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81화
모든 드래곤은 드래곤이 아닌 것으로 변신할 수 있지요. 어떤 이들은 드래곤의 강대한 힘이나 화염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그 변신 능력을 꼽기도 합 니다. 주위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퍽 통찰력 있는 주장입니다. 왕비는 그 환영의 난장판에 왜 드래곤이 아닌 것들도 섞여 있는 것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타이스는 인상적인 가짜 드래곤을 하늘에 잔뜩 풀어놓아서 사람들의 주의를 그쪽으로 끈 다음 그 자신 은 다른 것으로, 예를 들어 길시언 바이서스로 변신하여 섞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요. 정말 드래곤다운 교활함입니다. 왕비는 어금니를 깨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전부 다 없애주지! 드래곤 아닌 것부터!”
왕비는 그림자 지우개를 꺼냈습니다. 마침 저 편에 있는 트롤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즘은 퍽 보기 힘들어진 종족이지요. 왕비는 환영이 분명 하다는 생각에 그림자 지우개를 겨냥했습니다. 하지만 왕비는 주춤했지요. 근심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는 그 트롤은 어이없게도 신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좀 고전풍이지만 에델브로이의 신관 같군요. 왕비는 반골 드래곤 프로타이스가 저런 괴팍한 모습으로 변한 것인가 의심해 보았습 니다. 하지만 그건 괴팍하긴 해도 교활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왕비는 전부 다 없애기로 했음을 떠올리고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녀는 그 트 롤을 향해 그림자 지우개를 겨냥하고는 덮개를 열었습니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절벽 위에서 이루릴은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었어요. 두 팔은 아르페지오 하는 하프 연주자처럼 유려하 게 움직이고 있었고 턱은 당긴 채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앞뒤로 움직이는 그녀의 손이 바람을 어루만질 때마다 그녀의 과거에 있던 이들이 현재의 땅 위에, 현재의 하늘 아래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추모할 수 있어서 기뻐요. 그건 당신들이 여전히 내 속에 있다는 말이니까.’
이루릴은 눈을 떴습니다. 방금 끌어낸 또 하나의 과거가 그녀 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습니다. 허공에 떠 있는 그 환영을 향해 이루릴은 눈인사를 보 냈습니다.
‘오래간만이에요, 안녕하세요.’
그것은 드래곤이었습니다. 선홍빛 몸에 새카만 줄무늬가 있었지요. 프로타이스의 화려함과 지골레이드의 예리함, 아무르타트의 기괴함, 캇셀프라임 의 냉엄함은 모두 공포와 절망의 요소였습니다. 그 드래곤의 모습도 그런 것들을 이끌어내기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드래곤이 일깨우는 공 포에는 어쩐지 향수와 상실감의 색조가 짙었습니다. 그 호랑이와도 같은 모습은 현대인들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상징처럼 보였거든요. 관능적인 원시성, 우미한 야만성, 가치들로 분화되기 이전의 맥동하는 생명력 같은 것이 그 드래곤 주위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런 드래곤이 그토록 침 착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퍽 어울리는 일이었죠. 그 드래곤은 이루릴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죽이는데 일조하더니 이 표한한 시대에 나를 다시 불러내어 도와달라 말하는 건가.’
‘예. 화염의 창 크라드메서.’
‘무엇을 근거로?”
‘근거나 설명은 필요 없어요. 당신은 나니까.’
크라드메서는 싱긋 웃었습니다. 드래곤식의 미소지만 이루릴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지요. 크라드메서는 거대한 날개를 펼치더니 전장을 향해 질풍 처럼 날아갔습니다.
“도대체 왜 이래!”
왕자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팔 하나를 높이 들어올렸어요. 왕비는 그 조그만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그러니까 하늘이라 불리는 것을 쳐다보았습니 다. 그곳엔 형형색색의 비행 괴물들과 드래곤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지요. 무서운 포효를 내지르거나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낚아챌 듯 위협적으로 급강 하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면에 어느 정도 다가선 후 그것들은 병사들의 총격이 부담스럽다는 듯 다시 날아올랐습니다. 환영들이 할 만한 기만책이 었지요. 왕비는 이를 갈았습니다.
유모차에 누워있는 왕자에겐 그 광경이 똑똑히 보였겠지요. 왕비는 신경질적으로 유모차 손잡이를 움켜쥐었습니다.
“가만히 있어. 저건 다 가짜야. 왜 예언자의 자식이면서 환영에………….”
왕비는 눈을 크게 떴습니다. 왕자는 손을 더 힘껏 뻗었지요. 그것은 하늘이나 여러 마리의 괴물을 가리키는 어정쩡한 손짓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개별적인 하나의 대상을 지시하는 손짓이었지요.
왕비는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황급히 하늘을 보았습니다. 거대한 드래곤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왕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아무르 타트가 둘, 그리고 지골레이드가 셋, 캇셀프라임이 하나 보였습니다.
그리고 프로타이스도 하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