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61화
예언자는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습니다.
“정말 미안해.”
“괜찮아.”
“왕비는 지우지 마. 도로 갖다놔.”
“흥. 지워도 모를걸. 그런 여자는 원래 없었던 것이 될 테니까. 당신도 모르고 나도 몰라.”
예언자는 큰 병에 오랫동안 시달린 사람처럼 느릿느릿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왕지네를 똑바로 쳐다보았지요. 비밀스럽게 뻗은 손끝이 잠깐 닿 았을 뿐, 이젠 그녀를 만질 수 없었습니다. 망막은 배반의 살갗이지요. 시각은 가장 확실하게 상대의 존재를 알려주지만 상대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지 게 만듭니다. 예언자는 정말이지 왕지네의 어깨를 붙잡고 싶었어요.
예언자의 눈을 마주보던 왕지네가 말했습니다.
“도로 갖다놓을게.”
“미안해.”
왕지네는 대답하려다가 옆을 흘끔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곤 고개를 약간 떨구었습니다.
“시간 됐나 보네.”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다급히 할말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음만 급할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요. 결국 여러 번 했 던 말을 다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해.”
왕지네는 고개를 숙인 채 빙긋 웃었어요.
“바아, 바.”
병사들은 위엄 있는 태도로 예언자와 왕지네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왕지네가 유모차에 왕자를 눕히는 동안 예언자는 일부 병사들에게 이끌려 사라졌습니다.
자신의 곁에 남은 병사들과 함께 걸으며 왕지네는 유모차 안의 아기를 내려다보았지요. 그 아이가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왕지네에겐 새삼스 럽게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왕지네는 아기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실없는 농담을 떠올렸어요.
‘네 아빠는 엄마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이 싫은가봐. 다른 많은 남편들과 달리.’
아기는 왕지네를 따라 웃었습니다. 왕지네는 아기가 붙임성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지도 모른다는, 그리 근거가 뚜렷하지는 않은 생각을 해보았습니 다. 아기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던 왕지네는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죠.
‘네 엄마는 아빠를 닮은 자식을 낳고 싶어 했단다. 다른 많은 아내들과 같이 안됐지만 너는 그 사실을 가지고 네가 사랑의 결실이라고 말할 순 없겠 지. 미안해, 아가야. 미안해. 하지만 그 때문에 절대로 기죽진 마. 조심성 부족으로 태어났든, 불륜이나 강간의 결과로 태어났든, 아니면 너 같이 좀 특별한 경우든 상관없어. 죽을 때까지 살기도 바쁜데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왜 신경 쓰니? 태어났으면 신나게 살다가 미련 없이 가면 되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 벽타기꾼이 왕자님한테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테니 뭘 많이 요구하진 않겠지? 혹시라도 누가 네 혈통을 가지고 문제 삼아서 너를 왕자 님 자리에서 쫓아내면, 쳇. 내가 벽타는 법이라도 가르쳐줄게. 그러니 신나게 살다가 미련 없이 가자. 앞만 보고……………
왕지네는 걸음을 멈췄습니다.
병사들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왕지네는 황급히 유모차의 손잡이를 고쳐 잡는 시늉을 해서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다시 걸음을 떼는 그녀는 자연스 러웠어요.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태풍급은 아니라도 뇌우급은 되는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죠. 폭우에 흠뻑 젖은 왕지네의 정신이 파르르 떨렸습니 다.
‘미안, 미안해. 내가 나이 먹었나 보네. 드래곤에게 불 피우는 재주를 자랑하다니. 너는 과거에 신경 안 쓸 거지? 너희 엄마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네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나처럼 너도 미래만 생각할 거지? 네 아빠가 미래를 볼 줄 안다는 이유로 저 지경이 된 걸 봤으면서. 바보 같이.’ 조금 후 왕지네도 미래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이 그녀를 데려가는 방향이 좀 이상했습니다. 그녀가 떠나왔던 시녀들의 거처 방향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말을 못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왕지네는 병사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죠. 왕지네는 입을 다문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녀는 주변 분위기가 점점 화려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 었어요. 복도 옆의 벽에 금박 장식이 있는 것을 본 왕지네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궁성이라 해도 그런 장식이 사용될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겠지 요.
병사들은 어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곳엔 시녀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죠. 유모차를 본 시녀는 문을 열더니 왕지네에게 들어가라는 손짓 을 해보였습니다. 별 도리가 없었기에 왕지네는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는 바이서스의 왕비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