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74화
시에프리너 토벌군 임시 주둔지 안, 왕비의 처소인 커다란 천막 안에서 예언자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어요.
“왜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십니까. 전하.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 왕이 들고 있는 검이 마법검은커녕 칼이라고 불릴 수도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 아차릴 겁니다. 장식품 만드는 공방에서 제작한 물건이잖습니까.”
“그런 것도 아는 거요? 역시 예언자답군. 하지만 여전히 현실을 보는 눈은 형편없군. 요즘 세상엔 슬쩍 보는 것만으로 좋은 칼을 알아보는 관록 있는 기사 따위는 없소. 적당히 화려하면 그만이지.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오. 바이서스 왕가에 이름이 잊혀진 마법검에 대한 전설이 있다 는 사실 말이오. 솔로처가 만들었고 무엇이든 잘라내고 스스로 말도 할 줄 안다는 그 검. 당연히 그 이름은 그림자 지우개여야 하오.”
“그 가짜 마법검으로 왕과 바이서스 인은 속일 수 있겠지만 프로타이스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왕비는 시치름한 태도로 유모차 속의 왕자를 보며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대답이오. 그러니 입을 닫고 내 말을 들은 후 대답하시오. 내일 정오, 프로타이스는 어디 있게 되오?” 예언자는 움찔했습니다.
“어떤 미래를 예언할지는 제 소관입니다.”
“당신이 제대로 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동의가 한시적인 동의였음을 기억할 거요. 나는 그 한시적 동의를 철회하오. 내일 정오 프로타이스의 위치는?”
“도대체… 느닷없이 가짜 예언을 하고 가짜 검을 주어 왕을 전장까지 오게 하시더니 이젠 왕을 프로타이스에게 보내지 못해 안달하시는 겁니까? 바이서스는 어차피 파멸할 테니 그 전에 왕을 영웅으로 죽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왕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곤 예언자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귀족 여인들의 연약함을 묘사하는 소설들은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승마를 즐기는 귀부인들은 고삐를 다룰 팔 힘과 말에게 압력을 가할 만한 다리 힘을 가지고 있지요. 무용에 능한 숙녀들은 상당한 균형 감각과 순발력을 가지고 있고요. 무거운 총을 든 채 흔들림 없이 조준할 수 있고 발사의 반동을 이겨낼 수 있는 명사수라면 어떨까요?
예언자는 바닥에 쓰러질 뻔했습니다. 왕비가 냉랭하게 말했어요.
“설령 농담이나 비유라 하더라도 그런 끔찍한 일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끔찍한? 왕의 죽음……”
예언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습니다. 왕비가 반대쪽 뺨을 쳤거든요. 성질이 온화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예언자는 격노에 사로잡혀 왕비의 팔을 움켜쥐 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손을 멈췄습니다. 이마에 닿은 리볼버 총구는 훌륭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왕비는 공이를 당긴 다음 총구로 예언자의 이마를 세게 눌렀습니다.
“왕께서는 그 추악한 생물들을 없앨 것이다. 왕의 앞날에는 어떤 재난도, 어떤 예기치 못한 불상사도 없을 것이다. 나의 왕이시니까! 내가 그렇게 되 도록 할 거야. 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돕기만 하면 돼! 내가 널 가졌으니까!”
“내 아들의 어머니라고 해서 네가 나를 가졌
“가졌어! 네가 너의 내일을 나에게 넘겼으니까!”
예언자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총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예언자가 고개를 떨구었기에 총구는 그 정수리를 겨냥했 습니다.
“예언은 폭력이다? 이 나약한 자식아. 인간은 누구나 미래를 봐! 가을을 볼 수 없는 농부가 어떻게 봄에 씨를 뿌릴까. 너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을 뿐이야. 단지 그것뿐이지. 누구나 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건 네가 겁쟁이라는 말일 뿐이야! 넌 미래에 겁먹고 삶에 겁먹어 네 속으로 파고든 다음 모든 이를 경멸하는 흔해빠진 놈팡이야!”
예언자는 고개를 숙인 채 어금니 밖으로 목소리를 내보냈습니다.
“네 왕은 2큐빗짜리 쇠몽둥이 들고 영웅놀이를 하는 원시인이고 넌 돌 맞아 죽을 간통녀야.”
왕비는 방아쇠를 반쯤 당겼습니다. 한껏 압박 받던 공이치기의 용수철이 해방을 약속하는 더 큰 압박에 전율했어요. 방아쇠에 밀알만큼의 무게만 더 얹혀져도……………
왕비는 방아쇠를 놓았습니다.
예언자는 스산한 표정으로 왕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왕비는 분노에 지겨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과녁을 잘못 골랐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왕비는 천막 한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거기엔 왕비의 소지품들이 담긴 몇 개의 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왕비는 그 중 가장 큰 상자의 빗장을 풀고는 상자 뚜껑을 열었어요. 그러고는 리볼버로 상자 안쪽을 겨냥한 채 예언자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와서 봐.
상자로 다가간 예언자는 신음했습니다.
커다란 상자 안에는 웅크린 인간 여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벗기고 남은 것이 아니라 찢어내고 남은 것이 분명한 옷 쪼가리로 덮여 있는 몸은 불쌍하 리만큼 부어 있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의 얼굴은 창백했습니다.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기절한 건지도 모릅니다. 정신이 조금만 있었다면 갑작 스러운 빛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 텐데 여자는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가 흐느꼈어요.
“왕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