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14화


메인 건물 3층의 내 방에 도착해 보니, 방문 앞에 총관 혈마검호가 낯익은 시녀를 대동하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성지(聖地)에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비밀 서고를 다른 이들은 ‘성지’라고 한다.
개뿔이 성지는 무슨…
나는 총관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대답하고 방에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오는 총관은 웬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곡주님, 이번에 대교를 데려가셨다고…”

“응, 그랬어. 왜?”

“아, 아닙니다.”

흠…
다들 지금쯤 대교는 이미 내 손에, 혹은 그 살벌한 음양쌍마… 아니 ‘아수라 백작’에게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아끼는 제자를 잃은(?) 총관의 어색한 태도를 보니, 괜히 장난기가 발동한다.

“왜, 줬다 빼앗아서 섭섭한가?”

“다, 당치않은 말씀. 소인은 다만… 곡주님께서 대교를 무척 총애하시는 것으로 여겼기에 좀 당황했을 뿐입니다.”

“대교… 그래, 총관도 알다시피 걔 아주 이쁘고 착하고 성실하고, 하여간 여러 가지로 총애를 받아 마땅한 아이지. 인정해.”

“…..?”

난 일부러 게슴츠레 뜬 눈으로 대교의 동생들을 힐끗 본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애들이 아직 셋이나 남았는걸 뭐.
총관도 제자 세 명 정도면 됐지 않아?”

총관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마음을 숨기려는 듯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내 그럴 줄 알았어.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음하하-핫!!
‘극악한’ 척하는 것도 꽤 재밌다.
대교 동생들의 표정은… 흠, 역시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잔뜩 굳어 있는 얼굴들…
얘들한테는 조금 미안하다.
이따가 가르쳐 줘야지. 너희들 큰언니는 죽지 않았다고…

“흠… 그보다, 지총관. 냉화절소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던 건 어떻게 됐지?”

“음… 이것이 그간 월영당 소속의 야영(夜影)들이 수집한 정보를 정리한 것입니다.”

총관을 따라온 시녀는 양손으로 커다란 쟁반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30~40cm 정도 길이의 두꺼운 두루마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전에도 몇 번인가 받아보았는데, 가는 나무 막대기에 보고 내용을 적힌 비단을 둘둘 감은 다음 금색 실로 야무지게 묶어 놓은 것이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나, 월영당주에게 직접 곡주님의 엄명을 알렸으니 곧 보다 상세한 보고가 있을 것입니다.”

우쒸-!
시녀가 내 탁자에 공손히 내려놓는 보고서의 양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음… 그 전에 먼저, 장청란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야?”

“장청란의 현재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야영’들이 삼일 전 신야성에서 그녀의 종적을 놓친 후 아직…
하지만 어제부로 야영들의 절반이 그녀 탐색에 투입되었으므로 곧 그녀의 종적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강호의 소문이란 생각보다 빨리 전파되는 법이기도 하지만, 만약 해남파와 그녀 간의 연락 수단이 따로 있다면,
늦어도 칠일 안으로 그녀가 이번 사태를 알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늦어도 칠일…? 아니, 칠일씩이나?
이런 일이 알려지는 게 그렇게 늦어?
아참… 그래! 이곳은 전화나 TV 뉴스 같은 게 없지?
소식을 전하는 수단 중 가장 빠른 방법이래봤자 전서구(비둘기)나 전서매(이게 말이 되나?) 정도 있을 텐데…
흠, 생각보다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현재 해남파의 움직임은?”

“본 곡이 상대인 만큼 신중 대응론이 지배적인 모양이며,
해남파 장문인은 장청란의 귀가 후로 모든 대응을 미루고 있습니다만…”

총관은 씨익- 특유의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제기, 저 인간이 저렇게 웃을 때는 대부분 ‘살인’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곡주께서 성지에 드시자마자, 장명의 처인 ‘삼홍랑(三紅浪) 구월화(具越花)’가 해남파의 젊은 무사들 30여 명을 이끌고 감히 본 곡 입구에서 소동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장명의 처…? 뭐야, 설마 그녀를 죽인 건 아니겠지?”

“예, 그녀는 살려두었습니다.”

그녀만…?
그럼 나머지 30여 명은… 후, 묻지 않아도 알만하군.
공연히 좀 전에 대교 얘기로 장난친 것이 후회된다.
이런 인간들에게 더 극악한 척을 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이봐, 지총관. 자네는 이번 사태가 악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거 아니었어?”

“그야 물론, 화천루와의 정면 충돌은 좀…
허나 해남파의 잡졸들까지 화천루의 비호만을 믿고 본 곡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뭐… 하여간, 좋지 않은 진행인데…”

“…..”

“장명도 그렇고, 그 마누라도 당연히 자신들이 우리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 거 아냐.
그런데도 덤빈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고… 역시 그들의 조카인 장청란이 예상대로의 신분이라는 얘기…”

총관 녀석,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빙글거리고 웃는군.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는 화천루에 대한 대응책만 생각했었는데, 사건 발생의 원인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들이 화천루를 끌어들일 자신이 있으니까 일을 벌였다고는 해도,
어차피 그 화천루도 이곳과 라이벌 정도는 될지 몰라도 압도적으로 강한 곳은 아니다.
그렇다면…
장명이라는 놈과 그의 마누라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 가지 방향으로 압축될 수 있지 않을까?

첫 번째는 어떻게든 화천루 말고도 이곳을 소탕할 수 있는 세력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
두 번째는 애당초 이 비화곡을 어쩔 생각은 없고, 뭔가 다른 것을 노리고 시작한 일일 가능성…
세 번째는 그저 야후 장로에 대한 원한에 눈이 멀어, 암 생각 없이 야후 장로에게 엉겨 본 것…

음… 제기, 짱으로 취임한 지 석 달도 안 돼서 이런 복잡한 사건을 만나다니…

“…총관, 일단 말이야.
장명과 그 마누라 삼홍랑이라는 여자를 좀 만나봐야겠어.
어디지? 둘을 가두어 놓은 곳이?”

메인 건물에서 내 걸음 기준으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곳…
메인에서는 직접 보이지도 않는 이 계곡 가장 안쪽에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외장부터 썰렁한 4층 건물이 있는데, 그 1층 입구에는 이런 현판이 걸려 있었다.

지옥전(地獄殿).

난 어딘가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근처 지형 지물을 확인해 두는 습관(군대식)이 있어서 전에 이곳도 한 번 와봤었다.

1층과 2층은 비화곡 자체 죄인들을 위해 마련된 ‘형벌방’과 ‘뇌옥’ 위주이고,
3, 4층은 외부 죄인(법적 근거는… 없음)을 취급하는 곳이라고 한다.
지하에도 공간이 있는데, 그곳이야말로 이 ‘사설 감옥’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사람 껍질을 산 채로 벗기는 정도는 장난에 불과하다는 ‘고문실’과 ‘특급’으로 분류되는 중죄인을 수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지금은 정파와의 ‘전쟁’ 중이 아니라서 다소 한산한 편이라고 했는데…
제기, 근데 왜 여기저기서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리는 거야? 찝찝하게…

“이봐, 총관. 다음부터 내가 올 때는 업무(?) 중단하라고 그래. 시끄러워서 원…”

“존명!”

총관이 간수장 정도로 여겨지는 거구의 사내를 불러 뭐라고 속닥대는 것 같더니,
내가 3층까지 올라가는 사이 사방에 정적이 찾아왔다.
자주 느끼는 거지만, 이곳의 명령 체계 하나는 진짜 죽인다.
이상적인 군대 상이라고 할까?

음…
그런데, 막상 3층에 도착하니까 왜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리는 거지?
최근 몇 년 동안은 정파와 큰 충돌이 없어서 지금 3층에는 장명 부부만이 갇혀 있다고 들었고,
이 복도의 끝에 위치한 뇌옥이라고 했는데…
이런- 신음소리는 거기서 들려오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 두 사람, 여기 애들한테 무지하게 두들겨 맞은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 내 귀에 신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응-? 어랏?

…으흐응-! 허억-! 헉! 헉! 아아-!!

어쭈구리…
이건 구타나 고문에 의한 고통 때문에 내는 신음소리가 아니잖아?
어이없어하는 내 시선에 총관은 멋적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부를 같은 뇌옥에 가두었는데, 그게…”

둘을 같이 가둔 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어쨌든, 일파의 간부급에… 풀어줘야 할 가능성이 많은 자들이니까, 대접하는 의미에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뭐 이런 것들이 다 있냐 그래?

난 장명 부부가 갇힌 뇌옥 앞에 도착해서,
두터운 창살 너머로 그들 부부가 벌이는 질펀한 정사 장면을 보게 되었다.
40대로 보이는 약간 살찐 몸의 사내가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여자는 비오듯 땀을 흘리며… 흐트러진 머리칼은 뺨에 달라붙어 있고,
사내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연신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잡겠다. 잡겠어…

헌데, 얼핏 여자의 얼굴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 같더니 살며시 눈을 뜨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끼는 순간,
새액-! 웃는다.

응…?
이봐, 이 어처구니없는 여자야!
지금 나한테 웃은 거야?