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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80화


왕비의 두려움과 달리 프로타이스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토벌군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배짱과 한 수를 더 내다보는 혜안 을 칭찬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습니다. 드래곤을 칭찬하는 것이 해될 일은 아닐 테니까요. 다만 양심상 프로타이스의 비밀 한 가지는 고발해야겠군 요. 프로타이스는 결코 변신하지 않습니다. 이루릴이 변신 대신 투명화를 제안했던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드래곤의 능력이니만큼 프로타이스도 변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능력을 쓰지 않습니 다. 프로타이스는 자신이 다른 드래곤들 다 하는 짓은 안 하는 거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아일페사스나 이루릴 등은 프로타이스가 함부로 작은 존 재로 변신했다간 보석과 보물에 깔려죽을 테니 변신 못 하는 거라고 말하지요. 어느 쪽이 타당한 설명인지는 여러분이 선택하세요.

그 장대한 거짓의 축제가 필요했던 것 또한 프로타이스가 변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신이 가능했다면 프로타이스는 그냥 바이서스 병사나 왕 비의 시녀 등으로 변신해서 토벌군에 숨어드는 간편한 방법을 쓸 수 있었겠죠. 그런 쇼가 필요했다는 것이 바로 프로타이스가 변신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추리소설에 나오는 괴물 같은 명탐정이 아닌 왕비는 그 정도까지 내다볼 수는 없었어요.

자기 모습 그대로인 채로 토벌군의 머리 위를 선회하며 프로타이스는 생각했습니다. ‘정말 시시하군.’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입니다.

용감한 프로타이스는 이루릴이 열 개가 아닌 서너 개의 가짜만 만들어내도 만족할 예정이었습니다. 모든 드래곤들이 갈색 산맥에서 이루릴이 열 개 의 가짜 크라드메서를 만들어냈다고 말하기에 프로타이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과장의 절대적 후원자인 시간의 장난임이 분명하다 는 것이 프로타이스의 견해였지요.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따라온 이루릴은 과거에 그녀가 알았던 온갖 존재를 기백 단위로 허공에 불러내었습니다. 똑같은 것들이 많았기에 종류만 따지면 기백은 되지 않겠지만 그 정도의 대규모 환영은 드래곤에게도 경외스러운 것이었습 니다.

프로타이스는 그것이 정령의 힘이나 엘프의 능력은 아닐 거라 느꼈습니다. 같은 기술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은 이 세계에서 오직 이루 릴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겁니다. 프로타이스도 그냥 부피만 놓고 따진다면 그것에 필적하는, 아니, 그보다 더 큰 환영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지금 이루릴이 하고 있는 일은 흉내도 낼 수 없을 거예요.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프로타이스가 인간의 최신 발명품에 해박했다면 틀림없이 영화를 떠올렸을 겁니다. 촬영을 잘 했다면 대규모 전투 장면이라도 영사기 하나로 은막 에 띄울 수 있겠지요. 하지만 입술을 내미는 남자와 여자를 따로 촬영한 후 두 필름을 두 개의 영사기에 걸어서 은막 위에 키스하는 장면을 만들어내 라고 한다면 영사기사는 난처해할 겁니다. 그런데 이루릴은 병사 하나하나를 따로 촬영한 다음 그 수백 개의 필름들을 수백 개의 영사기에 걸어서 하 나의 은막에 동시에 비춤으로써 대규모 전투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사기 전부를 자신의 일부처럼 다루지 않는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신기지요.

그 어려움을 잘 이해하기에 프로타이스는 자신의 감탄에 힘껏 저항했습니다. ‘시시해, 시시하다고!’

그 덕분에 프로타이스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었지요. 광란하는 토벌군을 면밀히 관찰하던 프로타이스는 마침내 조금 떨어진 언덕에서 왕비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그림자 지우개도 보았습니다. 왕비는 드래곤에겐 별로 주의를 보내지 않은 채 땅에 있는 보 다 작은 존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로타이스는 왕비의 머리 위로 쉽게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프로타이스는 그림자 지우개에 집중했습니다.

그곳에 마법사가 있었다면 순간적으로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인간은 마법을 잃었지요. 프로타이스의 거대한 힘은 아무에게 도 들키지 않은 채 왕비가 들고 있는 조그만 각등에 쏟아졌습니다.

‘부서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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