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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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6화


제83장. 향대왕루(向大王樓)

동중산이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때가 묻은 추레한 천장이었다. 다시 눈을 깜박거렸을 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정신이 드시오?”

동중산은 그 음성이 어딘지 귀에 익다고 생각하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나 그 순간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 말았다.

‘으윽!’

음성의 주인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아직은 움직이면 안 되오. 당신은 정말 운(運)이 좋았소. 온몸의 실핏줄이 모두 터지고 등과 가슴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살아날 수 있었으니 말이오.”

동중산은 차츰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금까지 내가 사냥한 어떤 짐승도 당신보다 상처가 중(重)하지 않았소. 당신은 정말 끈질긴 사나이요. 물론 갈 노인의 솜씨가 좋았던 이유도 있지만 살고자 하는 당신의 강인한 생명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요.”

이제 동중산은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었다. 과연 그의 눈에 장승표의 투박한 얼굴이 들어왔다. 장승표는 그의 머리 위에 얼굴을 바짝 들이댄 채 그의 혈색을 살펴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음독(陰毒)이 모두 빠지지 않아 피부에 허연 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한결 좋아졌군. 며칠만 푹 쉬면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거요.”

동중산의 외눈과 눈이 마주치자 장승표는 털북숭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때문에 나는 갈 노인에게 백사(白蛇) 두 마리와 웅담(熊膽) 세 개를 빚졌소. 그러니 당신은 술 다섯 동이로 그 빚을 갚도록 하시오.”

동중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장승표를 바라보기만 했다. 장승표는 그 눈빛만 보아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볼 필요 없소. 자초지종을 따지자면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내가 감승을 만나러 가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장승표의 얼굴에 한 줄기 울적한 빛이 떠올랐다.

“감승은 좋은 녀석이오. 어려서부터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누구보다 마음이 여리고 잔정이 많은 녀석이었지. 그를 미워하지 마시오.”

동중산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장승표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던 감승의 비장한 모습이었다. 그런 감승을 미워할 리 있겠는가? 동중산은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소?”

입을 여는 것도 무척 힘들었으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장승표는 손가락을 헤아려 보더니 히죽 웃었다.

“오늘로 사 일(四日)째요. 갈 노인이 오늘쯤이면 당신이 깨어날 거라고 해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소. 정말 이런 쪽으로는 신통한 노인네라니까.”

“배가 고프군……”

“그럴 거요. 그래서 죽을 좀 끓여 왔소.”

장승표는 어디서 준비해 왔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를 들고 왔다. 동중산이 일어나려 하자 황급히 그를 제지헸다.

“그냥 누워 있으시오. 내가 비록 솜씨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 당신은 내 시중을 받아야 하오. 아녀자의 나긋나긋한 손길이 그립겠지만 이곳에는 남자들뿐이어서 말이오.”

장승표는 부드럽게 웃으며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동중산의 입으로 가져갔다. 동중산은 정말 그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으나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형편이라 꼼짝없이 누워서 죽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장승표가 끓인 죽은 고기를 잘게 찢어서 만든 것으로, 달콤하면서도 비리지 않아서 맛이 아주 좋았다. 얼마 되지 않아 동중산은 죽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제서야 장승표는 만족한 웃음을 띠며 접시를 치웠다.

“남자에게 시중을 받는 기분이 어떻소? 이만하면 나도 제법 이런 방면에 소질이 있지 않소?”

“최악이었소. 차라리 곰에게 시중을 받는 게 더 나을 거요.”

장승표는 입을 딱 벌리고 크게 웃었다.

“하하…… 그렇게 억울하면 빨리 털고 일어나시오. 안 그러면 당신은 며칠 동안 계속 내 시중을 받게 될 테니까.”

“그 말을 들으니 투지가 끓어오르는군.”

동중산이 금시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듯 하자 장승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그렇게 내가 싫으면 다음에는 곰 한 마리를 구해 올 테니 잘해 보시오. 암놈으로 구해 드릴까?”

장승표가 제지하지 않아도 사실 동중산은 몸을 까닥할 기운이 없었다. 비록 죽을 먹어서 시장기는 어느 정도 가셨으나 몸을 움직이려고만 하면 전신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동중산은 새삼 백동일의 가공할 검술이 떠올라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똑같이 검과 검을 들고 겨루었는데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든단 말인가?

팔다리가 잘렸다면 몰라도 전신의 혈맥을 터져 나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한 무공의 소유자를 무슨 수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고수들을 수도 없이 보유한 초가보의 힘이란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동중산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자 장승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듯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언제고 그자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을 거요. 우선은 몸을 회복시키는 게 급선무요. 그자에게 친구를 잃은 나도 이렇게 참고 있지 않소?”

“친구의 일은 정말 안됐소.”

“그게 그 녀석의 팔자였던 모양이오. 참, 그런데 동 형은 종남파의 제자라고 했소?”

동중산은 장승표가 갑자기 엉뚱한 걸 물어오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오?”

“내가 어제 언뜻 들은 이야기인데, 종남파의 제자 하나가 초가보가 관장하는 주룽 나타나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고 하오.”

그 말에 동중산의 외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그 일 때문에 초가보가 발칵 뒤집혀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하오.”

동중산은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신의 가슴이 맹렬하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동중산은 이럴 때 일수록 흥분하지 말자고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물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시오?”

장승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잘 모르고, 나이가 젊은 사람이라고만 하더군.”

“그는 어떻게 되었소.”

“초가보의 고수가 그를 잡으려 할 때, 갑자기 주루에서 불이 나서 난리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하오. 그 사이에 빠져 나간 모양이오.”

동중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가 나타난 게 언제요?”

“내가 어제 들었을 때, 그 전날이라고 했으니까 이틀 전일 거요.”

“장소는?”

“대왕루라는 곳이오.”

동중산은 한동안 허공을 올려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장승표가 이상하여 고개를 숙여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하나뿐인 그의 외눈이 이상하리만치 반짝거리고 있었다. 동중산은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지 계속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 형……”

장승표는 참지 못하고 나직이 그를 불렀다. 동중산은 여전히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수를 쓰든지 내일까지 내가 일어설 수 있게 해주시오. 필요하다면 팔 하나쯤 못 쓰게 되어도 좋소.”

“동 형……”

“나는 그 대왕루로 가 보아야겠소.”

“하지만…… 그가 대왕루에 다시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지 않소? 초가보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동중산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물론 그는 나타나지 않을 거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소.”

“……!”

“그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대왕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종남파가 아직 멸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오. 또한 살아 남은 본파의 제자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무언(無言)의 신호를 보낸 셈이기도 하오.”

동중산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기이한 열기를 담고 있어 장승표에게는 다른 어떤 음성보다 크고 웅장하게 들렸다.

“만약 나말고도 살아 있는 본파의 제자가 있다면 반드시 대왕루로 와서 자세한 내막을 알려 할 것이오. 그래서 나는 그곳에 가야만 하는 거요. 그곳에 올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장승표는 무언가에 억눌린 사람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만약에 이것이 초가보에서 당신들을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그래도 나는 그곳에 가야 하오.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오.”

장승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동중산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기만 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동중산을 쳐다보며 듬직하게 웃었다.

“갈 노인에게 평생 동안 백사를 갖다 바치게 된다 해도 당신을 내일까지 일어서게 할 테니 걱정 마시오. 하지만 마지막이란 말은 제발 하지 마시오. 그런 말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란 말이오.”


한 사람이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반백(半白)의 머리에 이목구비가 청수한 중년인의 모습이 있었다. 중년인은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더니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났군.”

그의 음성은 청량했으나 그 속에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씁쓸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반백의 중년인은 거울 속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처리해 줘야 할 일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대왕루에 가 주게.”

“그곳은 손 노제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 사람은 머뭇거리다가 한결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손 노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반백의 중년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단지 그 혼자 힘으로는 조금 벅찰 것 같아서 자네를 보내려는 걸세. 자네는 그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가 아닌가?”

“손 노제는 저와 동향(同鄕)으로, 어려서부터 제가 친동생처럼 아끼고 있습니다.”

“알고 있네. 이번에 그에게 일이 생겼는데, 그는 그걸 말끔하게 처리하지 못했네.”

“대왕루로 종남파의 생존자가 찾아왔다는 말은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앞으로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단 말이야.”

“설마 그럴 리가요. 종남파의 고수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소동을 벌여 놓고 다시 또 찾아오겠습니까?”

반백의 중년인은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건가?”

그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런데 그 사람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는 것이었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자네 말도 일리는 있네. 그런데 세상 일이란 게 꼭 이치(理致)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단 말이야. 그래서 묘한 재미가 있지.”

그 사람은 감히 대꾸도 하지 못하고 엎드린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원래 종남파의 잔당(殘黨)을 소통하는 일은 백동일의 몫이라 처음에는 그를 부르려고 했는데, 그는 솜씨는 좋은데 너무 자신감이 넘쳐서 쓸데없이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을 하려는 걸세.”

“맡겨 주십시오. 깨끗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종남파에 살아 남은 자가 있다면 이번 소동을 듣고 반드시 대왕루로 와서 자세한 내막을 알려고 할걸세. 그들도 우리처럼 서로의 행방을 몰라서 애타게 찾고 있을 테니 말일세.”

그제서야 그 사람은 반백의 중년인이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재차 머리를 조아렸다.

“총관(總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손익에게도 사정을 잘 설명하고 단단히 준비하라고 이르게. 이번에도 실수를 할 때는 자네들 두 사람은 먼젓번의 일까지 같이 책임을 져야 할걸세.”

그 사람의 어깨가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장담은 하지 말게. 아까도 말했지만 세상 일이란 게 꼭 의도한 대로만 진행되지 않으니 말일세.”

그 사람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종남파의 제자가 단 한 명이라도 대왕루로 찾아온다면 그날이 그의 제삿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제 스스로 목을 잘라 책음을 지겠습니다.”

“글쎄 너무 장담하지 말라니까. 하지만 솔직히 나도 이번에는 자네가 일을 잘 마무리해 주리라 믿고 있네.”

반백의 중년인은 거울 속에서 조용히 웃었다.


대왕루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진산월은 미시(未時)가 막 지날 무렵에 대왕루에 도착했다. 그의 몰골은 여전히 초췌했으나, 오늘은 깔끔한 새옷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인지 그전처럼 입구에서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산월은 주위를 둘러보다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곳은 비록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으나, 그 때문에 주루 안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창문이 그리 멀지 않아서 유사시(有事時)에 몸을 피하기도 수월했다.

“무얼 드시겠소?”

이십대 후반의 점소이 하나가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아마도 그의 행색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아서 실망한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간단한 소채(素菜) 몇 가지와 술을 한 병 시켰다. 점소이는 예상한 대로라고 투덜거리며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진산월은 자리에 앉은 채로 주루 안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많아서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제일 구석진 자리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자리를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먹고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었다. 진산월은 혹시라도 그들 중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곧 점소이가 소채가 담긴 접시와 술병, 술잔 하나를 가지고 왔다. 술은 그다지 좋지 않은 백건아(白乾兒)였고, 안주도 보잘 것 없는 소채뿐이었으나 진산월은 술을 한 잔 따라서 천천히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느낌은 예전과 흡사했다. 하나 예전에 술을 마실 때의 그 도도한 감흥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안주도 먹지 않고 다시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두 잔째 술이 들어가자 뱃속이 화끈거렸다. 진산월은 더 이상의 술은 마시지 않았다. 취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아무리 마셔도 쉽게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단 두 잔의 술에 벌써 취할 것을 두려워하는 신세가 되었다. 무공은 예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는데, 주량은 오히려 훨씬 더 못해졌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취하는 것이 두려울까? 혹시 취한 다음에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진짜 두려운 것은 술이 아니라 술을 마시면 생각나는 그 누구가 아닐까? 진산월은 더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누군가가 주루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을 보자 진산월은 황급히 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왜냐하면 입구에 선 채로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람은 그에게 음식값을 사기치고 도망갔던 미소녀였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나서서 그녀를 붙잡고 추궁해야 했으나, 그는 공연히 그녀 때문에 번거로움을 자초하기 싫었던 것이다. 하나 일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이 참, 어쩌지?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앉을 자리도 없잖아.”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투덜거리고 있던 서문연상이 문득 무엇을 보았는지 아름다운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어? 저자는……”

처음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주루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히려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몸은 복잡한 주루 안을 요리조리 빠져 나가더니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탁자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여기서 또 만났네요.”

의자에 앉은 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던 진산월은 그녀의 음성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는 진정으로 이 아가씨가 왜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산월은 그녀의 위아래를 쳐다보더니 퉁명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동생은 잘 있소?”

서문연상은 그가 묻는 말뜻을 몰라 아미를 치켜 뜨다가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어제 일로 화가 났나 보군요. 제 동생은 물론 잘 있어요. 하지만 그 아이가 멀리 떠나 있어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말도록 해요.”

뭐가 쓸데없는 오해란 말인가? 진산월은 이 당돌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아가씨와는 단 한순간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하나 그녀의 생각은 조금 틀린 모양이었다.

“어제 음식값은 잘 계산했어요?”

진산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배시시 웃었다.

“무슨 남자가 겨우 그런 일 가지고 그렇게 삐쳐 있어요? 그때 음식값은 내가 나중에 모두 계산해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진산월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나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 입을 놀려댔다.

“그런데 아들은 어디다 두고 당신 혼자 여기 있는 거예요? 설마 그 아이를 그 주루에 맡기고 혼자 도망친 건 아니겠죠?”

그녀가 제멋대로 지껄이며 성난 표정으로 쏘아보자 진산월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그녀는 다시 새침한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허락도 받지 않고 진산월의 앞에 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아무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합석하도록 하죠.”

그제서야 진산월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빈자리를 찾지 못하자 단순히 합석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진산월이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그녀는 지나가는 점소이를 부르더니 몇 가지의 요리를 주문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튀김은 속이 너무 무르지 않게 하고, 구이는 기름기를 쏙 빼고 줘요. 향채는 절반만 넣어야 하고, 모든 음식이 너무 짜거나 매우면 안 돼요. 특히 식초는 절대 쓰지 말아요. 난 신 게 질색이니까. 알았죠?”

점소이는 그녀의 요구 조건에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설레설레를 흔들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멍청하게 생겼는데, 주방까지 가다가 다 까먹는 게 아닌지 몰라.”

그녀는 혼자 종알거리더니 다시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진산월의 앞에 놓인 소채와 술병을 쳐다보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런 것만 먹으니 몰골이 그 꼴이죠. 다른 걸 아끼더라도 먹는 걸 잘 먹어야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어요. 어제의 일도 있고 하니 오늘은 내가 살 테니 있다가 음식이 나오면 같이 먹도록 해요.”

진산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오늘도 내가 계산 안 하고 그냥 갈까 봐 그래요? 걱정 말아요. 오늘은 당신이 가라고 해도 안 갈 테니까.”

“왜 그렇소?”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서 만날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도록 해요.”

“난 이거면 충분하오.”

그녀는 아미를 상큼히 치켜 떴다.

“군소리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 당신이 내 앞에서 그런 소여물 같은 걸 먹고 있으면 내가 음식이 넘어가겠어요?”

진산월로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그에게 소곤거렸다.

“참, 당신 그 소식 들었어요?”

진산월은 그녀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나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그녀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르게 입을 놀렸다.

“어제 취미사에서 혈겁이 벌어져서 승려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 말이에요.”

진산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 일은 비단 진산월뿐 아니라 장안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취미사는 비록 무림의 유명한 절도 아니고 고수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래도 절의 승려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살해당했다는 것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족했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화산파의 장로도 섞여 있다는 소문도 있어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하고 있었다. 서문연상은 주위를 한차례 재빨리 둘러보더니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어제 내가 그 현장에 있었지 뭐예요.”

진산월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이오?”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어제 마침 날이 너무 좋아서 바람도 쏘일 겸 남문 밖으로 나갔었는데……”

그녀는 주절주절 어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제법 긴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 그는 한마디도 끼여들지 않았다. 그러다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한마디를 물었다.

“그 두 사람 중 한 명이 마검 조일평이었단 말이오?”

“그래요. 그는 생긴 것부터 과묵해서 만만치 않아 보였어요. 이 공자와 둘이 정식으로 겨루었으면 정말 볼 만했을 텐데……”

진산월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떠들었다.

“아무튼 흉수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피에 굶주린 살인마(殺人魔)임에 틀림없어요. 어쩌면 무공도 모르는 선량한 중들을 그토록 무참히 살해할 수 있는지…… 게다가 그중에는 나이 어린 소년도 있었어요. 소요검객 사 대협의 손자라고 하는데, 그런 아이까지 살해한 걸로 보아서 아마도 성격결함자이거나 천부적인 살인……”

진산월이 듣건 말건 계속 조잘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이 문득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그녀는 조금 전과는 달리 요조숙녀처럼 얌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입구 쪽으로 향해 살짝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이쪽이에요, 이 공자.”

진산월이 돌아보니 막 한 사람이 주루로 올라와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짙은 청삼을 입고 이마에는 영웅건을 두른 그 사람은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진산월은 묻지 않아도 그가 어제 서문연상이 만났던 만상공자 이존휘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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