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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79화


모든 드래곤은 드래곤이 아닌 것으로 변신할 수 있지요. 어떤 이들은 드래곤의 강대한 힘이나 화염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그 변신 능력을 꼽기도 합 니다. 주위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퍽 통찰력 있는 주장입니다. 왕비는 그 환영의 난장판에 왜 드래곤이 아닌 것들도 섞여 있는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타이스는 인상적인 가짜 드래곤을 하늘에 잔뜩 풀어놓아서 사람들의 주의를 그쪽으로 끈 다음 그 자신 은 다른 것으로, 예를 들어 길시언 바이서스로 변신하여 섞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요. 정말 드래곤다운 교활함입니다. 왕비는 어금니를 깨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부 다 없애주지! 드래곤 아닌 것부터!”

왕비는 그림자 지우개를 꺼냈습니다. 마침 저 편에 있는 트롤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즘은 퍽 보기 힘들어진 종족이지요. 왕비는 환영이 분명 하다는 생각에 그림자 지우개를 겨냥했습니다. 하지만 왕비는 주춤했지요. 근심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는 그 트롤은 어이없게도 신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좀 고전풍이지만 에델브로이의 신관 같군요. 왕비는 반골 드래곤 프로타이스가 저런 괴팍한 모습으로 변한 것인가 의심해 보았습 니다. 하지만 그건 괴팍하긴 해도 교활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왕비는 전부 다 없애기로 했음을 떠올리고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녀는 그 트 롤을 향해 그림자 지우개를 겨냥하고는 덮개를 열었습니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절벽 위에서 이루릴은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었어요. 두 팔은 아르페지오 하는 하프 연주자처럼 유려하 게 움직이고 있었고 턱은 당긴 채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앞뒤로 움직이는 그녀의 손이 바람을 어루만질 때마다 그녀의 과거에 있던 이들이 현재의 땅 위에, 현재의 하늘 아래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추모할 수 있어서 기뻐요. 그건 당신들이 여전히 내 속에 있다는 말이니까.’

이루릴은 눈을 떴습니다. 방금 끌어낸 또 하나의 과거가 그녀 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습니다. 허공에 떠 있는 그 환영을 향해 이루릴은 눈인사를 보 냈습니다.

‘오래간만이에요, 안녕하세요.’

그것은 드래곤이었습니다. 선홍빛 몸에 새카만 줄무늬가 있었지요. 프로타이스의 화려함과 지골레이드의 예리함, 아무르타트의 기괴함, 캇셀프라임 의 냉엄함은 모두 공포와 절망의 요소였습니다. 그 드래곤의 모습도 그런 것들을 이끌어내기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드래곤이 일깨우는 공 포에는 어쩐지 향수와 상실감의 색조가 짙었습니다. 그 호랑이와도 같은 모습은 현대인들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상징처럼 보였거든요. 관능적인 원시성, 우미한 야만성, 가치들로 분화되기 이전의 맥동하는 생명력 같은 것이 그 드래곤 주위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런 드래곤이 그토록 침 착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퍽 어울리는 일이었죠. 그 드래곤은 이루릴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죽이는데 일조하더니 이 표한한 시대에 나를 다시 불러내어 도와달라 말하는 건가.’

‘예. 화염의 창 크라드메서.’

‘무엇을 근거로?”

‘근거나 설명은 필요 없어요. 당신은 나니까.’

크라드메서는 싱긋 웃었습니다. 드래곤식의 미소지만 이루릴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지요. 크라드메서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더니 전장을 향해 질풍 처럼 날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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