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4화
제81장. 중주쌍사(中州雙邪)
이곳은 하나의 주루였다.
이 주루는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았고, 약간 구석진 곳에 있어서 위치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쁜 미녀가 음식 시중을 드는 것도 아니었고, 음식값이 특별히 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저녁시간이어서인지 아예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막 주루 안으로 들어선 중년인 한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제길,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앉을 자리도 없잖아.”
마침 그의 옆을 지나가던 점소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가서 합석이라도 하시지요.”
중년인은 점소이가 가리킨 곳을 보고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어슬렁거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 탁자에는 두 명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합석 좀 합시다.”
중년인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그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냉큼 빈자리에 앉았다.
두 명의 청년 중 연장자(年長者)인 흑의청년은 별로 변화가 없는 반면에 나이가 어린 남삼청년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멀거니 중년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년인은 그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넉살 좋게 히죽 웃으며 점소이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 뜨거운 닭국물 국수하고 돼지고기 요리 몇 개 좀 가져오게. 술도 한 병 가져오고 말야.”
남삼청년은 자신이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도 중년인이 미안한 표정은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자 차츰 화가 나는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그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중년인이 돌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는 것이었다.
“자네들은 알고 있나?”
남삼청년은 중년인의 느닷없는 행동에 일시지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 누구에게 말하는 거요?”
“누구긴, 여기에 자네들 말고 또 누가 있나?”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이번에는 중년인이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우리는 초면(初面)인데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소?”
“나도 마찬가지일세. 별 싱거운 질문을 다 하는군.”
남삼청년은 중년인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안색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중년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일대에는 주루가 모두 네 개가 있지만, 그중에서 이 집이 제일 장사가 잘된다네. 그 이유가 뭔지 아나?”
중년인은 남삼청년이 대답하리라고는 기대도 안 했는지 재빨리 말을 계속했다.
“그건 바로 이곳의 주방장인 장호(張昊)의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이지. 그럼 장호가 제일 잘하는 음식이 뭔지 아나?”
남삼청년은 그저 멀거니 중년인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닭으로 만든 요리일세. 그중에서도 뽀얀 닭국물을 우려내어 만드는 국수야말로 진미(진미)라고 할 수 있지. 자네들도 아직 그 맛을 못 보았으면 잊지 말고 한 그릇씩 해치우도록 하게.”
남삼청년은 화를 내는 것도 잊고 우두커니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음성을 낮추어 속삭이는 내용이 기껏 주방장과 음식에 관한 것이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중년인은 마치 천기(天機)를 누설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는 나직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험험…… 자네들이 이곳의 진미를 몰라보고 쓸데없는 것들만 먹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 한마디했네.”
아닌 게 아니라 남삼청년과 흑의청년은 간단한 만두와 생선요리 몇 가지를 먹고 있던 참이었다.
남삼청년은 중년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으로 흑의청년을 돌아보았다.
흑의청년은 별로 꺼려하는 빛도 없이 주변에 있던 점소이에게 닭국물 국수 두 개를 주문했다.
중년인은 얼굴이 구겨지도록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은근한 눈웃음을 쳤다.
“자네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드는군. 그에 비해 이쪽 친구는 나이도 어리면서 조심성이 너무 많군 그래. 젊은 사람이 그래서야 쓰나.”
남삼청년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하나 그가 채 화를 터뜨리기도 전에 갑자기 주루 한쪽이 소란스러워지며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뒤이어 탁자가 뒤집히고 접시들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와장창!
“어이쿠!”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피하느라 장내가 시장바닥으로 시끄러워졌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소동이 벌어진 곳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창문가에 커다란 원탁(圓卓)이 있었는데, 그 원탁이 뒤집혀져서 사방으로 음식들과 깨어진 접시 조각들이 널러져 있었다. 엎어진 원탁 옆에는 체구가 거대한 장한 한 사람이 소매를 걷어붙인 채 한 사람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 장한은 좀처럼 보기 드물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데다 머리를 산발하고 허리춤에는 커다란 장도(長刀)까지 차고 있어 거칠고 우악스러워 보였다. 그에 비해 그가 금시라도 덤벼들 듯 노려보고 있는 상대는 체구가 작고 깡마른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짙은 회의를 입고 있었는데, 체구에 비해서 옷이 지나치게 커서 가뜩이나 작은 몸집이 더욱 왜소해 보였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니 덩치가 두세 배는 차이나 보였다. 그런데도 회의사나이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기가 꺾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봐, 성질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왜 그렇게 강짜를 부리는 거야?”
거한(巨漢)은 고리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강짜를 부린다고? 내가 정말 강짜 부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덕분에 애꿎은 음식만 못 먹게 됐잖아. 게다가 부서진 접시하며 탁자 수리비까지 합하면…… 이게 대체 얼마야?”
회의사나이는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하는지 혼자 속으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거한이 회의사나이의 이런 모습을 참지 못하고 손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덩치로 보아서 거한의 주먹 한 방이면 회의사나이는 거의 끝장날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거한은 발을 구르며 세차게 이를 갈아붙였다.
쿵!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지금 잔돈 몇 푼에 신경 쓰게 생겼느냐?”
그가 발을 구르자 주루가 온통 지진을 만난 듯 마구 뒤흔들렸다. 거한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 두려움과 외경(畏敬)의 빛이 떠올랐다. 이 거한은 단순히 체구만 큰 게 아니라 막강한 내공(內功)을 지닌 고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회의사나이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오히려 작은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푼돈을 아끼지 않으면 큰 돈을 모으지 못한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그리고 지금 네가 저질러 놓은 것만 해도 닷 냥은 족히 되는데, 닷 냥이 푼돈이냐? 그러니까 허구한 날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것이다.”
거한의 봉두난발한 머리카락이 부르르 떨리며 그의 입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절로 조마조마해져서 거한이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과연 거한은 중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화를 참지 못한 거한은 바닥에 눕혀져 있는 커다란 원탁을 붙잡더니 단숨에 머리 위까지 쳐드는 것이 아닌가?
“앗?”
“우와……!”
경악성과 찬탄성이 파도처럼 주위에 퍼져 나갔다. 그 원탁은 무게가 수백 근은 족히 나가 보였는데 거한은 마치 장작개비라도 들 듯 가볍게 들어올린 것이다. 거한은 원탁을 번쩍 쳐든 채로 회의사나이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 번 지껄여 봐라, 내 꼴이 어쨌다고?”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라도 두려움을 느낄만한데 회의사나이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오히려 냉랭한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무식한 게 힘만 믿고 설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네 꼬락서리를 보니 평생 가난뱅이로 늙어죽을 팔자라고 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한은 들고 있던 원탁을 그를 향해 집어던졌다.
“앗? 피해라!”
회의사나이보다도 주변의 구경꾼들이 더 놀라서 다급한 외침을 토하며 사방으로 몸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바람에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쾅!
수백 근이 나가는 거대한 원탁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어찌나 그 위력이 크던지 주루가 금시라도 무너질 듯 마구 뒤흔들린 것은 물론이고, 원탁이 떨어진 바닥은 나무판자들이 깨어져 땅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회의사나이의 안위가 걱정되어 급히 장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회의사나이는 처음의 위치에서 옆으로 조금 비켜선 자리에 태연히 서 있는 것이었다. 원탁이 떨어질 때 슬쩍 옆으로 비켜선 모양이었다. 말은 쉬웠지만 집채만한 원탁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데 원탁의 피해 범위만 살짝 벗어난 채 몸을 피한 그 동작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회의사나이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거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피해가 열닷 냥이나 됐다. 어쩔 테냐, 이 바보야?”
거한은 씩씩거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 집어던질 게 없는지 찾아보는 것이리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질겁을 하고 자신들이 앉아 있는 의자와 탁자를 꼭 움켜잡았다.
거한은 마땅히 던질 것을 찾지 못하자 더욱 화가 나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도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움직였다.
회의사나이는 그것을 보고 혀를 찼다.
“쯧, 이제는 칼까지 뽑으려고? 그걸 휘둘렀다가는 이번 일을 아무리 잘 해결해봤자 남는 것도 없이 손해볼 게 뻔하다. 그럴 바에야 나는 이번 일에서 손을 뺄 테니 너 혼자 잘해 봐라.”
회의사나이가 금시라도 몸을 돌려버릴 듯하자 거한이 칼을 뽑으려던 손을 멈추고 황급히 그를 불렀다.
“이…… 이봐, 얘기 좀 하자.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
“억울해도 손해보는 것보다는 낫지. 아무튼 나는 빠질 테니 칼을 뽑아 휘두르든 여기를 때려부수든 마음대로 해라.”
회의사나이는 한차례 손을 휘저은 후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거한은 다급해졌는지 달려가서 그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나 바닥에 널려져 있는 원탁에 발이 걸려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이쿠!”
거한이 활개치듯 두 팔을 쭉 뻗은 채 바닥에 나뒹굴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
“푸하하!”
조금 전만 해도 천하에 거칠 것이 없이 기세등등하기만 하던 거한이 자기가 내던진 원탁에 발이 걸려 바닥에 대(大)자로 누워 버린 모습은 폭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개중 눈이 날카로운 몇몇 사람들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공은 뛰어날지 몰라도 몸놀림은 엉망이로군. 틀림없이 신법(身法)도 형편없을 것이다.’
무림에서 고수로 행세하려면 단순히 내공만 높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법이며, 그 외에 투지(鬪志)나 임기응변 등 개인적인 소질이 필요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빠른 몸놀림과 빠른 시력, 빠른 손은 고수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거한의 이런 모습은 그의 가공할 힘에 경각심을 느꼈던 많은 고수들에게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주는 것이었다.
거한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는 회의사나이는 이미 주루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이런 제길.”
거한은 몸에 묻은 먼지를 닦을 생각도 없이 황급히 회의사나이를 따라 주루를 벗어나려 했다. 그때 주루의 입구를 지키던 장방(腸房)이 재빨리 그를 막아 섰다.
“소님, 계산하고 가셔야죠.”
거한은 눈을 부라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계산이라니? 무슨 계산?”
장방은 다소 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더니 줄줄 쏟아내었다.
“음식값이 두 냥 칠문(七紋)에 술값이 한 냥, 부서진 의자 값이 두 냥, 그리고 십 인용 원탁이 열 냥에 파손된 바닥까지 합치면 모두 열여덟 냥 되겠습니다. 손님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놀라서 그냥 나간 경우의 피해까지 합치면 훨씬 더 되겠지만, 그것은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열여덟 냥이라면 웬만한 일가족이 서너 달은 배곯지 않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거한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졌다.
“뭐가 그렇게 비싸? 저렇게 허접한 탁자가 열 냥이나 한단 말이야?”
“저 탁자는 칠선목(七仙木)으로 만든 것으로, 장안에서 유명한 장인(匠人)인 위장(韋壯)에게 특별 주문한 것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스무 냥은 족히 나가는 것인데, 그동안 사용한 것을 생각해서 절반만 가격을 친 겁니다.”
“그래도 너무 비싸. 게다가 난 음식은 반도 먹지 않았다구.”
“그거야 손님이 자기 손으로 엎은 것이니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요.”
거한은 얼굴색이 여러 차례 변하더니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무튼 너무 비싸. 난 그런 돈 못 내.”
장방이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못 내는 게 아니라 없는 게 아닙니까?”
거한은 험악한 인상을 썼다.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내가 그깟 스무 냥도 안 되는 돈이 없을 줄 아느냐? 아무튼 너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주인 나오라고 해. 주인 어딨어?”
거한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주루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거한이 너무 적반하장(賊反荷杖)을 부린다고 생각했으나 누구도 선뜻 나서서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장방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주인님은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런 일에 왜 주인님을 만나려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손님께선 그저 계산만 치르고 가시면 되는데 말입니다.”
“글쎄, 주인 불러와. 주인이 안 나오면 돈 못 줘.”
“안 계신 분을 어떻게 불러옵니까?”
“그러면 나중에 주인이 오면 그때 주지. 장안 남문의 평안객잔(平安客棧)에 있을 테니 연락하라구.”
거한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방을 떠밀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장방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막아라. 무전취식자(無錢取食者)다.”
점소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거한은 이 광경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 자식들이 멀쩡한 사람을 거렁뱅이로 모는군.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이 기회에 몸 좀 풀어 볼까?”
거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목을 앞뒤로 젖히고 팔을 한차례 휘저었다. 그의 관절을 푸는 소리가 우두둑! 우두둑! 하며 요란하게 주위에 울려 퍼졌다.
이 광경을 보자 달려들던 점소이들은 더럭 겁이 났는지 모두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거한은 두 팔을 어깨 넓이로 벌린 채 우람한 양팔을 허리에 얹고는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자, 한 놈씩 덤빌 테냐? 아니면 떼거지로 올 테냐? 선택권을 줄 테니 알아서 결정해라.”
점소이들은 그의 기세에 기가 질렸는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선뜻 덤비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무슨 소란이냐?”
굉량한 외침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장방이 반색을 하며 쪼르르 달려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님,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화려한 장포를 입고 얼굴에는 구레나룻이 가득한 중년인이었다. 장포중년인은 장방에게서 자세한 사정을 듣더니 이내 성큼성큼 거한에게로 다가갔다. 이어 거한의 위아래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입가에 냉랭한 미소를 매달았다.
“누가 감히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나 했더니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친구였군.”
장포중년인을 보자 거한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어……? 노 형(盧兄)이 여기 주인이었소?”
“그걸 이제 알았나? 자네 형은 어디에 있나?”
“저…… 그게……”
어찌된 일인지 조금 전만 해도 기세 등등하던 거한이 장포중년인 앞에서는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쩔쩔매는 것이었다. 장포중년인 또한 마치 쥐를 가지고 놀 듯이 느물느물한 표정으로 거한을 상대했다.
“자네들은 두 사람이 붙어 다니며 남들 괴롭히는 걸 취미로 삼는 자들이 아닌가?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중주쌍사(中州雙邪)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를 싸매고 도망가려 하겠나? 자네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자네 형도 가까운 곳에 있겠군. 그에게는 받아야 할 빚도 있는데 정말 잘된 일일세.”
“저…… 노 형, 아무래도 나는 급한 일이 있어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소.”
거한은 황급히 품속에서 커다란 금원보(金元寶)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걸로 오늘 일에 대한 변상은 충분할 거요.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다음에 다시 봅시다.”
그 금원보는 금 백 냥은 족히 되어 보일 듯 했다. 거한은 금원보를 옆에 멀거니 서 있는 장방에게 던져 주더니 재빨리 주루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나 장포중년인이 어느새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모처럼 만났는데 이렇게 그냥 간다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자네 형도 불러서 모처럼 회포를 풀자구.”
“아…… 아니오. 나는 정말 가야 하오.”
거한은 그의 옆으로 지나가려 했으나 또다시 제지당했다.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나? 잠시 후면 장씨 형제(張氏兄弟)들도 올 텐데 자네를 보면 무척 반가워할걸세.”
그 말을 듣자 거한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그…… 그들도 노 형과 함께 있소?”
“물론이지. 내가 주루를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네.”
“어이구!”
울상을 짓고 있던 거한은 갑자기 신형을 날려 장포중년인의 머리 위를 뛰어넘더니 그대로 입구 쪽으로 날아갔다.
“어딜 가려고?”
장포중년인이 손을 내밀어 거한의 옷자락을 움켜쥐려는 순간, 거한의 몸이 세차게 회전을 하더니 허공에서 삼 장이나 붕 떠올랐다. 그 상태로 몸을 뒤집은 거한은 쏜살같이 주루 밖으로 날아갔다.
“제발 그들에게 나를 봤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애원인지 협박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거한의 몸은 아득히 멀리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까지의 굼뜬 모습과는 너무도 판이한 놀라운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발보등공(發步登空)이 상당한 경지에 올랐군.”
장포중년인은 멀어져 가는 거한의 뒷모습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장방을 돌아보았다.
“부서진 탁자를 치우고 장내를 정리해라.”
“예, 주인 어른.”
밉살스런 거한이 꼬리를 만 개처럼 도망가자 신이 난 장방은 큰소리로 대답하며 점소이들을 재촉하여 탁자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장포중년인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중인들을 향해 포권을 하며 빙긋 웃었다.
“뜻하지 않은 소란 때문에 놀라셨을 거요. 사과드리는 의미에서 지금 드시는 음식 값은 받지 않을 테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 바라오.”
“와아! 주인장 만세!”
중인들이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장포중년인은 자신을 향해 환호성을 보내는 사람들을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가늘어졌다. 몇 개의 탁자 건너편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세 사람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두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이었다. 장포중년인의 시선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포중년인은 생각이 나지 않는지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내실로 들어갔다. 하나 잠시 후, 그는 다시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밖으로 나온 그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 한 줄기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전에 식사를 하고 있던 두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나갔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멍청하군, 그를 몰라보다니…… 그런데 그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장포중년인은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상념에 잠겨 있다가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려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저자가 계속 따라오는데요.”
남삼청년은 뒤를 힐끔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와 흑의청년은 주루에서 식사를 마친 후 장안성을 향해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사오 장 떨어진 곳에 주루에서 잠깐 합석했던 중년인이 어슬렁거리며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흑의청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으나, 남삼청년은 영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중년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중년인은 넉살도 좋게 활짝 웃으며 오히려 손까지 흔드는 것이었다.
“이거 공교롭게도 여기서 또 만나게 되는군.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중년인이 아는 척을 하며 성큼성큼 다가오자 남삼청년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아예 시선을 돌려 그를 외면해 버렸다. 하나 중년인의 낯짝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두꺼운 게 분명했다. 중년인은 그들에게 다가와서는 남삼청년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흑의청년을 향해 친근한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다.
“자네들은 어디를 가나?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떨어질 텐데 잠잘 곳은 정해 놓았나?”
흑의청년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하지 않았소. 좋은 곳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오.”
남삼청년은 뜻밖의 말에 놀란 눈을 하고 흑의청년을 돌아보았다.
“역시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지금 장안성으로 가고 있나?”
“그렇소.”
“장안 남문 일대에서는 그래도 평안객잔이 가장 깨끗하고 친절하지. 나도 마침 그쪽으로 가는 중인데, 같이 가세.”
“좋소.”
흑의청년이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남삼청년이 다급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사형(師兄)……”
“무얼 걱정하는 거냐? 어차피 우리는 장안에서 며칠 묵을 계획이 아니었더냐?”
“그래도……”
남삼청년이 계속 꺼림칙한 표정을 짓자 중년인이 넉살도 좋게 끼여들었다.
“나를 믿으라구. 내가 소개한 곳은 모두 틀림없는 곳이네. 조금 전에 닭국물 국수도 괜찮았지 않았나?”
남삼청년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으나,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확실히 아까 주루에서 먹었던 닭국물 국수는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별미 중의 별미였던 것이다.
“평안객잔은 잠자리도 편하지만 아침에 끓여 주는 죽이 맛이 아주 기가 막히지.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그 죽 한 그릇이면 속이 개운해진다네. 그래서 장안 일대의 술꾼들이 가장 즐겨 찾는 객잔이지. 보아하니 자네도 술을 좋아하게 생겼는데, 내일이 되면 나에게 고맙다고 할걸세. 하하……”
중년인은 소리 내어 웃더니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내 정신 좀 보게. 아직 통성명도 안 했군. 나는 남호(南湖)라고 하네. 여기에서 멀지 않은 보계(寶鷄) 출신으로 올해 마흔일곱일세.”
흑의청년은 담담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조일평이고, 이쪽은 내 사제(師弟)이니 풍시헌(風柴軒)이라 하오.”
“좋은 이름들이군. 만나게 되어 반갑네.”
남호는 섬서성을 진동시키는 마검 조일평의 명성을 듣지도 못했는지 조금도 놀라거나 뜻밖이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눈앞의 청년이 설마 그 유명한 마검 조일평일 리가 없고 단순한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곳까지는 무슨 일인가? 달리 볼일이라도 있어서 온 건가? 아니면 그냥 유람을 나온 건가?”
항상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던 조일평의 두 눈에 한 줄기 어두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래 전에 소식이 끊긴 친구의 행방을 알려고 왔소.”
“그런가? 그 친구의 이름을 알 수 있겠나?”
조일평이 안광을 번뜩이며 자신을 쳐다보자 남호는 싱겁게 웃었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 나는 이곳 토박이이니 자네의 친구가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일지 몰라서 묻는 말일세.”
조일평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귀하는 모를 거요.”
“그런가? 아무튼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러 왔다니 부럽군. 난 찾아볼 친구는 없고 오히려 귀찮은 떨거지들만 많아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신세인데 말일세.”
조일평이 별말이 없자 남호는 재차 물었다.
“그 친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말해 줄 수 있나?”
“모르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이름도 말해 줄 수 없다면 대체 무슨 수로 그를 찾겠는가?”
조일평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찾을 수 있을 거요. 그는 주위를 밝히는 보석(寶石)과 같은 사람이라 어느 곳에 있어도 빛이 나거든.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내 눈에 뜨일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