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27화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깊숙한 곳에서, 위대한 드래곤 레이디 아일페사스는 세계의 미래나 드래곤의 존재론적 의미, 그리고 우주의 진리에 대한 심모 원려에 빠져볼까 하는 유혹을 가끔 느끼면서 장기의 묘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묘수가 잘 떠오르지 않았나 봐요.
당신이 혁기에 조예가 깊다 해도 그녀에게 훈수를 할 순 없을 거예요. 그 장기는 드래곤 레이디가 만들어낸 것이었거든요. 그 장기판에는 ‘별’이나 ‘태양’, ‘드래곤’ 같은 전통적인 기물 대신 아일페사스가 장구한 세월 동안 사귀었던 친구들을 표현한 기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물들의 수 도 대단히 많았고 그 행마법도 아주 괴상했어요. 한 기물이 두 종류의 행마법을 가지는 경우는 다반사였고 심지어 어떤 기물들은 장기판을 드나들 수 도 있었습니다. 일반 규칙은 거의 천 개에 육박했고 특수 규칙도 거의 같은 수였죠. 확실히 저변화되긴 어려운 장기였지만 아일페사스는 그 장기를 보급할 계획이 없었기에 문제될 건 없었죠. 그 장기를 그럭저럭이라도 둘 수 있는 존재는 아일페사스 자신을 포함하여 현재 전 세계에 일곱뿐이고 그 중 인간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 작디작은 집단 내의 최강자는 아일페사스여야겠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 장기를 만든 이래 아일페사스는 언제나 2인자였지요. 어쨌든 그녀는 느닷없이 들려온 행마 같은 것은 떠올리지 못하거든요.
“흑의 운차이로 백의 엑셀핸드를 잡아요.”
아일페사스는 장기판에서 시선을 들어올렸습니다. 이루릴 세레니얼이 서 있었죠.
“그러면 샌슨이 말과 함께 친구 타기’ 규칙으로 운차이의 행마를 제한할 텐데?”
“당신 40년 전에 그렇게 해서 나한테 졌어요. 펫시. 잘 생각해 봐요.”
“이 괴물 엘프.” 아일페사스는 한숨을 내쉬곤 예의를 떠올렸습니다. “어서 와.”
이루릴은 배낭을 벗으며 빠르게 말했습니다.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해결되었어요. 그 서펜트는 앞으로 백 년 동안 배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다음엔 바이서스로 갈 생각이 에요. 전에 빚 하나 진 것도 있고 해서 왕자에게 선물이라도 가져갈까 하는데 여기서 뭘 좀 가져가도 될까요?”
“가져가기 전에 보여줘. 아, 당신 연락처로 온 편지가 있어. 당신이 여기로 올 것 같아서 미리 이쪽으로 가져오게 했어.”
아일페사스는 비늘 한 장 움직이지 않았지만 카르엔 드래고니안의 어둠 속 어딘가에서 편지 봉투가 휙 날아왔습니다. 그것은 정확히 이루릴의 얼굴 앞에 멈춰 섰죠. 이루릴은 그것을 붙잡아 편지를 꺼내었습니다.
아일페사스는 다시 장기판에 시선을 옮겼죠. 이루릴이 가르쳐준 40년 전의 실수를 떠올린 그녀는 새로운 행마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래 곤 레이디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대한 머리를 들어 다시 이루릴을 본 아일페사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루릴은 편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슬퍼요.”
“루리?”
“슬프지 않다는 것이 슬퍼요.”
아일페사스는 신음을 억눌렀어요. 턱없이 긴 시간을 함께한 사이인지라 그녀는 이루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지요. 이루릴은 차분한 동 작으로 편지를 접어 도로 봉투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려 드는 자신이 슬퍼요. 나, 오래 살았군요.”
아일페사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어요.
“누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예언자에게 연락해야겠어요.”
“예언자? 왜지? 그 건은 잘 해결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에게 가보겠어요.”
“잠깐. 그럴 거라면 지금 당장 이야기할 수 있어.”
고개를 갸웃하는 이루릴에게 아일페사스는 장기판을 가리켜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