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29화
미친듯이 바이서스 군인들과 싸우던 코볼드들이 갑자기 동작을 멈췄습니다.
그들은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만큼이나 대지를 통해 전달되는 소리에도 민감했지요. 총성이 난무하고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광기 어린 전장 의 한가운데서도 코볼드들은 땅을 울리는 독특한 진동을 느꼈고 그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짐작했습니다. 그들은 희열을 느끼며 무너진 바위벽을 돌아보았어요.
“시에프리너!”
코볼드들이 쉰 목소리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벌레떼의 습격과 유령 비행기의 공격, 코볼드들의 자기 파괴적인 공격에도 가까스로 버티 고 있던 바이서스 군인들은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어요. 무너진 바위벽에서 푸른 드래곤이 걸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열차가 터널에서 빠져나와 갑자기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정면에서 보는 것 같았죠. 일어난 사실만 말한다면 시에프리너가 밖으로 나와 머리를 들어올린 것이었지만.
“시에프리너! 시에프리너!”
코볼드들이 경기를 일으키듯 외쳤습니다. 산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그 불타는 눈을 마주본 토벌군 병사들은 혼이 빠져버렸습니다. 그 순간 죽음은 그들 대부분의 바람이 되었어요. 너무도 무서워서, 더 이상의 무서움을 견딜 수 없어서 그들은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시에프리너의 입 주위에 번개가 어리는 것을 보며 그들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시에프리너의 충성스러운 코볼드들의 경우엔 기뻐 날뛰었습니다. 그들의 주군이 그들에게 벼락을 토해내려 하고 있었어요. 인간의 탄환과 폭탄에 죽을 각오였던 그들에게 그보다 더 기쁜 죽음은 없었어요. 많은 코볼드들이 눈물을 흘렸고 그렇지 않은 코볼드들도 아낌없이 괴성을 질렀습니다. 흥 분 때문에 완전히 돌아버려서 자신의 얼굴을 할퀴고 수류탄으로 땅을 후려치는 코볼드들도 있었지요.
그들의 주군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바이서스 병사들은 가족과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코볼드들은 시에프리너의 이름을 외쳤지요. 그들 모두를 향해 시에프리너는 공평하게 벼락을 내뿜었어요.
구부러진 번개, 휘어진 번개, 꺾어지는 번개, 마치 혈관처럼 잔가지를 펼친 수백 줄기의 번개가 시에프리너의 입과 전장 곳곳을 순식간에 연결했습 니다. 시에프리너의 모습은 분노가 흐르는 그녀의 혈관 자체를 토해내는 것 같았지요. 벼락에 직격당한 인간이나 코볼드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눈 에 보이지도 않는 벼락 줄기에 강타당한 자들이 픽픽 쓰려졌습니다. 거기엔 많은 폭약들도 있었지요. 그것들이 벼락에 불붙어 터지기 시작하자 땅 전 체가 요동쳤습니다.
그 충격은 레어 안에 남아 있던 자들에게도 전해졌어요.
가혹한 충격에 다시 흙먼지와 돌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길한 것은 땅이 내뱉는 신음이었어요. 꽈르릉 하는 소리에 이루릴은 정신을 차렸어요. 무너진 것은 다행히 레어가 아니었습니다. 솔베스 개척민들이 떠난 후 방치되어 있던 광산의 약한 부분이 무너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충격이 레어 쪽으로 전해져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이루릴은 억지로 알의 잔해에서 눈을 옮겨 주위를 살폈습니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건 왕비였어요. 그녀는 왕의 시체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위 아래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이루릴은 곧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소리는 없었지만 그것은 명백히 비명이었습니다.
이루릴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어요. 죽은 왕의 품에는 아직 왕자가 안겨 있었죠. 이루릴은 왕자를 들어올리곤 왕비에게 말했어요. “전하. 일어나세요.”
왕비가 고개를 들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왕비가 바라본 곳은 이루릴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집이 불타는 것을 보는 사람처럼 한쪽을 멍하니 응 시했어요. 그곳에는 한 손에 총을, 다른 손엔 그림자 지우개를 든 예언자가 서 있었습니다.
예언자가 말했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