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94화
토벌군이 지휘통제부로 삼은 대형 천막 안에서 장군들은 탁자에 펼쳐진 작전 지도를 보는 척하며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왕을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왕은 몇 번이나 읽은 쪽지를 다시 읽고 있었지요. 그것은 왕비의 침소에 놓여 있었던 쪽지였습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나갑니다.’
그 뒤에 밥은 어디에 있다는 말이 붙어 있으면 어울릴 듯한 담담한 전언이었어요. 왕비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실종으로 인해 토벌군 군영이 발칵 뒤 집어지는 것뿐이었던 것 같았어요. 누군가가 왕비를 납치한 다음 추적을 막기 위해 쪽지를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제기되긴 했지만 곧 배제되 었지요. 검문을 맡은 병사와 트럭을 운전한 병사가 왕비의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했거든요. 트럭 운전병의 보고가 특히 인상적이었지요.
탁자 주위에 서 있던 장군들 중 한 명이 뚜, 뚜 하는 전신 신호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왕에겐 분명히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 다.
“광산으로 가셨다는 건 지하로 내려가실 작정이라는 말인데, 혹시 왕비 전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시에프리너의 레어로 통하는 비밀 통로라도 찾아보 려 하신 것 아닐까요? 예언자는 그런 목적으로 대동하신 것이고요.”
“그렇다면 진정 용감하신 분이군요. 하지만 좀….. 낭만적인 생각이군요.”
그건 정확하게 ‘멍청한 생각이군요.’라는 말로 들렸어요.
“대군을 좁은 지하 통로에 밀어 넣을 수는 없지요. 밤눈 밝은 코볼드들에게 학살당할 겁니다.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시고 조언을 구하셨다면 알려드 렸을 텐데.”
“우리를 놀라게 해주시려고 말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장군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곤 다시 왕의 눈치를 살폈지요. 왕은 더 이상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왕비는 자신이 걱정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간수할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도 있거니와 사람들이 떠난 지 오래된 광산에 무슨 위험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지하 전투에 능한 일개 분대를 광산에 파견하여 왕비를 찾도록 하라. 교전은 피하고 왕비를 찾아 귀환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적어도 일개 중대는 보내야 한다는 항의들을 경청한 다음 왕은 탁자로 다가가 작전 지도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왕비에 대한 것은 더 이상 듣지 않겠 다는 태도였지요.
“관측병들의 통신 상태는 확인했겠지? 드래곤 레이디는 어쩌면 인간이나 다른 것으로 변신하여 잠입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혹은 몸을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겠지. 관측병들에게 그 어떤 것이든, 오소리 한 마리라도 눈에 거슬리면 무조건 보고하라고 다시 일러라. 농담으로 여겨서 해이해질 지도 모르니 반복해서……”
순간 통제실 반대편에 있던 통신병들 중 한 명이 고개를 홱 돌렸습니다. 통신병은 방금 해독한 전신 신호를 들어올리며 외쳤지요.
“4번 관측소! 드래곤 레이디 접근!”
뒤이어 다른 통신병들도 앞다투어 외쳤습니다. 3번과 5번, 뒤이어 6번 관측소에서도 접근을 확인했다는 신호가 전해져 왔지요. 왕은 신음했습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 왔나.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주인답군.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데.”
왕은 관측병들에게 신속히 현재 위치를 이탈하라는 회신을 보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통신병들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던 통신병을 쳐 다보았습니다.
통신병은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왕은 고개를 조금 끄덕였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왕은 그 순간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 그에겐 결코 흔들리지 않을 확신이 있었습니다. 왕의 확신을 느낀 통신병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자기 앞에 놓인 송신기의 지렛대를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상적인 통신 규칙이랄 수는 없었지만 아무도 그 모습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지요. 침묵 속에서 지렛대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렸습니다. 길게, 짧 게, 짧게, 길게, 쉬었다가, 길게, 짧게, 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