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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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1화


제67장. 초가팔웅(焦家八雄)

종남산은 하늘과 땅 사이를 막고, 해와 달은 그 산의 돌 위에서 솟아오른다. 높은 봉우리는 밤이 되어도 경치를 잃지 않고, 깊은 계곡은 낮이 되어도 밝아오지 않는다……

남산새천지(南山塞天地), 일월석상생(日月石上生), 고봉야유경(高峰夜留景), 심곡주미명(深谷晝未明)……

매서운 바람 한 줄기가 짙은 구름 사이에서 내려와 산정(山頂)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종남산(終南山)의 겨울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며, 도처에 크고 작은 도관(道觀)과 사찰들이 산재해 있었다. 풍덕사(豊德寺)도 종남산에 있는 수많은 사찰 중의 하나였다. 이곳은 종남산의 북쪽 계곡에 있으며, 사천(四川)으로 넘어가는 관도(官道)가 통하는 풍욕구(??口)의 왼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북쪽은 가파른 절벽이 있고, 주변의 산세가 험해서 평소에도 찾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작은 사찰이었다. 붉은 노을이 풍덕사의 앞마당을 비추자 여기저기에 쌓여 있는 눈 무더기가 붉게 물들어 마치 피를 머금은 듯 했다. 다시 한 차례의 세찬 바람이 불자 눈 더미가 휘날려 절 안을 이리저리 휘돌다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 흩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풍덕사의 경내(境內)로 들어서고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짙은 회의를 입고 머리에는 방갓을 눌러쓴 장한이었다. 등뒤로 푸른 수실이 매달린 장검의 손잡이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인 듯 했다. 회의장한은 풍덕사의 앞마당으로 들어오자 빠른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방갓 밑으로 살짝 드러난 턱은 검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따금 불어오는 산바람만이 귀곡성(鬼哭聲)을 울리고 있을 뿐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평소에도 풍덕사는 워낙 조그만 절이라 기거하는 승려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인지라 향화객(香火客)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 적막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풍덕사의 승방(僧房)은 모두 세 칸이 있었는데, 회의장한은 그중 가장 우측에 있는 승방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승방 앞에 도착한 회의장한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승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들어오게.”

회의장한은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승방으로 들어갔다. 승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쪽에 낡고 비좁은 침상만이 동그마니 있을 뿐이었고, 벽에는 장식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다. 침상 위에는 얼굴이 쭈글쭈글한 노승(老僧) 한 사람이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회의장한은 노승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다녀왔습니다.”

노승은 비쩍 마르고 체구도 작아서 볼품없이 생겼다. 머리는 물론 박박 깎았고 턱에도 수염이 나 있지 않아서 어찌 보면 덜 자란 어린아이 같기도 했으나, 피부는 주름살투성이였고 얼굴의 여기저기에 검버섯이 피어 있어 언뜻 보기에도 칠십은 족히 넘은 것 같았다. 노승은 주름진 눈으로 회의장한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바람이 찬데 고생이 많군 그래.”

회의장한은 방갓을 벗었다. 턱과 빰에 수염이 가득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삼십대 후반쯤 된 사나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고생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대사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이를 어찌 고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보다 사람은 만나고 왔나?”

“다행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무어라든가?”

회의장한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요즘은 복잡한 일이 많아서 도저히 그런 일까지 신경을 쓰기는 힘들다고 하더군요.”

노승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그렇게 됐군.”

“장안대호(長安大豪) 이세적(李世翟)이라면 그래도 관중(關中) 일대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인물인데, 이렇듯 꽁무니를 뺄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 인심이란 원래 변화무쌍한 법일세. 노납이 그것을 알면서도 자네를 그에게 보낸 것은 혹시나 하는 한 가닥 기대 때문이었네. 공연히 자네에게 헛고생만 시켰군.”

“헛고생은 아닙니다. 대신 한 가지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게 무언가?”

“다음 달 초에 초가보(焦家堡)에서 강북삼보(江北三堡)의 회합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장안 뿐 아니라 섬서성 일대가 온통 술렁이고 있습니다.”

강북삼보라면 섬서성의 초가보와 하북성의 검보(劍堡), 산서성의 삼월보(三月堡)를 가르키는 말로, 이들 세 집단은 요즘 들어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신흥방파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구파일방에는 비할 수 없으나, 전통 있고 명망 있는 여러 명문정파들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회의장한은 목소릴 낮추어 신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회합은 단순한 회동(會同)이 아니라 강북삼보끼리 서로 혈연(血緣) 관계를 맺어 결속을 단단히 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혈연이라면……”

“초가보의 소가주(小家主)와 검보 보주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혼인을 하기로 했답니다. 검보와 삼월보는 이미 사돈 관계이니 그렇게 되면 강북삼보는 서로 인척 관계가 되어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뭉칠 수 있을 겁니다.”

노승은 나직이 침음했다. 검보의 안주인은 삼월보의 세 명의 보주의 여동생이었다. 회의장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강북의 신흥방파 세 개가 친척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강북무림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막강한 세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노승은 평생을 불문(佛門)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강호의 정세에는 어두웠으나, 강북삼보가 합쳐진다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노승의 얼굴에 근심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거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로군. 이세적이 몸을 사리는 이유도 알 것 같네.”

이세적은 무림인이었으나, 장안지부(長安知府)의 사위이기에 장안 일대에서는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무공 또한 뛰어난데다, 대대로 장안의 이씨 문중은 손꼽히는 명문(名門)이어서 휘하에 고수들이 구름처럼 많았다. 장안대호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게 된 것이었다. 그런 이세적도 상대하기 꺼려할 정도로 강북삼보는 급속도로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회의장한의 표정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억지로 얼굴을 폈다.

“아직 의기(義氣)를 잃지 않은 강호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찾아보면 우리를 위해 힘을 빌려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밖에서 음충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멀리서 찾을 거 없다. 사람은 여기에도 많으니까 말이다.”

회의장한이 대경실색하여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궁금하면 나와 보면 될 거 아니냐?”

음성에는 비아냥거리는 빛이 역력했다. 회의장한은 슬쩍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더니 얼굴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노승이 물었다.

“그자들인가?”

회의장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제 불찰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뒤를 밟힌 것 같습니다.”

노승은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닥치리라고 각오한 일일세. 그보다 노납의 무리한 부탁 때문에 자네까지 화(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면목이 없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보다 제가 저들을 잠시라도 막을 테니 그동안 대사께선 절 뒤쪽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조금만 더 있으면 주위가 어두워져서 운(運)이 좋으면 그들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멀쩡히 잘살고 있는 자네를 궁지에 몰아넣고 노납 혼자 어떻게 피할 수 있겠나? 저들의 목표는 노납일 테니 자네야말로 이쯤에서 손을 털고 떠나도록 하게. 자네 실력이라면 혼자 몸을 빼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

회의장한은 털북숭이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이 떠올랐다.

“이 곽우초(藿于楚)가 비록 협객(俠客)이라고 자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칼바람을 맞으며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찌 무공도 모르는 대사님을 늑대 같은 자들에게 던져놓고 꽁무니를 빼겠습니까?”

그 소리를 들었는지 밖에서 다시 예의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 누군가 했더니 조령검객(操靈劍客)이셨군. 중조산(中條山) 쪽에서만 활동한다고 하더니 머나먼 종남산까지 어인 행차이신가?”

곽우초의 표정에 조급함과 착잡함이 떠올랐다.

‘내 정체를 알고도 저토록 태연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수 같은데…… 내 한 몸이야 어찌되든 상관 없지만 대사님이 걱정이군……’

노승은 이곳 풍덕사의 주지(住持)로, 혜공(慧空)이라 했다. 혜공 스님은 이미 삼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이 작고 허름한 풍덕사에 머물러 있었으며, 종남산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혜공은 높은 불덕(佛德)을 쌓은 고승(高僧)도 아니었고, 절학을 지닌 기승(奇僧)도 아니었으나 곽우초는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존경해 오고 있었다.

이십여 년 전, 섬서성에 기근(饑饉)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곽우초는 그때 병든 노모(老母)를 모신 십대 중반의 소년이었다. 아무 재주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곽우초 모자(母子)도 그 기근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하나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혜공이 거의 굶어죽게 생긴 두 모자를 발견하고 자신의 절로 데리고 왔다. 자기가 먹을 것도 없으면서 혜공은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공양미를 풀어 두 모자에게 죽을 쑤어 주었고, 덕분에 곽우초 모자는 아사(餓死)를 면할 수 있었다.

기근은 이 년이나 계속되었고, 그동안 그들은 혜공의 배려로 풍덕사에 머물러 있었다. 곽우초의 어머니는 결국 삼년 후에 돌아가셨짐나, 그 죽음은 평온한 것이었다. 어머니를 묻고 난 곽우초는 강호를 뛰어들어 고수가 되었으나, 항상 마음속으로 혜공에게 감사해하고 있었다. 언제고 기회가 닿는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에게 결초보은(結草報恩)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달 전, 돌연 혜공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을 때 곽우초는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풍덕사로 달려왔다. 그곳에서 그는 혜공의 부탁을 받고 장안으로 갔다가 왔는데, 그사이 누군가가 그의 뒤를 밟아 이곳까지 쫓아왔던 것이다.

곽우초가 승방의 문을 열고 나오자 앞마당에 다섯 명의 사나이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 중 중앙에 팔짱을 낀 채로 우뚝 서 있는 사나이는 비쩍 마르고 눈빛이 음침한 삼십대 중반의 인물이었다. 겉모습은 왜소해 보였으나, 깡마른 얼굴에는 한 줄기 독기(毒氣)가 흐르고 있어 악랄하고 끈질긴 성격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곽우초는 사나이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는 냉랭한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는 누구요?”

사나이는 히죽 웃었으나, 그 미소는 겨울바람보다도 매섭고 음산했다.

“흐흐…… 나는 위지독(慰遲獨)이오.”

곽우초의 눈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찌푸려졌다.

“당신이 초가보의 팔웅(八雄) 중 하나인 독응(毒鷹) 위지독이란 말이오?”

“나를 알고 있다니 말하기도 편하겠군. 순순히 방안에 있는 사람을 넘겨준다면 당신이 떠나는 걸 말리지 않겠소. 그렇지 않으면, 흐흐흐……”

위지독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웃기만 했으나, 그 다음 말이 무엇인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곽우초의 마음은 먹장구름이라도 낀 듯 어두워졌다. 독응 위지독은 초가보의 고수들인 초가팔웅(焦家八雄) 중에서도 가장 신법(身法)이 빠르고 손속이 잔인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초가팔웅!
달리 팔수(八獸)라고도 불렀다.
그들은 요즘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초가보의 절정고수들이면서도 하나같이 성격이 흉폭하여 섬서성 일대에서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곽우초는 아직 그들 중 누구와도 직접 싸워 본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그들 중 한 사람도 당해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위지독의 양옆에 서 있는 네 명의 사나이들도 만만치 않은 고수들인 것 같았다. 곽우초는 자신이야 어찌되었건, 혜공만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랐으나 아무리 보아도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위지독은 냉정한 시선으로 곽우초의 얼굴 표정이 여러 차례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말 안 해도 알고 있소. 하지만 빠져 나갈 길은 없으니 헛된 심력(心力)을 낭비하지 말고 방안의 인물더러 순순히 나오라고 하시오.”

곽우초가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승방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혜공의 모습이 드러났다. 혜공을 보자 위지독은 잠깐 멈칫거리더니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누가 지금까지 몇 달 동안이나 우리 눈을 피해 다니며 속을 썩였나 했더니 이제 보니 곧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생긴 땡중이었군. 이 허물어져 가는 절의 주지승인가?”

혜공은 주름진 눈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이내 나직한 불호(佛號)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께선 노납을 무슨 일로 보려 하는 게요?”

위지독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내걸렸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노납은 오늘 시주를 처음 보는데 시주가 찾아온 이유를 어찌 알겠소?”

“흐흐…… 쓸데없이 노닥거리는 것은 내 취미가 아니지. 보아하니 이상한 동정심에서 일을 벌인 듯한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당신 숨겨 둔 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물러가겠소.”

혜공은 계속 시치미를 떼었다.

“숨겨 둔 자들이라니…… 노납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숨겨 두겠소?”

위지독의 얼굴에 점차로 짜증스런 빛이 떠올랐다.

“정말 앞뒤가 꽉 막힌 늙은이로군. 보주(堡主)께서 불필요한 살상은 가급적 금하라는 명령만 내리지 않았담녀 내가 이런 귀찮은 입씨름 따위를 하고 있을 것 같은가?”

혜공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위지독의 눈가에 진득한 살기가 떠올랐다.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 나이를 살았으면서도 꼭 관(棺)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단 말이지?”

곽우초가 바짝 긴장해서 혜공의 앞을 막아 섰다. 위지독은 그 광경을 보고 오히려 웃었다.

“흐흐…… 목숨을 버리고 자존심을 살리겠다고? 좋아, 더는 양보하지 않는다.”

그가 슬쩍 고갯짓을 하자 그의 양옆에 서 있던 장한들 중 우측의 두 명이 곽우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어깨가 딱 벌어지고 가슴이 유난히 넓어서 가만히 서 있을 때는 다소 미련해 보이는 모습들이었으나,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동작이 상상외로 빠르고 민첩했다.

곽우초는 이미 마음속으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기에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등 뒤에 메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창!
날카로운 검명과 함께 새하얀 검광이 장내에 번쩍거렸다.

곽우초가 익힌 검법은 천환십삼검(天幻十三劍)이었다.
이것은 환검(幻劍)의 일종으로, 검을 빠르게 변환시켜 상대의 눈을 어지럽히는 수법이었다.
따라서 발초(發招)가 상대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신속하고 갑작스러운 게 가장 큰 특징이었다.

지금도 곽우초는 검을 뽑자마자 단숨에 일곱 번이나 방향을 바꾸어 검을 교차로 찔러 왔다.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하고 즉흥적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 일곱 번의 변환이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검로(劍路)에 의한 것이어서 방심했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에 당하기 일쑤였다.

과연, 단숨에 그를 도륙(屠戮)할 듯한 기세로 달려들던 두 명의 장한들이 그의 매서운 검세에 놀랐는지 주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곽우초는 일단 잡은 선기(先機)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짝 그들에게 다가서며 질풍 같은 검초를 거푸 날렸다.

파파파팍!
삽시간에 주위 사방이 온통 그의 검에서 흘러 나오는 검영(劍影)에 휩싸여 버렸다.

두 명의 장한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바로 그때,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위지독이 갑자기 전권(戰圈)으로 뛰어들며 오른손을 질풍처럼 앞으로 내뻗었다.

파팡!
가죽북을 치는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검풍과 검영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곽우초는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위지독은 양어깨를 흔들면서 웃었다.

“흐흐…… 제법 날카로운 검법이다만, 나는 이미 네 검법의 약점을 파악했다. 정면에서는 쓸 만하지만 측면 공격에는 약해 빠진 검법이구나.”

곽우초는 검을 든 손이 들어올리기 힘들 만큼 저려 왔으나, 그보다는 위지독의 말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곽우초가 두 명의 장한들과 몇 수 겨루는 동안 위지독이 어느새 그의 검법의 약점을 알아차린 것이다.

고수들이 처음 만나는 상대와 겨루기 전에 부하들을 먼저 내보내는 것은 단순히 상대를 경시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림의 고수라면 누구나가 남들 모르는 비장(秘藏)의 한 수(手)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칫 뜻밖의 낭패를 보지 않기 위해 미리 상대의 솜씨를 파악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지금도 위지독은 곽우초의 검법을 잠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약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지 않고 직접 겨루었다면 이토록 쉽게 천환십삼검의 허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곽우초는 내심 위지독의 예리한 안목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약세를 보일 수는 없었다. 곽우초는 재빨리 주위의 정세를 살폈다. 위지독이 그와 대치해 있는 사이 위지독과 함께 나타났던 네 명의 장한들은 반원형을 그리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그들의 서 있는 위치가 절묘하여 쉽사리 장내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혜공은 아직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떠날 생각도 없는 것 같았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한들이 호시탐탐 그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곽우초는 절로 마음이 조급해짐을 느끼고 속전속결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빙글 몸을 돌리며 앞에 있는 눈 더미를 발로 찼다. 눈발이 사방으로 휘날리는 가운데 그의 신형은 한 줄기 빛살처럼 위지독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가고 있었다.

하나 위지독의 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곽우초가 눈 더미를 발로 차는 순간에 위지독은 이미 다른 곳으로 위치를 이동해 버렸던 것이다.

‘아차!’

곽우초는 안색이 변하며 황급히 달려들던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하나 그가 채 몸을 반도 돌리기 전에 오른쪽 옆구리 쪽으로 싸늘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왔다. 곽우초는 사력을 다해 검을 오른쪽으로 그어댔다.

팡!

검신(劍身)이 장력(掌力)에 격중되어 하마터면 손에서 날아가 버릴 뻔했다. 곽우초는 얼굴이 핼쑥해진 채로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상대의 공세를 간신히 막기는 했으나 아직도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 왔고, 오른팔 전체가 은은히 저리고 있었다.

‘독응은 몸만 빠르다고 알고 있는데, 장력의 위력이 이토록 강하다니…… 오늘은 아무래도 길(吉)함보다는 흉(凶)함이 더 크겠구나.’

곽우초의 마음은 납덩이를 달아맨 듯 무거워졌다. 그때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위지독의 신형이 바람처럼 그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흐흐…… 이제 슬슬 후회가 되는가?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위지독의 손에서 칼날 같은 장력이 거푸 쏟아져 나왔다. 일단 손을 쓰기 시작하자 위지독의 공세는 그야말로 서릿발처럼 매섭고 날카로웠다.

곽우초는 제대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그들의 주위 사방은 온통 위지독이 발출한 장영(掌影)에 휩싸여 그들의 신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 안에 있는 곽우초의 처지가 어떠하겠는가?

곽우초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력을 막아내는 손놀림도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는 아무래도 검을 사용하는 곽우초가 심력(心力)의 소모가 더 빨라서 불리하기 마련이었다.

곽우초는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위지독의 손에 맥없이 쓰러지리라고 생각하고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수중의 장검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위지독의 앞가슴을 향해 뛰어들었다. 천환십삼검 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강한 천환탈혼(天幻奪魂)의 절초가 빛살처럼 펼쳐져 나왔다.

곽우초의 눈에 위지독의 앞가슴 옷자락이 자신의 검기에 찢겨지는 모습이 들어왔다. 가 옳다꾸나 하고 쾌재를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양쪽 옆구리에 철퇴로 가격당하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우두둑!

갈비뼈가 으스러져 나가며 곽우초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와 함께 시커먼 핏물이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크으윽!”

곽우초는 허리를 꼬챙이에 꿰인 새우처럼 몸을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위지독은 앞가슴 옷자락이 모두 잘려 가슴이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곽우초를 향해 계속 달려들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그야말로 독응이라는 별호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곽우초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서 피하기는커녕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는 칼날같이 예리한 장력이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허리를 굽힌 상태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난데없이 승방의 지붕 위에서 하나의 인영이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눈부신 검기(劍氣)가 중인들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헛?”

위지독은 막 곽우초를 박살내려다가 갑자기 차가운 검기가 허공에서 자신의 상반신을 뒤덮으며 내려오자 짤막한 경호성을 내지르며 내밀었던 손을 황급히 거두어들였다.

쏴아아!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의 양쪽 소맷자락이 갈가리 찢겨지며 팔뚝이 송두리째 드러났다. 위지독은 상대의 검술에 놀라 안색이 변한 채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 순간,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인영이 곽우초와 한쪽에 멀거니 서 있던 혜공의 몸을 낚아채더니 다시 허공을 박차고 승방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웬 놈이냐?”

승방 앞에 포진(布陣)해 있던 장한들이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벼락 같은 노성을 내지르며 인영의 앞을 막아 서려 했으나, 인영은 번개보다도 빨리 승방의 지붕 위에서 장내로 뛰어들어 위지독을 물리치고 다시 곽우초와 혜공의 몸을 안고 승방을 넘어 사라지기까지는 그야말로 숨 몇 번 내쉴 만큼의 짧은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위지독은 뜻밖의 사태에 놀란 듯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인영이 사라진 지붕 위를 멀거니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양쪽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매가 모두 잘려 나가 훤히 드러난 팔뚝에 종횡(縱橫)으로 엷은 혈선이 그려져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절묘한 솜씨야.”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던 위지독은 문득 고개를 들어 장한들을 쓸어보았다. 장한들은 그때까지도 인영의 뒤를 쫓아야 할지 아니면 그의 지시를 기다려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위지독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놈들, 무얼 쳐다보고 있는 게냐? 어서 쫓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제서야 장한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인영이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위지독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다가 자신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곽우초는 자신이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보통 때라면 무림의 고수인 그가 남의 옆구리에 끼워진 채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조금만 움직여도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오는지라 그는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맥없이 정체 모를 인물이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고개를 쳐들어 상대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그것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가 기껏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대의 턱밑에 자라난 탐스러운 검은 수염뿐이었다. 그 사람은 곽우초와 혜공을 양쪽 옆구리에 낀 상태에서도 달려가는 데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는지 혜성 같은 속도로 앞으로 치달려 가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와 나무들이 연신 그의 발밑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검법 못지않게 신법(身法)에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인물임이 분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곽우초는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지며 통증이 극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마저 조금씩 혼미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달려가던 사람은 작은 개울 하나를 넘어 하나의 좁은 계곡 안으로 들어가더니 몸을 멈추었다.

“허억…… 헉……”

그제서야 곽우초는 그의 옆구리에서 빠져 나와 간신히 몇 차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엣 핏물이 흘러 내렸다. 그때 하나의 손이 다각와 그의 옆구리를 지그시 눌렀다.

“우욱!”

곽우초는 옆구리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짤막한 신음을 토해냈으나, 이내 부러진 갈비뼈가 이어져서 숨쉬기가 편해지는 것을 느끼고 상대를 돌아보았다.

“고맙소. 덕분에 살았소.”

“별말씀을. 옆구리를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괜찮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어 오는 사람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키가 장대하여 위풍당당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몸에는 여우가죽을 댄 백삼(白杉)을 걸치고 있었는데,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검과 두 눈에 번뜩이는 성광(星光)만 아니었다면 글을 읽는 문사(文士)로 알았을 것이다.

곽우초는 아직도 옆구리의 통증이 상당했으나, 억지로 그에게 포권을 했다.

“참을 만하오. 나는 곽우초라 하는데, 형장의 고명(高名)을 알 수 있겠소?”

백삼중년인은 짙은 눈꼬리를 꿈틀거리더니 이내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오! 이제 보니 조령검객이셨구려. 명성은 익히 들었소. 나는 백동일(白東一)이라 하오.”

언뜻 곽우초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상대의 검법이나 몸놀림으로 미루어 보건대 강호의 이름난 고수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처음 듣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조령검객이란 그냥 허울좋은 이름일 뿐이오. 어찌 백 형같이 강호에 몸을 숨긴 기인이사(奇人異士)에 비할 수 있겠소?”

“기인이사라니 당치 않소. 나는 그저 초야(草野)에 묻혀 살고 있는 무명소졸일 뿐이오.”

곽우초는 그가 자신의 내력을 별로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굳이 더 이상 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 그의 마음속으로는 한 줄기 의혹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가 때마침 나타나 우리를 구한 것은 과연 우연인가, 아니면……’

그때 백동일이 혜공을 돌아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혜공대사님, 그동안 별래무양하셨습니까?”

혜공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아미타불, 시주는 노납을 알고 있소?”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하긴 오래되었네요. 이십여 년 전에 뵌 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당시 저는 선사(先師)와 함께 찾아뵈었었는데……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혜공은 한동안 그를 찬찬히 살피더니 갑자기 쭈글쭈글한 얼굴에 반가운 빛을 떠올렸다.

“이십 년 전에 찾아왔다면…… 시주는 혹시 풍뢰검(風雷劍) 관소양(關召揚) 대협의 제자가 아닌가?”

백동일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기억나십니까?”

“노납의 눈이 어두워서 미처 시주를 알아보지 못했네. 그때 관 대협과 함께 노납을 찾아왔던 홍안(紅顔)의 청년이 바로 시주였군 그래.”

“이제 알아보시는군요. 십년이면 강산(江山)도 변한다는데, 그런 세월이 두 번이나 흘렀으니 대사님께서 저를 못 알아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관 대협은?”

“선사께선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미타불……”

나직이 불호를 외던 혜공은 잠시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관 대협은 젊었을 적부터 노납과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네. 이십여 년 전에 관 대협이 몹시 상심(傷心)하여 노납에게 왔을 때, 노납은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를 못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결국 그 예감이 적중하고 말았군.”

“선사께서도 그후로 늘 대사님을 뵙고 싶어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은 대사님을 더 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혜공의 주름진 얼굴에 한 줄기 어두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노납을 찾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 당시의 일이 마음에 큰 병(病)이 되었던 모양이군.”

백동일의 표정 또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대사님의 말씀대로 입니다. 선사께선 거처로 돌아가신 후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삼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선사의 유언(遺言)대로 종남산으로 가지 않고 강호(江湖)를 떠나 은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이번에 이상한 소문을 듣지 않았다면 은둔지에서 벗어나 대사님을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상한 소문이라면?”

백동일의 두 눈에서 기광(奇光)이 번쩍거렸다.

“종남파가 초가보의 침입을 받아 문파 제자 대부분이 죽거나 다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삼백 년을 내려오던 종남파의 대통(大統)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하더군요.”

말을 하는 도중 백동일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고, 두 주먹은 푸른 힘줄이 툭툭 불거지도록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줄곧 차분하고 침착했던 그의 얼굴에도 붉은 기운이 잠깐 어렸다.
백동일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다시 냉정을 회복한 듯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소문을 듣자 저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대사님께서 자세한 사정을 듣고자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대사님과 저분 곽 대협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자들은 초가보의 고수들입니까?”

“그렇다네.”

혜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동일은 나직하게 탄식을 토해냈다.

“그들이 대사님에게까지 손을 써 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소문이 틀린 것은 아닌 모양이군요.”

백동일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아주 어렵게 물었다.

“종남파는…… 멸문(滅門)했습니까?”

혜공은 잠시 주름진 눈으로 백동일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가 멸문인지는 모르지만……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백동일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좀더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종남파의 거처는 이미 초가보에게 완전히 접수당했네. 소문대로 문파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고, 이제는 그들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네.”

“종남파의 장문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도 변(變)을 당했습니까?”

“노납이 듣기론 종남파의 장문인은 이미 오래 전에 실종되어 장문인 자리는 공석(空席)이 되어 있었다고 하네. 그래서 초가보가 공격해 들어오자 남은 자들이 지리멸멸하여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도망치다시피 쫓겨났다고 하더군.”

백동일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분노에 찬 음성을 내질렀다.

“종남파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강호의 명문(名門)인데, 문파를 사수(死守)하지는 못할망정 꼬리를 말고 도망쳤단 말입니까? 아무리 장문인이 없기로서니 종남파에 그런 오합지졸들만 모여 있었다니… 장문인이란 작자는 대체 그런 조무래기들만 남겨놓고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건 노납도 모르겠네. 종남파에서도 장문인의 실종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들었네.”

백동일은 솟구치는 분을 이기지 못하겠는지 발로 땅을 세차게 굴렀다.

팍!

땅바닥에 발자국 하나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곽우초는 내심 깜짝 놀랐다.
지금은 바닥이 꽁꽁 얼어서 단단하기가 돌과 같았는데, 백동일은 발 한 번 구름으로써 발자국을 새겨놓았으니 그 공력(功力)의 심후함은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저 정도의 고수가 초야에 숨어 있었다니 새삼 강호의 넓음과 인물의 많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백동일은 종남파와 무슨 관계가 있길래 종남파의 멸문에 대해 이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백동일은 이내 자세를 추스르고는 혜공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너무 흥분하여 대사님 앞에서 실태를 보였군요. 죄송합니다.”

“시주 입장에서야 당연히 그럴 만한 일 아니겠나? 관 대협께서 살아 계셨다면 그 괄괄한 성질에 아마도 한바탕 큰 소란이 일어났을 걸세.”

백동일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선사께서 건재하셨다면 초가보 따위가 어찌 감히 종남파를 넘볼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선사 외에도 두 분의 사숙께서 모두 종남파를 떠나신 후로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습니다만, 선사님의 상심이 너무 크셔서 끝까지 종남파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군요.”

“아! 관 대협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걸세. 그분의 강직하고 불 같은 성격으로 당시에 그런 모욕을 당했을 때 그 자리에서 자진(自盡)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수치와 치욕을 잊기도 힘들었을 텐데 어찌 종남파로 돌아갈 수 있었겠나?”

“…!”

“관 대협과 다른 두 분의 사형제가 종남삼검(終南三劍)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을 때만 해도 강호의 어느 누구도 종남파를 우습게 보지 않았는데,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알겠군.”

종남삼검이란 말에 곽우초는 문득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종남삼검이라면 이십여 년 전에 종남파의 최고고수들로 불리던 인물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백동일이란 인물은 종남파의 인물이란 말인데, 저런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왜 종남파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 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때 백동일이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사를 비롯한 종남삼검 세 분 어르신들은 당시의 일에 커다란 수치심을 느끼고 조사(祖師)들을 뵐 면목이 없다면서 평생 종남파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저도 선사의 유지(遺志)를 받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종남파의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참으로 선사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아미타불, 종남삼검 세 분이 모두 은거를 하시는 바람에 종남파의 세력은 눈에 띄게 약화된 게 사실일세. 게다가 많은 고수둘이 하나둘씩 떠나게 되어 몇 년 전부터는 겨우 열 명 남짓한 젊은이들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네. 그들만으로 종남파를 노리는 외부 세력을 막기에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일이 이렇게 되도록 모르고 있었으니 제 죄(罪)가 큽니다.”

“그래도 백 시주가 뒤늦게나마 소식을 듣고 달려와 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일세. 종남삼검의 다른 두 분 소식은 듣지 못했나?”

백동일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십 년 전의 그 일 이후로는 두 분 사숙을 뵙지 못했습니다. 다만 낙일검(落日劍) 해(奚) 사숙(師叔)과 질풍검(疾風劍) 전(典) 사숙(師叔)은 소림사에서 종남산으로 오지 않고 각기 다른 곳으로 가셨다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백동일이 말한 이십 년 전의 일이란 소림사에서 종남파가 구대문파에서 쫓겨난 ‘기산취악’ 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이십일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종남파는 구대문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형산파의 도전을 받고 소림사에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과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당시 종남파의 장문인은 천치검 하원지였으나, 실질적인 종남파의 최고고수들은 하원지의 사제들인 종남삼검이었다. 하원지는 사람은 좋으나 성격이 너무 여리고 물러서 무공 방면으로는 큰 소질을 보이지 않았다. 종남삼검은 풍뢰검 관소양과 낙일검 해조림(奚彫林), 질풍검 전풍개(典風開)의 세 사람을 일컫는 이름으로, 그중에서도 풍뢰검 관소양은 그 불 같은 성정(性情)과 강력한 무공으로 누구나가 첫손가락에 꼽는 종남파 제일의 고수였다. 하나 관소양은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의 일인인 조화신검 사견심에게 오십 초 만에 치명적인 검상(劍傷)을 당해 무릎을 꿇었고, 해조림과 전풍개도 각각 다른 오결검객들에게 패했다. 더구나 장문인인 하원지는 오결도 아닌 사결검격에게 패해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 일 이후 종남파는 다른 구대문파의 중론(衆論)에 따라 구대문파의 지위에서 쫓겨났으며, 형산파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여 지금은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종남삼검은 그때의 충격으로 크게 상심하여 두 사람은 아예 소림사에서 내려오자마자 어디론가로 떠나버렸고, 관소양은 부상당한 하원지를 부축하여 종남산으로 되돌아왔다. 하원지를 자신의 거처에 데려다 놓고 난 관소양은 그 길로 제자인 백동일을 데리고 은거에 들어갔으며, 그 직전에 혜공을 찾아와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후로 하원지는 병상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장문인의 지위를 태평검객 임장홍에게 넘겨주고 죽고 말았으며, 남아 있던 제자들도 상당수가 떠나버려 종남파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종남파는 문파의 본산(本山)조차도 남에게 빼앗기고 남아 있던 제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실로 수백 년의 전통을 지닌 명문정파의 몰락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동일은 한동안 말못할 감회와 슬픔에 젖은 듯 묵묵히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나 듯 혜공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대사님은 강호의 일에는 관여치 않는 분인데, 초가보의 고수들이 무슨 일로 대사님께 위협을 가한 것입니까?”

혜공의 주름살로 뒤덮인 얼굴에 한 줄기 어두운 빛이 떠올랐다.

“그건 그들이 노납에게서 누군가의 행방을 알아내려 하고 있기 때문이네.”

“누군가의 행방이라뇨?”

“사실은 몇 달 전에 노납은 우연히 부상에 신음하는 사람을 구하게 되었네. 그자들은 그를 찾고 있었던 것일세.”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혜공은 잠시 침음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몇 남지 않은 종남파의 제자 중 하나일세. 초가보에서는 풀을 제거할 때 뿌리까지 뽑는다는 속담처럼 종남파의 제자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제거하고 있는 중일세.”

백동일은 그 말에 안색이 굳어져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혜공은 한동안 그를 찬찬히 응시하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앞장서서 몸을 움직였다.

“노납을 따라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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