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60화
예언자는 왕지네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곤 바닥에 엎드려서 두 손으로 턱을 받쳤죠. 그 한가로운 모습은 먼 곳에서 감시하는 병사들을 안심 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 예언자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봤다면 당장 총을 겨눴겠죠.
예언자는 잔뜩 굳은 얼굴로 왕지네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무슨 말이야? 그림자를 지워? 혹시 그림자 지우개를 말하는 거야?”
왕지네는 대답 대신 커다란 숨소리만 냈습니다. 그녀는 괴로운 표정으로 아기를 보았어요. 이윽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래. 눈 색깔이 당신하고 같네. 어쩌면 보는 법도 비슷할지 모르겠어.”
“왕지네.”
“훌륭해.”
“뭐가?”
“아들을 위해서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일을 한 거잖아. 그게 아버지라는 거지. 갑자기 이런 칭찬 하려니 좀 쑥스럽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어. 참 멋 져.”
왕지네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예언자는 뿌듯함이나 자랑스러움과는 다른 감정으로 얼굴을 붉혔습니다. 왕지네는 지친 표 정으로 하늘을 응시했어요.
“응. 난 구층탑에 들어가 아프나이델이 만든 그림자 지우개를 훔쳤어. 그걸 쓰면 뭐든 없앨 수 있어.”
“구층탑이라니… 없앤다고? 무기야?”
“무기? 아, 그래. 궁극의 무기지. 상대가 시간에 드리웠던 그림자까지 싹 지워버리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그건 정말 간단해. 그림자 지우개는 쉽게 말해서 덮개 달린 초야. 내가 시에프리너 앞에 가서 그림자 지우개를 내민 다음, 머릿속으로 목표는 시에 프리너라고 생각하면서 그 덮개를 열면, 그러면 안의 초가 저절로 불이 붙어서 시에프리너에게 빛을 비추게 되지. 그 빛이 닿으면 시에프리너는 휙 사라질 거야. 그림자가 빛을 받으면 없어지는 것처럼.”
“사라…………져?”
“응. 완전히 사라져. 그런데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에 무슨 자국 남는 것 봤어? 본 적 없지? 마찬가지야. 그렇게 사라지면 아무 흔적이 남지 않아. 원 래부터 없었던 것이 되는 거야. 그런데 원래부터 없었던 것에 대해 예언을 할 수 있겠어? 불가능하지. 그래서 당신은 예언을 안 한 것이 돼.”
왕지네의 말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본 예언자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어요.
“존재를 지운다고? 그 역사까지?”
“정말 대단한 무기지. 살인자가 직면하는 문제가 뭐겠어? 어, 나 또 말투 이상해지는 것 같네. 음. 어쨌든 문제가 뭐겠어? 보복이지. 죽은 사람 가족 이나 친구들의 복수만이 보복은 아니야. 법에 의한 처벌도 어떻게 보면 사회 구성원의 상실에 대한 사회의 보복이라 할 수 있지. 법질서라는 건 결국 ‘사회는 오크 저리가라 할 정도로 복수심이 강하니 사회한테 찍히지 말고 얌전히 삽시다. ‘잖아. 하지만 그런 문제는 그림자 지우개 앞에서는 영영 안 녕이지.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떻게 살인이야? 복수 같은 건 절대로 없어. 처벌도 없어. 최고의 무기잖아?”
예언자는 기가 막혔습니다. 성급한 감상이었죠. 왕지네가 말했어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냐. 더 기막힌 점이 있어. 죄의식도 없다는 거야.”
“뭐? 그 말은……”
“그래. 다른 사람들이 사라진 사람을 잊는 것처럼 그림자 지우개의 사용자도 잊어.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따라서 사용자는 자신 이 지웠다는 것을 몰라.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지. 정확하게 말해서 그런 일은 원래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무슨 죄의식을 느끼겠어? 그런 무서운 무기이다 보니 아프나이델은 그걸 부수기로 한 거지. 구층탑 안에 천 년 동안 봉인해서 저절로 부서지게 하는 것이 아프나이 델의 계획이었어.”
“천 년? 잠깐만. 그럼 당신은 아프나이델이 천 년 동안 아무도 들어가지 못할 거라 확신했던 탑에 들어간 거야?”
왕지네는 싱긋 웃었습니다. 예언자는 언젠가 그녀가 시에프리너의 레어를 털려 했던 것을 떠올리곤 그건 과대망상이 아니었나 보다고 생각했죠. 그 때 왕지네가 뭔가를 암시하듯 말했어요.
“그러니까 난 나 자신에게조차 들키지 않고 그녀를 지울 수 있어.”
“시에프리너?”
“멍청한 척이 서툴다. 알아들었구나?”
예언자는 두 팔을 겹치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왕비를 지우겠다고?”
“그럴 수 있다고.”
예언자는 팔뚝에 이마를 세게 문질렀습니다. 그러곤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왕지네는 엎드린 채 잠든 것처럼 보이는 예언자의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 다보았습니다.
그때 예언자의 손이 움직였습니다. 그 손은 뱀처럼 풀잎 사이를 움직였지요. 다른 쪽 팔과 머리도 그 손의 움직임을 감춰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사 들의 눈으로부터 말이에요. 예언자의 손을 보던 왕지네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끝이 그녀의 발목에 닿았을 땐 호흡을 잠깐 멈췄어요.
잠시 후 왕지네는 멈췄던 숨을 조용히 내쉬며 속삭였습니다.
“이런, 알아들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