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52화
바이서스 임펠에 새 날이 찾아왔습니다. 비록 태양은 안개를 적당히 떼어 뭉친 다음 하늘에 던져둔 것 같았고 공포를 과음한 바이서스 임펠 시민들 은 그 숙취에 시달리느라 우리 남은 생애의 첫째 날 같은 감상적인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할 상태였지만요. 결과적으로 바이서스 임펠에 찾아온 새 날 은 상당히 쌀쌀맞은 대접을 받게 되었지요.
그날 오후 바이서스 임펠에 나타난 여인 또한 처음엔 그리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러진 않았지요. 매일 찾아오는 ‘새 날’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여인이었거든요. 그녀가 바이서스 임펠에 나타나고나서 채반 시간도 되기 전에 그녀 주위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몰려든 인파가 본 것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엘프 여인이었어요. 금발에 훤칠한 키, 약간 구식으로 느껴지지만 촌스럽다고 말하긴 어려운 옷차림이었지 요. 그런 모순적인 인상은 낯설음 때문일 거예요. 여인의 옷차림은 인간이 만든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선들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엘프라는 것이나 그 옷차림보다 더 놀라운 건 그 여인의 끔찍할 정도의 존재감과 그에 수반된 압박감이었습니다. 혼자인데다 아기까지 안고 있어서 물리적으 로 말하면 두 팔이 봉쇄된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도 여인에게 40큐빗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군중의 가장 앞쪽에 있는 이들은 자신 이 평생 최고의 모험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처음으로 이성의 맨살에 손을 대었던 때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죠.
여인은 몰려든 인파에 아무 관심을 보내지 않은 채 자기 걸음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그 걸음에 따라 여인을 중심으로 한 원형 무인지대도 똑같 은 속도로 움직였지요. 사람들은 외국의 여왕이나 왕비, 혹은 어떤 종단의 비밀스러운 최고위 사제가 분명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들이 느끼 고 있는 그 이유 모를 압박감은 잘 설명하는 이론이었지만 상식적으론 말이 안 되는 소리였지요. 그런 이들이 수행원 하나 없이 그렇게 걸어갈 리는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득세한 것은 여인이 변장한 여신이라는 이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변변찮은 신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아기를 안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여신이 누군가 고민해봤어요. 바이서스 임펠 시민들에겐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여신은 없었어요. 그건 그냥 아기를 안고 걸어가는 엘 프 여인에 불과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바이서스 임펠 시민들은 만일 그렇다면 그건 그들이 그래야 한다고 믿는 세상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욕이라 고 생각했어요.
여인은 중앙광장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광장 한가운데서 여인은 뭔가를 찾듯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한 인간 여자가 걸어 나왔습니다.
엘프를 향해 걸어가는 여자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죠. 그녀는 의혹에 차서 엘프를 보다가 엘프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홱 돌리곤 했죠. 그러곤 자기 를 어떻게 해달라는 듯 비참하게 사람들을 둘러보았어요. 도망치고 싶은 것이 분명했죠. 하지만 그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았어요. 그 증 거로 여자의 걸음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죠. 마침내 엘프 앞에 도착한 인간이 말했습니다.
“새벽 꿈에서………… 제발. 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부르신 분이…………… 당신 맞습니까?”
사람들은 숨을 급히 들이마셨어요.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궁정마법사라면, 그렇다. 내가 불렀다.”
걸어나온 여자는 안도하면서 동시에 항의하고 싶었어요.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진 현대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예직, 아니, 그냥 수식어에 불과했지요. 여자의 실제 직무는 궁성 경호실장이었어요. 하지만 엘프는 항의할 틈을 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대로 아기를 내밀었지요. 경호실장은 무의 식적으로 아기를 받아들었습니다. 그녀의 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어요.
“바이서스의 왕자다. 데려가라.”
경호실장이 권총을 뽑지 않은 건 왕자를 한 팔로 지탱하는 위험을 감히 무릅쓸 수 없었기 때문이죠. 경호실장은 경기를 일으킬 듯한 모습으로 왕자 와 엘프를 번갈아 쳐다보았어요. 하지만 엘프는 이미 그녀나 왕자를 보고 있지 않았죠. 바이서스 임펠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엘프는 주위 사람들을 쳐다보았어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나는 드래곤 레이디 아일페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