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3화
벽타기꾼이라는 도둑의 한 부류를 아십니까? 말 그대로 이 자들은 벽을 탑니다. 도둑한테 이런 말 써봐야 우습지만 이 부류엔 괜찮은 인물들이 제법 있습니다. 경비원을 찌르거나 개를 독살하는 간단한 방법을 쓰는 대신 자신을 위험에 던지는 자들이거든요. 게다가 벽을 타야 하기 때문에 뭘 많이 들고 가지도 못하지요. 그래서인지 도둑 세계에는 이런 말이 전해집니다. 벽타기꾼 중에는 절대로 대도가 나오지 않는다고. 사실 대도라는 작자들은 필요하면 사람도 찌르고 불도 지르고 하는 말종들이지요. 낭만적인 도둑상에 가장 가까운 자들은 바로 벽타기꾼들입니다. 애석하게도 벽타기꾼이라 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의 악명이 널리 퍼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런 사실들을 놓고 볼 때 왕지네는 꽤 희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벽타기꾼이면서도 그 명성이 제법 높았지요. 불쌍하게도 뭐 대단한 것을 훔 쳐서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왕지네가 높은 명성을 누리는 까닭은 언어도단이라 할 만한 장애물을 몇 개 넘었기 때문이지요. 도저히 믿기 어렵 지만 어떤 이들은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구층탑은 사실 불침이 아니라고 덧붙이기도 하지요. 사실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런 이야 기가 퍼질 정도라면 그녀가 누리는 명성이 어떤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왕지네를 개인적으로 아는 소수의 지인들은 절대로 그녀 앞에서 그녀의 명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끝도 없는 신세타령을 듣고 싶 은 것이 아니라면요. 명성에 대한 왕지네의 견해를 요약하면 ‘고생만 죽도록 하고 얻는 것은 비참한데 쓸데없이 악명만 높으니 신세가 한심하다.’입 니다. 참 벽타기꾼다운 성격에 벽타기꾼다운 처지지요. 열두 개의 갈고리를 몸에 붙이고 지네처럼 매끄럽게 벽을 달리는 재주가 그녀의 자랑거리였 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런 처지에 지치고 화가 난 왕지네는 고생 최소화, 소득 최대화로 노선을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기대하진 마세요. 애초에 벽타기꾼이 될 정도 로 소심한 그녀였잖아요. 왕지네는 좀 더 낮은 벽을 넘어가 좀 더 비싼 것을 훔치기로 결정했지요. 보세요. 여전히 ‘벽을 넘는다’잖아요. 스스로의 힘 으로 인생을 바꿨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왕지네를 보며 지인들은 차마 그 사실을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친구라면 고언을 아끼지 말아야 하죠. 왕지네의 지인들은 그녀를 만류하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어느 캄캄한 밤, 왕지네는 그녀에겐 장애물이 라고 할 수도 없는 벽을 훌쩍 넘어가서는 자고 있는 집주인을 흔들어 깨운 다음 당당히 질문했습니다.
“진짜 알고 있었어?”
집주인인 예언자는 정말 묻고 싶었어요. 원하는 것이 질문이었으면 그냥 낮에 약속 잡고 문으로 들어오면 되지 않느냐고. 그리고 입버릇 교정에 별 노고를 들이지 않았던 예언자는 그대로 질문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장에 흥분하고 있던 왕지네는 조금 상처를 받았지만 기가 꺾이진 않았어요.
“예언 훔치려고 왔단 말이야. 무게가 전혀 없으니까 들고 다니기도 편하지. 귀에 쏙 넣어 가면 되잖아.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괜찮은 예언 하나 “내놔.”
·훔치는 거니까 밤중에 벽을 넘어야 한다? 당신 바보지?”
“바보가 이런 생각 어떻게 해? 당신이 바보구나?”
예언자는 왕지네를 두드려 패고 싶었어요. 하지만 계속 이어진 왕지네의 말이 그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죠.
“당신 예언 안 하잖아. 그러니까 훔쳐야 하지. 안 그래?”
그렇습니다. 조금, 아니, 확실히 이상한 형태이긴 하지만 그건 예언자의 신조에 대한 존중이었지요. 예언자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왕지네는 기절 초풍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