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91화
걸음을 멈춘 이루릴은 설명하듯 말했습니다.
“이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어요. 산란이 끝났으니까요. 이제 그 무엇이든 알 근처에 접근하면 시에프리너는 무의식적으로 공격할 거예요.”
“알이 뱃속에 있을 때보다 더 사나워진 거야?”
“예. 드래곤의 몸이라는 방어막이 없어진 셈이니까요. 여기에 앉죠. 왕지네.”
이루릴이 먼저 바닥에 앉았습니다. 왕지네는 어딘가에서 시에프리너의 포효가 들려올 것처럼 좌우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앉았죠. 이루릴은 그녀 에게 수통을 건네주었어요. 왕지네가 입을 축이자 이루릴이 말했습니다.
“여기로 데려와서 미안해요.”
“뭘 사과해. 이 동네 분위기 안 좋잖아. 당신한테 붙어 있기로 한 건 내 결정이었어.”
“다른 드래곤들과 마찬가지로 시에프리너도 당신이 그림자 지우개를 훔쳤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원망해요.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면 코볼드들을 보내서 당신을 공격할지도 몰라요.”
왕지네는 입술을 오므렸다가 말했어요.
“당신은 어때? 나를 어떻게 생각해? 전쟁판에 버리지 않고 이렇게 거둬준 걸 보니 잘 보인 거라고 생각하고 싶긴 한데.”
“나는 당신이 이미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왕지네는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왕지네는 그 자세로 몸을 좌우로 흔들었죠. 잠시 후 그녀가 웅얼거렸습니다.
“그 빌어먹을 물건을 손에 넣은 후로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어.”
“취한 채 쓸까봐 무서웠군요.”
“왕비에게 그걸 뺏긴 후에, 신경질도 났지만 기쁘기도 했어.”
“인간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일에 능하죠.”
“도대체 뭐지? 내가 누굴 지우면, 그 사람 가족이나 친구도 그 사람을 잊고, 심지어 나도 그 사람을 잊는다면, 그 사람은 도대체 뭐냐고. 왜 태어난 거지? 아니,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이니까 왜 태어났냐는 말도 쓸모없는 건가? 뭐가 뭔지 모르겠어. 하지만 진짜 생각하면 할수록 무서워서…………” 왕지네는 말끝을 흐렸습니다. 쾅, 쾅하는 소리 때문에 그녀가 내는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요. 이루릴은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한참 후 왕지네가 팔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벽을 탕 쳤어요.
“더럽게 시끄럽네. 야, 뇌에 때 낀 것들아. 그만 쏴!”
왕지네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목소리를 약간 높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여기로 올까? 그림자 지우개로 길을 막고 있는 바위를 확 없애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그러진 않을 거예요. 바위가 없다면 왕은 병사들을 들여보내지 왕비를 들여보내진 않을 테니까요.”
“아, 그렇겠네. 그러면, 음, 당신은 여기서 기다렸다가 그림자 지우개를 뺏는 거지?”
“예. 그건 아프나이델 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때 당신도 솔베스 밖으로 데려다줄게요.”
“고마워. 정말 신세 크게 지네. 그런데 여기서 바로 떠나는 거야? 남아서 시에프리너를 보호하진 않아? 당신 그것 때문에 예언자를 탈출시켰다가 여 기로 데려왔잖아.”
이루릴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어요.
“나는 드래곤의 수호자는 아니에요. 당신이 알고 있는 내 행적이 드래곤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일 거라는 것은 이해해요. 하지만 나는 과거에 드래곤 들과 싸우고 그들 중 특히 강대한 이를 죽이는 것에 일조하기도 했어요.”
왕지네는 입을 다물지 못했죠. 음률이나 장단은 없었지만 어쩐지 노래 같은 이루릴의 말이 계속되었어요.
“나는 누군가가 어떤 종족이라는 이유로 돕지는 않아요. 그건 누군가를 어떤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하는 것과 다름없는 차별이니까요. 나는 상대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에 따라 판단해요. 내가 믿어온 바에 따르면 시에프리너가 한 일은 공격받을 일이 아니에요. 자손을 가진다는, 모든 생물 의 지고한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니까.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라면 나는 바이서스에 반대했을 거예요. 하지만 예언자가 모든 것을 혼돈으로 만들어요. 예언에 따르면 바이서스는 지금 자기 보호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바로 그 예언이 약속하는 건 바이서스의 파멸이죠. 내가 바이서스를 안 락사시켜야 할까요?”
“그런 게………… 필요할 때도 있지.”
“바이서스는 다리가 부러지지도 않았고 자동차에 치이지도 않았어요. 안락사의 최대 근거이자 기준이 되는 것은 현재 받고 있는 고통의 크기지요. 바이서스엔 그런 것이 없어요.”
이루릴은 긴 다리를 끌어당겨 살짝 끌어안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하는, 그리고 내가 의심할 수 없는 일을 할 밖에요. 나는 그림자 지우개를 구층탑에 되돌려 놓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