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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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8권 고목생화(枯木生花)편 : 6화


제72장. 검풍남녀(劍風男女)

괴인은 유소응을 안고 바람처럼 치달려 가고 있었다. 그의 몸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던지 창고가 무너지는 소리에 놀라 달려오던 몇몇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가 지나가면서 일으킨 바람에 휩싸여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지고 만 것이다. 한동안 미친 듯이 장원을 지나던 괴인은 담장을 뛰어넘어 서안의 남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조금 더 지나자 서안의 거리가 끝이 나며 넓은 벌판이 나왔다. 벌판은 눈에 덮여 있어서 온통 새하얀 설원(雪原)을 이루고 있었다. 그 설원에서 괴인은 달리던 몸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두 명의 남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남자는 짙은 청의를 입고 있었는데, 체구가 당당하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턱이 약간 각이 졌는데, 얼굴이 조금 얽은 곰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준수한 모습이었다. 나이는 대략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여자는 날렵한 남색 경장(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피부가 백설처럼 희고 고운 미녀였다. 아직 여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렸고, 그렇다고 소녀라고 할 수도 없는 미묘한 나이였다. 그녀의 등뒤에는 붉은색 수실이 달린 장검이 메어져 있었는데, 입고 있는 의복과 대비되어 산뜻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두 남녀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괴인에게서 삼 장쯤 떨어진 곳에 우뚝 선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괴인이 주루로 돌아가려다 방향을 바꾸어 외딴 설원으로 온 것은 그들이 자신을 쫓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괴인은 한 손에 유소응을 든 채로 묵묵히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답답함을 느낀 남색 경장의 미녀가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리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누군데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건물을 부수고 도적질을 한단 말인가요?”

그녀의 음성은 외모만큼이나 깜찍하면서도 상큼했다. 괴인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남색 경장의 미녀가 다시 무어라고 소리치려 할 때, 청의인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하고는 괴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나는 화산파의 일대제자(一代弟子)인 천개방(千蓋邦)이라 하며, 이쪽은 내 사매인 백수함(白水含)이오. 귀하의 이름을 알고 싶구려.”

청의인의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것이어서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면모를 풍기고 있었다. 화산파의 일대제자라면 당금 강호에서 누구도 무시 못할 신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가 예의를 갖추어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혔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순리(順理)였다. 그런데도 괴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백수함의 고운 얼굴에 한 줄기 성난 기색이 떠올랐다.

“정녕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군요.”

하나 천개방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다시 말했다.

“사정이 있어 이름을 밝히기 싫다면 유화상단에서 납치해 간 사람이라도 돌려주지 않겠소?”

그때 비로소 괴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사람을 돌려달라고?”

천개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정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백주(白晝) 대낮에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 사람을 다치게 하고 납치하는 것은 귀하 같은 고수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소.”

천개방은 괴인의 신법이 뛰어남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와 싸우지 않고 좋게 해결하려는 모양이었다. 명문정파의 제자들일수록 한없이 오만하고 남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천개방의 이런 모습은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괴인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천개방을 응시했다. 그 수정(水晶)처럼 차갑고 맑게 가라앉은 눈과 마주치자 천개방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나이는 나보다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정기(精氣)가 대단하구나. 이자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

그가 이리저리 괴인에 대해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괴인의 나직한 음성이 귓전에 들려 왔다.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군지 보시오.”

괴인은 수중에 들고 있던 유소응을 앞으로 내밀었다. 괴인의 손에 들린 사람이 전신의 옷이 갈가리 찢겨진 채 피투성이가 된 소년임을 확인한 천개방과 백수함은 모두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난매신검 해정설의 제자들로, 해정설의 지시를 받고 폭발이 난 곳으로 갔다가 괴인이 누군가를 옆구리에 끼고 바람처럼 달려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무작정 따라왔던 것이다. 체구가 작아서 처음에는 괴인이 여자를 납치한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인물이었고, 게다가 나이 어린 소년의 참혹한 상태는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천개방은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는 괴인을 향해 물었다.

“그 소년은 누구요?”

“그 집 주인의 손자요.”

뜻밖의 말에 천개방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정말이오?”

괴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개방은 그 말의 진위(眞僞)를 파악하려는 듯 괴인과 유소응을 유심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하나 괴인은 조금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유소응 또한 정신을 잃었는지 아니면 잠들었는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고 그의 팔에 늘어져 있었다. 괴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소년이 유방현의 손자라는 말을 선뜻 믿기도 어려웠다. 세상에 자신의 친손자를 이런 꼴로 만드는 사람이 더구 있단 말인가? 더구나 상대는 이제 겨우 열 살 남짓의 어린 소년이 아닌가? 천개방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귀하는 그 소년과 어떤 관계요?”

“이 아이를 책임지기로 한 사람이오.”

짤막한 말이었으나, 다른 어떤 구구절절한 말보다 그 의미가 강하게 전달되었다.
천개방은 순간적으로 소년과 괴인을 이대로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일었다.
하나 그는 이내 마음을 결정했다.
소년이 유방현의 손자라면 이대로 정체도 모르는 괴인의 손에 넘져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소년이 유방현의 손자가 아니라면 괴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 되므로 그를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결론은 한 가지 뿐이었다.
천개방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년을 내려놓고 떠나시오. 그러면 지금까지의 일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소.”

괴인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그의 얼굴에 꽂혔다.
무서운 시선이었으나 천개방은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았다.
아무리 무서운 눈빛이라 하더라도 이런 정도로 화산파의 일대제자를 겁줄 수는 없었다.
괴인은 한동안 천개방을 쏘아보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보았군. 내가 지금까지 당신의 질문에 순순히 응해 준 것은 당신이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소.”

천개방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나는 예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이 알고 있는 예의란 결국 강자(强者)의 논리(論理)에 불과할 뿐이오. 화산파의 제자가 하는 일은 절대로 틀릴 리 없다는 오만함이 담긴 예의지.”

“…!”

“아쉽게도 그런 오만함은 내게는 통하지 않소.”

천개방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귀하의 말을 들으니 마치 내가 화산파의 제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귀하를 억압하고 있는 것 같구려.”

“내 말이 틀렸소?”

천개방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단지 도리(道理)를 말하고 있는 거요. 귀하의 말대로 그 소년이 유 노야의 손자라면 유 노야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소년을 마음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는 말이오.”

“이 아이의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요?”

“그들 가족의 자세한 사정을 우리 같은 외인(外人)들이 어찌 알겠소? 다만 그 소년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하오. 그러니 당신은 그 아이를 내려놓고 물러나시오.”

천개방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로서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사부의 당부를 받았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괴인의 왼쪽 뺨에 나 있는 흉터가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입꼬리를 비틀며 웃고 있는 것인데, 왠지 모르게 냉혹하고 비정하게 보였다.

“몇 년 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을 설득하려 했었을 거요. 하지만 이제는 나도 사태를 해결하는 데는 그것말고도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천개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힘으로 해보겠다는 거요?”

괴인의 대꾸는 단순 명료했다.

“당신이 원하는 바이지 않소?”

천개방은 뜨끔하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그의 마음속에는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다.
괴인이 자신의 말 한마디로 순순히 소년을 내놓고 물러날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은 힘으로 판가름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 해도 상대방이 자신의 내심(內心)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는 것은 확실히 꺼림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거렁뱅이 같은데 보기보단 상당히 예리한 인물이군.’

천개방은 어색함을 떨치려는 듯 어깨를 쭉 펴며 한발 앞으로 나섰다.

“화산파라는 이름으로 귀하를 억압하고 싶지는 않소. 귀하가 내 손에서 십 초(十招)를 버틴다면 더 이상 귀하를 제지하지 않겠소.”

은근히 상대방을 자극시키는 말이었으나 괴인은 하를 내지도 않고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십 초라, 적당하군.”

천개방은 그의 말속에 묘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을 느꼈으나, 그 점을 내색하기도 전에 괴인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천개방은 괴인이 이토록 성급하게 달려들 줄은 몰랐는지라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으며 슬쩍 옆으로 한걸음 비켜 섰다.
그런데 달려들 줄 알았던 괴인이 돌연 몸을 멈추며 그에게 말했다.

“검을 뽑으시오.”

천개방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내가 검을 뽑으면 귀하는 오 초(五招)도 버티지 못할 거요.”

“그것도 좋지.”

괴인의 알쏭달쏭한 말에 천개방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때 이제껏 한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수함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사형이 나설 것도 없어요. 제가 상대하죠.”

이어 그녀는 천개방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등뒤에 메고 있는 장검을 뽑아 들고 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천개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백수함의 성격은 상큼한 외모와는 달리 과격하고 다부진 면이 있었으며, 그녀의 장검 또한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빠르고 날카로웠다.
눈앞에 검광이 번뜩인다고 느낀 순간, 그녀의 검은 어느새 허공을 압축하여 괴인의 옆구리를 베어 가고 있었다.
가히 화산파의 일대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멋진 솜씨였다.
괴인은 한 손에 유소응을 안은 채로 옆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백수함은 다시 한차례 손을 움직였다.
동작이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검광은 어느새 허공을 선회하며 괴인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와 같은 변초(變招)는 강호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 이번에도 괴인은 반격하지 않고 빙그르르 몸을 돌려 그녀의 검을 피해 버렸다. 두 번이나 헛손질을 하게 되자 백수함의 얼굴색이 조금 굳어졌다.

“이번에도 피할 수 있다면 내가 졌다고 인정하겠어요!”

여인답지 않은 표독한 소리를 내뱉은 백수함은 돌연 수중의 장검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부르르…

그녀의 검끝이 세차게 흔들린다 싶은 순간, 갑자기 검끝에서 수십 개의 검화(劍花)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검화는 순식간에 괴인의 전신을 휘감아 갔다. 검에서 검화가 발출되는 광경도 특이하지만, 그 검화가 확산되는 속도는 그야말로 눈부실 정도로 빨라서 피하려 했을 때는 이미 전신이 검화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이토록 빠르고 특이한 검법은 드넓은 강호천지를 뒤져보아도 오직 하나밖에는 없었다.

“매화검법(梅花劍法)이군.”

괴인의 입에서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매화검법! 모두 스물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나 각각의 초식이 모두 세 가지의 변초를 담고 있어서 실제로는 칠십이 초에 달했고, 그 각각의 변초에 포함된 변화는 거의 무궁무진할 정도로 다채로웠다. 화산파에 비전(秘傳)되는 검법은 수십 종(種)이 있지만, 그중에서 강호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매화검법이었다. 그 위력이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매화검법 자체가 워낙 변화무쌍하고 특이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백수함이 펼친 초식은 이십사수매화검법 중의 매화토염(梅花吐艶)이라는 것으로, 폭발하는 듯이 빠르고 갑작스러운 변초가 특징인 절초였다. 지금도 그녀가 일단 초식을 발출하는 순간, 괴인의 몸은 이미 매화토염의 초식 안에 휘감겨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검화에 휩싸여 있는 괴인의 오른팔이 한차례 움직이는 광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다음 순간,

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백수함이 펼쳐낸 검화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백수함은 손을 내뻗은 자세로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었다. 그녀의 장검은 괴인의 목덜미 아래 인후혈(咽喉穴)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장검의 끝이 괴인이 들고 있는 길다란 물체에 가로막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물체는 형태로 보아 검을 누더기 같은 천으로 둘둘 만 것이 분명했다. 그 검이 손잡이 부분이 자신의 인후혈을 노리고 날아든 백수함의 검끝을 정확하게 막아낸 것이다. 매화토염은 수십 개의 검화가 거의 동시에 쏘아져 나오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은 상대의 검이 자신의 어디를 노리고 날아드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가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괴인은 간단한 동작으로 그 공세를 저지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수함의 고운 얼굴은 얼음장같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나 그녀의 심장은 오히려 더욱 세차게 뛰고 있었다. 괴인이 막아낸 것은 단순히 그녀의 검끝만이 아니었다. 매화토염의 무서운 점은 전신의 진력을 일순간에 폭발하듯 발산하기 때문에 설사 상대방이 검을 막아낸다 할지라도 검 속에 포함된 가공할 진력(眞力)과 그로부터 파생된 검기(劍氣)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괴인은 자신의 검을 슬쩍 들어올리는 동작만으로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막아낸 것이다.

‘고수구나!’

그녀의 몸에는 한차례 기이한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의 실력이 자신에 못지않다는, 아니 어쩌면 더욱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불안함에 떨게 했다. 하나 이내 그녀의 마음에는 여인 특유의 호승심(好勝心)이 불 같이 일어났다.

“어디 이것도 막아내 보시지.”

그녀는 내뻗었던 검을 회수하여 자신의 품속에 감싸안는 듯이 했다가 다시 내밀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그녀의 검은 조금 전과는 달리 다소 완만하게 전개되었다. 검화도 수십 개가 아닌 단 두 송이만을 피어올랐다. 그녀의 검에서 나온 두 송이의 검화는 하나는 빠르게, 하나는 느리게 각기 괴인의 미간과 명치 부분을 향해 날아들었다. 단 두 개의 검화뿐이었지만, 그 위력은 수십 개의 검화로 뒤덮인 매화토염보다 오히려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더구나 조금 전의 매화토염은 대부분의 검화가 허초(虛招)이고 막상 노리는 곳은 한군데였는데, 지금의 초식은 두 개의 검화 모두가 실초(實招)였다.

이 초식은 매화검법 중의 매개이도(梅開二道)라는 것인데, 스물네 개의 매화검법 초식 중에서도 살기(殺氣)가 많기로 이름난 초식이었다. 두 개의 검화가 실제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기 때문에 하나만 막았다가는 아무 소용도 없을 뿐더러 날아드는 속도가 제각기여서 단 하나라도 막거나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도 괴인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검화는 점점 빨라지고 있는데, 명치 쪽을 노리는 검화는 갈수록 느려졌다. 문제는 빨라진 검화는 언제든지 느려질 수 있고, 느리게 날아오는 검화도 언제든지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속도의 변화가 어떻게 될지는 오직 검을 펼친 당사지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막 괴인의 지척까지 다가온 두 개의 검화가 갑작스런 속도의 변화를 일으켰다. 미간을 날아들던 검화가 마지막 순간에 속도를 늦춘 반면 그 뒤를 따라오던 두 번째 검화가 갑자기 속도를 내어 처음의 검화를 추월하여 먼저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괴인은 그때까지도 천으로 만 검을 손에 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각기 다른 두 개의 검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또한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막 검화가 자신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좌우로 한 번씩 흔들었다.

따땅!

연속되는 두 번의 격렬한 마찰음, 그리고 뒤이어 침묵이 이어졌다. 백수함의 손에 들려 있던 장검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고,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 손목을 움켜잡은 채 괴인을 쏘아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괴인은 손에 든 검을 한차례 흔드는 것만으로 그녀의 매개이도 초식을 완벽하게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 반탄력으로 그녀의 검조차 날려 버린 것이다. 그녀는 오른손을 철퇴에 강타당한 듯한 통증 때문에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장검은 그녀에게서 이 장여 떨어진 눈 위에 떨어져 있었다. 괴인을 쳐다보는 그녀의 커다랗게 뜨여진 동공(瞳孔)에는 경악과 분노, 그리고 은은한 두려움이 함께 깃들여 있었다.

사각… 사각…

갑자기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천개방은 몇 장 밖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장검을 집어들더니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자신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차고 맑게 울리는 검명(劍鳴)이 고요하던 주위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수중의 장검을 가슴께로 들어올린 천개방은 괴인을 향해 신중한 자세로 다가왔다.

“지난 사초(四招)는 귀하가 이겼소. 내 일초(一招)마저 막아낸다면 더 이상 귀하를 제지하지 않겠소.”

괴인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이 여전히 검을 만 물체를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정신을 잃고 있는 소년을 안고,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 그의 자세는 어딘가 허점이 보일 법도 한데 천개방은 좀처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침통하리만치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수함이 그를 상대했을 때 짐작은 했지만, 막상 자신이 검을 들고 괴인을 향해 다가갈 때 비로소 천개방은 괴인이 얼마나 무서운 실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괴인은 방심한 듯 서 있기만 했는데도 그는 손을 펼치기도 어려울 만큼 막중한 중압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신이 한차례 검을 펼치기만 해도 괴인의 몸 전체가 예리한 칼날이 되어 자신에게로 짓쳐 올 것만 같았다.

‘검귀(劍鬼)로구나. 사매는 이런 자에게 어떻게 덤벼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자신보다 무공이 떨어진 백수함이 이토록 무서운 중압감을 떨쳐내고 괴인에게 계속 검을 휘두른 것이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하나 사실 백수함이 괴인을 공격했을 때는 이런 중압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천개방의 무공이 그녀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오히려 괴인에게서 중압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두려워하거나 꽁무니를 뺄 수는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화산파의 제자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법이다. 천개방은 수중의 장검을 가슴 위로 치켜 올린 자세에서 조금식 느리게 괴인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중압감이 점점 커져서 몸을 움직이기도 힘이 들었지만 그는 마치 거대한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앞으로 전진했다. 마침내 괴인과의 거리가 일 장으로 가까워지자 천개방의 두 눈에서는 횃불 같은 섬광이 번뜩였다.

“차압!”

그의 입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가슴 높이로 치켜 올려졌던 장검이 빛살 같은 속도로 폭사해 나오며 마치 용틀임을 하는 듯이 마구 꿈틀거렸다.

파파파팍!

사방이 온통 미친 듯이 움직이는 검영(劍影)에 휩싸여 버렸다. 검이 너무 종횡(縱橫)으로 난무하는지라 어느 것이 허초이고, 어느 것이 실초인지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일견 무질서해 보이기조차 하는 이 초식은 매화검법 중에서도 절초(絶招) 중의 절초인 매화노방(梅花怒放)이었다. 제멋대로 휘두르는 것 같아도 매화노방의 모든 변화는 오랜 세월 동안 치밀하게 연구된 결과의 부산물이었다. 매화토염이 수많은 허초 중에 단 하나만의 실초를 숨기고 있는 데 비해, 이 매화노방은 수십 개의 허초와 수십 개의 실초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괴인의 전신은 거센 파도처럼 요동치는 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렸다. 그 소용돌이는 수십 개의 무서운 이빨을 가진 채 그의 몸을 단숨에 조각내 버릴 듯 세찬 기세로 몰아닥쳤다. 그 소용돌이가 막 몸을 강타하려는 순간, 미동도 않고 있던 괴인의 몸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그 움직임은 지나치게 느려서 마치 천천히 돌아가는 그림판을 보는 듯 했다. 천개방이 본 것은 괴인이 천으로 만든 물체를 쳐들어 자신이 펼쳐낸 검초 속으로 느릿느릿 집어넣는 광경뿐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오른팔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크윽!’

고막 속으로 커다란 진동이 일어나 한순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와 함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이 괴인에게서 이 장여 떨어진 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사형!”

백수함이 놀란 외침을 내지르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천개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겉으로 드러난 외상(外傷)은 없었다. 단지 아직까지도 전신의 신경이 충격의 후유증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천개방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고 자신이 검을 꼬옥 쥐고 있음을 확인하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다.

“나는 괜찮다.”

천개방은 자신을 부축하는 백수함을 손으로 조용히 물리쳤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괴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떠났느냐?”

천개방이 묻자 백수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과 격돌한 직후, 그는 그 탄력을 이용해서 몸을 날려 설원의 저편으로 사라졌어요. 저는 그를 쫓으려 했으나 사형이 쓰러진 것을 알고 그를 추적하기를 포기했어요.”

“잘했다. 그는 네가 상대할 수 없는 고수다.”

백수함의 얼굴에는 씁쓸한 표정이 가득했다.

“사형의 매화노방은 완벽했는데, 그자에게 그토록 간단하게 격퇴당할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느끼는 씁쓸함은 천개방이 느끼는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 천개방은 마음속의 허탈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초식은 완벽했을지 몰라도 내공(內功)이나 진재실학(眞才實學)이 그자에게 많이 뒤떨어졌다. 만약 사부님이 펼치셨다면 그자가 그토록 수월하게 뚫고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는 솔직히 확신(確信)할 수가 없었다. 사부인 해정서러이 매화노방 초식을 펼쳤다면 물론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났을 것이다. 설사 그렇더라도 괴인을 쓰러뜨리기에는 역불급(力不及)이 아니었을까? 천개방은 아직도 괴인이 어떻게 매화노방을 깨뜨렸는지를 알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괴인이 조금 전에 검집째 둘둘 만 물체가 아니라 검을 뽑은 상태였다면 자신을 결코 살아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그건 누라 뭐라 해도 장담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백수함 또한 천개방의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조그만 음성으로 물었다.

“사형은 혹시 그자가 사용한 무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천개방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짐작이 안 가는구나. 동작 자체는 단순했는데 기이한 현기(玄機)가 담겨 있어 그 무공의 깊이를 측량할 수도 없었다.”

“그자의 정체가 과연 뭘까요?”

천개방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모르겠다.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아직 강호에는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백수함은 급히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저런 정도의 고수가 강호에서 활약했다면 우리가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더구나 그 특이한 외모만으로도 능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지 않았겠느냐?”

백수함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자의 외모는…… 조금 특이하죠.”

천개방은 그녀의 음성에서 무언가 미묘한 점을 느꼈으나 그것을 내색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되었건 강호에 그런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이번 일은 가치가 있었다. 더구나 그 인물이 요즘 강호인들의 관심이 온통 집중되고 있는 서안에 나타났다는 것이 신경쓰이는구나.”

“사형은 그가 초가보의 고수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초가보에서 새롭게 외부에서 영입한 자일 수도 있지. 그들은 요즘 미친 듯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으니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직 속단(速斷)하기는 이르다. 우리가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전무(全無)하니까 말이다. 다만 그자의 출현이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이 일대의 정세에 어떤 변수(變數)가 될지 궁금하구나.”

천개방은 허공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출현이 과연 본파에게 득(得)이 될는지 실(失)이 될는지…… 실로 미묘한 일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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