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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26화


연령 구분 없이 모든 남자애잘 아시겠지만 세상엔 수염이 허연 남자애도 수두룩합니다.―들을 미친 듯이 수다 떨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가 하나 있죠. ‘최고’입니다. 최고의 장수는 누구였느냐, 최고의 정치가는 누구였느냐, 최고의 모험가는 누구였느냐, 등등. 이 최고를 묻는 질문들 중엔 이런 것도 있죠. 최고의 마법사는 누구였느냐.

저런 질문을 많이 접해 보신 분들이라면 저 질문이 사실은 ‘핸드레이크와 솔로처 중 누가 더 강력했을까?” 라는 질문의 변형이라는 것도 아실 겁니 다. 저 질문이 던져졌을 경우 열에 아홉은 두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다투는 격론이 되게 마련이니까요. 애석하게도 두 사람은 사제 관계였거니와 심 각한 대립을 벌인 일도 없기에 격론이 종식될 날은 요원합니다. 아, 세상의 모든 남자애들을 생각한다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모든 격론의 장에는 언제나 소수의견이라는 것이 존재하죠. 핸드레이크와 솔로처의 철벽 같은 이름에도 감히 도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런 자들이 주로 내놓는 이름은 아프나이델입니다. 예. 구층탑을 세운 그 아프나이델 말입니다.

소수의견이 소수의견인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아프나이델 최강론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아프나이델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살았습니다. 물론 아프나이델도 자신의 인생이 평탄하진 않았다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겠지만 바이서스 건국 당시의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살았던 핸드레이크나 솔로처에 비하기는 어렵지요. 그는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기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겁니다. 게다가 아프나이델 자신이 도저히 무대 체질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길이 전할 수도 있는 아프나이델 탑을 ‘구 층이니까 구층탑’이라 불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 죠. 저런 성격의 인물은 역사라는 희비극 무대에서 주목을 받는 것이 좀 어렵죠.

하지만 바로 그 아프나이델 탑, 구층탑이 아프나이델 최강론의 증거가 된다는 것에서 어떤 이는 세상사의 오묘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우선 구 층탑은 마법사가 세운 최후의 탑입니다. 아프나이델 생존 당시에도 마법사의 탑은 제법 있었지만 그것은 과거에 세운 탑이 남아 있는 것에 불과했어 요. 그 시기 마법사들은 이미 탑을 쌓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지요. 따라서 아프나이델이 세운 최후의 탑은 대단히 상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구층탑에는 그런 상징성에 걸맞은 근사한 전설도 있지요. 만년의 아프나이델 앞에 정체불명의 엘프 여인이 나타났고 아프나이델은 그녀와 함께 구층 탑을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잘 아시겠지요. 그 전설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도 구층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거든요.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는 구층탑의 수단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도전자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격퇴되었거든요. 그 중에는 우스꽝스럽거나 호 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있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전설도 있습니다. 언젠가 구층탑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이 구성된 적이 있지요. 그 조사단은 구층탑 에 도착하여 캠프를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사소한 언쟁 끝에 피비린내 나는 난투가 벌어져 조사단의 반수 이상이 살해당했습니다. 당연히 조사 계획은 백지화되었고요. 이것은 기록에도 남아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상식을 신뢰하는 이들은 그 조사단에 서로를 죽일 만큼 증오했던 연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믿지만, 현실에서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구층탑의 저주라는 설명이지요.

아프나이델 최강론자들은 매일 기적의 기간이 연장되고 있는 진행형 기적이라는 것은 핸드레이크나 솔로처도 갖지 못한 것 아니냐고 주장하지요. 그에 대한 반대 논리는 주로 구층탑은 절대 불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구층탑에 들어가 보았다는 이야기는 부지기수입니다. 유명한 모험가나 뛰어난 도둑에겐 예외 없이 구층탑 침입의 전설이 따를 지경이지요. 하지만 그 전설들 중 어떤 것도 기록이나 증거로 뒷받침되진 않았기에 공식적으 로 구층탑은 여전히 불침입니다.

예언자의 집에서 뛰쳐나온 왕지네가 몇 개월 후 그 모습을 나타낸 곳이 바로 그 아프나이델 탑 앞이었습니다. 왕지네는 구층탑을 잔뜩 노려보고는 몸 곳곳에 열두 개의 갈고리를 부착했습니다. 구층탑을 오를 작정이었죠. 하지만 그녀는 구층탑의 불침 기록을 깨트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록은 이미 깨졌거든요.

예. 풍문에도 진실이 깃들 때가 있죠. 왕지네는 자신이 저질렀던 무수한 헛수고 중 하나로만 기억하고 있지만, 과거 그녀는 구층탑에 침입한 적이 있 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가볍고 작고 비싼 보물’을 찾지는 못했지요. 대신 구층탑이 왜 불침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아프나이델이 사상 최고의 마법사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왕지네가 보기에 그는 마법사에게 찾아보기 힘든 좋은 품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뒷정리를 할 줄 알았어요. 구층탑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가는 것을 막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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