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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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11화


제88장. 신산곡수(神算谷愁)

대안탑에 조금씩 오후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조일평이 대안탑의 아래에 도착했을 때, 이미 화산파의 고수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일평의 뒤에서 풍시헌과 함께 그를 따라오던 남호가 그들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많이도 왔군. 저들 중 다른 자들은 신경 쓸 거 없고, 두 사람만 조심하면 될걸세.”

이어 그는 중앙에 있는 눈부신 백발의 백의노인을 가리켰다.

“저 노인이 화산파의 장로인 난매신검 해정설이네. 천개방의 사부로, 순수한 검법 실력만 따지자면 십대자아로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정의 검객이지.”

해정설의 명성은 조일평도 익히 들어오고 있었다. 알려진 바로는 해정설은 화산파에서도 매화검법을 가장 완벽하게 터득한 인물로, 그의 매화검법의 경지는 백년 전의 천하제일고수였던 신검(神劍) 조일화(趙日華) 이후 최고라고 했다.

남호는 이어 해정설의 옆에 서 있는 알록달록한 화의(華衣)를 입은 중년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해정설도 해정설이지만 자네가 진짜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바로 저자일세.”

“저자가 누구요?”

“자네는 혹시 화산파에 계산이 비상하게 빠르고 심계가 깊어서 누구나가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나?”

그 말에 조일평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럼 저자가 신산(神算) 곡수(谷愁)란 말이오?”

“그렇네. 저자는 원래 화산파에서 집법(執法)을 맡고 있어서 여간해서는 산을 내려오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 여기까지 온 것으로 보아 화산파에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짐작이 가는군 그래.”

남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표정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조일평이 나타나자 해정설의 옆에 서 있던 천개방이 그를 맞았다.

“과연 약속을 지켰구려.”

조일평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천개방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마검 조일평다운 말이군. 하지만 본파 앞에서 너무 큰소리를 치는 건 조심해야 할 거요.”

그의 도발적인 말에도 조일평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귀하가 오늘 일의 주재자요?”

조일평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천개방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나 그가 무어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화의를 입은 중년인이 껄걸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하하…… 천 노제(千老弟)는 잠시만 뒤로 물러서게.”

그의 음성은 카랑카랑해서 듣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의 외모 또한 지나치게 비쩍 마르고 길쭉해서 강퍅해 보였다. 하나 그의 말을 듣자 천개방은 공손하게 인사를 한 후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명을 받겠습니다.”

천개방은 일대제자 중에서도 요즘 들어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어서 화산파에서의 지위가 그다지 낮지 않았다. 그런데도 화의중년인의 한마디에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게 따르는 것만 보아도 화의중년인이 화산파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화의중년인은 천천히 조일평의 앞으로 다가와서 유심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아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는 마검 조일평이로군. 나는 곡수라는 사람일세.”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하하…… 나 같은 사람이 자네에게 비할 수 있겠나? 아무튼 만나게 되어 반갑네.”

이어 곡수는 은근한 눈으로 조일평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된 이유는 잘 알 리라 믿네. 회담 여하에 따라 우리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敵)이 될 수도 있네.”

“무엇이 친구고, 무엇이 적이오?”

“말하기 시원시원해서 좋군. 자네가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걸세. 그렇지 못하고 의혹만 가중된다면 어쩔 수 없이 적이 되어야겠지.”

조일평의 태도는 여전히 침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소. 그것으로 당신들의 궁금증이 해소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그 판단은 내가 할걸세. 자네는 그저 보고 들은 것만을 사실대로 말해 주면 되네.”

조일평은 그렇게 했다. 곡수는 묵묵히 조일평의 말을 듣고 있더니 그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말한 것은 많은 부분이 내가 조사한 것과 일치하는군.”

“그럼 오늘 일은 이것으로 끝나는 거요?”

곡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야 모처럼 만난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 나는 자네의 말에서 세 가지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했네. 그것에 대한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네.”

조일평은 곡수가 자신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하자 호기심이 일었다.

“세 가지라니……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흉수가 왜 사 대협과 굉지선사의 목적을 잘랐느냐 하는 것일세.”

“……!”

“둘째는 사 대협의 목적을 자를 정도의 고수가 왜 일반 승인들은 팔다리를 잘라 살해했나 하는 것이고, 셋째로 하필이면 흉수가 왜 사 대협이 취미사에 도착한 날 오후에 살인을 저질렀느냐 하는 것일세.”

곡수는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놓고 잠시 말을 멈춘 채 조일평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반응을 알아보려는 듯이……
조일평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첫번째는 내가 흉수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고, 두 번째 역시 내가 흉수가 아니라서 모르겠소. 그리고 세 번째 또한 내가 흉수가 아니라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구려.”

곡수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똑똑한 사람이니 조금만 잘 생각해 보게.”

그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나오자 조일평도 더 이상 퉁명스럽게 대할 수는 없었다.

“첫째는 아마도 흉수가 노릴 수 있는 부위가 그곳 뿐이기 때문일 것이며, 셋째는 그가 취미사 내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사 대협이 왔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둘째 이유는 솔직히 모르겠소.”

곡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정직한 사람일세. 그렇다면 내가 말해 주지. 흉수가 사 대협의 목젖을 자른 것은 자네 말대로 그 방법 외에는 사 대협을 일초에 쓰러뜨릴 수 없었기 때문일세.”

“……”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사 대협은 본파의 태청강기(太淸?氣)를 오랫동안 수련하여 웬만한 도검(刀劍)에도 쉽게 상처를 입지 않는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네. 단지 그분은 오래 전에 목에 부상을 입어서 목젖 부위만이 약점으로 남아 있었네.”

곡수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반짝거렸다.

“그 부상은 오래 전에 그분의 숙적(宿敵)에게서 입은 것이지. 자네도 알지 모르겠군. 황성고검(荒城孤劍) 나력지(羅歷之)라고……”

조일평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분은 내 사부님이오.”

곡수는 짐짓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오! 그랬군. 이십 년 전의 장성제일검객(長城第一劍客)을 사부로 모셨기에 오늘의 일검혈견휴가 존재할 수 있었군.”

곡수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네도 잘 알겠군. 두 분은 오래 전에 서로 승부를 주고받았던 사이였지. 당시 두 사람의 승부는 일승일패(一勝一敗)였는데, 두 번째 승부에서 사 대협이 목에 일검을 맞고 패하고 말았다네.”

“……!”

“문제는 흉수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느냐 하는 것일세. 사 대협의 약점이 목 부위라는 것은 본파에서도 사 대협과 오랜 친분을 쌓은 몇몇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네. 흉수가 사 대협의 목젖을 노린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정확한 정보에 의한 것인가…… 참으로 미묘한 문제 아닌가?”

조일평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곡수는 그를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둘째로 흉수가 왜 사 대협과 굉지선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목젖을 자르지 않고 다른 수법을 사용했는가 하는 점일세. 만일 그가 모든 사람들의 목젖을 잘랐다고 생각해 보세. 그러면 자신의 수법이 전문적으로 사람의 목젖을 노리는 것임을 쉽게 드러내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문득 강호에서 오랫동안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어떤 무공이 떠올랐네.”

곡수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중인들의 귀에는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똑똑하게 들렸다.

“그것은 마도(魔道)에서도 아주 특이한 집단에서만 전해 내려온다는 살인수법이었네. 그 수법은 전문적으로 사람의 특정 부위만을 노리는 것인데, 일단 발출되면 누구도 피해낼 수 없다고 하네. 그 초식은 모두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번째 단계는 사람의 목을 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심장을 노리며, 세 번째 단계는 미간(眉間)을 노린다고 하네. 일 단계만 익혀도 능히 강호에서 특급살수(特級殺手)로 행세할 수 있고, 이 단계를 익히면 살수계의 제왕(帝王)이 될 수 있으며, 삼 단계에 도달하면 가히 죽음의 신(死神)이라 불려 마땅하다고 했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소. 그것은 탈혼검(奪魂劍)의 전설이 아니오?”

“그렇다네. 그래서 나는 흉수가 사 대협을 죽일 때 사용한 것이 탈혼검의 일 단계인 측탈혼(側奪魂) 수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네. 만약 그렇다면 흉수가 사 대협과 굉지선사는 목젖을 잘랐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팔다리를 잘라 살해한 이유가 납득이 되지. 함부로 그 수법의 흔적을 여기저기에 남겨 남의 주목을 받기는 싫었을 테니까.”

곡수는 여기까지 말을 한 후 한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렇다면 무서운 일이지. 소문으로만 떠돌던 탈혼검을 익힌 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니 말일세.”

조일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곡수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세 번째는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일세. 흉수는 사 대협이 그날 오전에 취미사에 도착한 것을 알고 오후에 혈겁을 저지른 것일세. 그렇다면 그는 취미사의 사정에 대해 손바닥처럼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겠지. 그가 취미사의 승려들을 하나도 살려 두지 않은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이 되네. 전형적인 살인멸구(殺人滅口)의 수법인 셈이지.”

곡수는 오른손을 쳐들더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생각해 보세. 흉수는 첫째로 사 대협이 과거에 목젖을 부상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며, 둘째로 탈혼검 수법을 익히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셋째로 취미사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일세. 굉지선사는 자네의 사부인 황성고검과 절친한 사이였네. 그러니 자네도 취미사에는 여러 번 들렀겠지?”

“……!”

“결국 흉수의 세 가지 조건 중 두 가지가 자네와 부합된단 말일세. 게다가 다른 한 가지도 자네가 익히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네. 이러니 우리가 자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단순한 억측 때문만은 아닌 것일세.”

조일평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하나 그의 뒤에서 지금까지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풍시헌과 남호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지금까지 화산파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화산파는 나름대로의 치밀한 논리를 가지고 조일평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거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군. 자칫하면 조일평이 꼼짝없이 흉수로 몰릴지도 모르겠는걸.’

그때 조일평이 불쑥 입을 열었다.

“시체들의 상흔(傷痕)으로 보아 흉수는 빙검의 일종을 사용한 것이 확실하오. 그건 어떻게 생각하오?”

곡수는 그가 그것을 물어 볼 것을 예상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남호는 공연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쩐지 조일평이 점점 더 올가미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아주 좋은 질문을 했네. 사 대협의 시체는 우리가 자세히 조사를 했지. 자네 말대로 확실히 흉수가 사용한 것은 빙검이었네. 그중에서도 최상급의 검이 분명하네.”

풍시헌이 옆에서 재빨리 끼여들었다.

“그런데 조 사형에게는 그런 검이 없소. 그건 명명백백한 사실이오.”

곡수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하얀 이를 드러냈다.

“과연 그런지 한번 생각해 보세. 흉수가 빙검을 사용한 것을 알고 나는 이 정도의 음한지기(陰寒之氣)를 지닌 신검을 지닌 자가 무림에 얼마나 있는지 조사해 보았네. 유력한 사람은 모두 세 명이더군.”

“……”

“그중 한 사람은 형산파의 오결검객 중 하나인 냉홍검 고진이었네. 그의 냉염신검이라면 능히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하나 사람을 풀어 조사해 본 결과 고진은 흉수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네. 혈겁이 벌어지기 이틀 전이 마침 형산파 장문인의 생신이었는데, 그 생신 축하 자리에 고진이 참석했음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었네.”

이틀이라면 제아무리 신법의 최고수라 할지라도 형산에서 장안까지 달려와 사람을 살해할 수는 없었다.

“또 한 사람은 신목령주일세. 그의 신물(信物)인 한목신검은 능히 강호제일의 빙검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아쉽게도 신목령주에 대해서는 우리도 조사에 어려움이 있네. 그의 행적 자체가 불투명한데다 설사 그가 어디 있는지 안다 해도 그에게 직접 찾아가 물어 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건 누구나가 인정하는 일이었다. 화산파가 아무리 구파일방 중의 하나이며 당금 강호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세력이라고 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신목령주를 흉수로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 뒷감당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곡수의 입가에도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단지 신목령주의 강호에서의 지위와 지금까지의 행보를 생각해 볼 때 이런 방식의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네.”

“남은 한 사람은 누구요? 그게 나란 말이오?”

“물론 아닐세. 그는 검보의 전대 보주였던 검왕 서문동회일세. 서문동회가 소장한 십이신병 중 빙백검은 음한지기가 강하기로 따지면 신목령주의 한목신검에 비길 만한 신검(神劍)일세.”

곡수의 음성이 한층 진지해졌다.

“며칠 전부터 서문동회가 은거하고 있던 검심각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네. 서문동회가 자신의 수하들인 해천팔검을 긴급히 소집했으며, 그들 중 몇 사람이 서문동회의 지시를 받고 강호로 나왔다는 것일세.”

“……!”

“그래서 우리도 그들의 행적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지. 더군다나 그들 중 세 사람의 모습이 장안에 나타났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네. 그런데 그와 함께 우리는 은밀한 정보 하나를 입수했네.”

“그게 무엇이오?”

“서문동회가 수하들을 푼 것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십이신병 중의 하나를 분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일세.”

조일평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그 검이 바로……”

“맞았네. 서문동회가 잃어버렸다는 신검이 바로 빙백검일세. 검심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빙백검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서문동회가 그토록 다급하게 수하들을 소집했던 것일세.”

“……!”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해천팔검 중의 세 사람이 장안에 나타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들은 취미사에서 빙검에 의한 혈겁이 벌어졌다고 하자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일세.”

곡수의 시선이 조일평의 얼굴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자네는 어디에 있었나?”

조일평의 짙은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곡수는 조일평의 대답을 가디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자네의 행적을 조사했지. 취미사에 오기 전에 자네는 하북성의 낭아산(狼牙山)에서 무극도(無極刀) 팽회(彭匯)와 비무를 했더군. 그곳은 마침 검보가 있는 보정(保定)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일세. 일이 참 공교롭다고 생각되지 않나?”

그 말을 듣자 풍시헌과 남호의 얼굴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졌다. 남호는 자신의 불안한 생각이 그대로 적중하자 마음이 절로 다급해졌다.

‘상황이 너무 불리해졌군. 일이 이렇게 공교롭게 될 수도 있나?’

조일평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듯 했다. 하나 그는 여전히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귀하의 말은 꼭 내가 검보에서 빙백검을 훔쳤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곡수의 얼굴에 조금 전과는 다른 차갑고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네. 자네가 자네 입으로 말한 거지.”

“나는 더 할말이 없소.”

“나도 마찬가지일세.”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와 함께 장내의 공기가 급속도로 싸늘하게 변해 버렸다. 풍시헌은 화산파에서 금시라도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 것 같은지 자신도 검의 손잡이를 잡은 채 조일평의 옆에 나란히 섰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남호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곡 대협이 생각 못한 게 있소.”

곡수는 난데없이 중년인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자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귀하는 누구요?”

남호는 싱겁게 웃었다.

“나는 남호라는 사람이오. 곡 대협 같은 분이 알 리 없는 무명소졸이니 나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상대의 넉살좋은 말에 곡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것은 그가 누군가에게 흥미를 느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내가 생각 못한 게 무엇이오?”

“곡 대협은 세 가지의 이유로 조 대협이 흉수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소. 그것은 첫째로 흉수가 사 대협의 목이 약점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로 흉수가 취미사의 사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셋째로는 흉수가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빙백검이 실종되었을 때 검보 근처에 조대협이 나타났었다는 것이오. 내 말이 맞지요?”

곡수는 그의 말에 관심이 가는지 짤막하게 말했다.

“계속해 보시오.”

“그런데 뒤집어서 말하면 이 세 가지 이유는 모두 조 대협이 흉수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소. 첫째로 사 대협의 약점이 목이라는 것은 그분이 태청강기를 완벽하게 익혔기 때문이오. 다시 말해서 태청강기를 익히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이 유일한 약점으로 남지는 않았을 거란 뜻이오.”

“……!”

“그렇다면 흉수는 사 대협의 약점이 목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이 태청강기를 완성하여 그외에는 다른 약점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하오. 그런데 조금 전에 곡 대협도 말했다시피 사 대협이 태청강기를 익힌 것은 바깥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었소. 솔직히 무림에서 십여 년이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사람이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소?”

남호는 한쪽에서 묵묵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조일평을 가리켰다.

“그러니 단순히 목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를 흉수로 모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하오. 목의 약점과 태청강기에 대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사 대협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오.”

곡수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당신은 흉수가 본파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요?”

남호는 히죽 웃었다.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당신이 지금 자기 입으로 한 말이오.”

남호가 조금 전에 곡수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풍시헌이 통쾌한지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곡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냉랭해졌다.

“나뿐만 아니라 본파를 모독하는 말이로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소? 사 대협과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화산파의 고수들은 아니지 않겠소? 찾아보면 의외의 인물이 나타날 수도 있을 거요.”

그 말에 곡수의 몸이 한차례 가늘게 떨렸다.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 이내 그는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두 번째는 뭐요?”

“첫번째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취미사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지 조 대협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요. 게다가 당시 조 대협은 하북성에서 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 대협이 언제 취미사에 왔는지를 알고 있을 리가 없소. 그가 취미사에 사람을 심어 놓고 수시로 전서구(傳書鳩)라도 주고받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오.”

“……”

“사 대협이 혈겁이 벌어진 날 오전에 취미사에 도착했다면, 흉수는 적어도 그날 아침에 장안 일대에 있어야 하오. 설마 흉수가 사 대협이 왔다는 걸 전해 듣고 부리나케 천 리(千里)를 달려와 혈겁을 저질렀겠소?”

곡수의 얼굴은 점차로 냉정해졌다.

“셋째는?”

“빙백검이 실종되었을 때 조 대협이 그 부근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를 흉수로 몬다는 것은 더욱 말도 안 되는 이유요. 흉수가 정말로 빙백검을 범행에 사용하기 위해 훔쳤다면 당연히 세인들의 이목이 빙백검의 실종에 집중된다는 것을 알 텐데, 미쳤다고 그 근처에서 남과 비무를 하여 일부러 행적을 드러내는 짓을 하겠소?”

남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정말로 주목해야 할 일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오.”

“그게 무엇이오?”

“흉수가 왜 하필이면 빙검을 흉기로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오. 어차피 목젖을 잘라 상대를 해칠 것이라면 아무 장검이나 사용해도 되지 않겠소? 그런데 일부러 멀리 떨어진 하북성까지 찾아거서 은밀하게 숨겨진 빙백검을 훔쳐서 그걸로 살인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곡수의 눈이 조금 전보다 더욱 가늘어져서 거의 감긴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나 같은 무명소졸이 대(大) 화산파의 고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소? 단지 나라면 머리 속으로 이상한 억측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해천팔검을 만나서 빙백검의 실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겠소. 현재 남아 있는 단서 중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건 그게 유일하지 않소?”

곡수는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한동안 실눈같이 가늘어진 눈으로 남호를 응시하고 있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뛰어난 형세 판단에 놀라운 언변(言辯)…… 일전에 당신 같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남호의 몸이 움찔거렸다.

“당신이 그 사람인지 아닌지는 별로 관심 없소. 하지만 당신의 말에는 제법 흥미가 있군.”

이번에는 남호가 입을 굳게 다문 채 곡수를 쳐다보았다. 곡수는 돌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어차피 이번 일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사안이 아니니 당신 말대로 해천팔검을 만나보겠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우리만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기 바라오.”

남호가 흠칫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조만간에 알게 될 거요. 그들은 아마 우리처럼 당신의 말을 느긋하게 들어주지는 않을 테니 미리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요.”

이어 곡수는 몸을 돌려 해정설에게로 다가갔다.

“이쯤에서 끝내려는데 괜찮겠습니까?”

해정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타당한 결정인 것 같군. 해천팔검을 만나는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하게.”

“알겠습니다.”

화산파의 고수들은 곧 조일평 일행을 남겨 두고 떠나갔다. 떠나기 전, 곡수는 조일평에게 뜻깊은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가지만 그렇다고 자네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닐세. 앞으로 무슨 행동을 하든 자네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될걸세. 그걸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네.”

멀어져 가는 화산파의 고수들을 바라보는 조일평의 시선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풍시헌이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저자가 말한 그들이 누굽니까? 화산파말고 또 누가 우리를 노리고 있단 말입니까?”

옆에 있던 남호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야 뻔하지.”

“뻔하다니요?”

“자네는 잊었나? 이번 혈겁으로 숨진 사람은 사익뿐이 아니라는 걸.”

풍시헌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 그렇다면 곡수가 말한 그들이란 바로……”

남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 이제는 자네도 알겠지? 우리는 앞으로 큰 불덩이를 등에 지고 다니는 격일세.”

풍시헌이 답답한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소리쳤다.

“이건 너무 억울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남에게 시달려야 한단 말입니까?”

“곡수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나?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예?”

남호는 그의 어깨를 밉지 않게 살짝 쳤다.

“진범(眞犯)을 잡으면 되지. 진짜 흉수를 찾아 그들 앞에 내놓기 전에는 우리는 절대로 편하게 잠을 잘 수 없을 거란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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