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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128화


시에프리너는 레어의 벽에 몸을 쿵쿵 부딪치며 허위허위 걸었어요. 실로 오래간만에 걷는 것이었고, 또 제정신이라고 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그 걸 음은 거칠었지요. 시에프리너는 몇 번 바닥에 세게 넘어졌습니다. 그때마다 레어 전체가 종처럼 울렸고 돌멩이와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하 지만 왕비는 자신의 몸을 때리는 모래와 돌을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이 왕비의 이마를 찢었는데도 왕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쓰러진 왕을 보고 있었어요. 발에서 가슴까진 멀쩡했어요. 얼굴도 괜찮았죠. 다만 바닥의 바위에 부딪힌 뒤통수가 깨져 있었어요. 머리를 중 심으로 방사상으로 펼쳐진 핏자국은 마치 망토나 후광처럼 보였어요.

왕비는 아직까지도 울컥울컥 솟아나오는 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빨갛다.’

왕비는 피가 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곤 손등으로 이마를 닦았어요. 시에프리너가 레어를 빠져나갔습니다. 먼지 구름은 여전했지만 돌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천천히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벽에 붙어 있던 프로타이스는 그 광경에서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프로타이스는 그것이 진짜 경험한 일임을 떠올렸어요. 아마 발탄이었죠. 머리가 깨진 꼬마와 그 옆에 있던 조금 더 큰 꼬마. 프로타이스는 머리가 깨진 그 꼬마를 살려줬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몸에 붙이고 있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보물들 중 하나를 소모해야 했어요. 프로타이스는 그 아이의 이름이 에이다르 어쩌고였다는 것도 떠올렸어요. 더 자 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것이 프로타이스한 충동 때문에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프로타이스한 충동 때문에 프로타이스는 왕을 살려줄까 생각해 보았어요. 하지만 그에겐 위대한 권능을 가진 보물이 없었 고 설령 그런 보물을 가지고 있다 해도 왕을 살리긴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 옛날의 그 꼬마는 다 죽어가고 있었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았죠. 하지만 왕은 확실히 죽은 상태였습니다. 프로타이스는 입술을 비틀어 쭛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뭔가가 그의 발을 건드렸습니다.

프로타이스는 고개를 숙였어요. 튕겨 오른 유모차에서 굴러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뭔가가 그의 발치에 놓여 있었죠. 그것을 자세히 본 프로타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그것은 악명 높은 셈리타이의 여섯째 손가락이었어요.

셈리타이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육손 마법사 카즐빈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 물건을 만들어냈죠. 그 물건이 있으면 손가락이 다섯 개인 이도 카즐빈이 만들어낸 여섯 손가락을 위한 마법들을 쓸 수 있었어요. 제법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문제는 그 물건이 손가락이 다섯 개뿐인 자들에 의해 완전히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는 점에 있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셈리타이의 여섯째 손가락은 다섯 손가락으로 만들어낸 마법을 멋지게 방해 할 수 있었어요.

프로타이스는 자신이 왜 마법을 쓸 수 없었는지를 깨닫고는 분노를 담아 셈리타이의 여섯째 손가락을 짓밟았습니다. 프로타이스는 그 효과에 깊은 인상을 받았죠. 셈리타이의 여섯째 손가락이 부서지자마자 금발과 흑발의 엘프 여인들이 나타났거든요. 그것은 아일페사스와 이루릴이었습니다. 어 리둥절한 채 상황을 살피는 그녀들에게 프로타이스는 젠체하며 말했습니다.

“셈리타이의 여섯째 손가락이었습니다. 내가 그걸 부쉈죠.”

프로타이스를 목격한 아일페사스가 놀라서 말했어요.

“프로타이스? 너 프로타이스지? 어떻게 변신한 거지?”

“본모습으론 여기가 비좁을 것 같아서 변신했습니다.”

“아아. 넌 현실로 되돌아왔지만 보석과 보물들은 되돌아오지 않은 거야. 그래서 변신할 수 있었군.”

프로타이스는 아일페사스의 말을 못 들은 척했습니다. 그때 이루릴이 숨막히는 소리를 냈어요.

“알……?”

아일페사스는 깨진 알껍데기와 노랗고 붉은 액체를 보곤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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