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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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10화


제87장. 소년방화(少年方華)

취미사를 벗어난 진산월은 문득 자신으 옷소래를 내려다보았다. 옷소매 한쪽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금 잘려 나가 있었다. 진산월은 그 옷자락을 보며 씁쓸하게 웃엇다.

‘역시 맨손으로 그 정도 검객과 겨룬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군. 그자가 전력을 다했다면 나도 왼손을 다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진산월이 전력을 다했다면 위병국도 가슴팍이 으스러졌을 게 분명하다. 조금 전에 진산월이 사용한 것은 종남파의 무공 중 몇 가지였다. 특히 마지막에 위병국의 가슴팍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것은 장괘장권구식 중의 단봉조양이었다. 평범한 단봉조양으로 어떻게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위병국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병국이 검을 들고 공격을 해올 때부터 진산월은 그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의 검이 변화하는 모습까지 머리 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그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진산월은 위병국이 아무리 기이한 절초를 사용한다 해도 자신은 그 모든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붕에서의 삼 년은 결코 헛되이 보낸 세월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은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만날 일도 없겠지.’

진산월은 자신을 등쳐먹었던 그 당돌한 아가씨를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왠지 그녀와의 인연이 아주 끊긴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다. 그의 생각은 다시 취미사의 혈겁을 저지른 흉수에게로 넘어갔다. 어제 대왕루엣서 서문연상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진산월은 흉수에 대해 나름대로 몇 가지 가설(假說)을 세워 보았다. 오늘 직접 조사한 바로 그 가설 중 일부가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설의 나머지 부분이 맞을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으나, 만약 그것이 모두 옳다면 흉수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가설의 나머지 부분을 증명하기가 보통 까다로운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산월이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느릿느릿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흑흑……”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그건 분명히 울음소리였다. 진산월은 무심결에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화곡을 벗어난 종남산의 얕은 산자락 아래였다. 수풀이 우거진 산기슭 옆에 하나의 작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그 돌무더기를 반쯤 기댄 채 한 사람이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흐느끼고 있었다.

“흐흑……”

입술을 깨물고 최대한 소리가 흘러 나오지 않게 참고 있었지만, 그래서인지 나직하게 새어 나오는 그 울음소리는 다른 어떤 통곡보다 더욱 비통해 보였다. 진산월은 그 울음소리에 담겨 있는 한없이 우울한 절망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 자신도 한때는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흐느끼고 있는 그 사람의 곁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울음소리가 잦아들더니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쳐들었다. 어깨가 유난히 좁고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소년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제법 질이 좋은 것이었으나, 여기저기가 구겨지고 더렵혀져 별로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이는 십칠팔 세쯤 되어 보였으나, 한두 살쯤 더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앞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이 풀어 헤쳐져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었다. 소년은 멀지 않은 곳에 웬 낯선 사람이 우뚝 선 채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눈물 자국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이목구비는 제법 또렷한 편이었다. 소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저만치 걸어갔다. 진산월은 묵묵히 멀어져 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소년의 눈물 젖은 모습이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진산월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산을 내려왔다. 공교롭게도 그가 가는 방향이 소년과 같은지 저 앞에 비실거리며 걸어가는 소년의 모습이 계속 시야에 들어왔다. 소년은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걷고는 해서 진산월이 그리 빠르게 걷지 않았는데도 점차로 두 사람의 사이가 좁혀졌다. 가까이서 보니 어깨는 더욱 좁은 것 같았고, 유난히 긴 팔에 비쩍 마른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소년이 걷다가 몸을 휘청할 때면 금시라도 쓰러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얼마쯤 가니 간이천막을 쳐놓고 국수를 팔고 있는 작은 주막이 나타났다. 진산월이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마침 소년이 먼저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주막 안은 그리 넓지 않았으나, 사방을 양가죽으로 막아서 제법 훈훈했다. 대여섯 개의 탁자는 대부분이 비어 있었고,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두 명의 장한이 앉아서 뜨거운 닭국물을 훌훌 불며 먹고 있었다. 소년은 가장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무얼 드릴까요?”

배가 불룩 나온 주인이 탁자를 닦으며 묻자 소년은 두 명의 장한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과 같은 걸 주세요.”

그의 음성은 가늘고 나직해서 자칫했으면 여인의 목소리로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그때 다시 주막의 입구가 펄럭이며 진산월이 들어왔다. 소년은 아까 보았던 키가 큰 괴인이 자신을 따라 주막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움찔하여 고개를 숙였다. 가뜩이나 좁은 어깨각 더욱 왜소해지며 금시라도 머리가 목안으로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진산월은 주위를 쓰윽 둘러보더니 소년의 옆에 있는 탁자로 가서 앉았다. 어차피 주막이 크지 않아서 어디를 앉아도 가까운 거리였으나, 소년의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진산월은 닭국물 하나와 만두를 주문했다.

그런 다음 옆에 앉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아예 고개를 바닥에 처박다시피 한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 모습이 측은해 보이기도 하고 의아해 보이기도 했다.

‘무척 소심한 녀석이군. 무엇이 두려워서 저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일까?’

진산월은 말이라도 걸어 볼까 하다가 공연히 그를 더욱 불안하게 할 것 같아 그냥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때 그는 주막의 입구에 있던 두 명의 장한이 소년을 힐끔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연신 소년을 쳐다보더니 자기들끼리 무어라고 나직하게 소곤거리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들의 시선이 소년의 손목을 향한 것을 보고 이내 그들의 의중을 짐작했다.

소년의 가느다란 오른 손목에는 유난히 값나가 보이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 팔찌는 언뜻 보기에 청옥(靑玉)으로 만든 것 같았는데, 작은 구슬이 여러 개 박혀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고가품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팔찌를 보는 두 명의 장한의 얼굴에는 탐욕스런 빛이 감돌고 있었다.

곧 주인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왔다.

소년은 뜨거운 닭국물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그것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빨리 먹고 이곳을 나가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진산월은 천천히 닭국물과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그전처럼 토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나 예전의 그 먹성 좋던 시절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닭국물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으나, 만두는 맛이 형편없었다.

진산월은 딱 한 개를 맛보고는 나머지는 손도 대지 않았다.

진산월이 닭국물을 반도 먹지 않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음식을 먹기 시작한 소년이 벌써 다 먹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계산을 하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진산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막을 벗어나는 소년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두 명의 장한도 황급히 주막을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도 병(病)인가? 자기 한 몸도 주체를 못하는 놈이 자꾸 쓸데없는 일에 끼여들다니……’

그는 계산을 하고 주막을 나왔다.

주막에서 장안의 남문까지는 오 리(五里)쯤 되었다.

그곳은 지나가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곳곳에 숲 속이 있어서 악당들이 일을 벌이기에는 아주 적당했다.

진산월은 한차례 주위를 둘러보고는 근처에서 가까운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숲 속에 들어가기도 전에 소년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었다.

“왜 이러세요?”

소년의 음성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어 가뜩이나 가느다란 목소리가 거의 끊어질 듯 애처롭게 들렸다.

“우헤헤…… 이놈은 사내 녀석이 완전히 계집애 같은 소리를 내고 있구나. 네놈이 차고 있는 팔찌가 아무래도 내가 예전에 잃어버린 물건 같아서 그러니 좋게 말할 때 순순히 보여 주어라.”

“아…… 안돼요!”

“누가 빼앗아 간다고 했느냐? 확인해 보고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면 다시 돌려주겠다.”

진산월은 천천히 숲 속으로 들어갔다.

사오 장쯤 들어가니 제법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는 예상하고 있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 명의 장한은 험상궂은 표정을 한 채 소년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소년은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이…… 이건 내 거예요. 절대로 당신들이 잃어버린 물건이 아니란 말이에요.”

두 명의 장한 중 수명이 텁수룩하게 난 텁석부리 장한이 눈을 부라렸다.

“이 자식이 말귀를 못 알아듣네! 꼭 손을 써야 정신을 차릴테냐?”

옆에 있던 쥐눈의 장한이 갈라터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무섭게 하지 말고…… 잘 타일러 봐.”

쥐눈의 장한은 누구에게 얻어맞았는지 양쪽 뺨이 퉁퉁 부어 있어서 가뜩이나 작은 눈이 거의 감겨져 있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입 안이 모두 텨졌는지 음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텁석부리 장한 또한 안색이 약간 파리한 것이 몸에 부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기세 등등한 눈으로 소년을 노려보며 계속 험악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내가 일단 손을 대면 그냥 팔찌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네놈의 팔목을 모조리 부러뜨리고 말 것이다. 그래도 내놓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그래도 제법 형식을 갖추는 것처럼 보이더니 지금은 아예 노골적으로 협박을 했다.

소년은 그때마다 학질 걸린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계속 도리질을 했다.

“안 돼요. 이건 절대로 내줄 수 없어요.”

“이 자식이 정말!”

텁석부리 장한이 마침내 솥뚜껑만한 주먹을 번쩍 쳐들고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어억!”

소년은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진산월은 그를 구해 주기 위해 몸을 날리려다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몸을 멈춰 세웠다. 금시라도 텁석부리 장한의 주먹에 나가떨어질 것 같던 소년이 몸을 옆으로 비틀어 용케도 장한의 주먹을 피한 것이다. 그 바람에 텁석부리 장한은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 순간, 소년이 내지른 오른발이 장한의 발목을 가격했다.

콰당!

텁석부리 장한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이쿠!”

보기 흉하게 바닥에 널브러진 텁석부리 장한은 이내 오만가지 인상을 찡그리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꼬마놈이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명년(明年)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니 그렇게 알아라!”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쥐눈의 장한이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텁석부리 장한에게 소곤거렸다.

“이봐, 괜찮을까?”

“괜찮지 않고. 이건 그냥 내가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풀에 넘어진 거야.”

쥐눈의 장한은 계속 망설였다.

“저놈도 며칠 전의 그 계집애처럼 실력을 숨긴 고수가 아닐까?”

텁석부리 장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그의 어깨를 탁 쳤다.

“천하의 비천서(飛天鼠)가 계집애한테 당하더니 새가슴이 되었구나. 걱정 말게. 그 계집은 워낙 총기 있고 다부져서 우리가 당했지만, 저놈을 보게. 저런 겁쟁이가 무림 고수면 세상에 고수 아닌 사람이 없을걸세.”

쥐눈의 장한은 한차례 더 소년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이번에는 틀림없겠지.”

“나만 믿으라구. 아무려면 우리가 그렇게까지 재수가 없겠나?”

텁석부리 장한은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소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소년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울상을 지었다.

“제발 그냥 보내 주세요. 돈이라면 열 냥쯤 있으니까 그걸 드릴게요.”

열 냥이라는 말에 텁석부리 장한은 잠시 마음이 동하는 모습이었으나 쥐눈의 장한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도리질을 했다.

“우리가 무슨 거지인 줄 아느냐? 그깟 돈을 탐하게. 단지 나는 잃어버린 내 물건을 되찾으려는 것뿐이다.”

쥐눈의 장한이 옆에서 재빨리 지껄였다.

“남의 물건을 그동안 함부로 썼으니 그 열 냥은 사용료로 받는 것이 좋겠네.”

텁석부리 장한은 징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자네 말이 맞네. 이놈!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그 팔찌와 열 냥을 내놓고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오늘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소년의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졌다. 소년이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떨고만 있자 텁석부리 장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년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놈!”

텁석부리 장한이 휘두르는 주먹은 상당한 위력이 있어서 제대로 맞으면 갈비뼈 몇 대쯤은 그대로 부서져 나갈 것 같았다. 게다가 이번에 그는 전력을 다했는지 그 속도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때를 같이하여 쥐눈의 장한도 소년의 뒤로 살금살금 돌아가서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을 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소년은 몸을 덜덜 떨면서도 옆으로 두 걸음 이동했다. 그러자 텁석부리 장한이 내뻗은 주먹이 이번에도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어?”

텁석부리 장한은 분명 자신의 주먹 아래 노출되어 있던 소년의 모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자 어리둥절한 외침을 토해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진산월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보법(步法)을 익혔군. 단지 너무 겁을 집어먹어서 그 위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구나.’

처음에 소년이 텁석부리 장한을 바닥에 나뒹굴게 할 때 진산월은 소년의 동작이 나름대로 현기(玄機)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장내에 끼여들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텁석부리 장한의 일격을 잘 피해냈다. 하나 주먹이 빗나가 허점투성이인 텁석부리 장한을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주춤 물러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달려들 용기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소년의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쥐눈의 장한에게 몸의 뒷부분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흐흐…… 애송이는 애송이구나.’

쥐눈의 장한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날리며 소년의 뒤통수를 향해 장검을 찔러 갔다. 그것은 정말 악랄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다.

소년은 설마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노리고 올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지 텁석부리 장한에게만 온통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소년의 귓전으로 누군가의 전음성(傳音聲)이 들려 왔다.

“앞으로 몸을 숙이고 횡단무산(橫斷巫山)을 펼쳐라!”

그 음성이 워낙 갑작스러워서 소년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자신의 몸 뒤에서 예리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년은 몸을 앞으로 바짝 숙인 채 횡단무산의 일식으로 오른발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세차게 회전시켰다. 시퍼런 장검 하나가 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뒤로 휘둘러진 그의 오른발에 무언가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퍽!

“아이고!”

막 소년의 뒤통수를 베었다고 생각하고 득의만면해하던 쥐눈의 장한은 꼼짝없이 옆구리를 소년의 오른발에 격중당하고 허리를 절반으로 꺾었다. 그때 다시 소년의 귓전으로 예의 전음성이 들려 왔다.

“급류용퇴(急流勇退)의 식으로 몸을 돌리며 개창망월(開窓望月)을 펼쳐라!”

소년은 무심결에 몸을 옆으로 뉘어 빙글 돌리며 오른손을 아래에서 위로 힘껏 내질렀다. 그 주먹은 옆구리를 부여안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던 쥐눈의 장한의 아래턱을 사정없이 가격해 버렸다.

쾅!

쥐눈의 장한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허공으로 몸이 솟구쳤다가 바닥에 쭉 뻗어 버렸다. 그는 몇 차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아래턱이 부서진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텁석부리 장한은 쥐눈의 장한이 순식간에 작살 맞은 개구리처럼 쭉 뻗어 버리자 놀라고 당혹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감히 소년에게 덤비지도 못하고 그의 눈치를 보다가 소년이 자신에게 손을 쓸 기색이 없자 바닥에 뻗어 있는 쥐눈의 장한을 들쳐업더니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쏜살같이 도망갔다.

소년은 우두커니 서서 텁석부리 장한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다가 퍼뜩 생각이 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황급히 숲 속을 벗어나 달려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망설이다가 그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기다리세요.”

진산월은 소년의 음성을 듣자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가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도……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신경 쓸 거 없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소년은 다시 그에게로 달려갔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냐?”

소년은 쭈삣거리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진산월에게 내밀었다.

“야…… 약소하지만 도와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소년이 내민 것을 내려다본 진산월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은 은화 열 냥이었던 것이다. 소년은 가뜩이나 차갑고 무서운 진산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몸을 덜덜 떨었다.

진산월은 한마디 심한 소리를 하려다 꾹 눌러 참고는 말없이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열 걸음이나 걸었을까? 갑자기 소년이 다시 달려오더니 그의 앞에 넙죽 엎드리는 것이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 몰라서……”

진산월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진산월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소년은 쿵쿵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용서해 주세요. 미안합니다……”

소년의 얼굴은 삽시간에 흙먼지로 뒤덮였고, 이마는 피부가 까져서 퉁퉁 부어 올랐다. 진산월은 그 모습을 내려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나라.”

소년은 머리를 바닥에 찧는 것을 멈추고 쭈삣거리며 일어났다.

“그…… 그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느냐? 사람마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방법이 다를 뿐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내가 속이 좁았던 게지.”

소년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고맙습니다.”

진산월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항상 그렇게 남에게 사죄를 하고 다니느냐?”

“예?”

“지나친 겸양이나 자기 비하(自己卑下)는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법이다. 너는 좀더 네 자신을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년은 뜻밖의 말에 멍하니 진산월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싸늘하게 굳어 있어 그토록 무섭게 느껴졌던 진산월의 얼굴에는 진지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괜찮은 무공 실력을 지니고도 하류배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도 네가 네 자신을 너무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움츠리고 사는 거냐?”

소년의 얼굴이 실룩거리더니 고개가 팍 떨구어졌다. 고개 숙인 소년의 목덜미가 유난히 가늘어 보였다.

진산월은 소년이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산월은 한동안 소년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 소년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이해 못할 거예요, 절대로……”

그 음성은 너무 낮아서 유심히 듣지 못했다면 단지 소년이 웅얼거리는 것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진산월은 다시 소년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떨군 소년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어요……”

“무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냐?”

소년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소년의 얼굴은 눈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유난히 빨개진 두 눈 속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빛이 담겨 있었다.

“아무도 당신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겠죠? 언제나 남에게 의지가 되고, 맡겨진 일은 빈틈없이 해치우겠죠? 주위에 기대하는 사람도 많고, 개중에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도 나에게 무어라고 하지 않아요.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기대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말이에요.”

소년의 음성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격정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소년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에요. 내가 있어도 누구 한 사람 나한테 말을 걸지 않고, 일을 시키지도 않고,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아요. 내가 무어라고 해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어요.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고, 마음을 터놓을 친구는 더더욱 없죠.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

“그런데 나를 본 지 반시진도 안 된 당신이 어떻게 나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기껏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나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악당들한테 나를 도와 주었다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소년은 갑자기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세상의 어느 누구도……”

소년의 낮은 음성 속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깊은 슬픔과 고통, 번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작고 좁은 어깨가 보이지 않는 무겁고 거대한 짐에 짓눌려져 있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한동안 소년의 숙여진 머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물론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다른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원래가 고독(孤獨)한 존재다.”

이번에는 소년이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 남의 이해를 구하려고 하지 마라. 대신에 네가 먼저 남을 이해하려고 애써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진심으로 너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이렇게 힘든데도요? 나 혼자 지탱하기도 힘겨운데 남을 먼저 이해하라고요?”

“원래 고통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는 법이다. 네가 남을 이해하게 될수록 너의 고통은 줄어들고 기쁨은 늘어날 것이다.”

“……!”

“너는 양친(兩親)이 살아 계시냐?”

진산월의 돌연한 물음에 소년은 움찔하더니 고개를 쳐들었다.

“아버지만……”

“그러면 너는 나보다 최소한 두 배는 행복한 것이다. 세상에는 부모 없는 고아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들의 고통이 어떠한지는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지.”

소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때로는 없는 게 나을 때도 있어요. 나는 늘 그렇게 꿈꾸며 살아왔어요.”

진산월의 눈빛이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막상 닥치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그 사람이 밉다고 해도 말이지.”

“나는 절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소년이 모처럼 다부지게 말하자 진산월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조그만 음성으로 말했다.

“방화(方華)라고 해요.”

“나이는?”

“열여덟 살이에요.”

“특별히 갈 데가 있느냐?”

소년 방화의 얼굴이 다시 시무룩하게 변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면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그 말에 방화는 다시 진산월을 올려다보았다. 방화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높은 곳에 있는 진산월의 얼굴은 홀쭉하게 마른 데다 커다란 흉터까지 있어 매서워 보였다. 하나 방화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최소한 방화는 그렇게 느꼈다.

그는 그 눈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더니 조그만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폐가 되지 않을까요?”

진산월은 조용히 웃었다.

“그렇진 않을 게다.”

“하지만…… 폐가 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러면 떠날 게요.”

“그러지.”

방화는 다시 머뭇거리자 입을 열었다.

“내가 떠나고 싶을 때도 떠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것도 승낙하마.”

“제게 어떤 걸 요구하셔도 다 들어드리겠지만, 이 팔찌만은 달라고 하지 마세요.”

진산월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제서야 방화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웃어 보는 미소였다. 미소가 떠오른 방화의 얼굴은 지금까지의 궁상맞고 비참한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준수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 미소를 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도 한 가지를 약속해라.”

“그게 뭐죠?”

“앞으로는 좀더 자주 웃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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