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86화
왕비는, 정말 말하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왕자에게 예지의 능력이 있다고 선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랬다간 당장 사람들이 왕비와 예언자의 관계를 의심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시에프리너의 레어가 어디 있는지 밝혀낸 것은 예언자의 업적이 되었습니다.
“예언자는 시에프리너의 레어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왕이여, 가서 저 가증스러운 파멸의 어머니를 베고 왕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시고 우리 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십시오!”
시에프리너 토벌군은 신이 났습니다. 왕은 도착하자마자 전쟁의 방식을 바꿨지요. 일선의 장군들은 코볼드들을 상대로 참호전을 고집한 것은 큰 실 수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 참호전은 전쟁의 기본 공식이 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상만큼이나 지하를 좋아하는, 아 니, 지하 쪽을 더 좋아하는 코볼드들은 장사정포나 기관총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둘 다 협소한 지하에선 언어도단이 되는 무기들이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참호를 파고 웅크리는 건 코볼드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고대풍의 회전을 강요하는 것이 백 배 나았지요.
군인들의 완고함과 요령 없음에 관한 전통적인 조롱들이 바이서스의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메우자 몇몇 장군들은 스스로 계급을 반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왕은 익숙한 바보짓의 가치에 관한 격언을 인용하며 그들을 용서하는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었지요. 전쟁의 주역이 왕 으로 확실히 재편되자 왕은 굉장한 속도로 병력을 전진시켰습니다.
“현지 장악도, 요새 건설도 필요 없다. 우리는 시에프리너를 제거하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토벌군은 시에프리너의 레어를 향해 날듯이 진군했습니다.
코볼드들은 처절한 저항을 보여주었습니다. 동굴이 아닌 개활지에서 코볼드들이 인간에게 덤비는 것은 자살 행위지요. 그들은 기꺼이 자살을 선택 했습니다. 죽은 동료의 시체를 방패삼아 끌어안은 채 수류탄을 입에 물고 기관총 진지로 뛰어드는 코볼드 전사의 모습은 바이서스 병사들을 전율하 게 했습니다. 게다가 코볼드들은 앞뒤 없이 날뛰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코볼드들은 노획한 인간의 무기를 이용하여 야간 저격이라는 끔찍한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저격이 원래 무서운 기술이지만 야간 저격이라는 것은 인간에겐 거의 마법처럼 느껴지는 기술이지요. 밤눈이 기막히게 밝은 코볼드였기에 가능한 신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용기와 지혜에도 불구하고 코볼드들은 화력의 절대적 열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토벌군이 진군과 코볼드 소탕을 병행하자 코볼드들은 지리멸렬하게 무너졌지요. 솔베스가 아무리 그들의 땅이었다지만 한때 솔베스를 떠났다가 급히 돌아온 것이었기에 코볼드들에 겐 제대로 된 후방 지원이 없었거든요. 반면 토벌군은 바이서스라는 강대국에서 국가 단위의 지원을 퍼부어주고 있었지요. 코볼드들은 상대가 될 수 없었지요.
그건 시에프리너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다른 존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에프리너가 총애하던 전설적인 오거 전사 에켈퍼는 무려 122개의 총상 을 입고는 수십 년 동안의 충성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시에프리너에 바치는 명시 ‘하늘과 땅과 춤’을 썼던 시인 베리나는 바이서스 병사들에게 포 위당하자 ‘이 입이 다른 이를 위해 노래하게 두진 않겠다’며 자신의 입에 칼을 쑤셔넣어 자살했습니다. 코카트리스 치샷사의 죽음 또한 특기해야겠군 요. 눈을 잃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지만 그 눈의 소유자가 코카트리스라면 그것은 비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치샷사가 살아남은 것은 시에프리너의 후의 덕분이고 치샷사가 자살하지 않은 것은 시에프리너의 우정 덕분이지요. 그 장님 코카트리스 치샷사는 폭탄을 들고 토벌군의 상공 으로 날아간 다음 자폭했습니다. 눈으로는 상대를 석화시킬 수 없지만 접촉으로 석화시키는 것은 죽은 직후라도 가능했으니까요. 공중에 흩뿌려진 치샷사의 깃털과 살점은 석화의 비가 되어 토벌군을 엄습했지요.
그 모든 영웅적인 죽음들은, 결국 시에프리너를 돕는 이들의 죽음이었지요. 시에프리너는 적수공권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솔베스에 드 래곤은 나타나지 않았지요. 어떻게 그렇게 종족의 일원을 외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왕이 가진 솔로처의 검이 그토록 무서운 걸까요. 바이서스의 왕 과 토벌군의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했던 코볼드들과 다른 괴수들을 찬양하고 드래곤들을 비웃었습니다.
마침내 어떤 드래곤이 솔베스로 온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을 때 왕과 병사들은, 물론 불안함을 느꼈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기꺼운 기분도 느꼈습니 다.
“한 마리쯤은 와줘야지. 홀몸도 아닌 시에프리너가 불쌍하잖아.”
그들은 난폭하게 웃었지요. 하지만 날아오는 드래곤의 이름이 밝혀지자 그 웃음은 빠르게 사그라들었습니다. 그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황급히 그 정보를 재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보는 정확한 것이었지요.
솔베스로 오는 드래곤의 이름은 아일페사스였습니다.
드래곤 레이디가 카르 엔 드래고니안을 나온 것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