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18화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태양 아래 털로 뒤덮인 들판에서, 이루릴은 현실의 백사장을 향해 다가오는 프로타이스를 느끼며 말했습니다.
“프로타이스는 구층탑 대신 자신이 마법적 압박을 가해서 그림자 지우개를 부수려 했어요. 나는 그것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렇지 않 았어요.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으니까요.”
프로타이스가 의문을 춤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루릴이 빠르게 말했어요.
“아프나이델은 그림자 지우개를 파괴하려 했어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림자 지우개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었지요.”
왕지네가 입을 벌렸습니다. 이루릴은 왕지네를 보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죠.
“그림자 지우개를 가지고 있을 때 가장 무서웠던 것이 뭐였죠, 왕지네?”
왕지네는 반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걸 써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요. 아프나이델이 걱정했던 것도 그것이에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 세계의 무엇을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공포.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를 지운 기억이 없다는 것은 안심의 근거가 되지 못해요. 타파할 수 없는 불안만 커질 뿐이죠.”
왕지네는 자신의 몸이 부서질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두 어깨를 부여잡았습니다. 이루릴은 동정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본 다음 계속 말했어요. “아프나이델은 그걸 견딜 수 없었지요. 그래서 아프나이델은 그림자 지우개를 그냥 파괴하는 대신 자신이 혹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삭제를 복구하는 방식으로 파괴하기로 했지요. 어떻게? 그림자 지우개의 작용 방식이 바로 그 대답이었지요. 그림자 지우개는 만물을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요. 그런데 그림자 지우개 자체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일페사스가 신음했습니다. “아!”
“예. 그림자 지우개에 의한 삭제도 원래부터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되겠지요. 만에 하나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삭제가 복구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프 나이델은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그림자 지우개를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려 했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또 하나의 그림자 지우개가 필요할 텐데?”
“그렇죠. 아프나이델은 그림자 지우개를 지우기 위해 그림자 지우개를 하나 더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아프나이델은 마법사 들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야심만만하다 할 만한 계획을 세웠어요. 그는 시간을 또 하나의 그림자 지우개로 삼기로 했어요.”
“시간?”
“시간이 가진 망각의 힘.”
“아…… 과연! 하지만 그렇다면 천 년은 긴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짧은 건데. 겨우 천년 가지고 될까? 인간뿐이라면 몰라도 세상엔 드래곤이나 엘프 도 있어. 당신 같은 경우엔 그 오랜 세월 동안 망각 없이 고인들을 추도하고 있잖아.”
“예. 그래서 구층탑이 필요했던 거죠. 구층탑은 내부의 그림자 지우개를 향해 압박을 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건 구층탑 외부에 흘러가는 시간을 마력으로 바꿔 내부로 집중시키는 것이었을 거예요. 수만 년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을 천 년만에 해내기 위해 구층탑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그를 잘 알았던 나도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요. 그러니 프로타이스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지요. 프로타이스는 물론 강대한 마법적 압박을 구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힘이 아니라 시간이에요. 망각이지요. 그걸 몰랐기 때문에 프로타이스는 그림자 지우개를 없애는 대신 그 자신이 지 워졌지요.”
“그렇군. 그런데 지워진 프로타이스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는 거지?”
“프로타이스의 생각 중 일부는 맞았던 모양이에요. 프로타이스는 구층탑에 갇혀 있는 동안 그림자 지우개가 약해졌을 거라고 보았지요. 예. 다시 표 현하자면 그림자 지우개는 많이 지워졌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프로타이스를 확실히 지우진 못한 것 같아요. 말하자면…… 드래곤은 지웠지만 반항은 지우지 못한 것 같아요.”
‘프로타이스를 둘로 나누면 드래곤과 반항이 된다.’ 아일페사스가 한 말이죠.
“그래서, 그 반항은 드래곤 부분이 지워진 상태에서도 무에 대항하여 자신을 창조할 정도의 힘은 발휘할 수 있나 봐요.”
“자기….. 창조?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 된다고?”
“엄밀하게 말하면 무를 자신의 원인으로 삼는 것이겠지요. ‘반항’이니까.”
아일페사스는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프로타이스하군.”
이루릴은 살포시 미소지었습니다. 왕지네는 놀랐지만 이루릴이 세계 파멸의 순간에도 아름다운 것, 재미있는 것을 보면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엘프라 는 걸 아는 아일페사스는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루릴의 다음 행동엔 그녀도 놀랐어요. 이루릴은 허공을 향해 외쳤습니다.
“들었죠? 프로타이스가 돌아오고 있어요. 그 때문에 시에프리너를 지워도 소용없어요. 프로타이스가 돌아오기로 작정한 것이 바로 이 현실이기 때 문이에요. 그래서 자꾸만 이 현실로 돌아오는 거예요. 이 현실에 닻이 내려진 거예요. 그러니 포기하고 도망치세요, 전하! 프로타이스는 전하를 용서 하지 않을 거예요!”
왕지네와 아일페사스는 그들이 있던 마법적 공간과 시에프리너의 레어 사이에서 소리가 통한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었지요. 그녀들은 충격을 가 라앉히려 애쓰며 왕비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왕비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나의 왕께서 시에프리너를 죽이면 돼!”
이루릴이 얼굴을 찌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