. 종남파 무공의 절정인 천하삼십육검의 최절초인 천하무궁은 열두 개의 방위를 아홉 개의 변화를 일으켜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놀랍게도 진산월의 눈앞에 펼쳐진 오백여 장에 걸쳐 있는 열석대진(列石大陣)은 종남파 무공의 정화인 천하무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말못할 감회와 격동에 가득 차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머리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장하민이 이십 년 동안이나 간절히 찾아 헤맸고, 자신도 문파의 존망(存亡)을 걸고 찾던 별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장하민의 별! 모든 종남파 고수들의 마음속의 별!

그 별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 종남파 무공의 형상을 빌어 진산월의 눈앞에 그 생생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진산월이 다시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반각(半刻) 가까이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바닥에서 일어선 진산월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개 속을 뚫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같은 무의미한 걸음이 아니었다. 이미 진법의 모든 변화를 파악하고 그 해답을 찾은 다음 최후의 목적지를 향하는 그런 걸음이었다. 삽시간에 진산월의 몸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개 너머 있을 그 무언가를 향해……


죽림(竹林)은 울창했다. 안개 속을 뚫고 나온 진산월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푸른 대나무숲이었다. 밖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엄동설한인데, 이곳은 따스한 바람이 불고 수림이 우거져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푸르기만 할 뿐이어서 과연 자신이 화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와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진산월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죽림 안으로 들어갔다. 청량한 대나무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오자 지금까지의 모든 번민과 시름이 사라지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죽림을 지나자 작은 뜰이 나왔고, 뜰 너머에 한 채의 모옥(茅屋)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모옥의 앞으로 다가와서 의관(衣冠)을 단정히 한 다음 공손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종남의 이십일대 장문인 진산월이 고인(古人)의 선거(仙居)를 찾아왔으니 무례함을 용서하기 바랍니다.”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진산월은 이런 식으로 영면(永眠)에 들어간 선배고수에게 자신의 방문을 알린 것이다. 진산월은 모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대례(大禮)를 올렸다. 모옥의 입구에 하나의 조그마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현판은 모서리가 거의 삭았고, 중앙에 써 있는 글씨는 회색으로 변해서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나 그 안에 써 있는 글씨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현판 중앙에 써 있는 단아(端雅)하면서도 고색 창연한 글씨 넉 자.

< 태을선거(太乙仙居) >

그 네 글자야말로 진산월의 지금까지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생생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모옥이야말로 종남파의 영원한 우상이며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인 태을검선 매종도의 거처였던 것이다. 진산월은 삼고구배(三顧九拜)를 하여 조사(祖師)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그런 다음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고 모옥의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기도 전에 문고리가 부서졌다.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러 모옥 자체가 하나의 화석(化石)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진산월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의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깨끗했다. 그토록 오랜 풍상을 거쳤음에도 아직도 청결(淸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모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매종도의 유골도 없었고, 책장이나 서고(書庫)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삭을 대로 삭아 버린 낡은 침상만이 뿌연 먼지 속에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진산월은 혹시라도 숨겨진 문이나 밀실(密室)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여 방안을 샅샅이 뒤졌다. 하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지만, 그 사람이 남기고 간 것은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진산월은 신(神)이 농간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진산월은 차츰 정신이 들자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과연 매종도는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매종도의 유골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할지라도 유골 자체가 먼지로 화해 완전히 사라질 리는 없었다. 설사 그렇다고는 할지라도 매종도가 소지하고 있던 그의 애검(愛劍)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매종도가 생활하면서 읽었을 책들과 그가 죽기 전에 남겼을 유급(遺?)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매종도가 아무리 상심하여 은거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자신의 절학을 무덤 속으로 가지고 들어갈 리는 없었다. 하다못해 남겨진 종남파의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흡사 누군가 몽땅 자루에 쓸어담아 가 버린 것처럼……

생각이 그에 미치자 진산월은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자신이 비록 운이 좋게 이곳을 발견하긴 했지만, 과연 지난 이백 년 동안 자신 외에 누구도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인가? 이백 년이란 너무도 긴 세월이었다. 그 기간 동안 누군가 뜻하지 않게 이곳을 발견하고 진법을 파해하여 안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자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갔을 리는 없었다. 제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해도 말이다. 모옥 밖에 종남파의 제자만이 풀 수 있는 열석진이 펼쳐져 있다 해도 강호는 워낙 넓고 기인(奇人)들이 장강(長江)의 모래알처럼 많으니 종남파 제자 외에도 그 열석진을 푸는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열석진을 뚫고 들어온 사람이 종남파의 제자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왜 지금가지 매종도의 비학을 익힌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아니, 이 모든 것은 진산월의 착각이고 사실 매종도는 아무런 비학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모옥은 아예 매종도가 살지도 않은 것이 아닐까?

진산월은 숱하게 떠오른 의문에 사로잡혀 가슴이 답답해졌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모옥 밖으로 나온 진산월은 문득 생각이 나서 모옥의 뒤를 돌아가 보았다.

있었다. 모옥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작은 봉분이 있었다. 진산월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봉분 앞으로 다가갔다.

< 일대종사(一代宗師) 매종도지묘(梅宗道之墓) >

진산월의 머리를 부수어 버릴 듯한 강렬한 충격을 주는 글귀가 적힌 작은 비석이 봉분 앞에 있었다. 과연 이곳은 매종도의 거처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매종도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결국 진산월의 우려대로 자신보다 먼저 매종도의 선거를 찾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비석에는 비문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단지 비석 자체가 무척 오래되어 푸르스름한 이끼가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석을 세운 지 수십 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렇다면 매종도의 비학은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의 손에 넘어간 것이리라.

진산월은 너무도 허탈해져 봉분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토록 모진 고생을 감수하고 찾아낸 곳이 이미 알맹이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먼지만 수북이 남아 있는 모옥이라니…… 자신의 고생이야 그렇다 치고 이십 년에 걸친 장하민의 피와 땀은 어떻게 보상받겠는가? 결국 장하민은 애초부터 이룰 수 없는 꿈을 쫓아 평생을 바친 것이 아닌가? 비석의 마모된 상태로 보아 장하민의 훨씬 이전에 이미 매종도의 비학은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으니 말이다.

한동안 진산월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간신히 잡은 줄로만 알았던 종남파 부흥(復興)의 끈은 이로써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매종도의 비학은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고, 그에 따라 종남파를 기사회생(起死回生)시킬 수 있는 절학을 얻을 기회도 사라져 버렸다. 문파 제자도 몇 사람 남지 않은 지금의 종남파가 과연 화산파와 형산파 같은 거대문파의 압력을 견딜 수 있을까? 아니, 당장 종남파를 호시탐탐 노리는 초가보조차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진산월은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암담한 절망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매종도의 거처를 찾지 못했을 때는 그래도 한 가닥 기대가 있었다. 언제고 매종도의 비학을 찾게 되면 종남파를 되살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나 매종도의 거처를 찾고, 매종도의 비학이 이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음을 알게 되자 기대는 사라지고 절망(絶望)만이 남게 되었다.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다는 절망은 사람을 한없이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칠흑 같은 밤길을 걷는 나그네가 발길을 재촉하는 것은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편히 쉴 수 있는 객잔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아무리 걸어도 결코 객잔이 나타날 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나그네라도 더 이상 발길을 재촉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절망의 무서운 점이다. 진산월이 그 절망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린 것이었다.

무덤은 눈에 덮여 있었다. 진산월은 무덤으로 다가가 무덤 앞에 서 있는 비석을 쓸어보았다.

< 대종남(大終南) 이십대 장문인 태평검객 임장홍지묘

  • 불초제자 진산월 읍립(泣立) >

음각(陰刻)으로 파인 글씨가 쓰인 비석이 드러났다. 진산월은 손으로 글씨들을 하나씩 어루만졌다. 그 글씨들은 진산월 자신이 직접 쓴 다음, 정(釘)으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정성을 다해 조각한 것이었다. 그 글자마다 임장홍을 향한 진산월의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지금 그 글자들을 어루만지니 새삼 진산월은 사부인 임장홍이 그리워졌다. 그것은 돌아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그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사부, 외롭습니다……’

진산월은 비석에 이마를 갖다 대었다. 눈자위가 뜨뜻해지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빰을 타고 흐르다 턱밑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진산월은 사부의 비석을 끌어앉으며 소리 죽여 오열했다. 그 자신도 지금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험한 일을 당하고 모진 시련을 겪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그가 아닌가? 하나 종남파 부흥의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고 사부의 무덤 앞에 서자, 그의 마음은 끝 모를 슬픔과 외로움에 휩싸여 자신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건만 그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잡으려는 별은 갈수록 멀어져서 아득해져만 가는데, 그는 그 별을 꿈꿀 수 있는 기회조차 상실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을까? 아니면 애초부터 자신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꿈을 꾸었던 것일까? 진산월은 사부의 유명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 울었고,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사형제들이 불쌍해서 울었다.

일단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에 비석이 흠뻑 젖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그는 눈물을 멈추었다. 마음속의 슬픔은 여전했지만, 그는 언제까지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산 아래에는 자신만을 믿고 의지해 온 네 명의 사제가 있다. 그리고 아득한 저 멀리 하늘 아래 어딘가에는 자신을 데리려 오기만을 학수고대 하고 있는 한 여인이 있지 않은가?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진산월은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일어나서 가야만 한다. 그 길은 바로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부, 다음에는 반드시 사매와 함께 오겠습니다.’

진산월은 사부의 무덤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조그만 약속이었다. 진산월은 한 번 더 사부의 무덤을 보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차가운 산바람이 그의 몸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지만 전혀 추운 줄도 몰랐다.

사부의 무덤에서 내려온 진산월은 종남파로 가려다 방향을 바꾸어 누관(樓觀)으로 향했다. 누관은 예로부터 종남산에서도 제일절경(第一絶景)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었다. 종남산은 모두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봉우리들을 남오대(南五臺)라 불렀다. 서안의 남쪽에 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라는 뜻이었다. 누관은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중봉(中峰)에 위치해 있었다. 진산월은 누관의 명승을 감상하며 마음속의 울적함을 씻어낼 생각이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남파로 돌아갔다가 자칫 사제들에게 불안감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중봉의 가파른 봉우리에 앉아 눈 덮인 누관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절로 탄성이 일었다. 화산은 기암괴석이 많고 산세가 오밀조밀한 데 비해, 종남산은 산세가 웅위(雄偉)하고 깊었다. 그래서 일찍이 당(唐)의 대시인인 왕유(王維)는 종남산을 일컬어 ‘의여우상적오비(意余于象的奧秘 : 높은 품성을 지닌 코끼리처럼 오묘한 신비가 있는 곳이다, 라는 뜻)’ 라고 칭송한 바 있었다. 한동안 누관의 명승을 감상하고 있자니 마음속의 슬픔이 점차로 가시며 상쾌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누관에 가면 세상의 시름이 모두 사라진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군……’

진산월은 딱 반시진만 더 앉아 있다가 종남파로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하늘은 겨울 하늘답지 않게 맑고 청명했다.
멀리 한 조각 구름이 한적하게 흘러오는 광경이 흡사 봄날의 오후 같았다.
그토록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도 중봉의 험한 봉우리에 막혀 버렸는지 별로 느끼지지 않았다.
울적한 마음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진산월은 누관의 경치를 감상하다 깜박 졸았다.
퍼뜩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찜찜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던 진산월은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난 또 뭐라고……”

그가 앉아 있던 곳은 중봉의 정상에서 십여 장 아래에 있는 넓적한 바위 위였는데, 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세워놓은 듯한 돌무더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돌무더기의 형상이 언뜻 보기에는 사람의 얼굴과 비슷했던 것이다.
게다가 돌무더기의 위쪽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그 두 개의 텅 빈 구멍이 사람의 동공(瞳孔)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 돌무더기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무더기의 형상은 그가 앉아 있는 곳에서 보았을 때만 사람의 모습을 닮았고,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돌무더기로 다가가 보았다.
돌무더기는 어른의 머리통만한 돌 수십 개를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이었다.
언제 누가 쌓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의 마모 상태로 보아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렇게 쌓여 있었음이 분명했다.
돌과 돌 사이가 오랜 풍화(風化)로 거의 달라붙어 있어 손으로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진산월은 한동안 돌무더기를 어루만지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모진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닳고닳은 돌무더기가 사람 얼굴을 닮았구나……
사람도 풍상을 많이 겪으면 돌을 닮아 가지 않을까?”

별 생각 없이 돌무더기를 만지던 그의 손이 돌무더기 중간에 나 있는 구멍으로 향했다.
그 구멍은 어른의 손 하나가 간신히 들락거릴 수 있을 정도였는데, 양쪽으로 하나씩 뚫려 있어 언뜻 보기에는 정말 사람의 얼굴에 뚫려 있는 두 개의 눈 같았다.
진산월은 무심코 그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만져지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허리를 숙여 구멍 안을 들여다보았다.
구멍 안에 작은 구슬 같은 것이 보였다.
진산월은 호기심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그 구슬 같은 것을 꺼내려 했다.
하나 그 구슬이 구멍보다 커서 그냥은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누군지 짓궂은 사람이군. 일부러 구멍보다 큰 걸 안에 집어 넣다니……”

진산월은 나직하게 혀를 차며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파아…

구멍 주변의 돌이 부서지며 구멍이 커졌다.
그제서야 진산월은 구멍 안에서 구슬을 꺼낼 수 있었다.
막상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니 그것은 구슬이라기보다는 주사위를 닮아 있었다.
크기는 가운데 손가락 마디 두 개를 합친 것만 했는데, 표면이 유달리 반질반질 했다.
재질은 옥(玉) 같기도 했고, 수정(水晶) 같기도 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그 물건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돌무더기 안에 이런 물건이 있다는건 뜻밖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돌을 쌓아놓고 그 안에 그 사람의 유품(遺品)을 넣어 둔 것이리라.
유품이라는 생각이 들자 진산월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제 알겠군. 이건 사리(舍利)구나.”

진산월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이제 보니 그가 돌무더기에서 발견한 작은 구슬 모양의 물건은 죽은 사람의 유골(遺骨)에서 나오는 사리였던 것이다.
진산월은 오랫동안 심신의 수도(修道)를 닦은 고승(高僧)의 몸에서 사리가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 사리가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사리는 대개가 깨알같이 작고 둥글둥글했으며, 간혹 큰 사리라고 해도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것이었다.
물론 고승에 따라서는 몸 속에서 쌀 한 가마니 분량의 사리가 나오기도 하지만, 사리 하나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진산월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사리는 거의 야광주(夜光珠)로 오인할 만큼 컸으니 진산월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정도의 사리가 나왔다면 필시 일세(一世)에 보기 드문 고승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고승을 기리기 위해 석탑(石塔)을 세운 다음 시신을 화장해서 나온 사리를 안치해 둔 모양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자 진산월은 자신이 돌탑을 훼손하여 그 안에서 사리를 꺼낸 행위가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공연히 편안히 잠들어 있을 고승의 영면(永眠)을 방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 그와 함께 또 다른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반대쪽 구멍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함이 치밀어 올랐다.
한쪽 구멍에 사리가 있다면 다른 한쪽의 구멍에도 그에 못지 않은 고승의 유품이 들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 유품을 찾아 잘 살펴보면 어쩌면 고승의 정체를 알게 될지도 몰랐다.
진산월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고승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대체 어떤 고승이기에 이토록 거대한 사리를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진산월은 마음속으로 이름 모를 고승과 돌무더기를 쌓은 미지의 인물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반대쪽 구멍을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구슬이나 사리 같은 것은 없었다.
대신 둘둘 말린 누런 양피지 조각이 살짝 보였다.
진산월은 손가락을 집어넣어 양피지 조각을 꺼내 들었다.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양피지 조각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금세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조심스럽게 양피지를 펼쳐 보았다.
양피지에는 빛 바랜 회색빛 글씨 몇 자가 적혀 있었다.

< 진리(眞理)를 얻고 싶은 자, 파(破)하라! >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구였다.
진리란 무엇이고, 파하라는 건 또 무슨 뜻인가?
진산월은 영문을 알 수 없어 한동안 양피지 조각을 쳐다본 채 복잡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양피지 조각은 사리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이 돌무더기를 세운 사람이 집어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슨 이유에서 이런 문구가 적힌 양피지를 넣은 것일까?
진리가 무엇인지는 별개로 하고, 파하라는 건 대체 무엇을 부수라는 것인가?
손에 들고 있는 사리인가, 아니면 돌무더기 자체인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진산월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돌무더기를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오른손에 공력을 끌어올려 돌무더기를 후려쳤다.
사리는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결정체(結晶體)이다.
그것이 곧 진리다.
하나 돌무더기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한 허상(虛像)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파해야 하는 것은 다름아닌 허상, 곧 돌무더기인 것이다.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짧았다.

콰아앙!

벼락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돌무더기는 진산월의 손에서 쏟아져 나온 경력(經力)에 그대로 박살나 버렸다.
돌무더기가 무너지자 그 자리에 하나의 작은 동혈(洞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보니 돌무더기는 그 동혈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던 것이다.
저 동혈이 과연 진리로 가는 입구(入口)란 말인가?
저 동혈 속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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