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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68화


왕비는 침실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왕비의 팔다리에 휘저어진 공기는 무거웠고 그녀의 뜨거운 날숨과 땀으로 습했습니다. 하지만 왕비는 그 무겁고 축축한 느낌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지요. 가벼움과 보송보송함은 광고업자의 언어죠. 정말 무겁고 축축한 물 속에서 이루어지는 물놀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 속에서 즐거운 비명을 터뜨리는 아이들을 떠올려보세요. 인간이 주위를 뜨겁고 건조한 잿더미로 만드는 드래곤을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겁 니다.

다리에 착착 감기는 잠옷자락이나 땀에 젖어 얼굴과 어깨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은 왕비를 방해하기는커녕 그녀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지쳐서 바닥 에 쓰러진 후에도 왕비의 팔다리는 계속 꿈틀거렸습니다. 왕비는 천장을 향해 두 팔을 한껏 뻗었습니다. 가슴을 반으로 접을 듯이.

그녀에겐 예언자가 있고,

그녀에겐 그림자 지우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에겐 그녀가 있었지요.

약간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일 거예요. 왕비는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어요. 그 말은 그녀가 미래를 선별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유리한 미래는 내버려두고 불리한 미래는 무효화시키는 것으로써, 신들이 특허권을 주장할 법한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바이서스의 왕은 운명의 정원사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왕비는 두 팔을 떨어뜨리곤 홍소했습니다. 그녀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압도적 전망이 자꾸만 그녀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고 있었어요. 왕비는 가 슴을 들썩이며 웃음도 울음도 아닌 기이한 소리를 냈죠. 왕비가 사랑하는 왕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완전한 미래, 정해진 해피엔드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자랑스러움 때문에 왕비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왕비는 가슴을 쥐어짜는 희미한 소리를 내며 계속 울었습니다.

얼마 후 바이서스 인들은 충격적인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화려한 선언이었지요.

“유랑하는 별자리는 밤하늘에 필요 없다. 왕이 그 불운의 성좌를 떨어트리리라!”

예. 왕의 친정 선언이었습니다.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지요.

가장 먼저 일어난 반응은 강력한 비난이었습니다. 왕의 친정은 전근대적이라는 말도 부족한, 거의 원시적인 일이었거든요. 전쟁 수행은 오래 전부터 직업 군인의 일이 되었으니 왕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효과는? 애석하지만 그것 또한 기대할 것이 별로 없었 습니다.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왕이 전선의 병사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면 뙤약볕 아래에 병사들을 모아놓고 침이 마르도록 떠드는 것보다는 그 냥 대필 작가라도 고용해서 좋은 연설문을 쓴 다음 신문에 실어 배포하는 쪽이 훨씬 낫죠. 신문은 왕과 달리 수백, 수천 부씩 발행할 수 있고 가지고 다니다가 꺼내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 외에도 많은 신문들의 장점을 놓고 보면 피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이 직접 전선으로 가는 짓은 광기나 다름없 었습니다.

그토록 어이없는 짓이었기에, 사람들은 ‘혹시?’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지요. 바이서스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두 번째 반응이었습니다. 뿌리를 알 수 없는 덩굴인 소문이 사람들 사이로 가지를 치고 줄기를 뻗었습니다. 여기서 수군거리고 저기서 속삭이다가, 마침내 모든 이들이 기정사실인 것처 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프로타이스가 솔베스로 온 것이었군. 왕에게 죽을 운명이었기에. 응? 못 들었어? 예언자가 얼마 전에 베란다에 또 나와서 예언했잖아. 춤추 는 성좌는 루트에리노의 후손에게 죽는다고.”

베란다에 다시 나온 예언자를 직접 보았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보는 친구의 친구들이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예언자는 기가 막혀서 왕비에게 따지려 했어요. 하지만 왕비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여행 준비에 바빴기 때문이죠. 왕은 왕 비와 왕자도 원정에 동행하라 요청했거든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수도를 비우는 것이지만 왕은 괘념치 않았어요. 전쟁에 패한다면 바이서스가 파멸할 테니 어차피 돌아올 필요가 없는 것 이고, 승리한다면 드래곤을 물리치고 미래를 바꿔서 바이서스를 구한 왕에게 아무도 저항할 수 없을 테니 역시 수도를 비우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는 것이 왕의 설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그 모든 일이 왕비 자신의 출전을 위해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왕비 자신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습니다. 왕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결정이었 다고 믿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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