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9권 풍운기혜(風雲起兮)편 : 8화
제85장. 암운중첩(暗雲重疊)
장안의 남쪽에는 멀리서도 볼 수 있는 기이한 탑(塔) 하나가 있었다. 탑은 오층(五層)에 불과했으나, 그 높이는 무려 삼백 척에 달했고, 입구는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서 호화롭고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대안탑(大雁塔)이다. 대안탑이 있는 절은 자은사(慈恩寺)라고 하며, 당나라 고종 때 세워진 후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는 장안의 명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자은사의 현(現) 주지는 백운(白雲)이라는 스님으로, 백운선사는 이름 그대로 흰구름처럼 고고하고 불심(佛心)이 깊어서 신도들의 신망(信望)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백운선사는 세속의 욕망에 담백하고 사심(邪心)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단 한 가지의 유혹에는 몹시 약했다. 그것은 바로 질 좋은 차였다. 천지(天池)나 용정(龍亭) 같은 이름난 명차(名茶)들은 몰론이고 별로 이름이 없는 차일지라도 자신이 아직 맛보지 못한 좋은 차가 있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구입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그런 백운선사이니 어떤 사람이 천지나 용정보다 오히려 좋다고 알려진 호구(虎邱)를 가지고 찾아왔다고 하자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선뜻 자신의 방으로 안내해 들어오도록 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백운선사를 모시고 있는 사미승(沙彌僧) 현오(顯悟)가 정작 의아해하는 것은 오전에도 이와 비슷하게 누군가가 차를 가지고 백운선사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자은사가 비록 역사가 깊고 이름난 사찰이라고 해도 주지인 백운선사를 찾아오는 손님은 별로 없었다. 백운선사가 워낙 조용한 성품에 외인(外人) 만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향화객도 별로 없는 한겨울에, 그것도 오전과 오후에 두 번이나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오전에 찾아온 사람들이 젊은 청년들이었던 데 비해, 이번에 온 사람들은 자신과 같이 머리에 계인(戒印)을 하고 무거운 선장(禪杖)을 든 승려들이었다. 나이는 두 사람 모두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는데, 태도가 의연하면서도 가끔씩 두 눈에 불 같은 안광이 번쩍거리는 것으로 보아 무공을 익힌 무승(武僧)들임이 분명했다. 두 명의 승려는 체구가 제법 당당했는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현오는 두 번이나 걷다 말고 고개를 돌려 그들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현오는 귀가 어두운 사람이 아니었기에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지스님, 모시고 왔습니다.”
현오가 백운선사의 방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하자, 안에서 백운거사의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분들을 드시라고 하고, 너는 그만 물러가 있거라.”
“예.”
현오가 물러가자 두 명의 승려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방장실(方丈室)은 그다지 넓지 않았으나 깨끗하고 단아해서 기거하는 사람의 심성이 어떠한지 느끼게 해주었다. 방의 한쪽에 둥그런 원탁이 있고, 그 앞에 눈썹이 허연 노승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두 명의 승려는 노승의 앞에 가서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림의 정화(丁華)와 정선(丁善)이 백운선사님을 뵈옵니다.”
백미노승(白眉老僧)은 얼굴에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이리로 와서 앉게.”
두 명의 승려 중 좌측의 얼굴이 동그란 승려가 들고 있던 차 봉지를 노승에게 내밀었다.
“우연히 질 좋은 호구차를 얻게 되었기에 선사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십시오.”
노승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고마우이. 다 늙은 나이에 무엇을 탐(貪)한다는 게 우습지만, 이게 노납의 유일한 낙(樂)이니 어쩔 수가 없군 그래.”
노승이 차를 받자 그제서야 두 명의 승려는 그의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이 노승이 자은사의 주지인 백운선사였다. 백운은 손수 차 봉지를 뜯어 말린 찻잎을 확인하고는 옆에 있는 작은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우려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백운의 손길은 나이답지 않게 경쾌했고, 두 눈은 곧 맛보게 될 차에 대한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 물은 본사의 뒤에 있는 옥류정(玉流井)에서 퍼온 것일세. 천하에서 제일 좋다는 양계(梁溪)의 혜산천(惠山泉)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일대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물일세. 노납이 이십 년 전에 직접 찾아내서 우물을 만들었지.”
백운은 마치 귀한 아들을 남에게 자랑하듯 떠들어댔다. 마침내 차가 모두 우러나지 백운은 두 승려에게 한 잔씩 따라준 후 자신도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후우……”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지그시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하던 백운은 눈을 번쩍 뜨고 감탄사를 발했다.
“역시 좋군. 천지나 양선(陽羨)도 물론 훌륭하지만 호구의 이 독특하며 그윽한 향취에는 역시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나?”
두 명의 승려는 차에는 별로 조예가 깊지 못한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느낌이야.”
백운은 만족한 미소를 흘리며 다시 차를 따라 마셨다.
“오늘 노납을 보자고 온 것은 어제 취미사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겠지?”
백운이 대뜸 정곡을 짚어 말을 꺼내자 두 승려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소림사의 이대제자들로, 좌측의 승려가 정화였고 우측의 승려가 정선이었다. 정화가 재빨리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그 일에 대해 선사님께 하교(下敎) 받고자 합니다.”
“하교는 무슨…… 노납도 그 일에 대해서는 별반 아는 바가 없네.”
“그래도 선사께선 굉지 사조께서 살아 계셨을 때 가장 친한 사이가 아니셨습니까?”
백운의 얼굴에 한 줄기 어두운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그렇지. 솔직히 그의 죽음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네. 하지만 인간은 언젠가는 모두 정토(淨土)로 돌아가는 법. 그 시기가 조금 당겨졌다고 해서 크게 서운한 일은 아닐걸세.”
두 사람은 백운의 말에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감히 더 입을 열지 못했다.
“취미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모두 스물네 명일세. 세상의 어떤 일이 그만한 대가를 바칠 가치가 있겠나? 모두 부질없는 짓인 줄 모르고 날뛰는 미생(微生)의 짓인 게야.”
“……!”
“소요검객 사익 조손을 제외한 나머지 승려들의 시신은 노납이 이곳으로 수습해 와서 후원 쪽에 안치했네. 잠시 후에 영구(靈柩)나 참배한 다음 돌아가도록 하게.”
노골적인 축객령(逐客令)에 두 명의 승려는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번에는 정선이 나직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소승들은 섬서성 일대를 수행하던 중에 본사(本寺)의 급보를 받고 허겁지겁 이곳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본사에서 다른 분들이 오실 때까지 저희가 해야 할 임무가 있으니 선사께선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자네들 사정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노납이 이번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자네들보다 결코 많지 않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워낙 중대(重大)하여 그 여파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선사께서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고 해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흐음, 그건 노납도 짐작하고 있었네. 이번 일로 장안 일대가 온통 소란스러워질 거라고 말이지. 하지만 노납이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다네.”
“무엇이옵니까?”
“소림사는 예전부터 이번의 초가보와 화산파의 격돌로 강북무림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네. 그런데 이번 일이 자칫 그들이 본격적으로 이 사태에 끼여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네.”
두 명의 승려는 그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이 느끼기에도 소림사에서 본격적으로 이번 일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선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본파가 끼여들지 않더라도 이번 일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겁니다. 이미 사태는 개방으로까지 확대되었으니 말입니다.”
백운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개방의 장안분타주인 나타개 소방방이 대왕루에서 숨졌다고 하더군요.”
백운의 안색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소방방이? 누가 그를 죽였나?”
“그게 미심쩍습니다. 소방방은 대왕루를 나서다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는데, 사람들이 가서 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아서 독살(毒殺)당한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왕루에서 먹은 음식에 독이 들어 있었단 말인가?”
“그런 추측이 있다는 거지요. 하지만 독살당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보다 정확한 것은 시간이 흘러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백운은 나직하게 침음했다.
“음…… 대왕루라면 초가보에서 운영하는 곳이 아닌가?”
“그래서 문제가 심각해진 것 같습니다. 소방방은 어제 취미사의 혈겁을 발견한 이존휘의 부탁으로 은밀히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대왕루에서 이존휘에게 그동안의 경위를 설명하고 주루를 벗어나던 중 변(變)을 당한 것입니다.”
“……!”
“사실 어제 혈겁에서 본사의 굉지 사조와 함께 화산파의 장로가 살해당했기 때문에 혹시 초가보에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건을 조사하던 개방의 고수가 초가보 영역에서 의문(疑問)의 죽임을 당하자 의혹이 더욱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정화가 입을 열었다.
“소승은 다른 말도 들었습니다.”
백운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떤 말인가?”
“만상공자 이존휘가 어제 시체들을 검색해 보고는 시체들이 모두 음한지기를 띤 장검에 당한 것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방방에게 음한지기의 장검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행적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소방방이 조사한 바로 그들 중 검보의 전대 보주인 검왕 서문동회의 움직임이 수상하다고 했답니다.”
“서문동회라면 무림의 명숙(名宿) 중에서도 명숙인데 무엇이 수상하단 말인가?”
“혈겁이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서문동회의 최측근 수하인 해천팔검 중 몇 사람이 서문동회의 밀명(密命)을 받고 장안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소방방이 죽던 그 시간에 대왕루의 이층에서 해천팔검의 세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소방방의 죽음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음……”
“초가보든 검보든 그들이 곧 있을 삼보회동으로 하나의 세력화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번 혈겁에 대해 그들 쪽에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백운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비록 무림인은 아니었으나, 장안 일대의 형편은 나름대로 해박했다. 자은사는 장안에서도 제일 유명한 사찰이며, 백운은 이 자은사의 주지로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온 사람이었다. 따라서 알게 모르게 장안 일대의 정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훤히 꿰뚫고 있는 형편이었다. 백운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일은 커져도 너무 커져 버렸다. 단 이틀 동안에 강호에서 가장 거대한 세 개의 세력이 모두 피해를 보았던 것이다. 소림사와 화산파, 그리고 개방은 비단 구파일방뿐 아니라 당금 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세력들이었다. 그 세력의 중요 인물들이 살해를 당한 이상 그들이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혈겁에 대한 의혹이 초가보를 비롯한 강북삼보에 쏠린다면 한바탕 거대한 피바람이 몰아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자칫하면 구파일방에서 가장 큰 세 문파와 강북삼보가 맞붙을지도 모르겠구나.’
그것은 상상만 해도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백운은 오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조일평이 떠올랐다. 조일평은 그의 오랜 친우(親友)의 제자로, 예전에도 가끔씩 자은사로 놀로 오고는 했었다. 조일평에게서 백운은 취미사에서 벌어진 참혹한 일에 대해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때 조일평은 이렇게 말했었다.
“이번 사건은 아무래도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이상한 냄새라니……”
“음모(陰謀)의 악취(惡臭) 같은 것 말입니다. 악마적(惡魔的)인 머리를 가진 누군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살인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악취치고는 아주 지독한 악취지요.”
“그들을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짓을 했겠느냐? 사익은 오랫동안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던 사람이고, 굉지는 아예 무공과는 담을 쌓고 불도(佛道)만 쌓아온 인물이 아니더냐?”
“다시 생각해 보면 사익은 화산파의 장로 중 한 사람이고, 굉지선사는 소림사 장문인의 사숙으로 그 신분과 지위가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네 말은 흉수가 그들의 개인적인 면보다는 신분이나 지위 때문에 그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조일평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 이번 일이 이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 더욱 거대하고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저도 모르지요. 다만 제 생각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조일평은 이렇게 말하며 그답지 않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조일평의 말대로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백운은 무언지 모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암운(暗雲)이 점차로 다가오고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두 건(件)의 비극적인 사건이 끝이 아니라 가공할 혈겁(血劫)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 정화의 음성이 그의 깊은 상념을 깨웠다.
“선사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백운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정화를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사익이 무슨 이유로 굉지 사조님을 만나러 왔는지 아시는지요.”
백운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왜 그것을 알려고 하는가?”
“굉지 사조는 이십 년 가까이 취미사에만 계신 분이셨습니다. 흉수가 처음부터 그분을 노릴 생각이었으면 굳이 사익이 오는 날을 골라 혈겁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
“그래서 소승은 흉수가 하필이면 그날 살인을 자행한 것은 그 목적이 굉지 사조가 아닌 사익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익이 무슨 일로 굉지 사조를 찾아왔는지를 알게 되면 흉수의 의도를 좀더 확실히 알 수 있지 않나 하여 선사께 여쭌 것입니다.”
백운은 정화의 둥그런 얼굴을 물끄러미 쳐자보더니 갑자기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는 보기보다 상당히 총기 있는 사람이군. 똑똑한 젊은이를 만난다는건 언제나 유쾌한 일이지. 확실히 사익이 굉지를 찾아온 것에는 나름대로 중요한 이유가 있네.”
정화와 정선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백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나 그들은 이내 실망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자네들에게 말하지는 않겠네.”
정화는 마음속의 실망감을 억누르며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저희들 때문이시라면 본사의 다른 분을 모셔오겠습니다.”
자기들의 신분이나 항렬이 낮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우회적인 질문이었다. 백운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젊은 만큼 솔직하군. 다소 성급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젊으니까 가능한 이야기지. 노납이 말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사익이 굉지를 찾아온 이유가 어떠한 것이든 이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일세.”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노납이 말한 대로일세. 사익은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굉지를 찾아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네. 그러니 쓸데없이 그들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건 고인(古人)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그렇지 않나?”
정화는 백운의 말뜻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물었다.
“알겠습니다. 선사께서 굉지 사조님과 아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백운은 정화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그를 찬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흠, 오래되었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으니 거의 칠십 년쯤 되었을까?”
“그야말로 평생 친구이셨군요.”
“그런 셈이지.”
“소승이 일전에 듣기로 두 분 말고도 또 한 분의 친한 친구가 계시다고 하더군요.”
백운의 주름진 눈에 새삼스러워하는 빛이 떠올랐다.
“굉지가 자네에게 그런 말까지 했나?”
“운이 좋게도 몇 년 전에 굉지 사조님을 뵈었다가 그분과 밤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의 말씀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랬었군. 친구가 한 명 더 있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보는가?”
“굉지 사조님의 말씀으로는 그분께선 평생을 무도(武道)에만 심취하여 속세를 멀리하고 오직 검(劍)만을 닦으며 지내셨다고 하더군요.”
“……!”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검도에 빠지게 된 이유가 젊었을 때 화산파의 일대제자에게 패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결국 절치부심하여 그 일대제자엑 설욕했지만, 그때부터 검에 눈을 떠서 그후로도 계속 검에만 매진해 오고 계시다고 말입니다.”
정화는 백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소승은 그 친구분과 겨루었다는 화산파의 일대제자가 소요검객 사익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운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더니 조금 전과는 달리 엄격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이번 일과는 상관없는 것일세.”
“그렇겠지요. 다만 소승은 사익이 굉지 사조님을 찾아온 이유가 혹시 그 친구분 때문에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여쭈었을 뿐입니다.”
이번에는 백운이 엉뚱한 것을 물었다.
“자네의 사부는 누구인가?”
정화의 눈에서 번쩍하는 신광(神光)이 피어올랐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노납은 일전에 굉지에게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네. 소림사의 이대제자 중에 아주 신통한 자가 들어왔는데, 어찌나 무공에 재질이 뛰어나고 영특한지 소림의 웃어른들이 친자식보다도더 아끼고 귀여워한다고 했지. 소림에서는 그를 일대제자로 키우고 싶었으나, 그때는 굉지의 사형인 굉요선사가 입적(入寂)하고 대방이 장문인에 오른 후라서 어쩔 수 없이 대방의 제자로 입적(入籍)시켰다고 하더군.”
백운의 얼굴 표정과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두 눈만은 날카로운 빛을 띠며 정화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림에서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비밀리에 그에게 극히 일부분의 일대제자만이 익힐 수 있는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까지 배우게 하여 장차 소림의 기둥으로 키우고 있다고 하네. 소림의 웃어른들은 그를 일대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팔대신승에 빗대어 소신승(小神僧)이라고 부른다고 들었네.”
“……”
“벌써 십 년도 더된 이야기라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자네를 보니까 문득 생각이 나는군. 재미있는 이야기 아닌가?”
정화는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그 점에 대해서는 소승이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백운은 조용히 웃었다.
“총기 있고 솔직한 데다 말재주까지 뛰어나군. 좋은 일이야. 하지만 재주가 너무 승(勝)하면 인정이 없어 보인다네. 항상 잊지 말고 마음속에 부처를 간직하도록 하게.”
정화는 신광이 어리는 눈으로 백운을 응시하다 고개를 숙였다.
“선사의 금과옥조(금과옥조)를 잊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경과되었군. 더 어두워지기 전에 굉지의 영구를 참배하도록 하세.”
“예.”
정화와 정선은 백운에게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백운은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묵묵히 쳐다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저 아이는 다 좋은데, 너무 자신감이 강하구나. 일평, 그 아이와 부딪친다면 틀림없이 둘 중 하나는 부러지고 말 텐데 걱정이로다.”
백운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상념에 잠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