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그림자 자국 – 77화


첫 번째 총성이 울리고나서 잠시 후 예언자는 광분하는 병사들 사이를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달리거나 몸을 웅크리지도 않았고 마차 아래로 기어 가지도 않았지요. 서가로 다가가는 도서관 이용자 같은 차분한 걸음걸이였습니다. 하지만 사방의 환영들에게 총을 쏘거나 비명을 날려 보내느라 정 신이 없었던 병사들은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언자는 그 사실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5분 전 그가 미래를 보았을 때 병사들이 그를 보는 장면은 없 었으니까요.

예언자는 딱 한 번 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발 앞엔 병사 한 명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가 5분 전에 본, 유 탄에 맞은 불운한 병사였지요. 예언자는 허리를 숙여 병사의 소총과 탄띠를 집어 들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여전히 그의 걸음은 태평했지요.

하지만 왕비의 천막 안에 도착하자마자 예언자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몸을 던지듯 달려간 예언자는 황급히 상자를 열었습니다. 안쪽에 있던 왕지 네는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총소리 때문에 정신은 차린 지 오래였지요. 예언자는 한 손으로 그녀를 일으켜 앉히고는 다른 손으로 주머니칼을 꺼내 팔과 다리의 밧줄을 잘랐습니다. 그러곤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죠.

“크게 말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조용히 해. 재갈을 풀어줄게.”

재갈이 풀리자 왕지네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입을 감쌌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어요. 예언자는 입을 꾹 다문 채 왕지네의 팔다리를 주물렀습니다. 잠시 후 왕지네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도망치는 거야?”

“도망쳐.”

“당신은 안 간다는 말이네?”

예언자는 왕지네를 부축하여 상자에서 일어서게 했습니다. 비틀거리는 왕지네를 의자로 데려간 예언자는 그녀로 하여금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서게 했습니다. “다리 풀어.” 왕지네는 그를 보다가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했습니다.

“음. 왜 이렇게 된 건지 묻지 않아?”

“봤어.”

“응?”

“당신 미래는 보지 않았어. 대신 과거를 봤지. 왕비가 당신 얼굴을 알아봤지? 그리고 그림자 지우개를 뺏은 다음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었다가 상자 에 담아 출정했고.”

왕지네는 앉았다 일어섰다 하던 것을 멈추고 똑바로 섰습니다.

“내 과거를 봤다고?”

“최근만 봤어. 당신이 잡힐 때의 과거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 맹세해도 좋아.”

“당신 미래 말고 과거도 볼 수 있어?”

“현재가 아닌 시간을 보니까 과거도 볼 수 있어.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총 쏠 줄 알아?”

“확실히 내 과거를 다 보진 않은 모양이네. 쏠 줄 알아.”

예언자는 소총을 왕지네에게 건네곤 직접 탄띠도 채워주었습니다. 예언자가 버클을 채울 때 왕지네가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예언자는 흠칫하다가 뒤로 물러났습니다. 왕지네가 그의 팔을 붙잡았어요. 왕지네를 보던 예언자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당신 아들에게 미안해? 태어나게 해서? 그러지 마. 그건 당신 아들에게 모욕이야. 아들이 좋아서 곁에 있겠다면 상관없어. 손 흔들고 떠날게. 하지 만 태어나게 한 빚을 갚기 위해 아들 곁에 있지는 마. 그런 거라면 지금 나하고 같이 도망쳐.”

예언자는 팔목을 슬쩍 끌어당겼습니다. 왕지네는 힘 있게 그것을 쥐었다가 탁 풀어주었지요. 팔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예언자는 왕지네에게 잡혔던 손목을 주무르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가 힘없이 말했어요.

“왜…… 지금도 내 이야기뿐인 거야. 당신 푸념이나 당신 분노는 어디 간 거야?”

왕지네는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을 지었지요.

“우리 둘이 있을 때 더 바보는 당신인 걸로 오래 전에 결정 난 걸로 아는데? 덜 바보가 더 바보 신경 써줘야지. 자, 어떻게 할 거야?”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