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76화
동쪽 하늘로부터 프로타이스가 날아왔습니다.
보석으로 뒤덮인 거대한 드래곤이 지평선을 깨부수며 해일처럼 일어났습니다. 그 날갯짓에 구름이 찢어지고 그 몸에서 내뿜는 보석광이 하늘을 그 을릴 것 같습니다. 동쪽은 아마도 의도된 방향이겠지요. 아침의 태양을 등진 프로타이스는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만큼 찬란하게 번뜩이고 있었지요. 잠깐 동안이지만 왕비는 그림자 지우개를 들어올릴 생각도 못한 채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가까스로 손에 쥔 그림자 지우개를 떠올렸 을 때 왕비의 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프로타이스가 아냐! 푸른 드래곤! 지골레이드다! 시에프리너의 아버지 지골레이드다!”
군영 쪽에서 어떤 이가 목이 찢어져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왕비에겐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소리였지요. 왕비는 의혹에 가득 차서 동쪽 하늘의 드래곤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딸을 구하기 위해 온 지골레이드일까요? 그 번뜩임은 몸에 붙인 보석이 아니라 단지 햇빛인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 기 어려웠습니다. 왕비는 해명해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군영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해명은 곧장 주어졌습니다. 절망처럼 푸른 몸에 잘 벼려진 칼날을 연상케 하는 몸, 그리고 입 주위에선 청백색의 파괴적인 번개가 이글거리고 있는 드래곤. 지골레이드가 분명했지요.
다만 그것은 남쪽 하늘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왕비는 주정뱅이처럼 동쪽과 남쪽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동쪽 하늘에서는 프로타이스가, 남쪽에서는 지골레이드가 날아오고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마법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의 혼란을 말로 풀어보면 이렇게 되겠지요. 프로타이스이기도 하며 지골레이드이기도 하고, 동쪽에 있으면서 또 한 남쪽에도 있다……………. 확실히 무슨 마법처럼 들리네요. 왕비가 가까스로 그 한심한 상황에서 빠져나왔을 때 사태는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군영에서 다시 고함이 들려왔습니다.
“서쪽, 서쪽! 또 있다!”
재난은 구두점을 모른다고 말한 것이 칼 헬턴트였던가요? 왕비에게, 그리고 토벌군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히 구두점 없는 재난이었습니다. 서쪽에, 예. 또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새카맣습니다. 하늘에 금이 가면서 갑자기 우주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쪽으로부터 날아오 는 그 드래곤은 날개가 네 개였습니다. 긴 목과 꼬리와 네 장의 긴 날개 때문에 그 드래곤은 여섯 개의 선, 혹은 하늘이 깨진 자국처럼 보였지요. 그런 독특한 모습을 한 드래곤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서스는 한 때 드래곤 라자가 태어나던 나라지요. 왕비는 그 이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
까마득한 옛날 서쪽으로 영영 떠났다고 알려진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였습니다. 발탄의 어머니라고도 알려져 있지요. 발탄의 건국엔 아무런 도 움도 준 적 없지만, 그녀가 서쪽으로 떠난 후에야 바이서스 서쪽의 신천지가 개방되었고 그 땅에 몰려든 이들이 발탄을 건국했으니까요. 그 고대의 역사를 품고 있는 드래곤이 다시 동쪽으로 날아온 겁니다.
하지만 끝은 멀었습니다.
북쪽의 하늘에서 또 드래곤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아무르타트와 반대로 새하얀 모습을 한 무시무시한 모습의 드래곤이었습니다. 왕 비도 이번에는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습니다. 저토록 인상적인 모습이라면 틀림없이 유명할 텐데요. 문득 왕비는 자신이 현존하는, 혹은 현존하고 있 을 것으로 추측되는 드래곤만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왕비를 전율하게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캇셀… 캇셀프라임?”
북쪽에서 날아오는 새하얀 드래곤은 까마득한 옛날, 닐시언 대왕 시절에 죽었던 캇셀프라임입니다! 왕비는 턱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서쪽으로 영 영 떠났다고 알려졌던 아무르타트가 돌아온 것까지는 이해하더라도, 저편으로 떠난 캇셀프라임이 죽음을 넘어 돌아오다니오.
죽음을 어떻게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혼자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비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리를 듣고는 시선을 끌어내렸습니다. 그녀가 하늘을 보던 사이에 땅에는 어느새 시커먼 연기가 대형 산불을 연상시 키는 모습으로 깔려 있었어요. 그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습니다. 왕비는 고대의 기마병들을 떠올렸지만 실제로 들려온 소리는 훨씬 더 자극적 이었습니다. 살이라는 느낌이 하나도 없었어요. 기수와 말 모두에게 충분히 있어야 하는 살과 근육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지요. 오로 지 딱딱함뿐인, 마치 뼈와 금속만으로 이루어진 기마부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기 사이로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정말 뼈와 금속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그들은 음산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얼얼어어붙붙은은 마마음음, 핏핏빛빛 깃깃발발!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의의 율율법법!”
왕비는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데스나이트였습니다. 그 옛날 솔로처에게 파멸당했던, 그리고 몇 백 년 후 부활하여 바이서스 남부를 초토화시켰다 가 다시 사라졌던 그 악령의 부대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것들이 사방의 하늘과 땅에 계속 나타났습니다. 와이번들이, 그리핀들이, 하피들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왔습니다. 비틀거리는 좀 비들이 뒤뚱거리는 미노타우르스와 꿈틀거리는 키메라와 함께 다가왔습니다. 최근 몇 백 년 동안 아무도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었지요. 병사들은 공 황상태에 빠졌습니다. 무차별 발포는 당연한 수순이었지요. 어디를 봐도 그덴산의 거인임이 분명한 거대한 형체가 쿵쿵거리며 다가왔을 때 비로소 첫 번째 총성이 울렸으니 바이서스 군인들도 정말 잘 참은 셈입니다. 그들의 훈련 담당자들은 자랑스러워해도 될 거예요.
권총이, 소총이, 기관총이 불을 뿜었습니다. 더 처절한 것은 병사들의 비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중에는 정신착란적인 웃음도 있었지요. 소 를 타고 달려오는 고대 전사를 보고 터뜨린 웃음이지만 결코 우습거나 어이가 없어서 내뱉는 웃음은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