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4화


전쟁에 질 줄 알고 있었으면서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는가. 그 당시 이 질문은 형태와 강도를 바꿔가며 예언자에게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불길한 예언보다 더 나쁜 것은 예언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당시 바이서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을 주도한 것은 책임 규명이라는 화살에 쫓기고 있던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리 열심히 선동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화가 났거 든요. 어머나. 당신은 제 아버지가, 연인이, 아들이 죽을 줄 알고 계셨군요. 그러면서도 입을 다물고 계셨네요. 비범하기도 하셔라. 제 경의를 표현하 기 위해 당신의 혀를 뽑아드려도 될까요? 그러면 침묵을 지키기 수월하실 텐데.

예언자는 사람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질문하고 싶었지요. 질 거라고 예언했다면 전쟁을 벌이지 않았을 거란 말인가? 전쟁을 벌이 지 않을 능력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럴 능력이 있다면, 그냥 전쟁을 벌이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아무도 안 죽었을 텐데? 유감스럽 게도 그 질문을 할 기회는 예언자에게 주어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 질문들은 예언자의 속에 쌓여 있다가 그날 밤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지요.

앞서 말했지만 예언자는 화술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왕지네 또한 남의 말을 듣는 재주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수도 없이 되 풀이 말했습니다. 왕지네는 예언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그래. 너무하긴 하네. 제멋대로 사고치고는 왜 말리지 않았냐고 거꾸로 대드는 애송이 꼴 비슷하네. 하지만 당신도 좀 냉정한 거 아냐? 다른 사람 도울 능력이 있으면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아? 그게 사람 사는 정이잖아. 뭐라더라, 능력이 있으면 책임도 있다고 하던가. 그런 말도 있잖아?”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럴 듯하게 들리는 말 떠들기는. 물건이 달려 있으면 겁탈할 책임이 있냐?”

“입에 파리 꼬이겠네.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의 미래를 강간해도 되냐고 묻는 거야.”

“헤에? 예언이 그런 거야?”

“그런 것이지.”

그것은 왕지네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말이었습니다. 그녀도 오래된 유행에 익숙한 사람이었거든요. 하지만 왕지네는 예언자가 그렇다고 하니 예언은 그런 것이겠지 하고 간단히 수긍했습니다.

“그렇구나. 그러면 나랑 자자.”

“……저녁에 뭘 먹으면 밤중에 이야기가 그렇게 가는 거야?”

예언자의 오해와 달리 왕지네는 미래 세대 창조에 매진해 보자고 제안한 것이 아니었어요. 왕지네는 자신의 동의 하에 자신의 미래를 봐달라고 요청 한 것이었습니다. 예언자가 나빴죠. 비유를 그 따위로 했으니.

“당신이 동의하건 말건 상관없어. 미래를 보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고 약탈이야.”

“우리 쪽에 올 수 있겠네. 나는 도둑이거든.”

“여자한테 이런 말 해본 적 없지만, 할 수밖에 없군. 꺼져.”

왕지네는 낄낄 웃으며 떠났습니다. 그녀는 문으로 나가라는 예언자의 고함을 산뜻하게 무시하고는 벽을 넘었지요.

다음 날 예언자는 한밤중에 억지로 깨워지는 경험을 이틀 연속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당신. 아주 극악한 녀석의 미래를 보는 건 어때?”

예언자는 생각했어요. 베개 밑에 프라이팬을 넣어두면 어떨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